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2화
19장 3화 박람회 이후(2)
대한제국 박람회는 이제 민간에게 개방되었다. 한양 도성의 백성들도 입장료로 한 냥을 내고 하루 종일 관람하였으며 며칠에 걸쳐 아예 박람회장에서 사는 사람도 있었다.
“참 좋은 광경이야. 세상 어떠한 나라의 백성들이 궁궐에 마음대로 드나드나.”
나나 일준이 같은 고위 관료는 민간인 출입이 금지된 전각 위에서 이를 바라볼 수 있었다.
일준이는 내 말을 듣고는 맞장구를 치듯이 말하였다.
“혁명이 일어난 나라라면 드나들 수도 있겠지?”
“러시아 말이야? 거기는 정말 혁명이 일어날 수도 있겠어.”
마르크스는 나를 일종의 사형(師兄)으로 생각하였다. 솔직히 말해 현대에서 마르크스의 유물론을 기반으로 역사를 익힌 사람이라 이게 잘된 일인지는 모르겠다.
그는 편지를 보내며 자신의 행동을 알려주었다. 인도를 개선시키기 위하여 진정한 혁명이 시작될 장소로 러시아를 택하였고 전쟁 포로를 대상으로 강연을 실시하였다.
“운이 좋으면 마르크스의 강연을 들은 포로들을 중심으로 혁명이 시작될걸?”
니콜라이 1세가 화병으로 죽으면 후계자 알렉산드르 2세가 즉위한다. 이후 패전 충격과 개혁을 감안하면 정말 최초의 공산주의 국가가 세워질지도 모른다.
그게 현대처럼 독재자가 집권하는 국가가 아닌 이상적인 국가일지도 모르고. 물론 일준이는 코웃음을 치며 답했다.
“러시아같이 무식한 나라에서 민중 봉기가 일어나면 손쉽게 진압할 텐데? 강연을 들은 포로들을 죄다 잡아서 시베리아로 보내 버리겠지.”
“놈들 수준 생각하면 전쟁에 참전한 사람은 닥치는 대로 잡아들일 거다. 그러면 전쟁에 참전해서 차르를 위해 피를 흘렸던 사람들이 가만히 있을까?”
내가 만들어낸 비밀경찰, 전신과 언론을 통한 감찰제도는 꽤나 후대에 만들어질 제도다. 이걸 마르크스가 미리 터득한 덕분에 어설픈 비밀경찰 따위는 손쉽게 따돌리리라.
그 스승이 나라서 좀 문제기는 하다. 일준이는 잠시 머리를 굴리고는 러시아에서 벌어질 일을 나름 예측해 말했다.
“잘못하면 내전이 벌어질지도 모르겠는데.”
“그럴지도 모르고. 우리는 전쟁이라는 꽃놀이패에 적당히 개입하면 충분해.”
앞으로 꽃놀이패는 넘쳐난다. 남북전쟁도 그렇고 러시아 내전도 그렇고 훗날 청나라도 그렇지. 일준이는 눈을 빛내며 말했다.
“기회를 노려서 개틀링 건을 수출하면 어떨까?”
“그 거대한 물건 말고 좀 작은 걸로 수출해라. 내가 말한 모터 뺀 녀석은 만들고 있냐?”
“모터 없는 기계식은 일 초당 한 발, 기계식은 이미 일 초당 다섯 발을 발사할 수 있어.”
“청나라 군대가 불쌍하다.”
지금도 불쌍하긴 하지. 청나라 사람들은 영혼이 없는 경극을 계속 공연하였다. 그나마 프로이센이 유학생을 받아들이긴 했는데 20명 한정이라던가.
이미 대다수의 과학자들은 전 세계로 퍼져나가 자신의 발견을 자랑하였다. 남은 인물들은 외교관들인데 영국 외교관들이 내가 머무는 전각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어이구 손님 오셨네. 내가 여기 있어도 될까?”
