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6화
20장 11화 러시아 혁명(3)
보름의 시간을 두 명의 혁명가가 알뜰하게 활용하였다. 마르크스는 자신이 잘하는 인맥 형성과 토론을 위하여 인근의 지식인들을 만나 여러 대화를 나누었다.
엥겔스는 말재주가 없는 편이나 경제학적 지식이 풍부하였다. 그는 마르크스와 달리 러시아의 국가정책과 경제구조를 확인하고 정책의 수정 방향을 모색하였다.
닷새가 지날 무렵, 마르크스는 고주망태가 되어서 다리를 휘청거리며 객실로 들어왔다.
그는 대한제국에서 배운 대로 술을 깨려고 꿀물을 한 잔 타서 들이켜고는 고함을 쳤다.
“이 머저리 놈들! 지식인이라는 놈들이 무비판적으로 차르의 의견을 수용해!”
“무비판적으로 차르의 의견을 수용한다고?”
“내가 살다 살다 이런 머저리들은 처음 봤어! 거의 뇌 구조가 해면(스펀지) 같은 놈들이야! 머리통을 뜯어보면 차르에 대한 충성심이 뇌의 대부분을 차지할 거야!”
이 시대 러시아는 차르의 은총 아래에 굴러가는 국가였다. 차르는 절대적인 존재이며 신의 대행자이고 모든 러시아인의 아버지였다.
반정부 인사라 이미 시베리아에 유형당한 부류의 사람이라면 모를까 지식인조차 이 의견에 동조하였다.
마르크스는 자신의 오판에 울분을 토하며 말하였다.
“각계각층의 지식인을 설득하여 차르의 뜻을 되돌리려 하였는데 설득 자체가 안 통하잖아!”
“그러면 다른 방법을 택해야겠군. 카를 자네가 사람을 설득하려는 사이 나는 농노 해방령의 근거가 되는 각종 자료를 정리하였다네.”
엥겔스가 정리한 자료는 수백 페이지에 달했다. 마르크스는 그 자료를 확인하고는 술기운이 올라와 헛구역질을 한 다음 손사래를 치면서 말하였다.
“내일…… 내일 아침에 이야기하지. 지금은 죽을 것 같아.”
다음 날, 마르크스는 숙취에 절어버린 채로 엥겔스의 방으로 향하였다. 밤을 지새우며 정책을 정리한 엥겔스는 바로 설명을 시작하였다.
“숙취가 심한 것 같은데 내용을 잘 이해할 수 있겠나?”
“가급적이면 간략하게 요약해 주게.”
“알겠네. 일단 농노 해방령의 골조는 토지의 유상 분배야.”
수천 개에 달하는 수치가 엥겔스의 손으로 정리되었다. 모든 설명을 들은 마르크스가 이해하였다며 고개를 끄덕이자 엥겔스는 마지막 설명에 돌입하였다.
“가장 큰 문제는 복리로 적용되는 이자율과 말도 안 되는 토지 가격일세. 표준 거래가격과 비교했을 때 최소 이십 퍼센트에서 최대 백 퍼센트가 비싸더군.”
이쯤 되면 마르크스도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언젠가 일어났을 일이었다는 말투로 이번 사태를 평가하였다.
“농민 봉기는 반드시 일어날 일이었어. 지부상소가 그 불길을 일찍 태워 버렸을 뿐이야.”
봉기를 막는 방법은 농노 해방령의 완전한 수정 외에는 없었다. 마르크스는 아직도 숙취를 앓는 머리로 천장을 바라보다 해장술로 위스키를 한 잔 마시며 말하였다.
“뭐 이딴 개혁을 생각하지? 생산성 개선을 위해 이딴 머저리 같은 짓을 한다고?”
“내 말이 그 말일세. 생산성이 올라가기는 하는데 부작용이 너무 심해.”
엥겔스가 보기에는 장기적 생산성은 분명 증가할 예정이었다. 자영농과 소작농의 의욕 차이를 감안하면 최소 20% 이상 생산력이 증가하리라.
