소설리스트

효명세자와 함께하는 조선 생활-260화 (337/345)

260화

21장 9화 새 주인

에이다와 휘하 연구진이 완성한 전기 사륜차는 순조의 어가로 맹활약을 하였다. 오래 사용하여 부품 대다수를 교체한 어가는 예전보다 좀 느린 속도로 계속 이동하였다.

대열의 가장 앞에는 전기 사륜차가, 그 양옆에는 호위병들이 있었으며 후방에는 등짐을 잔뜩 짊어진 수백여 명의 사람들과 이천여 명에 달하는 군인들이 있었다.

순조의 어가가 천천히 정지하는 동안 선전관과 호위병이 나서서 순조의 어가가 머무를 장소를 정돈하였다. 대부분이 흉갑을 패용한 기병들은 사방을 ‘ㄷ’자로 호위하였다.

“태상황 폐하 납시오!”

러시아 이주민들이 어리둥절한 사이 대한제국 출신의 모든 사람들은, 심지어 기존에 쌍성자에 거주하던 러시아인들도 일제히 도열하였다.

이들 모두가 무릎을 꿇고 절을 올리자 한참 이주민을 지원하던 쌍성자 주둔 부대의 사단장이 대표로 인사를 올렸다.

“이 차디찬 변방에 태상황 폐하께서 친림하심을 진심으로 경하하옵니다!”

운전수가 모든 레버를 올려 엔진을 정지시키자 모터의 공회전 소리 또한 멈추었다. 순조는 두툼한 갖옷을 입은 채 주변을 둘러보고 안전벨트를 풀었다.

일흔이 다 다가온 순조의 몸은 쇠약해졌지만, 아직 부축을 받아야 할 수준은 아니었다. 자신의 어가에서 조심스럽게 내린 순조는 주변을 둘러보고 손을 들어 명령을 내렸다.

“상황을 보아하니 한창 일을 하던 차였구나. 어서 일터로 돌아가도록 하라.”

너무나 당연한 처사라 아무도 이견을 제시하지 않았다. 순조가 흡족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자 대열의 뒤에서 장성 한 명이 말에서 내려 앞으로 달려 나왔다.

“폐하, 날이 점차 싸늘해지고 있사옵니다. 부디 편안한 곳에 머무르며 옥체를 보존하소서.”

한쪽 무릎을 꿇은 장성은 시커먼 장성 특유의 군복에 소매에는 용 문양을, 어깨에는 금실로 수놓은 견장을 착용하였다.

여기에 수많은 훈장이 가슴에서 빛을 발하고 있었다. 이 충언을 들은 순조는 콧잔등에 스치는 싸늘한 바람을 느끼고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답하였다.

“짐의 나이는 종심(從心 - 일흔)에 이르지 아니하였다. 부여 왕이 나를 염려함은 당연한 일이나, 아직 찬바람 정도는 버틸 수 있도다.”

전직 군인이자 아버지의 뒤를 이어 부여왕이 된 이최응이 순조의 행렬을 호위하고 있었다. 부여도에 있는 이천여 명의 최정예 병력을 모조리 데려왔다.

이 병력들은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여 35㎏에 달하는 군장을 짊어진 채 순조를 호위하였다. 이는 러시아 이주민들이 폭동을 일으키는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기 위함이었다.

그 염려와 달리 러시아 제국의 이주민들은 순조의 대열을 멍하니 지켜보았다. 대한제국의 황제가 러시아 제국의 차르와 대등한 권력을 지닌 자임은 이들 모두가 알고 있었다.

“태상황이면 전임 차르 아닌가?”

“조금 다르지, 차르께서 퇴위하신 적은 별로 없지만 퇴위하신 다음에는 황족이 되지 않나. 대한제국은 태상황이라고 황제보다 더 높게 부르더군.”

“그럼 차르보다 더 높은 분이라고?”

