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효명세자와 함께하는 조선 생활-216화 (213/345)

216화

19장 1화 크림 전쟁(1)

대한제국 국제 구호협회는 선전포고 직후 출범식을 가졌다. 명목은 전쟁으로 인한 부상자들의 구조와 인의의 실천이라는 거창한 주제였다.

“이 나라가 황제폐하의 치세하에 태평성대를 누리는 가운데 세계 각지에서 변란이 빗발치고 있다. 이러한 일을 좌시할 수 없으니 의술 방면의 지원을 실시하겠다.”

파견 요지는 간단하였다. 대한제국과 아무런 인연이 없는 오스만 제국에 나아가 병사를 치료하며 이후 외교 서한을 통하여 영토를 점령한 국가 아래에서 치료를 실시하라는 말이었다.

이건 전쟁 예상과 정확히 일치하기도 하고. 러시아는 처음에 오스만 상대로 승리하다 영국, 프랑스 연합군이 전선에 투입되면 속절없이 밀려나겠지.

국제 구호협회는 이 과정에서 내가 작성한 외교 서신을 하나씩 건네주면 된다. 어지간해서는 위험에 노출될 일이 없어지고 융숭한 대접을 받으리라.

“……이상으로 의원 일백이십 명과 보조 인원 사백 명의 파견을 결정하겠다.”

본래 역사의 헌종은 태자로서 이들의 인솔을 담당하였다. 의원들 하나하나와 악수를 나누다 얼마 전 내의원에 발탁된 황도연(黃度淵)과 악수를 나누며 말했다.

“혜암(惠庵)은 여러 의술을 능통하게 익혀 이름이 높다 하였지. 부디 오사만국에 다녀와 많은 병사들을 치유하고 질병의 전파를 막아내게.”

“태자전하께서 저를 어여삐 보아주시니 그저 감읍할 따름이옵니다.”

“그러고 보니 아쉬운 일이구려. 내가 알기로 혜암은 대탄강(大灘江 - 한탄강의 옛 이름) 인근에서 발병하는 괴질을 연구하였는데 그 연구가 중단될 지경 아닌가.”

“전선에서 수많은 이들이 의원을 찾으며 목숨을 잃고 있사옵니다. 간혹 발병하는 괴질은 한 해에 열 명의 목숨을 앗아가나 제가 치료할 수 있는 환자는 천 명이 넘을 것입니다.”

같은 부자지간이라도 효명제와 태자의 성격은 확연히 다르다. 둘 다 풍부한 지식을 통해 파악하나 효명제는 전체적으로 믿을 수 있는 사람의 최종 결과물을 확인하는 성격이다.

반면 태자는 하나하나의 요소에 몰두하는 성격이다. 의원 가운데 명성이 높은 사람들의 저서를 확인하였는지 이들과 제법 길게 대화를 나누며 배웅을 하였다.

다음으로는 내가 오스만 제국에 공식 서한을 보냈다. 이미 의원을 소집하기 전부터 지원 의사를 밝혀둔 덕분에 이들이 머무르는 과정에 큰 문제는 없으리라.

물론 오스만의 태도는 문제가 있다. 이들은 개혁에 실패한 유럽의 병자 주제에 러시아 제국을 상대로 수비 정도는 할 수 있을 것이라 판단하겠지.

“외부대신님께서 여러 고안을 하고 국서를 보내 저희의 앞길을 순탄하게 해줄 것이라 믿겠습니다.”

“저도 갖은 노력을 다 해보았으나 현장에서 일어나는 긴급 사태는 막을 길이 없습니다. 일단 각 진영을 오갈 때에는 언제나 신중을 기해주십시오.”

파견되는 의사들에게 간단히 설명을 해주었다. 오스만 제국은 가뜩이나 기술이 부족한 상황이라 이 지원을 무조건 받아들이고 보호하리라.

러시아는 모든 기술 발전이 더딘 나라라서 한 명의 의사도 소중하다. 기껏해야 의약품을 뜯어가는 것이 전부고 해는 신변은 보호해 주리라.

영국과 프랑스는 진정한 동맹국인 대한제국의 의사를 필사적으로 보호하고. 여기까지 설명이 끝나자 의사들은 마지막으로 감사 인사를 올리며 말하였다.

“저희 모두가 죽지 않고 평안히 돌아올 것을 약속드리겠습니다.”

“이번 파견을 통하여 많은 것을 배우고 많은 것을 가르쳐 주시오.”

다음 순서는 발해급 함선 세 척을 통한 인원 파견이었다. 무장을 최소화하고 남는 공간을 모두 의약품과 지원 물품으로 채워 넣은 함선이었다.