그 생산성 증가를 위해 너무 큰 대가를 치르고 있었다. 마르크스가 지나가듯이 ‘대한이라면’이라는 말을 하자 엥겔스가 손뼉을 치며 의견을 내놓았다.
“생각해 보니 앞뒤가 안 맞지 않나? 생산성을 개선할 목적의 개혁이라 말했는데 농업 생산성 개선의 가장 모범적인 사례를 아예 무시했는데?”
“농업 생산성 개선의 가장 모범적인 사례?”
“농업의 부족한 생산성과 세금 제도를 동시에 개선하는 방식. 대한이라는 해답이 있지 않나.”
마르크스는 엥겔스의 의견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국가마다 여러 요소의 차이가 있으나 대한제국의 농업 개선 방식은 여러 문제점을 한 번에 해결하는 수단이었다.
비료 공급을 명분으로 토지를 다시 측량한다. 이 과정에서 발생한 행정 소요를 지속적으로 유지하며 비료 공급과 새로운 조세제도를 도입하는 과정을 거친다.
최종적으로 토지 배분, 측량, 지방 행정력 그리고 새로운 조세 제도를 비료 분배 과정으로 강제 적용한다.
마르크스는 여기까지 생각한 다음 턱에 손을 괴고 답하였다.
“가장 좋은 방식이기는 하지. 물론 러시아 제국의 행정력은 바닥을 치고 기본적인 토지 면적 또한 대한제국보다 훨씬 넓은 편이야.”
마르크스는 이미 엥겔스의 설명을 듣고 러시아의 토지 제도의 문제점을 알아차렸다. 그러고는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가장 큰 차이에 대해 논하였다.
“대한제국은 상위 오 퍼센트의 지주가 토지의 절반을 소유하였지. 러시아는 상위 오 퍼센트의 지주가 토지의 팔십 퍼센트를 소유하고 있어. 이 차이도 감안해야지.”
“개혁 기간을 대한보다 길게 하거나 농민에게 비료 가격을 더 많이 부과시키는 것으로 해결할 수 있겠지. 특히 인산 비료는 수에즈 운하를 통해 꽤 싼 가격에 끊어올 수 있을걸?”
이 외에도 수많은 농지 개혁 방안을 논의하였다. 그러나 둘이 머리를 맞대어도 러시아는 생산성 개선이라는 두리뭉실한 말로 모든 일을 대충 처리하려는 것 같았다.
마르크스는 반사적으로 파이프 담배에 불을 붙이고 한 모금을 빨아들였다. 그러고는 엥겔스에게 돈을 얻어서 화려한 생활을 즐기던 옛 모습을 반성하듯이 말하였다.
“꼭 예전의 나 같군. 앞뒤 생각도 안 하고 두서없이 채무를 뒤집어쓰고 엥겔스 자네에게 달라붙어서 언젠가는 다 갚아주겠다고 하지 않았나.”
“어이구, 나이를 먹고 제정신을 차리긴 했나 보군. 남은 이천 파운드는 언제 갚을 건가?”
서적으로 벌어들이는 인세와 자신의 생활수준을 점검하던 마르크스는 난처한 듯이 계속 담배를 피워댔다.
엥겔스가 슬쩍 몸을 기울이자 그는 억지로 웃으면서 답하였다.
“러시아 제국 방식대로 하자고. 오십 년 동안 분할로 납부하겠네.”
“이율은 육 퍼센트 복리로 할까?”
“그건 너무 잔인하지 않나! 자네는 공장을 굴리는 부르주아로서 나와 같은 사상가의 인성 함양을 도와줄 의무가 있어!”
“도와주기는 개뿔. 내가 아무리 공장을 굴려도 설비 도입과 인력 보충…….”
엥겔스는 갑자기 말을 멈추고 생각에 잠겼다.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그는 마르크스를 보면서 말하였다.
“애초에 농업 생산성 개선이 아닌 생산성 개선이라고 공표를 했잖아. 이놈들 생산성 개선을 위해 공장을 만들어 내려 하는군!”
“그건 뭔 개풀 뜯어 먹는 소리인가? 식량 수출국인 러시아 제국이 농업 구조 개선도 안 하고 공장부터 만들어내? 그 돈은 어디서 만들어내고?”
