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효명세자와 함께하는 조선 생활-259화 (336/345)

259화

21장 8화 아픈 현실

박은찬은 다음 주로 예정된 러시아 제국 이주민 관리, 일종의 봉사활동을 점수도 벌고 산천을 누비며 적당히 시간을 때울 수 있는 일이라 생각하였다.

“우리 같은 생도를 파견해서 풍부한 경험을 쌓게 할 목적이겠지.”

박은찬을 비롯한 서른 명의 신청자들 모두 비슷한 생각을 하였다. 동아시아의 다양한 기후와 지형 조건을 체험하고 장교들의 숙련도를 끌어올리기 위한 파견 교육이라 생각하였다.

쌍성자 북부, 삼강습지의 서쪽 입구가 파견 장소였다. 박은찬을 비롯한 서른 명의 생도들은 이 갑갑한 사관학교를 벗어나 자연을 만끽할 생각으로 짐을 꾸렸다.

그 생각과 달리 사관학교 분원의 교육자들은 물론이고 주변 군부대의 병사들까지 모두 러시아 이주민들을 받아들이기 위해 움직였다.

“왜 이렇게 사람이 많이 움직이지? 도적 떼라도 왔나?”

주변을 보아도 병사들 혹은 쌍성자 일대에서 지원을 위해 파견되는 사람들이었다.

박은찬이 궁금증을 해소하기 위해 교관들에게 질문을 하려는데 북쪽에서 전령 두 명이 달려왔다.

-사람이 너무 많이 왔습니다! 일손이 더 필요하니 조금이라도 빠르게 움직여 주십시오!

박은찬과 생도들은 서로를 돌아보며 의문을 표시하였다. 사람이 많이 왔다고 자신과 같은 생도들까지 파견할 사태는 일어나지 않으리라.

그러나 인솔을 담당한 장교는 입술을 깨물고 생도들에게 명령을 하달하였다.

“지금부터 행군 속도를 올린다, 말이 지치지 않도록 관리하도록!”

박은찬은 어린 시절 한양을 통해 북방으로 이주하는 화전민들을 본 적이 있었다. 이들 대다수는 국가의 철저한 관리, 정확히는 박현상의 제안 덕분에 여러 혜택을 받은 사람들이었다.

산에서 내려온 다음 한 달 이상 제대로 된 음식을 먹이고 병을 치료하였다. 여기에 공장제 면직물을 아낌없이 사용해 제대로 된 의복을 갖추고 식량도 공급하였다.

대부분의 생도의 시선에서 이주민은 이토록 철저한 준비를 한 다음 이주하는 사람들이었다. 반면 러시아 제국의 이주민은 이런 준비를 하나도 하지 않았다.

모든 생도들이 말을 갈아타며 하루를 내리 질주하여 주민을 받아들이는 장소로 향하였다. 해당 장소를 담당하는 군인들이 지시를 하달하였다.

“말은 나중에 돌려줄 것이니 즉각 내놓도록. 한시가 바쁘니 어서!”

다짜고짜 떨어진 불호령에 생도들의 모든 말과 예비 말이 일터로 끌려갔다. 질퍽거리는 습지에서 그나마 온전한 땅을 골라 러시아에서 무질서하게 건너온 이주민을 받아들였다.

박은찬과 생도들이 방문한 이 지역에만 삼천여 명의 이주민이 배정되었다. 이주민의 몰골을 확인한 박은찬은 얼이 빠진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이건 아닌데. 사람이 이런 꼴을 할 수가 있나…….”

러시아에서 유배당해 머나먼 동방으로 이주한 소작농들은 한 푼의 지원도 없이 벌어둔 푼돈으로 시베리아를 건너왔다.

그 결과는 참혹하기 그지없었다. 박은찬이 보기에도, 대부분의 평민 출신 사관생도들이 보기에도 이들 가운데 사람으로 불릴 몰골을 한 이들은 백여 명 중 한 명에 불과하였다.