그 황제보다 높은 권력자가 이 자리에 나타났다. 평생 차르를 한 번도 보지 못한 러시아 이주민들의 입장에서는 하늘의 달과 별이 지상으로 내려온 것과 같은 상황이었다.

그것도 수많은 호위병과 인부들을 데리고 대한제국의 변방 중의 변방에 방문하였다. 모두가 이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는 가운데 순조는 흥밋거리를 찾아 내부를 시찰하였다.

“땅이 질척거리는구나. 하긴, 습지라면 이 정도로 땅이 질척거림은 당연한 일이로다.”

순조가 아무 곳이나 돌아다니자 질척거리는 습지에서 진흙이 튀어 옷깃을 더럽혔다. 자신의 옷에 튄 진흙을 본 순조의 눈이 찌푸려졌지만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였다.

예전이라면 바닥에 거적을 깔아두라 명할 상황이나 지난 십여 년 이상을 재미있어 보이는 장소를 떠돌던 사람이다. 그저 옷을 갈아입으면 될 일이라 생각하였다.

가장 먼저 순조의 눈이 향한 곳은 사관생도들이 벌목을 돕는 현장이었다. 자신이 친히 이름을 지어주고 관직에 올린 박현상의 아들 박은찬이 이곳에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사관생도 박은찬이 혹시 여기에 있느냐?”

“태상황 폐하께서 신을 찾으시니 그 영광이 하해와 같사옵니다!”

박은찬은 어린 시절 몇 번 순조를 만나본 적이 있었다.

애초에 은찬의 이름은 순조가 어명으로 하사한 이름이라 순조 입장에서는 양자로 들인 자식이 낳은 증손자 정도로 보았다.

순조의 시선이 박은찬의 겉모습을 훑어보았다. 손에는 피가 배어 나온 붕대를 감고 온몸에 땀을 흘려 흙먼지와 뒤범벅이 된 채 열심히 일을 하는 참 군인의 모습 자체였다.

“일을 열심히 하였구나. 평상시에 고된 훈련을 받은 보람이 있더냐?”

“보람을 느끼지 못하였나이다. 한시라도 바삐 더 많은 사람을 살리기 위하여 잡념을 버리고 오로지 몸을 놀렸사옵니다.”

“가장 옳은 말을 하는구나. 네 부친이 훌륭한 일을 하여도 자랑하지 않고, 언제나 겸손하게 세상을 주시하는 것과 같은 모습이다. 그런데 말이다.”

순조 입장에서는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라는 말 자체가 이해가 안 되었다. 그가 아는 이주민은 이주 장소까지 철저히 보호를 받는 것이 상식이었다.

“사람을 살린다는 말이 무엇이더냐? 짐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말이로구나.”

“설명을 드리자면, 기나긴 이야기이나 신이 아는 사실을 말씀드리겠사옵니다.”

박은찬은 순조에게 드미트리를 통해 입수한 정보와 현재 이 지역의 상황에 대해 말하였다. 순조는 모든 설명을 듣자 발을 동동 구르며 분노를 토해내었다.

“세상에 이런 일이 있더냐! 마르크스라는 자를 내 한 번 만나본 적이 있거늘! 어찌 이리 배려가 없고 무심한 말을 하여 사람들을 고통에 빠트리는가!”

“신 또한 태상황 폐하와 같은 마음을 품고 있사옵니다. 책상물림에 불과한 자가 세상을 주무르려 하면 이러한 일이 벌어지기에 마련입니다.”

“노서아의 신료들은 대체 뭘 하기에 유배를 당하는 자들을 관리하지도 않는가!”

순조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정보를 되새겼다. 박현상이 말하기를 러시아 제국에서 머나먼 동쪽으로 유배되는 사람들이 생겨날 것이라 하였다.

이들을 대한제국의 사람으로 받아들이는 대신 노동력을 얻어내 삼강습지를 더 빠르게 개척하고 소작농으로 부리자는 말을 하였다.

