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효명세자와 함께하는 조선 생활-258화 (335/345)

258화

21장 7화 깨어진 꿈

1857년 7월 무렵, 대한제국 사관학교 생도들에 대한 분원 이전 모집이 완료되었다. 이들은 표면적으로는 머나먼 쌍성자에서 병참기지를 수호하는 대신 더 빠른 진급을 약속받았다.

분원 이전을 선택한 사관생도는 대부분 인맥이 부족하거나 평범한 집안 출신이라 조금이라도 빨리 진급하고 싶은 욕심을 부리는 사람들이었다.

이백여 명의 생도들 가운데 단 세 명의 생도가 양반 가문 출신이었으며 개중에 명망 높은 가문 출신은 단 한 명, 박은찬이었다.

“아버지! 어머니! 쌍성자에서 제대로 된 장교 교육을 받고 돌아오겠습니다!”

“잘 다녀오너라! 가서 병에 걸리지 않게 각별히 조심하도록 하고!”

부모의 배웅을 받은 박은찬은 쌍성자로 향하는 증기선에 몸을 올렸다. 같이 배웅을 받은 사관생도들은 그와 눈이 마주치기가 무섭게 아는 체를 하면서 친하게 지내려 하였다.

“인훈 생도님 아니십니까. 저 기억하십니까?”

“기억하고 있고말고. 그나저나 우리는 같은 생도인데 왜 존대를 하시오?”

“그게…… 제가 좀 나이도 어리고 촌구석 출신이라 말이지요.”

배가 인천을 떠나 블라디보스토크, 이제는 북외(北嵬)라 불리는 지역에 도달할 무렵, 박은찬은 아버지의 위세를 등에 업고 자연스럽게 생도들의 대표로 추대받기 시작하였다.

이 또한 박은찬이 의도하던 바였다. 사관학교의 역할 중 하나가 인맥 형성을 통한 끌어주기와 밀어주기라 자연스럽게 이토 히로부미를 밀어낼 수 있을 것이라 판단하였다.

물론 아버지인 박현상도 이 사실을 알고는 있었다. 그러나 앞으로 벌어질 일을 예상하고 아무런 조처도 취하지 않았다.

“드디어 도착했군. 어서 내리도록 하세!”

생도 대표가 된 박은찬이 집에서 가져온 짐을 짊어지고 가장 먼저 하선을 준비하였다. 그러자 벌떼처럼 달라붙은 생도들이 그에게 아부를 하며 친한 척을 하였다.

“배에서 시달리느라 몸이 찌뿌드드했습니다. 내리자마자 술이라도 한 잔 하시죠.”

“어허, 입학 행사를 다 치르고 휴일이 시작될 때 마셔야 하지 않겠나?”

적당히 모범적인 척을 한 박은찬은 이 지역의 술집이 러시아의 영향을 받아 독한 술을 잘 마신다는 정보를 이미 입수해 두었다. 그러나 항구로 다가설수록 사람의 소리가 들려왔다.

북외항의 항구에는 수많은 배가 들어차 있었다. 목선부터 소형 증기선까지 가리지 않고 집결한 배에서 내린 승객들이 이미 항구를 가득 채울 지경이었다.

박은찬은 항구에 내려 주변을 돌아보았다. 적게 잡아도 만 명이 넘을 사람들이 우글거리며 자신이 모르는 언어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북외 항에 이렇게 사람이 많다고? 안쪽의 쌍성자에 사람이 많이 사는데.”

이들의 정체는 삼강평원을 개척하기 위해 불러들인 일본 사람들이었다. 북방의 혹한에 견디기 위해 수많은 물자를 배부 받으며 질 좋은 소를 한 마리 이상 지급받기까지 하였다.

“이래서야 여기서 뭘 즐길 수는 있겠나…….”

“잠시 대화를 나누고 돌아왔습니다. 절반은 북방으로 이주하여 미리 개척된 땅에 집을 만들고, 나머지 절반은 여기서 대기하면서 겨울이 지나갈 때까지 버틴다더군요.”

이토 히로부미의 이야기를 들은 박은찬은 눈을 찌푸리며 주변을 바라보았다. 그의 말대로 주변의 임시 가건물은 물론 상가까지 일본 이주민들이 들어차 있었다.

“뭐? 겨울이 지나갈 때까지 북외항 일대에서 버틴다고? 집은?”