“아주 민감한 이야기면 영국에서 눈치를 줄 거다. 염려하지 말고 있어봐.”
영국 외교관들은 박람회를 실컷 즐기고 왔는지 취발이 탈을 허리에 차고 검게 물들인 초립을 실크 모자 대신 쓰고 있었다.
이들은 방 안으로 들어와 얼굴에 금칠부터 시작하였다.
“완벽한 박람회입니다. 이보다 더 좋은 박람회는 영국 박람회밖에 없지요.”
“규모 면에서 말입니까 아니면 기술에서 말입니까?”
“그야 규모이지요. 기술은 저희가 그리 뛰어나지 않은 것 같군요.”
외교관들은 나와 인사를 나누고 일준이와 아예 악수를 나누었다. 그러고는 대한제국에서 보낸 국제 구호협회의 활약에 대해 칭찬하였다.
“크림 전쟁에서 병사들이 콜레라와 정체불명의 열병으로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닐슨 총장님이 이십 년 전에 발명한 경구수액이 콜레라에 특효약이더군요.”
“그것참 반가운 소식입니다. 그나저나 경구수액 제조 자체가 문제인데요.”
“그 정도야 손쉽게 할 수 있지요. 덕분에 최소 오만 명 이상이 목숨을 건졌습니다만…… 프랑스 측에서는 의료진의 대응이 늦어 사상자가 빗발치고 있습니다.”
정체불명의 열병은 크림 출혈열인데 대처방법이 없을 거다. 외교관은 괜히 한숨을 쉬면서 프랑스를 살살 돌려서 비난하였다.
“프랑스 놈들은 대처가 늦어서 베트남에서 들여온 설탕으로 경구수액을 만들어내더군요.”
“사실 제가 조언을 해보았습니다. 전쟁터에서는 언제나 달달한 것이 먹고 싶어지니까요.”
이건 내 조언이다. 내가 제과와 제빵에 취미를 들인 이유가 군대에서 단 것이 너무 먹고 싶어서였지.
그래서 베트남에게 대한제국의 군수 지원품을 보내며 설탕을 최대한 끌어다 보내라 하였다. 외교관들은 나를 자세히 살펴보다 맞장구를 쳤다.
“이것 참 혜안이 대단하시군요. 그러면 혜안을 가지신 박 후작님께 지금까지 본 이득을 좀 돌려드리겠습니다.”
영국이 먼저 이득을 돌려준다 말하고 있었다. 순간적으로 이 말을 듣고 정신이 혼란스러웠다.
영국의 외교정책이 변했는지 내가 너무나 흉악한 짓을 많이 해서 영국이 겁을 먹었는지 모를 일이다. 아무려면 좋으니 천연덕스럽게 대응하였다.
“우리 대한제국은 이번 전쟁에서 중립국입니다. 외교적 이득을 볼 수 없는 노릇이지요.”
“저희가 좋은 정보를 입수하였지요. 일본의 사쓰마라 불리는 지방 세력과 관련된 정보입니다.”
아직도 일본 정부에게 비협조적인 사쓰마 번과 관련된 내용이었다. 이토록 사쓰마가 비협조적인 이유를 거슬러 올라가면 내가 원흉이었다.
내 제안대로 아편 단속반을 보낸 것까지는 좋은데 단속 수위가 점점 높아졌다. 처음에는 거래한 사람만 몽둥이로 구타하다 결국 피를 보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사쓰마 번에 진입했을 때에는 돌입 직후 보이는 모든 사람을 썰어 죽이며 아편굴을 청소했다더라. 심지어 다이묘의 친척 가문까지 이 대상이 되어 가문이 풍비박산 나 버렸다.
이건 사쓰마 번의 잘못도 있으나 막부의 잘못도 커서 내가 차마 개입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에 영국이 발판을 마련해 주겠다고 제안하며 아예 서신을 건네주었다.