“농노를 착취해서 만들어내겠지! 그러니 강압적으로 정책을 추진하는 걸세!”
엥겔스는 종이에 러시아 제국의 자금 흐름을 그려냈다. 상식적인 토지 분배를 위하여 정부의 토지 구매를 표준지가(地價)로 산정하고 이율은 단리 1%로 설정했다.
여기에 뛰어난 경제학자 특유의 감각으로 감가상각이나 자금 경색을 비롯한 수많은 요소를 더해 나갔다. 계산 결과 러시아 정부는 2억 루블 정도의 이득을 보았다.
“이 정도 이득이면 크림 전쟁으로 인한 인플레이션도 잡아낼 수 있고 내부 자금 사정을 융통하기에 적당한 수준일 걸세. 장기적으로 보면 조금의 이득을 보긴 하겠지.”
엥겔스가 계산한 자금 흐름은 상식적인 수준이었다. 마르크스는 계속 공식을 적어나가는 엥겔스를 보면서 다시 질문을 하였다.
“현실은 이율이 복리 육 퍼센트요 토지 가격도 높지. 그럼 얼마의 이득을 보겠나?”
“토지 가격을 표준 지가에서 적게는 이십 퍼센트, 많게는 백 퍼센트 이상 부풀렸지 않나. 대충 계산해 보면 정부의 이득은 십억 루블, 최소 일억 파운드에 달할 걸세.”
러시아 제국은 농민을 철저히 착취하여 50년 동안 연간 이백만 파운드를 꾸준히 착취할 체제를 갖추었다. 마르크스는 여기에 자신의 이론을 도입하였다.
“이 정도면 구조 개선을 안 하고 공장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거야. 매년 이백만 파운드의 돈이 농촌에서 쏟아져 나오면 채권을 이천만 파운드 정도 판매해도 문제가 없을 것 같군.”
경제학자 엥겔스의 계산 결과 아래에 마르크스가 인적 자원의 흐름을 적어나갔다.
“대한은 어느 정도 국가 체계를 정상화한 다음 행정력을 변형하여 교육과 기반 시설 관리에 손을 댔었지. 그러한 관리가 없다면 결국 농촌 유민이 양산될 뿐일세.”
“카를 자네의 말이 맞아. 그 미어터지는 인구들은 결국 도시로 올라오겠고.”
“그럼 이 원시적인 봉건 사회에서 공장 노동자로 착취를 당하겠지! 이래서 차르가 절대로 타협을 보지 않겠다고 선포한 거야!”
알렉산드르 2세의 원대한 계획은 공업화였다. 그 과정에서 러시아 제국의 체질을 개선할 수 있으나 농노들은 50년 동안 착취를 당할 신세가 되었다.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착취를 당한 농노들은 결국 자신의 농노 지위를 포기하고 토지를 내놓으리라. 그렇게 되면 도시로 밀려 들어와 값싼 노동력으로 소모될 것이 뻔했다.
둘 다 그런 방식으로 도시로 올라온 노동자들의 처우를 염려하였다. 영국이나 프랑스 같은 열강들은 지속적으로 근로기준법과 노동법을 고쳐나갔다.
“영국에서도 공장 노동자들이 제대로 대접을 받을 때까지 수십 년이 걸렸는데.”
“엥겔스 자네 공장은 처음부터 대접을 잘해서 예외 사항일 뿐이지. 초창기 공장은 생지옥이나 다름없었어.”
이미 영국에서 20년 전에 벌어진 일이 재현되리라.
공장에서 모두가 가혹한 착취를 당하고 팔다리가 잘려나가도 돈 한 푼 받지 못한다. 설령 몸이 멀쩡해도 병에 시달릴 예정이다.
영국조차도 인구를 감당하지 못하여 기숙사에 사람을 쑤셔 박았는데 러시아 제국 따위가 제대로 된 기숙사를 만들 리가 없었다.