그 소작농이 모조리 오는 길에 죽어나가고 오고 나서도 후유증으로 고통을 겪고 있다. 순조는 박은찬의 어깨를 두드린 뒤 몸을 돌려 명령을 하달하였다.

“이들이 제대로 정착하여 소작농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전심전력으로 지원하라!”

순조는 옛 시대를 사는 사람이다. 정확히는 옛 조선의 풍습에서 부패와 신분 차별이라는 요소를 제외한 건전한 풍습을 남겨둔 채 새 시대에 살고 있었다.

모두가 전심전력으로 지원하라는 말에 의문을 표시하였다. 모두가 측은지심을 가득 품은 채 몸을 놀렸고 온 힘을 동원하다 못하여 사관생도의 힘까지 빌리는 처지였다.

그런 순조의 눈이 이최응이 데려온 부여도의 병사들에게 향했다. 이최응을 호출한 순조는 즉각 첫 명령을 하달하였다.

“부여 왕이 데려온 병력들은 장기 작전을 대비하여 식량을 챙겨왔을 터. 이를 모두 이주민들에게 배포하라.”

“하오나 귀중한 통조림과 쪄서 말린 쌀이 태반이옵나이다.”

“고작 철로 만든 통에 담긴 고기 조림이 중요한가! 아니면 사람이 기력을 찾는 것이 중요한가! 짐이 아예 새것으로 사들여 다시금 마련할 것이니 염려하지 말라!”

이최응도 당황한 눈초리였으나 한편으로는 다행이라 생각하였다. 통조림도 엄연히 유통기한이 있으며 부여도의 전투식량 대다수가 유통기한이 끝나가던 차였다.

미음을 먹고 속이 어느 정도 풀린 러시아 이주민들에게 다음 식량이 준비되었다.

속을 니켈로 도금한 깡통들이 하나씩 뜯어지며 거대한 가마솥에 내용물이 담겨 가열되었다.

“새 통조림은 맛 하나는 좋네. 예전 통조림은 오래되면 안이 삭기 시작해서 맛도 끔찍하게 변하고 역한 쇠 비린내가 진동을 했는데.”

“그냥 소나 돼지를 잡아서 고기를 먹이면 배탈이 날 수도 있잖나. 통조림을 한 번 더 끓여서 죽 형태로 배급하면 여러모로 편리하기는 할 거야.”

예전에 만주에서 작전을 실시하던 병사들은 어느새 장교가 되어 배식을 주도하였다. 이들이 먹었던 통조림과 비교하면 지금 통조림은 제대로 된 음식이었다.

고기를 잘게 찢고 푹 끓인 통조림 쌀죽이 이주민들에게 배급되었다. 이주민들이 천천히 죽을 먹는 동안 순조는 주변을 시찰하며 여러 문제점을 개선하기 시작하였다.

“내가 알기로 쌍성자에 새로운 공업단지를 설립하였거늘. 이런 추운 고장에서 지낼 피난민들에게 구들은 몰라도 어찌 난로조차 배급하지 못하는가?”

“쌍성자의 공업단지는 새로운 물품 위주로 편성되었나이다. 석탄을 사용하는 주철 난로를 생산하지 아니하고 석유를 가공한 기름을 때는 난로를 생산하옵니다.”

장성들이 식은땀을 흘리며 순조에게 설명하였다. 그러자 순조는 손뼉을 치면서 자신이 담당하고 있는 석유 생산 및 분별증류를 떠올리고 말하였다.

“그러고 보니 얼마 전 석유 공급 요청이 들어온 것이 그 때문이었구나.”

“실로 그러하옵니다. 이주민들이 생각보다 많이 밀려와 본토에 있는 공장에 발주를 넣어 석탄을 사용하는 난로를 들여올 예정이옵니다.”

“때를 놓칠 수 있으니 석유를 사용하는 난로를 그대로 들여오면 되지 않겠느냐. 이 난로도 내가 사들이겠다.”