제대로 된 의복을 입은 사람은 없었다. 신발조차 해지고 닳아 발에 대충 거적을 씌워서 신발을 대신하였으며 남은 옷은 누더기나 마찬가지였다.

온몸에 자잘한 상처를 입고 피부에 때와 흙먼지가 덕지덕지 달라붙어 백인이 아닌 시커먼 토인(土人)으로 보일 지경이었다. 여기에 몸 상태는 더욱 말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이주민들은 뼈와 가죽만 앙상하게 남아 사지를 덜덜 떨어대며 고통을 호소했다. 개중에 한 사람은 군인이 건넨 마른 빵을 먹고 속이 뒤틀려 구토를 하였다.

“어떤 놈이 마음대로 식량을 줬나! 식사를 최대한 묽은 미음으로 쑤어서 지급하도록!”

박은찬이 있는 구획을 담당하는 참령(參領 - 대대장)은 말 위에 올라 지시를 하달하였다. 그 지시가 하달되는 동안에도 이주민들은 몇 명씩 정신을 잃고 바닥에 쓰러졌다.

“참령님! 사람들이 혼절합니다! 계속 죽어 나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분류하고 관리하라고! 군불이라도 때어서 체온을 유지시켜! 넌 뭘 하나!”

“그럼 생도들은 어떻게 합니까!”

“그 애송이들이 알아서 일을 하건 말건! 눈앞의 사람이 급하다!”

머나먼 시베리아부터 이주민들의 뒤를 추격한 사신이 마지막 수확의 낫질을 시작하듯, 긴장이 풀린 피난민들에게 죽음의 손길이 다가왔다.

생도들 모두가 멍하니 방금 전까지 살아 있던 사람들이 숨을 거두고 싸늘하게 굳어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이런 가운데 이토 히로부미가 가장 먼저 나섰다.

“이럴 때가 아닙니다. 사람이 굶주리면 써늘한 바람만 불어도 쓰러지기 마련입니다!”

그나마 생도들 가운데 가장 비슷한 경험을 한 사람이 이토 히로부미였다. 그의 어린 시절은 아편에 중독된 아버지로 인해 질긴 목숨을 가까스로 이어간 비참함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한 박은찬을 이토 히로부미가 일깨우는 꼴이 되었다. 이토 히로부미는 도끼와 톱을 가져와 적당한 곳에 던져두고 주변의 나무를 발로 계속 걷어찼다.

마침내 한 나무가 크게 뒤흔들렸다. 나무를 한 번 쓰다듬어 확인한 이토 히로부미는 박은찬에게 고함을 치며 지시를 내렸다.

“이 나무는 죽어서 수분이 많이 빠져나갔습니다. 좀 연기가 날 것 같은데 지금 상황에서는 별수가 없습니다!”

“그걸 어떻게 아는데? 나무를 어떻게 다룰 줄 알아?”

“전 숯쟁이로 일해본 적 있으니까요! 아무튼 됩니다!”

근처에는 아름드리 참나무 하나가 죽어 있었다. 이토 히로부미의 손에 이끌려 생전 처음 톱을 잡아본 박은찬은 호흡을 맞춰 톱으로 나무를 썰어냈다.

그의 손에 물집이 돋아날 무렵 아름드리 참나무가 옆으로 넘어갔다. 그 굉음에 생도들의 시선이 모이자 박은찬은 삿대질을 하며 생도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다들 뭘 해! 나무를 어서 장작으로 잘라서 불을 피워! 이등박문! 넌 다음 나무 찾아!”

“인훈 형님! 다음 나무 찾았습니다!”

본래 러시아 이주민의 인솔과 분류를 위해 배정된 생도들은 벌목 작업을 자발적으로 실시하였다. 아직 습기를 머금은 덜 마른 장작이라도 이 상황에서는 귀중한 자원이었다.

체온을 잃어가던 피난민들은 모닥불 덕분에 체온을 보존하고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모든 작업이 끝나자 박은찬은 가죽이 벗겨진 손을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내 평생 톱질을 해본 적이 없는데.”