“상가를 임대해서 거처로 삼는다 하였습니다. 지금도 상가에 들어가고 있지 않습니까?”

박은찬의 첫 계획, 쌍성자에 유행하는 러시아식 술을 섭렵하려는 계획이 무산되었다. 더군다나 이토록 많은 사람이 머무르면 밖에 나가서 좀 놀아보려는 두 번째 계획도 무산되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은찬의 희망은 꺾이지 않았다. 이 사람들도 몇 개월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빠져나갈 것이고 그때쯤 되면 마음대로 놀면서 호화롭게 지낼 수 있으리라.

“생도들 왔는가! 새 사관학교는 시가지 외곽에 있으니 어서 이동하도록 하게!”

지역을 관할하는 장교가 생도들을 인솔하였다. 자연스럽게 준비된 말에 오른 생도들은 주변 경치를 보면서 하늘로 솟구치는 매연을 확인하고 큰 소리로 외쳤다.

“이야 여기에 공장이 다 들어서네. 인훈 생도님, 저거 무슨 공장일까요?”

“군수품 공장이겠지. 아니라면 도자기 공장이라도 차렸을 것 같은데?”

시베리아를 통해 간접 통치한 러시아 제국과 달리 대한제국은 1년 만에 공장을 설립하고 수많은 노동자를 배정할 여력이 있었다.

울창한 삼림 사이로 난 길을 1시간가량 이동하자 공장 인근을 호위하기 위한 군부대, 그리고 더 깊은 숲속에 러시아군의 요새를 개조하여 만든 사관학교가 등장했다.

“내일 아침에 입교 환영식이 있으므로 잠시 휴식을 취하도록! 주변을 돌아다니되 너무 멀리 가지는 마라! 호랑이가 출몰하는 지역이다!”

벽돌로 축조한 기숙사는 제법 널찍한 개인실과 주철로 만든 난로까지 있었다. 바닥 난방을 가동하더라도 지나치게 추울 경우 난로를 사용하라는 배려에 가까운 조치였다.

생도들은 자신에게 배정된 개인실로 들어가 짐을 풀어놓고 주변을 순찰하였다. 광활한 자연을 즐기고 한가한 생활을 즐기려던 박은찬은 불편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생각 외로 문제가 많아도 나쁘지 않아. 여기서는 교육도 그리 어렵지 않을 게 분명하잖아.”

한양의 사관학교에서는 기라성 같은 인재도 많고 다들 가문이 융성하여 경쟁자가 많았다. 반면 이 시골 촌구석에서는 자신이 사관생도 대표를 거머쥐고도 남을 자신이 있었다.

이들이 박은찬 자신을 섬기는 순간부터 이토 히로부미의 비중은 한없이 낮아지리라.

박은찬은 저 멀리서 허둥거리는 이토 히로부미를 보면서 중얼거렸다.

“네 정성은 갸륵하다만 안 될 일이지. 근처에 일본인들이 많이 왔는데 이들이나 돌봐라.”

그렇다 해도 이토 히로부미를 아예 버려둘 생각은 없었다. 가끔 일본에서 이주한 사람들을 돌봐주면 체면도 챙기고 놀 기회도 얻을 수 있었다.

마침내 다음 날이 밝았다. 생도 전용 식당에서 식사를 즐긴 박은찬은 의복을 정돈하고 새 사관생도 생활의 막을 올렸다.

군가 제창이 끝난 뒤 장성 특유의 제복을 입은 젊은 남성이 단상에 올랐다.

그의 얼굴을 어디선가 본 경험이 있는 박은찬은 인사를 듣고 의외의 인물임을 알아차렸다.

-쌍성자 분원에서 생도 생활을 다시 시작한 것을 진심으로 환영한다. 본관은 얼마 전 참장(參將 - 소장 계급)으로 부임한 어재연, 자는 성우(性于)라 한다.

어재연의 명성은 나름 널리 퍼져 있었다. 조선-청 전쟁 이후 미국에 파견되어 새로운 전술을 창설한 장성이자 차기 대한제국군의 수뇌부로 자리매김할 인물이었다.

그런 어재연의 등장에 박은찬의 표정이 뒤틀렸다. 그가 생각한 쌍성자는 후방의 안락한 생산 및 보급기지이지 이런 명장이 올 장소가 아니었다.