이틀에 걸친 하역 작업이 완료될 무렵 일준이가 찾아왔다. 녀석은 나를 보자마자 상자 하나를 보여주면서 말했다.

“설파제는 비밀리에 전달하려고 내가 직접 왔다.”

“그거 제대로 쓸 수 있을까 모르겠네.”

일준이가 설파제의 효능에 대해 이야기하려는 사이 뒤에서 고함이 들려왔다. 익숙한 여성의 목소리였는데 고함이 점점 커져왔다.

“잠시요! 배에 공간 있나요?”

“아이고 내가 못 살아. 결국 저걸 끌고 왔네!”

일준이가 이마를 치면서 시가지 방향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수레 여덟 개에 기계 덩어리들이 잔뜩 담겨 있었다.

여기에 수레를 끄는 황소 위에 올라타 팔을 흔들어대는 에이다까지 있었다. 그녀는 소의 등 위에서 훌쩍 뛰어내리며 말하였다.

“닐슨! 제 발명품은 구 할 이상 완성되었잖아요! 왜 보내지 말라는 거예요?”

“그야 이번 국제 박람회에서 선보일 모델이니 보내지 말라는 거지!”

“국제 박람회요? 웃기는 소리 하지 마세요! 사람을 구하고 인의를 퍼뜨리려면 모든 도구를 활용해야지! 이 좋은 도구들을 활용하지 않는다니요!”

삐거덕거리는 거대한 우마차에는 최소한 1톤이 넘어갈 수준의 거대한 기계와 여기에 직결될 중형 증기기관이 있었다. 처음에 있는 기계 세 대를 가리킨 에이다가 설명을 하였다.

“제가 연구진들이랑 고안한 발명품이에요! 정식 명칭은 이 기계가…….”

“이거 세탁기 아니야? 원통을 돌려서 빨래를 하는 기계.”

기계는 세 개의 원통이 있었다. 왼쪽의 작은 원통, 가운데의 큰 원통 그리고 오른쪽의 구멍이 뚫린 원통이다. 이런 물건은 세탁기밖에 없어서 무심코 말이 나와 버렸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에이다는 종종걸음으로 달려와 내 손을 잡고 질문을 퍼부었다.

“한센! 이 기계의 정체를 어떻게 알아내셨어요?”

“내가 라임하우스에서 빈민가 생활 할 때 증기 세탁기가 나왔잖아.”

나온 적이 있기는 할 거다. 내가 알기로 산업혁명 이후 옷감 공장에서 증기 세탁기를 사용하다가 민원에 의해 실패한 전적이 있었다. 그걸 감안해 지나가듯이 말했다.

“당시에는 그 기계가 경쟁 상대가 될 거라 생각했었어. 소음이 심한 것을 약점으로 삼아서 청나라 사람들을 비롯한 세탁업 종사자를 꼬드겨서 민원을 넣었지.”

“역시 한센!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다르다더니! 그 기계는 소음이 심해서 한센이 수작을 부릴 수 있었죠! 이 기계는 안 그럴 거예요!”

역사적 사실을 기반으로 잘 넘어갔다. 아무튼 욕인지 칭찬인지 모를 말을 한 에이다는 춤을 추듯 세 바퀴를 옆으로 돌아 기계를 손으로 내려치면서 말했다.

“이 기계는 보신 대로 세탁 기계예요! 지금까지 수많은 발명가가 개발한 물건을 증기 기관과 엮어서 강화한 녀석이지요.”

“그리고 괴물이기도 하고.”

“닐슨! 이건 꼭 필요한 기계예요! 빨래는 하루 종일 아낙네들이 매달려 온몸을 써가면서 하잖아요? 이건 물과 석탄만 넣으면 돌아가는 기계라니까요!”

다시 일준이에게 타박을 준 에이다는 기계에 대해 설명하였다. 통을 옆으로 눕혀 세탁물을 집어넣거나 빼는 기능. 세 단계에 걸쳐서 세탁, 헹굼, 그리고 탈수를 진행하는 기능까지 있었다.

“이 기계는 이론상 이 톤의 석탄을 넣으면 하루 일 톤의 옷감을 세탁하고 탈수까지 할 수 있어요.”

“그게 대단한 건가 안 대단한 건가?”

“대단하지요! 전장에서 사람이 중요하지 석탄이 중요한가요? 더군다나 수산화나트륨을 잔뜩 넣어서 옷감을 완전히 표백하고 소독하는 작업도 가능하구요!”