“저도 이런 톱을 써본 적은 없습니다. 그냥 몸이 움직이지 뭡니까.”

사관학교의 체력 훈련을 모두 이수한 생도들도 진이 빠져서 제대로 움직이지 못할 지경이었다.

그러한 이들에게 장교들이 다가와 육포와 빵을 건네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박 생도와 이등박문 생도 덕분에 대처를 좀 빠르게 할 수 있었어. 둘 다 잘하였네.”

“별말씀을요. 그나저나 식량이 남은 것 같아서 다행이로군요.”

“쌍성자도 식량이 남을 정도로 풍족한 상황은 아니야. 당장 사람을 보내서 용천도는 물론이고 부여도를 통해서 식량을 들여와야 할 상황이라네.”

“부여도를 통해서 식량을 들여온다니요? 제법 어려운 일 아닙니까?”

삼강습지는 대한제국의 영토인 용천도에 한 발을 걸친 지역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된 개척이 안 된 이유는 교통 문제였다.

용천도를 통해 접근하려면 험준한 산과 겨울이 되면 얼어버리는 강을 건너야 한다. 그나마 육로가 정비된 쌍성자를 통해 올라가는 것이 효율적이고 자원 소비도 덜하리라.

북방에서 오랜 시일을 근무한 장교도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작은 담배 파이프에 담뱃잎을 쑤셔 넣고 불을 붙이고는 불편한 표정으로 말하였다.

“누가 아니라 하나. 내가 기병 장교 시절일 때에도 훈련을 위해 돌아다니던 경로인데 식량을 짊어지고 이동한다……. 노비라면 몰라도 보통 사람은 절대 안 할 일이야.”

“이 나라에 노비가 어디 있습니까?”

“그렇긴 하군. 아마 부여왕(이하응의 형 이최응) 전하께서 힘을 좀 쓰셔야 할 것 같은데.”

장교가 실없이 웃으며 다음 지시를 하달하기 위해 자리를 비웠다. 이미 말라버린 빵과 육포를 적당히 쪼개 입안에 넣은 박은찬은 수통의 물로 이 육포를 목으로 넘겼다.

대부분의 생도들은 별다른 말도 없이 식사를 대충 마쳤다. 모두가 조용하게 식사를 하는 동안 여력이 남은 박은찬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의무대에 가서 소독약과 붕대 좀 받아올게.”

박은찬이 가만히 살펴보니 손아귀가 찢어져 피를 흘리는 생도가 보였다. 잘못해서 상처가 곪으면 큰일이 날지도 모르는 상황이라 솔선수범하여 약을 받아오려 하였다.

물론 의무대에서는 박은찬 따위의 부상자를 치료할 정도로 여유가 있지 않았다. 박은찬이 처음으로 목격한 것은 부상을 제때 치유하지 못해 썩어버린 사지를 절단하는 모습이었다.

-끄아아아아아아악!

톱이 사지를 밀고 들어가자 피가 솟구치며 환자의 몸이 요동쳤다. 톱질을 하는 의사는 쉴 새 없이 톱을 놀려 사지를 잘라내면서도 보조를 담당한 의무병에게 욕을 내뱉었다.

“모르핀! 모르핀 투여했는데 반응이 이래?”

“죄송합니다! 모르핀을 희석한 것을 재차 희석한 것 같습니다.”

“이따위로 일하려면 애초에 의무병 지원을 왜 했냐고!”

텅 소리와 함께 사람의 몸에 달려있던 사지가 통 속에 담겼다. 소독과 지혈을 마친 사지에 설파제를 뿌리고 소독된 붕대를 감은 직후, 다음 환자가 이송되었다.

“다음! 이번 절단은 정강이다! 모르핀 제대로 투여해!”

박은찬에게 눈길을 주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나마 반대편에 있는 의무대는 수백 명에 달하는 환자들을 진찰하고 처방을 내렸다.