비위생적으로 부대끼는 사람들 사이에 전염병이 창궐하리라. 의료 체제도 엉망이라 시신이 수없이 쌓이고 그 자리를 다른 사람들이 메우리라.
가장 큰 문제는 이런 산업 혁명을 차르가 주도한다는 사실이었다. 신의 대행자이자 모든 러시아 제국 백성의 아버지인 차르에게 어느 누구도 반발하지 못할 것이다.
“영국에서는 노동 쟁의가 발생하면 정부 감찰관이 의회까지 이 안건을 보고했지. 눈 가리고 아웅 식이더라도 결국 수십 년의 투쟁 끝에 법이 만들어지고 권리가 보장되었어.”
“러시아에서는 지부상소를 실시한 자네 제자들처럼 모조리 모가지가 잘릴 거야. 그리고 아예 없는 사람이 되어서 대충 암매장당하겠지.”
마르크스는 어느새 파이프 담배에 다시 불을 붙이고 엥겔스는 위스키를 담은 잔을 건넸다.
둘은 잔을 마주친 다음 앞으로의 계획을 수립하였다.
“또 다른 독재자가 나올지도 모르지만 답이 없어. 이번 농촌 혁명을 성사시켜야 하네.”
“맞는 말이야. 또 다른 독재자는 최소한 농민 출신이라 말은 잘 듣지 않겠는가.”
“프리드리히 자네의 예상과 달리 정말 농민이 주도하는 공산국가가 만들어질지도 모르지.”
두 혁명가는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궁전 안에서 며칠에 걸쳐 대책을 수립하였다.
여러 경제적 여건, 계층의 상황 그리고 러시아 제국의 구조적 약점이 분석 대상이 되었다. 그들은 마침내 러시아 제국의 가장 큰 약점을 찾아냈다.
“지방에 토지를 가진 부재지주들이 가장 큰 약점이군. 채무가 총자산의 절반 이상이라?”
“카를 자네가 약점을 노려야 하네. 지방 부재지주들이 파산하면 토지를 분배하는 계획 자체가 헝클어질 거야. 이 타격이 연쇄적으로 러시아 제국의 상층부에 치명상을 입히겠지.”
“아예 국가 금리를 높여버려서 토지 가격에도 손을 대면 더 좋겠는데.”
“그 정도로는 모자라. 돈줄을 틀어막는 것도 방법일세.”
이번 혁명은 피와 폭력으로 점철된 폭력이 아닌 다른 방식의 혁명이 필요하였다. 설령 농민 반란에 성공해도 차르의 목이 잘릴 일은 없었다.
기껏해야 차르의 권리를 빼앗고 공산주의의 논리로 돌아가는 국민회의를 만드는 것이 전부이리라.
마르크스는 이 혁명을 완수하기 위한 수단을 제시하였다.
“가장 먼저 할 일은 지방 농노의 파업이야. 십 년 정도 일을 안 하면 부재지주들이 연쇄 파산하고 이들의 채권자인 국가와 고위 귀족들이 연쇄 도산할 걸세.”
“카를, 그러면 농민들이 굶어 죽거나 정부군에게 진압당할 텐데?”
“굶어 죽을 위기에 처할 때 항복하면 되겠지. 여기에 이율을 조금이라도 올리면 오 년 이내에 지주들이 연쇄 도산할 걸세.”
알렉산드르 2세의 무관용 정책 또한 도움이 되었다.
반역을 일으키면 무조건 시베리아 유형을 보낼 것이라 선언한 말을 떠올린 마르크스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했다.
“항복한 농노들은 시베리아 영구 유형을 당할 거야. 거기서 동쪽으로 가다 보면 대한의 동맹국 몽골이 나오고 더 동쪽으로 가면 대한의 영토가 나오지.”
“그럼 그 많은 러시아 농노들을 대한제국에 보내버리겠다고?”
“대한은 새 영토를 관리하기 위해 사람이 많이 필요할 것 같은데 한 오십만 명 정도 보내도 괜찮지 않겠는가?”
박현상은 자본가이며 공산주의 혁명의 적이나 민중을 끔찍하게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어디까지나 효율적으로 관리하는 방식을 추구하나 러시아보다 나은 형편이리라.