“정보는 우리도 입수하고 있습니다……. 이건 의외군요.”
“제법 쓸 만한 정보가 아닙니까?”
정보에 의하면 사쓰마 번은 막부와 척을 지고 대놓고 무기, 특히나 선박을 수입하였다. 이건 우리 정보부의 실수가 아니다.
이들은 아편이 퍼진 후유증으로 경계를 삼엄하게 하였다. 결국 일종의 정보 공백지가 된 지역이지.
그 개혁 가운데 한 가지 사항이 영국의 정보망에 포착되었다. 사쓰마 번은 영국에서 제조된 증기선을 사들여 이를 전력으로 삼으려 한다!
“이런 상황에서도 전함을 구매한다. 성능은 보잘것없어서 다행이군요.”
“한 번 구매하면 두 번이고 세 번이고 구매하게 마련이지요?”
“그렇지요. 압도적인 격차를 목격하지 않는 한 헛된 힘을 비축하겠지요.”
참 난감한데 개입하면 외교적 문제가 될 수도 있다. 영국 외교관은 이 상황을 절묘하게 노리고 좋은 제안을 하였다.
“우리 영국 해군이 올해 십이월에 우수리스크 일대를 공격하려 진군하고 있습니다. 이 함선의 시험 운항 시기를 노려서 협박 한번 해보시지 않겠습니까?”
영국이 제안하는 것은 일종의 나쁜 형사, 좋은 형사 작전이다. 영국 함대가 힘으로 사쓰마 번을 압박하면 대한제국이 ‘동맹 구원’이라는 명목으로 참가하는 작전이지.
이후 영국 함대와 적당히 협상을 하고 사쓰마 번을 막부의 일원으로 만들어 버리라는 소리이다. 대한제국 입장에서 사쓰마 번이 골칫거리라 좋은 제안이다.
일본에서 가장 외부와 접촉하기 쉬운 위치인데 막부에 반대해서 군사적으로 제압하기도 힘들다. 이렇게 해주면 나야 고마운 일인데 영국 측에서도 당연히 원하는 것이 있었다.
“사쓰마 지역이 일본 정부에 복속되면 법 하나만 만들어주십시오. 우리 영국이 일본에 합자 회사를 설립할 수 있도록 개방하는 법률 말입니다.”
“그 정도야 응당 해드려야지요.”
이번 거래는 제법 좋은 거래였다. 영국 입장에서는 일본에 빨대를 꽃을 수 있고 대한제국 입장에서는 머슴의 절뚝거리는 다리를 치료할 수 있다.
영국 외교관들이 악수를 마치고 나가자 일준이는 나와 방문을 번갈아가며 바라보면서 한소리를 하였다.
“이제는 강화도 조약처럼 협박까지 하시네. 나중에는 대체 뭘 하시려고?”
“이게 협박이냐? 세상을 인식시키는 과정이지?”
불합리한 조약이 아니고 그저 일본인을 개화시켜 우리의 머슴으로 삼는 거다. 나는 아주 떳떳하게 일준이에게 말했다.
“아무튼 난 잘못한 게 없다! 잘못은 다 영국이 했어!”
“솔직히 영국보다 네가 더 무서워. 영국도 지금 네가 무서워서 피한 거잖아.”
이건 너무 옳은 말이라 할 말이 없었다.
* * *
1853년 11월 말, 구마모토 항구에는 수많은 인파들이 몰려들었다. 이날은 사쓰마 번의 피와 땀 그리고 눈물로 구매한 배의 첫 시험 항행을 실시할 예정이었다.
다이묘를 비롯한 수많은 주요 인사들이 이 항행을 기념하려 항구에 모였다. 이들은 철갑으로 뒤덮인 배를 보며 눈시울을 적셨다.
“우리도 조선과 버금가는 거대한 철갑선을 사용할 수 있다니. 내 눈물이 다 나는군.”