환자들 가운데 고열을 호소하는 폐렴 환자는 일상다반사였으며 모두가 작거나 크게 상처를 입었다. 한 환자는 북극 모기에 수백 곳이 넘게 물려 온몸이 부풀어 올라 있었다.

“이거 설파제로 될까 모르겠는데. 일단 부항으로 화농 다 빼내고 소독해 보자고.”

골절 따위는 부상 축에도 끼지 못하였다. 동상에 걸리거나 감염된 손가락과 발가락을 절단할 의사가 부족해 일단 방치하고 나중에 절단을 예약할 지경이었다.

박은찬은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의무대 바깥에 나와서 무릎을 꿇고 웅크렸다. 그는 조금 옅어진 피비린내를 느끼며 자리에 앉아서 중얼거렸다.

“생지옥이야……. 이런 생지옥이 또 있을까.”

“혹시 말이오, 혹시 프랑스어 할 줄 아시오?”

박은찬의 귀에 어설픈 프랑스어가 들려왔다. 누구인지 확인해 보니 러시아 제국 이주민을 관리하던 사람 같았다.

상대의 복장은 이주민 평균보다 월등히 좋았다. 다 찢어지고 해진 군화와 누더기와 군복의 중간쯤 되는 러시아 군복 그리고 고물딱지가 되다시피 한 머스킷과 휘어진 총검이었다.

상대가 왜 프랑스어를 할 줄 아는지, 신분이 어떠한지는 몰라도 대화를 나누지 않고서는 정신이 나갈 것 같았다.

박은찬은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를 통해 배운 프랑스어를 내뱉었다.

“잘할 줄 압니다. 대화가 되겠습니까?”

“유창하군요. 의무대에 할 일이 있어 기다리는 처지에 이야기라도 합시다.”

박은찬의 옆에 앉은 사람은 가슴주머니를 더듬어 파이프를 꺼내 담배를 피우려 하였다. 그러나 파이프에는 금이 가 있고 담배 주머니에는 아주 조금의 가루밖에 없었다.

그 모습을 본 박은찬은 자신에게 지급된 생도용 여송연(시가)을 떠올렸다. 상대에게 여송연을 건넨 박은찬은 상대방의 복장을 살펴보고 질문을 하였다.

“피우시오, 그나저나 군복을 보니 러시아 제국군 출신인 것 같은데.”

“예전에는 그랬소. 지금은 차르에게 반기를 들고 유배당한 신세이지만.”

“유배를 당하셨다. 그럼 프랑스어는 언제 배우셨습니까?”

“전쟁에서 포로생활을 할 때 배웠소. 내 이름은 드미트리고 성은 안 불러도 되오.”

두 줄기의 담배연기가 올라오자 이주민들이 몰려들어 담배를 달라고 아우성을 쳤다. 박은찬은 그 모습을 보며 쓴웃음을 짓고 여송연 뭉치를 건네주며 말했다.

“난 새 여송연을 사들이면 되니까 마음대로 피우시오.”

아예 절을 하다시피 고개를 숙인 러시아 이주민들은 여송연을 한 모금씩 피우고 환호성을 질러댔다.

그 모습을 본 드미트리는 쓴웃음을 지으며 프랑스어로 말했다.

“지옥에서 가까스로 탈출하고 담배를 한 대 피우니 마음이 놓이는군.”

“맛은 어떻소?”

“세상 그 어떤 맛보다 좋소. 이런 시가 한 대를 얻으려고 몸을 파는 사람도 있었지.”

“뭐? 뭐요?”

드미트리는 박은찬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태연하게 내뱉었다. 그 모습을 한참 동안 확인하더니만 오히려 이해할 수가 없다는 듯이 말하였다.

“시베리아 외곽이면 몰라도 시베리아를 건너오지 않았소? 당연한 일 아니오?”

“뭐가 당연합니까. 세상에 어떻게 그런 일을 할 수가…….”