설명을 들으니 의외로 제대로 된 세탁기였다. 세탁 원통은 세제와 옷감을 넣고 빨래를 한다. 헹굼 원통은 두 배의 물을 넣고 천천히 돌리고 마지막 탈수 원통이 물을 빼내고.

에이다는 이 기능에 대해 자랑스럽게 설명하고 마지막으로 걸레짝이 된 스웨터를 보여주며 말했다.

“문제가 있다면 지나치게 힘이 강해서 섬세한 옷이 다 망가진다는 거예요. 그래도 군복이나 침대 시트 같은 물건을 세탁할 수 있으니 얼마나 좋아요?”

“아주 좋은 물건이야. 기왕이면 박람회 때 출품하면 좋을 것 같은데.”

“박람회에는 소형으로 만들어서 부유한 집에서 쓸 수 있는 크기로 줄여놓아야지요.”

요즘 잠잠하다 싶었는데 또 좋은 물건을 발명한 에이다였다. 일준이가 이마를 감싸 쥐고 고개를 돌리는 것과 달리 그녀는 의원들에게 다가가 이 기계를 권하였다.

“여러분 모두가 이 기계를 사용하셨으면 좋겠어요. 전쟁에서 피와 오물에 물든 병사들을 그 더러운 환경에 그대로 방치하실 생각인가요?”

“에이다 교수님의 말씀이 옳습니다. 이불보는 물론 환자복을 이 기계로 세척하면 되겠군요.”

“그럼 당장 배에 올려주세요! 증기기관 사용법 정도는 아시죠?”

의사들의 보조 인원에는 증기기관 기술자도 있었다. 이들은 간단한 사용법을 듣고 기계를 배 위로 올려놓았고 다음 기계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건 또 뭐야? 웬 거대한 상자가 있어?”

“이번 물건은 뭘까요?”

이번 기계는 정말 모르겠다. 나무 위에 철을 덧댄 판자 여러 개가 있다. 여기에 한 철판에는 손목 두께만 한 관이 한쪽에 얽혀 있는 물건이다.

일준이는 이 물건을 보더니 발을 동동 구르며 말했다.

“압축식 냉장고를 배 위에 올려? 저게 석탄을 얼마나 먹는데!”

생각해 보면 최초의 냉장고는 1870년대에 나왔는데 에이다의 지식이라면 20년 정도 빨리 내놓는 것이 가능하기는 하겠지.

일준이는 이런 위대한 발명을 두고도 못 미더운 듯이 말하였다.

“저 기계 하루에 석탄을 사 톤 정도 먹는 기계 아니야?”

“전쟁에 쓰일 약재를 보존하려면 저온 보관이 필수잖아요!”

“그건 맞는 말인데 대부분의 약재는 건조 물품이라 저온으로 보관할 필요가 없어.”

“세탁기도 전장으로 보내는데 냉장고를 왜 못 보내요!”

또 다시 기술적 부부싸움이 시작될 것 같아서 내가 해결하였다. 선원들에게 말해 이 거대한 기계를 배 위에 설치하라 하고 결론을 내려주었다.

“일준아, 일단 전쟁에서 얼마나 쓸모가 있는지 확인이나 해보자고.”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이걸 발해급에 올리면 공간이 얼마나 필요할까…….”

출항은 냉장고 설치로 인해 하루가 지연되었다. 선체 중심에 공간을 만들고 거대한 냉장고를 설치하며 이를 증기기관과 연결하여 시험 가동까지 했다.

에이다의 냉장고를 체험해 보려 직접 안으로 들어갔다. 일준이와 함께 약재가 들어찬 냉장고 안으로 들어갔는데 싸늘한 수준에 불과했다.

“이거 냉각 용량이 초과된 것 아니야?”

“이 냉장고 냉매가 에테르라서 문제가 좀 있어. 참 웃긴 기계야.”

일준이는 벽에서 냉기를 내뿜는 파이프를 가리키며 설명을 하였다.

“에이다가 증기 압축으로 냉매를 액화시키는 방식을 채택했는데 그 과정에서 열이 유입되더라. 더군다나 냉각 과정에 외부 온도가 개입하니까 이 꼴이지.”

“잠깐, 냉장고가 온도를 유지하는 게 아니고 외부 온도에 영향을 받는다고?”

“그래, 이 냉장고는 외부 온도보다 18도 낮추는 수준이 한계야. 실험실 환경 기준이고 실제로는 15도를 낮추는 수준이 전부일걸?”

지금은 9월 초이다. 낮 기온은 27도에 밤 기온은 20도에 달하니 내부 온도는 평균 9도에 불과하리라.

일준이는 밖으로 나와 연기를 뿜어대는 증기기관을 가리키며 말했다.