“성우 참장님이 왜 오셨지? 저분은 여기 있을 사람이 아닌데?”

“뭐가 어떻게 되든 간에 최신 전술을 가르치러 오신 것 같습니다.”

“그 전술은 우리도 배우고 있잖아.”

잔뜩 흥분한 이토 히로부미와 달리 박은찬은 눈을 가늘게 뜨고 단상을 바라보았다. 어재연은 잠시 숨을 고른 다음 입학 연설을 계속하였다.

-현재 청나라 내부의 정세가 불안하다. 첩보에 의하면 삼십 만에 달하는 대군을 육성하고 병장기를 생산하며 민란을 착실히 제압하고 있다 한다. 자고로 대륙이…….

생도들 대다수가 알고 있는 이야기가 계속되었다. 박현상을 통해 정보를 입수한 박은찬 입장에서는 청나라의 행동은 뒤늦게 정신을 차린 졸부의 행적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 거대한, 추산 인구가 4억 명 이상이며 매년 인구가 400만 명 이상 증가하는 상황에 대한제국의 2배에 불과한 30만 명의 병력을 양산한 것이 전부였다.

지난 전쟁을 기억하는 대한제국의 사관생도들은 코웃음을 치면서 친구들에게 중얼거렸다.

“전쟁이 벌어지면 또 성벽에 똥칠을 하고 속옷이나 매달아 대겠지.”

“이번에는 똥이 모자라서 오줌을 바를지도 몰라.”

“너무 더러운 내용이라서 우리 교육에도 검열하지 않았나.”

이토 히로부미는 교육에서 배우지 않은 내용이 나오자 고개를 돌려 박은찬을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무뚝뚝한 표정으로 질문을 하였다.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청나라는 아편도 좋아하고 똥도 좋아하는 똥 같은 나라인지요?”

“과장 없는 진실이야. 마침 청나라 이야기를 하시는군.”

어재연은 분위기를 환기하기 위하여 자신이 경험하였던 청나라의 이야기를 하였다. 생도들 대다수가 이야기를 듣자마자 웃음을 머금기 시작했다.

-본관이 청나라에 다녀왔을 때의 이야기를 하겠다. 철도 측량을 위해 산속에 들어가 군불을 피웠는데 하필 양귀비밭이 근처에 있었지.

-당시 주변 관리들은 무뢰배들을 포섭해 양귀비를 길러 아편을 채취하였다. 그 무뢰배들이 양귀비밭을 태우는 것으로 오인해 미치광이처럼 달려든 적이 있다.

-알고 보니 무뢰배도 아니고 그 고을에 있던 포졸과 지주들 휘하에서 힘 좀 쓰는 놈들이더구나. 놈들에게 유리한 고지를 점하고 총을 쏘아 붙이니 꽁지 빠지게 달아났다.

생도들 모두가 웃음을 참다가 억누르지 못하였다. 산기슭에 양귀비밭이 있는 것도 우스운 일이고, 그 양귀비밭을 지방 관리들이 기르는 것도 우스운 일이었다. 심지어 위대한 대한제국군에게 다짜고짜 덤벼들어서 죽음을 자초하니 더더욱 우스운 일이었다.

반면 이토 히로부미와 몇몇 일본 유학생들은 눈에 핏대를 세우고 침묵을 지켰다.

“이 개놈의 새끼들…….”

“진정해. 그런 놈들을 격퇴한 이야기 아니야.”

생도들의 분위기를 확인한 어재연은 다시금 칼집을 바닥에 내리쳐 쿵 소리를 내었다. 그러고는 방금 전까지 웃던 표정이 없이 진중하게 말하였다.

-당시에 양 정교님, 지금은 나와 같이 참장이 되신 분과 내 휘하에 있던 병력 가운데 한 명이 죽고 셋이 중상을 입었다.

-고작 불량배에 총을 쥐여주었는데도 이런 일이 벌어졌다. 하물며 삼십만 대군을 육성해 낸 청나라가 변란을 일으키면 이 나라의 백성이 얼마나 희생되겠는가?

생도들은 사관학교에 입학할 당시 일종의 충성서약, 국가를 위해 장교로 활약하겠다는 서약을 하였다. 그 서약의 의미가 어재연의 경험을 통해 점차 크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물론 상대가 변란을 일으키면 응당 이 나라를 보호하기 위해 응수해야 한다.