“저도 그렇습니다. 이쯤 되면 조선을 능가할 수는 없어도 대응할 수는 있겠지요.”
“그놈의 당약(唐藥 - 아편)만 퍼지지 않았어도 삼 년은 빠르게 구매할 선박이었어.”
다이묘인 시마즈 나리아카라(島津斉彬)는 울분을 토하듯이 연기를 뿜어 올리는 증기선을 바라보았다. 그동안 수많은 고난을 겪으며 이 자리에 올라온 덕분에 감회가 남달랐다.
네덜란드의 상인과 기술자는 배 안에서 마지막 점검을 마치고 나리아카라에게 돌아왔다. 이들은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 다음 배의 상태에 대해 말해주었다.
“십 년이 조금 넘은 선박이라 내부는 멀쩡합니다. 모든 기자재를 정성껏 보수하였고 돛 또한 예비용으로 준비해 두었습니다.”
“수고가 많았네. 그동안 고생이 참으로 많았는데 며칠만 더 고생해 주게.”
“초기 고장이 발생할지도 모르니 당연한 일이지요.”
그는 네덜란드 기술자들과 악수를 나누고 눈앞에 있는 배, 첫 시험항해를 마치고 니혼마루(日本丸)라는 이름으로 명명될 배를 한동안 바라보았다.
이 배의 정체는 1840년에 영국에서 건함을 시작한 1,500톤급 증기선이었다. 목조 선박 외부를 얇은 철판으로 강화한 과도기적 군함이 될 물건이었다.
그러나 군함으로 쓸 수 없는 배가 되어버렸다. 네메시스 호의 침몰 이후 모든 철갑 증기선은 폭발력에 대응하기 위한 이중 외부 격벽 구조가 필요해졌다.
더군다나 구식 동력인 타륜(舵輪) 추진방식이기까지 하였다. 결과적으로 방어력도 군함에 미달, 기동력은 증기선 중 하위에 속하는 애매한 배가 되어버렸다.
“이 거대한 선박의 가격이 고작 은자 십오만 냥밖에 안 할 줄이야. 혹시 문제가 많은 물건을 비싼 값에 파는 건 아니겠지?”
결국 이 배는 애물단지 신세가 되어 이리저리 치이다가 일본에서 헐값으로 쓰이게 되었다. 네덜란드 상인들은 양심적인 가격에 이 배를 판매하여 당당하게 말했다.
“이 배의 본래 가격은 은자 오십만 냥이 넘었습니다. 운반비와 수리비 그리고 훈련비를 감안하면 십오만 냥도 싸게 판 것입니다.”
“예산 문제로군. 좀 더 제대로 된 배는 은자 백만 냥이 넘는다 하니 어쩔 수 없었지.”
사쓰마 번에서 제시한 은자 20만 냥 이하의 가격, 철판 외장재, 그리고 천 톤 이상의 배수량을 만족하는 군함은 이 배 하나 외에는 없었다. 사실 반쪽짜리 군함이지만.
이런 악조건이 겹친 배이다 보니 한계는 명확하였다. 범선을 상대로는 우위, 일반 증기선을 상대로는 열세 혹은 대등 수준에 불과하였다.
열강들의 전함 앞에서는 하루살이 신세나 마찬가지이지만 굳이 말할 필요는 없으리라.
모든 준비가 끝나고 해가 중천에 뜰 무렵 기적소리가 들려왔다.
-부우웅!
배에서 기관 예열이 끝난 신호를 알렸다. 나리아카라는 잠시 목을 가다듬고 명령을 내렸다.
“출항하라! 아리아케 해 내부를 한 바퀴 돌고 돌아오도록 하라!”
“명을 받들겠습니다!”
항구를 떠나 저 멀리 사라지는 배를 보며 나리아카라는 울컥 솟아오른 눈물을 닦았다. 그는 자리에 앉아 푸념하듯이 과거의 일을 털어놓았다.