“유럽이면 북쪽 극지방 근처에서 물건을 꽝꽝 얼려서 천천히 운송할 수라도 있지. 혹시나 원양 항해를 하면 좀 쓸 만한 물건이 될지도 모르겠고.”

나중에 대한제국이 원양 항해 능력을 갖춘 선단을 만들면 모를까 쓸모가 별로 없다는 소리다.

일준이는 마지막으로 의원들을 만나 설파제를 전해주었다.

“이 약은 최종 임상 시험을 거치지 않은 약물인데 미리 시험해 주실 수 있으십니까?”

“대체 어디에 쓰이는 약물입니까?”

일준이가 건넨 물건은 작은 유리병에 1회 투약 분량으로 담긴 설파제였다. 녀석은 약의 상세를 설명한 다음 엄숙히 경고하듯 말하였다.

“이 약을 처음에 조금 주사하여 발진이 일어나는지 확인하고 투여하시길 바랍니다.”

“알겠습니다. 패혈증이나 염증을 다스리는 약이라니 전쟁에서 요긴하게 쓰일 것 같군요.”

“부디 처방전을 남기시고 각 약품을 시험한 환자의 상세를 기록하시길 부탁드리겠습니다. 저도 자료가 필요한 입장이니까요.”

마지막으로 시험용 설파제 1,000인분을 올린 발해급 함선 세 척은 머나먼 오스만 제국을 향해 출항하였다.

이들이 어떠한 일을 겪을지, 뭘 배울지는 스스로 터득해야 할 일이다.

* * *

오스만 제국은 아직 영국과 프랑스에 구원 요청을 보내지 않았다. 두 국가의 일방적인 조약에 휘둘리는 대신 자체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한 것이다.

이러한 상황을 두 국가가 가만히 보고 있지 않았다. 의회를 소집하고 오스만 제국의 수호와 수에즈 운하의 방어를 목적으로 해군 전력을 급파하였다.

영국군은 기술력이 결집된 배수량 6,500톤에 달하는 철갑 증기선 워리어(Warrior)를 비롯한 18척의 전선을 파견하였다.

기함 워리어는 연돌에서 맹렬히 연기를 뿜어내며 전선으로 향하였다. 갑판 위에서 해군 총사령관 찰스 네이피어는 망원경으로 저 머나먼 동쪽을 바라보았다.

“장관이 따로 없군. 저 멀리 보이는 배가 오를레앙급 신형 전함이던가?”

1850년, 프랑스는 배수량 5,700톤의 오를레앙급 철갑 증기선을 건조하였다. 이미 양국의 증기선 경쟁은 과도한 수준에 이르렀고 마침내 이 경쟁 작품이 첫 전선에 투입되었다.

프랑스도 함대를 끌고 나와 일부러 지브롤터 해협 근처에 머물며 영국 해군을 염탐하였다. 여기에 호사가들도 모여들었다.

이들은 총 32척에 달하는 웅장한 선박들을 사진, 회화, 심지어 문학으로 남기고 있었다.

그러나 그 선박 내부에서는 처절한 사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이러다가 쪄 죽겠네! 환풍기 좀 더 세게 가동해 주시지 말입니다!”

석탄을 넣는 잡부들은 속옷 한 장만 입은 채 온몸으로 땀을 흘려대며 삽을 놀리다 장교에게 항의하였다. 장교 또한 웃옷 단추를 모두 풀어 헤친 채 땀을 흘리며 답했다.

“지금 환풍기 최대 출력이야!”

“그럼 여기서 쪄 죽으라는 말입니까!”

“야! 나는 코트 입고 있잖아! 밤이 되면 좀 시원해질 테니 참아!”

워리어호는 12개에 달하는 증기기관을 장착하여 우수한 기동성을 자랑하였다. 문제가 있으니 이 증기기관은 최신식 콜리스 엔진이 아닌 구형 증기기관이었다.

효율이 떨어지는 증기기관은 더 많은 석탄을 소모하였다. 이로 인해 각 기관이 열을 사방으로 뿜어내며 선체를 달궈 버렸다.

선체 내부가 열기로 후끈 달아올라 모두 땀을 뻘뻘 흘리며 갑판 교대 근무를 자처할 지경이었다. 그 갑판조차도 온돌처럼 달아올라 모두가 해풍으로 땀을 식혀대고 있었다.

“본국에서 시험할 때에는 조금 더운 수준에서 끝났는데…….”

찰스 네이피어도 이마에서 흐르는 땀 한 줄기를 닦으며 부관이 건넨 물을 들이켰다. 부관은 네이피어의 눈치를 보면서 자신의 의견을 내놓았다.