“우리가 온 거리는 육천 베르스트(Versta – 약 1㎞)요. 처음에는 모두가 소 두 마리에 말 한 마리 정도, 여기에 수레에 식량을 얹고 머나먼 유배의 길에 올랐소이다.”

드미트리는 비명소리에 몸서리를 치고는 수술이 진행되고 있는 천막을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손가락을 곱아가며 당시에 있었던 일을 털어놓았다.

“처음 버린 것은 소요, 소가 계속 이동하면서 풀만 먹으면 힘이 빠지기 마련이지. 그러니 아무 마을이나 골라잡고 소를 대충 팔아치웠소.”

“그러면 식량은 어떻게 가져가십니까?”

“다음으로 판 것이 말이고 그다음이 식량이오. 빵을 만들 재주도, 맷돌을 짊어질 자신도 없어서 밀과 호밀 그리고 메밀을 삶아서 씹어 먹었지. 여기까지는 괜찮았는데.”

드미트리는 등에 메고 있던 머스킷의 개머리판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일곱 개에 달하는 빗금이 그어져 있었다.

“주변의 도적놈들, 자칭 개척자들이 우리처럼 유배당한 농민을 약탈한 거요. 나를 포함한 전직 군인들이 뭉쳐서 그 도적놈들을 격퇴하려 시도했었소.”

“시도했다는 말씀은 실패하였다는 뜻입니까?”

“격퇴는 하였는데 잡혀간 사람이 부지기수에 죽은 사람도 부지기수라는 말이지. 내 막내도 그 자리에서 죽었소. 창에 맞아 피를 흘리며 내 품에 안겨서 숨을 거두었지.”

드미트리는 아무런 표정의 변화도 없이 담배를 빨아들이고 연기를 내뱉었다. 그러고는 자신의 눈가를 더듬으며 쓴웃음을 지었다.

“아들 둘과 딸 하나가 죽어서 이제는 눈물도 말라버렸군. 나아가면 나아갈수록 생지옥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소. 처음에는 희망에 차 있던 사람들도 죽음을 피해 움직였지.”

설명이 계속되었다.

날이 갈수록 늘어나는 도적들로 이주민의 피해는 갈수록 늘어났다. 그렇다고 멈출 수도 없는 것이 시베리아의 허허벌판에 농토를 개척하기 전에 굶어 죽을 신세였다. 멈추는 순간 주변의 개척자들이 도적으로 돌변해 약탈을 하리라.

그나마 정상적인 개척지를 방문해도 몇 배에 달하는 가격으로 물건을 팔았다.

“잠을 자려고 건초를 산더미처럼 거두고, 까샤(죽) 한 그릇을 먹으려고 똥을 치워댔소. 그나마 우호적으로 나선 사람들이 누구인지 아시오? 이 지역에 살던 사람이오.”

“시베리아에 살던 원주민들 말입니까? 그 사람들은 러시아 제국에 토벌당한 사람들인데요?”

“그 사람들이 보기에도 우리가 딱해 보인 것 같더군.”

대한제국의 영토 근처에 도달했을 때가 되자 대부분의 이주민은 거지 신세가 되었다. 심지어 마지막까지 추격한 도적들을 격퇴하려고 총검으로 상대를 찔러 죽였다.

그 고난을 극복할 무렵 한 무리의 지원군, 외몽골의 사람들이 도적들을 격퇴하였다. 이 이야기를 마친 드미트리는 반 넘게 피운 시가를 다른 사람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카를 마르크스 선생은 동방에 희망이 있다고 말했소. 그 희망을 찾아 수많은 절망을 맞이하였는데 이제 좀 희망이 보일 것 같구려.”

“카를 마르크스라 하면 좀 이상한 사상가 아닙니까? 그 털이 덥수룩하고.”

“오, 직접 보신 적이 있소?”

“네. 어린 시절에 한 번 본 적은 있지요.”

박은찬은 카를 마르크스를 본 적이 있었다. 자신의 아버지와 대화를 나누고 가르침을 얻었다면서 감사를 표시하고 돌아간 사람이었다.