여기에 영국으로 돌아간 다음 러시아를 엿 먹일 방법도 있었다. 박현상에게 배운 방식대로 마르크스는 폭탄을 설치하고 도화선을 먼 곳에서 터트리려 하였다.
모든 내용을 정리한 마르크스는 농노들에게 보낼 편지도 마련하였다. 차르의 위대한 자비를 받아들여 시베리아 동부를 삶의 터전으로 삼아 계속 진출하라는 내용이었다.
“이 편지를 참전 용사들이라면 잘 해석하겠지. 동쪽으로 계속 진출하면 대한이 나오지 않나.”
“대한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했나?”
“모든 열강들에 대해 이야기를 했는데 대한 이야기를 왜 안 했겠나?”
예정대로 보름이 지났다. 알렉산드르 2세가 불편한 기색을 보이며 마르크스와 엥겔스를 소환하였고 둘은 극진한 예의를 갖추며 인사를 올렸다.
“저의 쓸데없는 강의로 차르께서 고난을 겪으셨습니다. 이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봉기를 일으킨 농노들에게 보여줄 서신을 작성해 보았습니다.”
“고작 서신?”
알렉산드르 2세는 편지를 읽으며 몇 번이고 코웃음을 쳤다. 그러고는 트집을 잡듯이 마르크스를 쏘아붙이기 시작하였다.
“반란을 일으킨 자들은 죄가 크니 유배를 자처하라? 여기에 동부 시베리아로 향하라?”
“자고로 한 번 일어난 불씨는 모래로 덮는다고 꺼지지 않는 법입니다. 유배당한 농노들이 혹한에 고통을 겪은 다음에야 차르의 자비하심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한 항목이 마음에 걸리는군. 저항하고 싶으면 계속 저항하라? 계속 나아가라?”
“자비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들이 존재할 겁니다. 농노들이 사라지면 이러한 극소수의 불순 종자만 남아 항거를 계속하다 형장의 이슬이 될 것이 아닙니까?”
알렉산드르 2세는 마르크스의 마음가짐을 인정하였다. 서신에는 ‘죄를 뉘우치라.’라는 내용이 가득 담겨 있었다. 가급적 죄가 클수록 동쪽으로 나아가라 하였다.
이 또한 그의 정책을 반영하는 결과물로 보였다. 의자에서 일어난 알렉산드르 2세는 마르크스와 악수를 나누었다. 그러고는 마지막으로 경고하듯이 말하였다.
“혹시나 이 서신을 받고도 항복하지 않을 수도 있는데.”
“적어도 거점을 버리고 도망치기는 할 것입니다. 개죽음은 모두 피하게 마련이죠.”
“기나긴 몰이사냥을 하라는 말이로군. 수습은 못 하여도 대처는 잘 해서 다행이네.”
마르크스의 사과를 받아들인 알렉산드르 2세는 대규모 토벌 명령을 내렸다. 이 명령이 마르크스의 속내임을 알아차린 사람은 러시아에 아무도 없었다.
아마 몇 년이 지난 다음, 농노들의 반란이 지리멸렬하게 이어지고 경제가 무너질 무렵에야 눈치를 채리라. 그러나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조용히 영국행 배에 몸을 올렸다.
영국으로 돌아온 마르크스는 다시 인맥을 동원하였다. 그는 처음에는 러시아의 화려한 궁정 생활과 차르의 위엄을 설파하는 칼럼을 작성하여 러시아를 칭찬하였다.
이후 신문 기사를 확인하고 모여든 귀족들에게 러시아의 현황에 대해 논의하였다. 이 과정에서 엥겔스의 인맥을 동원하여 은행가와 공장주들까지 참여하였다.
“러시아는 우리 영국을 따라 산업화를 추구하고 있습니다. 저 마르크스가 감히 말씀을 드리니 러시아의 변화를 우리는 반드시! 경계해야 할 겁니다.”
“우스운 소리를 하는군. 러시아 따위가 산업화를 추구해?”
“놈들은 제대로 된 물건도 만들지 못할 걸세. 어디서 농업국 따위가.”