“당나라 놈들이 약만 풀어놓지 않았어도 이 배가 두 척이 되었을 것인데.”
시마즈 가문의 가신 모두가 고개를 숙이며 나리아카라의 푸념을 받아들였다. 청나라에서 들어온 아편은 지난 7년 동안 사쓰마 번을 시작으로 일본 서부를 모조리 갉아먹었다.
첫 피해자는 운젠 산에서 일하던 광부들이었다. 이들은 진통제인 아편에 취해 일을 하다 죽어갔다.
그다음으로는 선물을 주고받으며 아편에 접촉한 각 가문의 하급 무사들이었다. 이들만 죽었다면 모르겠지만 이들의 가족들도 가산을 탕진해 거지 신세가 되었다.
가장 큰 타격은 젊은 인재들의 아편 중독이었다. 사이고 기치노스케(다카모리)를 필두로 한 쓸 만한 인재들이 아편 중독자가 되어 죽거나 폐인이 되었다.
“한 척은 내가 탑승하고 다른 한 척은 오쿠보 녀석이 탔으면 얼마나 좋을까.”
“가주께서는 이미 지나간 일에 마음을 더 이상 두지 마십시오.”
“기치노스케 녀석이 돌아오면 용서해 줄 생각이 있건만…….”
나리아카라를 비롯한 고위 인사들은 다 같이 한숨을 쉬며 죽거나 폐인이 된 젊은이들을 떠올렸다. 아편의 피해는 사쓰마 번에 깊은 흉터를 남겨 버렸다.
이 중 젊은 인재인 사이고 다카모리는 아편 단속이 시작되자 실종되었다. 가문에서 잘 키우던 인재인 오쿠보 도시미치는 아편을 끊은 후유증으로 여전히 방 안에서 은둔하고 있었다.
심지어 분가 중 하나인 키모츠키(肝付) 가문은 아편을 밀매하는 조직이 되었다. 막부에서 보낸 단속반 시부타쿠죠가 기습을 가했고 가문 인원 대다수가 목숨을 잃었다.
나리아카라는 아편으로 벌어진 참극을 떠올리며 손을 움켜쥐었다. 어찌나 세게 움켜쥐었는지 주먹 사이에서 핏물이 새어 나올 지경이었다.
“언젠가는 이 배 위에 군인을 올려서 당약을 퍼트린 놈들을 모조리 도륙해 버리겠다.”
최소한 이 정도는 해야 울분이 풀릴 것 같았다. 가신들은 나리아카라의 얼굴을 바라보다 진지한 표정임을 알아차리고 말을 돌리려 하였다.
“그러하면 우리 사쓰마 번의 힘으로 청나라와 전쟁을 벌이는 꼴 아닙니까?”
“앞으로 할 일이 많습니다. 가주님께서 이러한 배를 열 척은 만들어야 할 수 있는 일이지요.”
“혹시나 모르지. 배가 배를 만나서 새끼를 칠지도 모르지 않나?”
늙은 가신이 꺼낸 농담에 나리아카라를 비롯한 사람들 모두가 웃음을 터트렸다. 이윽고 저 머나먼 아리아케 해 반대편으로 사라진 배에서 기적 소리가 들려왔다.
-부웅- 부웅- 부우우웅- 부웅
네덜란드 기술자들은 서로를 돌아보며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이를 확인한 나리아카라는 기적 소리가 어떠한 신호를 의미하는지 알아차리고 말하였다.
“긴급 사태가 벌어졌을 때의 기적 소리가 아닌가? 암초로 인하여 좌초하였나?”
“좌초 신호가 아니고 천재지변과 관련된 신호입니다.”
“천재지변? 지진이라도 났다면 땅이 흔들려야 정상인데?”
이윽고 머나먼 바다에서 포성과 폭발탄 특유의 폭음이 들려왔다. 최소 20여 발 이상의 함포를 사격하는 소리까지 들려오자 나리아카라는 바로 명령을 하달하였다.