-그 변란에서 조금이라도 희생자를 줄이려면 치졸하고 비겁하며 일방적인 싸움을 벌여야 하지 않겠느냐. 이 쌍성자 사관학교 분원은 그 비겁한 싸움을 위해 만들어졌다.

어재연이 손짓을 하자 풀을 엮은 옷, 대한제국에서 임복(林服)이라 부르는 복장을 입은 병사들이 밖에서 들어왔다. 박은찬은 이들의 정체를 똑똑히 알고 있었다.

“저거 저격병 아니야? 저격병 병과와 관련된 훈련은 우리가 딱히 안 받는데?”

“오오! 저게 수풀 속의 호랑이라 불리는 저격 병사로군요!”

박은찬의 눈동자가 흔들리며 주변을 빠짐없이 확인하였다. 생도들이 기대와 흥분 그리고 앞으로의 고난을 예상하는 가운데, 어재연은 단상에서 내려와 하나하나의 병기를 소개했다.

“이 쌍성자에서는 개량한 갑식, 진식 소총을 시작으로 수많은 병장기를 다룰 예정이다. 이 병기들은 내후년 초, 1859년 4월부터 기존 병기를 대체하여 배부될 예정이고.”

어재연이 손짓을 할 때마다 방수포에 감싸져 있던 신병기들이 드러났다. 각 구경의 암스트롱포는 물론이요 아직도 기밀 사항에 해당하는 개틀링 건을 비롯한 무기이다.

“그 병기를 너희 장교들이 일선 병사들에게 교육시킬 예정이다. 그럼 대다수의 병기 사용법과 관리법을 전수 받아야겠지?”

박은찬은 크고 아름다운 40파운드 암스트롱 포, 대한제국 공식 명칭으로 30근 후미장전식 화포를 확인하고 질겁하였다. 이런 거대한 포를 다루는 과정 자체가 고통스러운 일이리라.

그에게 남은 최후의 보루는 교육 시간이었다. 엄정한 사관학교의 교육 체계를 생각하면 이런 병기에 대한 교육은 많이 이수하지 않으리라. 그런 기대를 하였다.

“또한 이 쌍성자 사관학교에는 현직 장교들, 심지어 장성들까지 방문하여 신병기에 대한 사용법을 익힐 것이다. 이들이 교관 역할이 되어 실전에 필요한 사항을 전달하겠지.”

그 기대조차도 무너졌다. 말 그대로 학문 교육과 실전 교육을 병행하는 최악의 장소가 이 쌍성자 사관학교가 아닌가.

어재연은 그나마 희망을 보여주듯이 손가락을 하나 들고 말하였다.

“대신 이 사관학교는 일주일에 닷새만 수업을 실시한다. 기밀 유지를 위해 본국에 돌아가는 날은 설날과 추석으로 제한되는 것을 고려한 혜택이지.”

이틀의 휴일조차 박은찬에게는 끔찍한 일의 연속이리라. 이토 히로부미의 기준점이 같은 생도조차 아니고 현직 장교로 올라간 순간부터 매 주말마다 지옥을 경험할 것이다.

박은찬의 내장이 실시간으로 뒤틀리는 반면 이토 히로부미는 기대감에 부풀어 올랐다. 그는 대열 맨 앞에서 어재연을 향해 오른팔을 들고 목청은 높여 질문을 하였다.

“사관생도 이등박문 질문이 있습니다! 저를 비롯한 일본 출신이 이 무기를 쓰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좀 기다리면 어떠한가? 몇 년이 지나면 신형 병기도 일본에서 자연스럽게 사들이게 될 터. 일본으로 돌아가 장교 생활을 하며 무기를 다루도록 하게.”

“대한제국은 청나라와의 일전을 벌일 국가가 아닙니까! 저를 가르쳐주신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서 다음 변란에 대한제국의 편을 들어 참전하고 싶습니다!”

넉살 좋게 웃어넘기려던 어재연조차 심각한 표정으로 이토 히로부미를 바라보았다. 진심이냐는 듯이 고개를 까딱거리며 눈을 가늘게 뜨고 바라보아도 그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결국 어재연은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이토 히로부미의 어깨를 두드리면서 길을 마련해 주었다.

“이토록 열정이 넘치는 사관생도가 있을 줄이야. 정 그렇게 원한다면 졸업 시험을 이수하고 대한제국에서 몇 년 근무하다 돌아가도록.”