사업가들은 물론 은행가들조차 마르크스의 의견에 코웃음을 쳤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부연 설명을 하였다.
“러시아의 월급은 하급 근로자 기준으로 백오십 루블, 아무리 높게 쳐도 이십 파운드가 안 됩니다. 우리 공장의 하급 근로자는 최소 오십 파운드를 받지 않습니까?”
“그 돈이면 영국에서는 굶어 죽기 직전까지 몰릴 신세인데?”
“여러분, 러시아는 곡물 수출국입니다. 지방 농민들이 일 년에 십오 파운드도 벌지 못하는 나라인데 하급 노동자는 농민보다 조금 더 버는 수준이 아닙니까?”
마르크스는 러시아의 상황을 조금 과장하여 설명하였다. 농촌에서 수없이 양산되어 도시로 몰려드는 인구, 한없이 값싼 물가, 그리고 너무나 싸구려인 인건비를 묘사하였다.
“우리의 공장에서는 점심마다 제대로 된 음식을 먹이고! 제대로 된 검진을 받으며! 안전을 보장하여야 합니다. 그러나 러시아는 어떠합니까! 그럴 필요가 있습니까?”
청중 모두가 마르크스의 말에 빠져들었다. 너무나 싼 인건비를 내세워 무차별적으로 공장을 굴릴 러시아는 영국의 생산품을 대신할 값싼 생산품의 생산지였다.
공장주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이며 이 의견에 동의하였다. 그러던 중 한 군부 인사가 자리에서 일어나 질문을 하였다.
“그럼 러시아와 또다시 전쟁을 일으키라. 뭐 그런 소리인가?”
“전쟁이되 경제 전쟁입니다! 앞으로 공장 설립과 관련한 채권을 십 년만 구매하지 말아 주십시오, 러시아 공장 투자를 십 년만 중단하여 주십시오! 그 돈으로 미국에 투자하십시오!”
마르크스는 아무 말이나 내뱉으면서 청중을 설득하였다. 조만간 미국에서 소와 말이 쏟아질 시대가 올 것이니 냉동선에 투자하라는 조언까지 하였다.
어차피 자신의 예측이 틀려도 욕을 한 번 먹으면 될 일이었다. 자신이 욕을 먹는 대신 러시아 제국이 경제적 위기에 처해 전복되는 사태를 원할 뿐이었다.
마르크스의 예상대로 러시아의 정책은 표류하기 시작하였다. 채권이 잘 팔리지 않아 억지로 이자율을 끌어올려 억지로 채권을 판매하기까지 하였다.
당연히 투자 금리도 상승하여 러시아의 전체적 금리가 솟구치기 시작하였다.
이 타격은 몇 년이 지나기도 전에 모조리 러시아 농노들을 옥죄는 지방 지주들이 떠안게 되었다.
“진압을 아주 잘하시는군. 아주 잘하고 계시니 마음이 놓여.”
경제적 연쇄 붕괴를 눈치채지 못한 알렉산드르 2세는 마르크스에게 감사 편지를 보냈다. 농노들이 마르크스의 편지를 받자마자 항복하여 스스로 유형을 자처한다는 말이었다.
물론 혁명을 지속할 핵심 인력인 참전 용사들은 농민들이 항복하는 사이 다른 지역에서 재차 참전 용사와 합류해 봉기를 이어갔다.
“일을 아주 잘하는군, 앞으로 십 년이나 버틸까.”
귀족들이 줄도산하고 경기 침체로 토지가격이 바닥으로 떨어질 것이다. 그러면 알렉산드르 2세가 제시한 토지 가격은 실질 가격의 4배 이상으로 솟구치리라.
결국 묵묵히 정책에 따르는 농노들조차 혁명에 동참하리라.
마르크스는 자신의 사형(師兄) 정도 관계인 박현상에게 서신을 보냈다. 앞으로 많은 농노들이 이주를 택할 것이니 잘 받아달라는 조언이었다.
박현상이 자신이 손을 댄 혁명에 어떤 평가를 보낼지도 궁금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