순조는 요하 하구에서 유전을 발견한 장본인이었다. 이 유전에 채굴시설과 정제시설 모두를 자신의 개인 자금으로 마련하고 끝없이 석유를 채취하였다.

그는 감도 잡지 못한 채 덮어놓고 석유를 뽑아내고 가공하여 비축하기만 하였다. 순조는 손을 꼽아가며 자신이 소유한 석유가 얼마나 되는지에 대해 논하였다.

“내가 한 해에 캐내는 석유가 이백만 관(750톤)이다. 여기에 다른 유전을 두 개 더 발견하여 아직 제대로 채굴하지도 못하는 형편이지.”

“이백만 관이라 하셨사옵니까? 그러하면 석유를 채굴한 지 이 년이 지난 형편이니…….”

“난로나 외구들 혹은 증기기관에 쓸 수 있는 정제 석유가 도합 말(1말 = 약 6리터)로 따졌을 때 십만 말이 넘어가노라.”

순조는 옛 조선의 문화인 절제와 비축을 생활화하였다. 수백만 석에 달하는 환곡을 쌓아두듯 요하 유전에서 생산된 석유를 무턱대고 요동의 각 지역에 비축해 두었다.

오히려 석유의 생산과 정제 속도가 석유난로의 공급 속도보다 빨라 물량이 적체될 지경이었다. 반면 현지 군관들은 난색을 표하며 이 결정에 이견을 제시하였다.

“석탄은 허름한 수레로 마음대로 옮길 수 있사오나 석유는 쇠로 만든 제대로 된 통이 필요하옵나이다.”

“그 일은 동티단이 알아서 할 것이니 염려하지 말라.”

요동 일대에는 순조의 명에 따라 동티단이 50리, 약 20㎞ 간격으로 주유소와 배터리 충전을 위한 증기기관을 마련해 두었다. 정작 아무도 쓰질 않는 한가한 장소였다.

이런 주유소에는 최소 5톤 단위의 기름이 보관되어 있었다. 어차피 기름이 계속 생산되어 보관될 장소도 필요하던 차라 순조는 동티단을 불러 명을 내렸다.

“호 대사마는 어디 있는가?”

“신은 여기 있사옵니다! 폐하!”

동티단 최고 간부인 호 서방은 나무를 잘라 통나무집을 만들다 헐레벌떡 뛰어왔다. 또다시 자신들을 일터에 밀어 넣은 순조가 어떤 명령을 내릴지 노심초사하는 눈치였다.

순조는 애틋한 표정으로 호 서방을 바라보았다. 그를 비롯한 동티단은 순조의 아래에서 십 년 가까이 고된 노동을 하여 기력이 쇠하고 몸 이곳저곳이 불편해지고 있었다.

“그간 고생이 많았어. 내 아래에서 사람들을 도와 온전한 일을 하지 않았나.”

“아니옵니다! 신은 앞으로도 더욱 열심히 일할 수 있사옵니다!”

“그렇게 말은 하면서도 얼마 전부터 팔뚝에 붕대를 감고 다니지 않나.”

호 서방은 속마음을 숨긴 채 순조가 제발 자신들을 방면해 주기를 빌고 또 빌었다. 오로지 충심으로 가득 찬 표정을 지은 채로 무죄 방면을 간절히 청하였다.

물론 순조의 마음은 달랐다. 이제 새로운 사람들을 고용하여 자신의 아래에서 부릴 생각으로 헌 신을 버리고 새 신을 찾는 심정으로 명을 내렸다.

“이제 마지막 과업을 하면 될 것 같군. 가장 먼저 내 어가를 분해하도록 하라.”

“어가를 분해하시면 아니 되옵나이다!”

순조는 자신의 어가가 점점 낡아가는 것을 느꼈다. 예전이라면 잘 올라갈 경사의 언덕도 한참을 힘을 들여 천천히 올랐다.