“으아악! 정말 감사합니다!”

흥분을 주체하지 못하여 목소리가 갈라지고 입에 게거품을 문 이토 히로부미를 바라본 박은찬은 이마를 감싸 쥐며 앞으로의 고난을 염려하였다.

그 고난은 보름의 적응기간 뒤 현실로 다가왔다. 평상시에는 각종 군사학과 필요 학문을 이수하고 제반 지식을 쌓아나가는 교육에 또 다른 실질적 교육이 추가되었다.

“지금부터 삼십 근 후미장전식 대포의 분해 결합 시험을 실시한다!”

분해 결합 시험을 위해 포 방열 훈련이 먼저 이루어졌다. 거대한 대포를 옮기느라 힘이 빠진 박은찬의 손이 다시금 움직였다.

머리통 크기의 폐쇄기를 낑낑거리며 결합한 박은찬은 사력을 다하여 장전과정을 이행하였다. 장교들은 이 사이를 오가며 생도들을 닦달하였다.

“백 번 글로 익히는 것 보다 열 번 분해 조립을 하는 것이 빠르다! 손을 놀려라!”

-끄아아악 내 손가락!

폐쇄기를 닫다 손가락이 부러진 생도가 비명을 지르며 의무실로 이송되었다. 평범한 생도는 이 정도로 해도 만족하였는데 단 한 명은 특별 대우를 받았다.

교관 역할을 자처한 현직 포병 장교들은 생도들 가운데 박은찬에게 집요하게 달라붙어 고함을 쳐댔다.

“손이 느리다! 박 생도!”

“열심히 하겠습니다아아아!”

그는 조선-청나라 전쟁부터 포병으로 참가한 병사 출신이었다. 가뜩이나 권위 넘치고 가혹한 프랑스의 군사 교육을 오귀스트 마르몽을 통해 이수 받은 사람이기도 하였다.

마르몽에게 귀족적 소양을 지니라는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었다. 그런 이들은 박현상의 아들 박은찬이 타인의 모범이 되기를 간절히 원하였다.

이 뒤틀린 애정은 끝없이 이어졌다. 전직 포병은 물론이고 그루시에게 기병 교육을 받은 장교들조차 박은찬을 위하여 더욱 큰 애정을 퍼부어주었다.

“박 생도! 기병의 모범이 무엇인가!”

생도들 모두가 가혹한 기병들에게 시달렸으나 박은찬은 더더욱 가혹하게 시달렸다. 이들은 박은찬이 자신들의 기병 돌격을 모두 배우기를 기대했다.

당연히 박은찬이 탄 말의 앞, 뒤 그리고 양 측면을 기병 장교들이 에워쌌다. 억지로 말의 속도를 높인 채 박은찬은 온몸이 휘둘리는 와중에도 목청을 높여 기병의 의무에 대해 논했다.

“악! 기병의 모범은 적진을 향하여…….”

한 달 동안 쏟아진 애정은 많은 것을 변하게 만들었다. 가장 먼저 박은찬에게서 콩고물을 얻어먹으려던 생도들이 이 애정에 간접 피폭당해 박은찬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주말에 나가서 쉬려 해도 대부분의 상가가 휴업 상태였다. 이틀의 휴일 동안 술집을 찾아 일대를 헤맨 박은찬은 방 안에서 안주도 없이 보드카로 병나발을 불 수밖에 없었다.

“내가 이러려고 온 게 아닌데!”

오늘도 끝없이 시달리다 휴일이 찾아왔다. 다시 이틀 동안 외로운 휴식을 맞이하게 된 박은찬은 숨이라도 쉬려고 그 부족한 지혜를 쥐어짜 냈다.

그러던 중 게시판에 새로운 쪽지가 달라붙어 있었다. 놀랍게도 이 지옥 같은 사관학교를 며칠이라도 벗어날 다른 길이 제시되어 있었다.

<러시아 제국의 이주민을 닷새간 관리할 생도는 보고하도록, 가산점 부여>

러시아 이주민이건 뭐건 이 감옥 같은 사관학교를 벗어날 수단으로 인식되었다.

박은찬은 이토 히로부미를 꼬드겨 이 이주민 관리활동, 일종의 체험학습 겸 봉사활동을 신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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