“해적이 침습한 것 같구나! 쓸 수 있는 배를 모두 끌고 나가 니혼마루를 지원해라!”
니혼마루를 구조하거나 해적을 격퇴할 목적의 배가 막 출항하려던 찰나, 망원경을 들고 있던 파수병이 소스라치게 놀라 고함을 쳤다.
“다이묘님! 배! 배가 늘어났습니다!”
“배가 늘어나? 뭔 소리인지 똑바로 말하지 못하겠느냐!”
“지…… 직접 보! 보는 게 나을 겁니다!”
늙은 가신은 혀를 차며 파수병에게 망원경을 빼앗아 먼바다를 바라보았다. 잠시 뒤, 가신은 나리아카라에게 망원경을 건네며 말했다.
“우리 니혼마루가 부쩍 자라서 혼사를 치렀나 봅니다.”
“계속 농담을…… 정말 배가 늘어났군.”
망원경으로 살펴본 배는 여덟 척에 달했다. 니혼마루와 비교할 수 없이 거대한 증기선과 그나마 조금 덜 거대한 증기선 두 척, 그리고 니혼마루와 대등한 배 다섯 척이었다.
가장 앞에 있는 니혼마루는 사실상 포위당한 상태로 길을 안내하고 있었다. 천재지변이나 마찬가지인 거함(巨艦)들의 습격에 모두가 혼이 빠져 상황을 관망하였다.
이윽고 니혼마루가 항구로 귀환하였다. 승무원들 모두 겁에 질려 배에서 뛰쳐나오듯 내려온 다음 보고를 실시하였다.
“영길리의 군함들입니다! 노서아를 공격할 것이니 보! 보급을! 내놓으라고 합니다!”
“갑자기 저희를 향해 겁박하듯이 달려들어 속절없이 포위당하였습니다!”
점차 다가오는 함대를 확인한 나리아카라는 질겁한 표정으로 크기를 확인하였다. 대략적인 눈대중 크기를 말하는 동안 네덜란드 기술자가 선박의 정체를 알려주었다.
“영국 해군의 최신예 전함 워리어급입니다. 배수량으로 따져도 저희가 판매한 선박의 네 배 이상이지요.”
“그럼 니혼마루가 몇 척이나 되어야 저 거선을 상대하는가?”
“열 척 이상이 에워싸면 희망이 있겠지만…… 배가 워리어급 외에도 많습니다.”
함대에서 가장 작은 배가 니혼마루와 동급이며 가장 큰 배는 네 배 크기에 달했다. 모두가 이 사태에 당황하여 선원들을 닦달하였다.
“보급? 조선에서 보급을 할 것이지!”
“조선이 이번 전쟁에서 중립국을 자처해 보급을 할 수 없다 하였습니다.”
나리아카라는 네덜란드 상인과 기술자들을 바라보았다. 나름 국제 법률을 알고 있는 입장에서 이 상황이 정상적인 압박인가 협박인가 애매한 시점이기도 하였다.
네덜란드 상인들도 답답하기는 매한가지였다. 이들은 서로 의견을 나누고 답해주었다.
“저들의 행위는 잘못되었으나 그 근본은 틀리지 않습니다. 중립국인 대한에서 보급을 받을 수는 없으니 제3국의 항구에서 입항 허가를 정식으로 받고 보급하는 것입니다.”
“그럼 왜 니혼마루를 에워싸고 겁박하였단 말인가?”
“그야 실력에 자신이 있어서 벌인 일이지요. 솔직히 말씀드려서 저 군함들이 공격을 실시하면 일대가 하루 이내에 쑥대밭이 될 겁니다.”
이미 박현상과 밀약을 맺은 영국 함대는 항구에서 제법 먼 거리를 유지한 채 여전히 연기를 뿜어 올리고 있었다.
마침내 영국 배에서 상륙용 나룻배가 한 척 접근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