“시험 항해를 할 때에는 가을인 데다가 영국의 날씨가 시원한 편이라 선체가 식은 것 같습니다. 반면 여기는 북아프리카 연안에 날씨도 더운 늦여름이지요.”

“잘못하다가는 전선에 투입되기도 전에 난리가 날 것 같군. 당장 보급품 확인하도록 해.”

“어떠한 보급품 말씀이십니까?”

“화약을 제외한 식료품과 식수 전부 다 확인해야지. 어서 움직여!”

네이피어의 예상은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부관은 난감한 표정을 지은 채 돌아와서 말하였다.

“건조 식량은 그럭저럭 버티고 있는데 신선 식품이 점차 부패하고 있습니다. 음식 보관을 위해 저장된 얼음도 기존의 두 배가량 빠르게 소모하고 있습니다.”

“당장 수에즈와 오스만 제국에 연락 보내서 신선한 육류를 미리 저장해 두라 해.”

영국에서 출발하여 지브롤터를 통과, 이후 흑해까지 나아가는 데 30일도 걸리지 않는 여정이다. 문제는 오스만 제국의 허가와 좁은 해협을 통과하는 대기시간이다.

이 과정을 모두 감안하면 30일이 아닌 90일, 혹은 더욱 오랜 시일을 증기선에서 보낼 수도 있었다. 앞으로의 일을 생각한 네이피어는 한탄하듯 말하였다.

“최대 이천 마일(3,200㎞)을 보급 없이 움직일 수 있으면 뭘 하나. 고작 이십 일 만에 열기로 모든 식량이 쪄질 지경인데.”

“예전에 대한에 다녀온 적이 있는데 구들이라는 것이 이와 흡사하더군요.”

“구들이라. 바닥에 불길을 때서 지옥처럼 뜨겁게 만드는 난방 방식 말인가?”

“이미 대한에 다녀온 장교들이 워리어호를 구들 배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네이피어는 코웃음을 치면서 땀을 흘리는 장교들을 바라보았다. 이대로 아무런 대책 없이 항해하다가는 항해 중 손실로 전쟁에 난항을 겪으리라.

더군다나 햇볕을 쬐며 몸을 수건으로 닦는 수부들을 보니 다른 문제도 생겨날 것 같았다. 매일 땀을 흘리며 옷을 제대로 세탁하지 못하니 두드러기가 생겨나는 이들이 있었다.

“좀 손해를 보더라도 보급선을 먼저 보내서 신선한 식수를 잔뜩 공급하도록. 이러다 피부병까지 생기면 난리가 날 것 같군.”

자신이 영국 해군에 처음 발을 들일 때에는 일반 해군에게는 인권이라는 단어가 존재하지 않았다. 병에 걸리건 괴혈병으로 피를 쏟건 소모품에 불과하였다.

이제는 빈민가도 사람이 살 정도가 되어서 자연스럽게 인권이라는 단어가 모두의 머릿속에 박혀 들어왔다. 네이피어는 얼기설기 굴러가는 워리어호를 보며 중얼거렸다.

“옷을 빨아주는 기계나 음식을 차갑게 만들어주는 기계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옷을 빨아주는 기계가 있기는 한데 기껏해야 식탁보를 세탁하는 수준에 불과합니다.”

“언젠가, 누군가는 만들어내겠지. 그나저나 음식을 차갑게 만드는 기계는 언제쯤 나올까.”

“그런 기계가 있다면 저는 해군에서 퇴역하고 장사에 뛰어들 겁니다.”

부관은 네이피어에게 슬쩍 미래 계획을 알려주며 은퇴를 이야기하였다.

네이피어가 눈을 가늘게 뜨고 바라보자 그는 천연덕스럽게 웃으며 말하였다.

“잘 보관한 고기는 잘하면 한 달 정도 보관할 수 있지 않습니까? 아예 얼어버린 고기는 석 달은 보관할 수 있지요.”

“그렇지. 근데 왜 해군을 그만두고 장사를 하나?”

“미국의 쇠고기 가격은 우리 영국의 오분의 일에 불과하지 않습니까? 음식을 차갑게 만드는 기계를 이용해 쇠고기만 수입해도 떼돈을 벌 겁니다.”

“기계가 나오기 전에 은퇴하고 싶은가?”

네이피어도 부관의 미래 계획을 웃으며 받아넘겼다. 정말로 그런 기계가 생겨나면 이 세상의 구조가 변해 버리리라.

이런 문제는 프랑스의 함대도 동일하게 겪고 있었다. 두 함대는 더위로 인하여 땀을 흘려대며 선원의 고통과 함께 흑해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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