여기에 갈수록 소음이 심해지고 진동 또한 심해졌다. 부품을 교체하는 수준이 아닌 아예 새로운 어가를 마련할 필요성이 있었다.

“지금 무얼 하느냐. 노서아의 백성들이 추위에 시달리며 밤잠을 설칠 지경인데 축전지를 모두 사용하여 전구를 밝히기라도 해야 하지 않겠는가.”

“며…… 명을 따르겠사옵니다!”

순조는 새 어가에 쓸 전기차를 박현상이 마련해 줄 것이라 판단하였다.

그도 그럴 것이 이번 이주민 사태는 박현상의 손으로 처리해야 할 일을 자신이 대신 처리해 준 격이었다.

정말로 어가가 분해되어 모터는 어디서나 쓸 수 있는 동력 공급용으로, 배터리는 전구와 연결되어 불을 밝히는 데에 사용되었다. 심지어 알루미늄 프레임도 쓸 데가 있었다.

“이 금속은 가볍고 쉬이 녹슬지 아니한다. 녹이고 틀로 찍어내 작은 솥을 만들면 더욱 좋을 것 같구나.”

모든 작업이 즉석에서 진행되었다. 러시아 이주민들은 방금 전까지 스스로 움직이던 마차, 대한제국의 전임 황제가 타고 다니던 기물로 만든 솥을 지급받았다.

임시로 지어진 통나무집에 배터리가 설치되고 전구가 안을 밝혔다.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에 러시아 이주민들은 순조에게 절을 올리며 찬양을 시작하였다.

“대한제국의 차르께서 우리에게 빛과 소금을 내려주셨습니다!”

“이 은혜를 옥토를 개간하고 모든 소출을 공헌하여 갚아드리겠습니다!”

안드레이를 포함한 카자크 기병을 다룬 전적이 있는 순조는 러시아어를 어느 정도 알고는 있었다. 그는 이주민들의 말에 흡족한 표정을 지으며 동티단에게 다음 명령을 내렸다.

“다음 명령이 마지막 명령이다. 요동 일대에 비축된 석유를 이주민들이 모두 정착하여 제대로 된 농토를 마련할 때까지 공급하여라.”

“하오나 제대로 된 농토를 마련하려면.”

“앞으로 일 년 이상 걸릴 것이 아니더냐. 그러하니 마지막 명령이지.”

호 서방을 비롯한 동티단은 자신들의 고난을 생각하고 질겁하다 못해 경기를 일으켰다. 대충 만든 수레도 아닌 쇠로 찍어낸 통에 석유를 담아 운반하는 작업 자체가 미친 짓이다.

설령 기차를 사용한다 해도 쌍성자에서 삼강평원까지 올라가는 길은 기차가 없다. 이 길을 오가려면 사람의 걸음으로 나흘이 넘게 걸렸다.

“명을 완수하면 모두의 죄를 사면하겠다.”

“태상황 폐하의 명에 따르겠사옵나이다.”

동티단에게 마지막 명을 내린 순조는 따로 마련된 숙소에서 잠을 청하였다. 이후 이틀이 지나자 모든 것이 변해 있었다.

“이 정도는 되어야 사람이 사는 고장 같구나.”

동티단이 진흙과 이끼에 범벅이 되며 수많은 나무를 잘라 임시로 사용할 통나무집을 마련했다. 몇 년이 지나면 습기를 먹고 썩어 문드러질 집이나 그 정도만 되어도 충분했다.

냇가에는 낮의 따스한 때를 노려 이주민들이 몸을 씻기 시작하였다. 어찌나 때가 탔는지 냇물이 비누 거품과 땟국으로 색이 변할 지경이었다.

여기에 피골이 상접한 몸에 살점이 붙어나가기 시작하였다. 심각할 정도로 기침을 하던 사람들조차 어느 정도 기침이 잦아들며 병이 자연스럽게 치료되었다.