당시에는 아버지와 연줄을 만들려 하는 수많은 사람 중 하나라 생각하였다. 이 기억을 떠올린 박은찬은 이를 부득부득 갈아대면서 마르크스에 대한 저주를 내뱉었다.

“개놈의 새끼. 애먼 사람을 생지옥으로 몰아넣어?”

“아마 시베리아가 얼마나 험악한지 모르는 사람이라 그런 제안을 한 것 같소. 사실 차르의 눈 밖에 난 시점에서 우리 모두 시베리아에서 뒹굴 신세였소.”

박은찬은 아버지인 박현상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다시금 알 수 있었다. 그의 세심한 배려와 정책이 없는 평범한 국가가 얼마나 많은 사람을 고통에 빠트리는지 체감한 것이다.

그 고통을 겪고 살아난 사람이 여기에 있었다. 드미트리는 박은찬의 얼굴을 바라보더니 다시금 수술이 진행되는 천막을 가리키고 말했다.

“이제 안사람만 치료되면 정착할 수 있겠지. 그래도 아들 둘은 살아서 다행이야.”

“드미트리 계십니까! 드미트리!”

자신의 이름을 부르자 드미트리는 벌떡 일어나 의무대를 노려보았다. 박은찬도 그의 뒤를 따라 수술이 끝난 환자가 대기하는 장소로 향했다.

“아내. 아내는 어떻게 되었소! 팔에 박힌 총알을 뽑아낸다 했는데!”

“대단히 죄송한 말씀입니다만 수술 중에 혈관이 터져서…….”

침대에는 팔에서 피가 새어 나온 드미트리의 아내가 평온한 표정으로 숨을 거두었다. 어떻게든 의료진이 명줄을 잡아보려고 수혈을 시도한 흔적까지 보였다. 그 노력에도 불구하고 동맥 파열로 인한 과다출혈을 감당할 수 없었다.

드미트리는 아내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현실을 부정하다 마침내 아내의 죽음을 받아들였다.

“정신 좀 차려! 애들은 어떻게 하냐고! 여기는 낙원인데! 왜 낙원에서 죽어!”

아내의 핏기 어린 시신을 부둥켜안은 드미트리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려댔다. 시베리아를 건너오며 메마른 눈물이 다시금 터져 나오고 이내 통곡이 되었다.

수술을 집도한 의원은 주먹을 한 대 얻어맞을 각오로 이를 꽉 깨문 채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러나 드미트리는 입에서 비탄이 섞인 말이 새어 나왔다.

“수술 계속하시오. 다른 사람을 많이 살리시구려.”

아내의 시신을 등에 업은 드미트리는 저 머나먼 벌판으로 향했다. 그가 극단적 선택을 하지 않기를 빈 박은찬은 대충 알코올이 담긴 병과 솜을 받고 밖으로 나가며 중얼거렸다.

“인력이 필요해. 우리가 머무를 시간이 앞으로 삼 일밖에 없는데…….”

“저기 정체불명의 마차가 옵니다! 말도 없이 움직입니다!”

보초병이 머나먼 서쪽을 가리키며 고함을 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박은찬이 머나먼 서쪽을 바라보자 정말 정체불명의 마차가 있었고 그 앞에는 말이나 소 같은 가축이 보이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은 마차가 말도 없이 움직인다며 겁에 질려 있었지만 박은찬과 고위 영관들은 저 물건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이 세상에 스스로 움직이는 어가와 주홍색 바탕의 어기(御旗)를 사용하는 사람은 단 한 명밖에 없었다.

이윽고 우렁찬 목소리로 명령이 하달되었다.

“저 마차는 태상황 폐하께서 다루시는 어가(御駕)이다! 모두 절을 올려라!”

러시아 이주민들이 어리둥절해 하는 사이 대한제국의 백성들 모두가 도열하여 절을 올렸다. 이윽고 전기엔진 특유의 구동음이 더욱 커지며 어가가 도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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