“실로 경이로운 일이옵나이다. 폐하께서 친림하시지 아니하였다면 이들이 어찌 되었을지 신은 갈피조차 잡지 못할 일이옵니다.”

부여 왕 이최응은 정비작업을 벌이는 동티단과 자신의 휘하 병력들을 바라보며 순조에게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 말을 들은 순조는 헛기침을 하면서 예전 일을 변명하듯 말하였다.

“얼마 전의 일이 생각나는구나. 노서아의 이주민들을 보러 가겠다고 부여 왕에게 말했을 때에 굳이 친림할 필요가 없다고 하였지.”

“신의 생각이 부족하고 경험이 미욱하여 잘못된 간언을 올렸사옵니다.”

“그럴 수도 있다. 더 이상 괘념치 말고 앞으로 주어진 일에 충실하도록.”

순조가 흥미를 위해 벌인 일이 정말 수많은 이들의 목숨을 구하게 되었다. 앞으로 많은 재산을 소모할 것 같지만 그 정도 재산은 순조에게는 푼돈이나 마찬가지였다.

그 푼돈조차도 러시아 이주민에게는 대천사가 강림하여 성령을 내린 것과 대등한 은혜였다. 이들도 나름대로 은혜를 갚기 위해 여러 준비를 하였다.

“태상황 폐하, 이주민들이 폐하에게 드릴 것이 있다 하옵니다.”

“무엇을 준다는 말인가. 한번 보러 가자꾸나.”

순조가 방문하자 이주민들 모두가 대한제국의 방식대로 절을 올렸다. 이주민들은 고작 이틀 동안 사력을 다해 거대한 오븐을 만들고 빵을 구워냈다.

갓 구워내 따스한 열기가 느껴지는 흰 빵과 소금이 피난민 대표를 통해 순조에게 건네졌다.

“너무나 큰 은혜를 드린 대한제국의 차르께 저희가 드릴 것은 이 빵과 소금에 불과하옵니다.”

동구권 특유의 접대 관습, 흰 빵과 소금을 받은 순조는 빵을 쭉 찢어 소금을 찍고 입안에 넣었다.

“맛이 좋구나.”

순조는 자리에 모인 모든 이들에게 빵을 조금씩 찢어주었다. 다음 순서는 이최응, 그다음 순서는 각 장성들과 장교들에게까지 빵이 전해졌다.

사람 머리 크기의 빵이 모두의 뱃속으로 사라지자 이주민들은 자신들의 선물을 받은 순조에게 충성 맹세를 하였다.

“대한제국은 저희의 새 고향이며 황제께서는 저희의 새 차르입니다.”

“새로운 차르를 경배하며 저희의 모든 것을 드리겠나이다.”

순조 입장에서는 난감한 말이었다. 이들은 엄연히 러시아의 이주민이며 대한제국의 영토에 건너와 소작농으로 일할 사람들이다.

더군다나 니콜라이 1세의 지원도 기억하고 있었다. 러시아 제국의 기병들과 군마 덕분에 청나라와의 전쟁에서 승리하였음을 명백히 알고 있다.

“나는 자네들의 차르가 아니야. 주인도 아닌 새 지주일 뿐이지.”

“하오나 저희는 차르의 잘못된 판단으로 이런 고통을 겪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저희는 여기서 힘을 비축하여 차르를 권좌에서 몰아낼 것입니다!”

순조의 눈동자가 흔들리며 자신이 젊은 시절에 경험했던 난, 홍경래의 난이 되새김질 되었다.

당시에는 자만심에 취하고 권신들에게 휘둘리며 끔찍한 실수를 저지른 전적이 있었다.

아무래도 이 장소에 오래 머무르며 사람들을 교화시켜야 할 것 같았다. 순조는 박은찬을 포함한 사관생도들과 함께 쌍성자로 내려와 도성에 서신을 보냈다.

옛 유학자들과 백성을 교화시킬 재주가 있는 옛 방식의 사람들을 불러 모으라는 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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