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6화
18장 5화 방사능의 세계(1)
일준이의 실험은 착실히 진행되고 있었다. 녀석은 마이클 패러데이의 자문 요구를 받을 때부터 이미 피치블렌드 광석을 주문하였다.
그 피치블렌드 광석을 받은 사람은 나이다. 일준이는 관리 엄수와 유출 방지를 위해 1톤이 조금 넘는 피치블렌드를 모두 내 앞으로 배송하였다!
“외부대신님께서 이 물건을 직접 주문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아, 예. 그렇긴 합니다.”
“대한제국도 피치블렌드로 ‘생명력이 넘치는’ 유리를 만들어내려는 것 같군요. 훌륭한 결정입니다.”
그 생명력이 아니고 방사능이 넘치는 유리다!
내가 애써 표정 관리를 하자 프로이센 출신의 무역상은 호들갑을 떨며 상자를 두드리고 말했다.
“그나저나 참 특이한 주문이군요. 쓰레기 취급받는 피치블렌드를 안쪽에 얇은 납을 덧댄 나무상자로 감싸고, 그 위에 다시 두꺼운 천을 감싸라?”
“뭐 물이 새어 들어가지 않게 잘 주문하려는 노력이었습니다.”
“그냥 십 톤 정도 주문하셔서 대충 사용하시지요. 아무튼 포장비와 운송비가 광물 가격의 이백오십 배가 조금 넘으니 이 점은 양해해 주십시오.”
피치블렌드의 가치는 길가의 돌멩이보다 못하다. 이 녀석은 은이 많이 산출되는 광맥에서 은 광맥이 끊겨나갈 때부터 등장하는 광물이다.
그 광물이 어떠한 위험성을 가지고 있는지 이 세상에서 단 두 명만 알고 있다.
피치블렌드를 확인한 일준이는 휘파람을 불면서 말했다.
“마침 9월이라 새 학기 시작이잖아? 지금까지 한 달 단위 유급휴가만 가끔 즐겼는데 이제 한 학기를 푹 쉬면서 피치블렌드 연구에만 전념할 생각이다.”
“지금까지 안식년 안 지켰냐?”
“오 년에 한 번 쉴 수 있는 유급 휴가?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그걸 왜 지켜? 에이다도 육아 휴가 외에는 안 지키는데?”
이 부부가 어떻게 부부생활을 하고 교수생활을 하는지 궁금해졌는데 둘 다 금슬은 좋으니 알아서 하고도 남겠지.
첫날 실험 정도는 내가 확인해 주기로 하였다. 녀석은 인천 외곽에 있는 해안가의 아주 동떨어진 한옥 한 채를 잔뜩 개조하고 필요한 비품을 모두 챙겨두었다더라.
녀석의 실험용 저택으로 향하는 마차에서 궁금증이 생겨났다. 인천까지 가져온 피치블렌드가 얼마나 위험한 물질인지 일단 알아봐야겠다.
“우리가 운반한 피치블렌드는 얼마나 위험한 물건이지?”
“호흡기나 소화기를 통해 내부피폭이 되지 않으면 별문제 없어. 위에서 한 바퀴 뒹굴고 춤을 춘다고 해도 내부피폭만 없으면 정상 생활을 할 수 있다.”
“이 안에 있는 방사능 모두가 내부피폭이 된다고 가정하면?”
“아마 연간 이십사 시버트 정도의 방사능에 노출될걸? 현대라면 몰라도 이 시기에는 일 년에 여섯 번 정도 죽을 수 있는 양이야.”
다른 마차에 미리 운반되었던 피치블렌드 상자를 떠올리니 소름이 돋아왔다. 24시버트가 장난도 아니고 엑스레이 수십만 회를 동시에 찍는 수준의 방사능이 아닌가.
자연스럽게 일준이의 건강이 염려되었다. 그러자 녀석은 코웃음을 치면서 말했다.
“이미 실험실을 개조해서 초거대 환풍기를 설치해 두었다. 내부 온도조절은 불가능한데 통풍은 초거대 송풍기 여섯 개로 제어하는 중이고.”
“그걸로 안전할까? 피폭당하잖아?”
“내부피폭은 대부분 호흡기를 통한 분진 피폭이야. 방독면도 착용하고 발생한 분진은 기류 자체를 뽑아내서 대처하고. 일반 피폭은 방호복을 준비했다.”
녀석과 실험실로 향했는데 외형만 한옥이지 강박증에 가까운 안전 제일주의가 엿보이는 실험실이었다.
벽돌로 만든 건물 외부에는 배터리 충전용 소형 증기기관이 있었다. 이것이라면 양반인데 더 심한 물건도 있었다.
지붕 위에 올라가 있는 온수 보일러, 사방으로 뚫려 있는 환기구까지. 화룡점정은 10m 높이의 철제 굴뚝과 그 안에 달린 송풍기까지 있었다.
“이거 만드는 데 일만 냥 정도 사용했을 것 같은데.”
“만 칠천 냥 정도? 내부 비품과 기자재를 합치면 칠만 냥.”
“그 정도면 한양에 쉰 칸 벽돌집에 보일러를 방마다 설치한 집을 사들이고도 남는다!”
말 그대로 돈질이다. 실험실 관리를 위해 하인도 한 명 있었는데 일준이는 하인을 보고 손짓을 하면서 말했다.
“이제 실험을 할 것이니 내 말 명심하게. 저 안에서 폭발이 일어나거나 집이 무너지지 않는 한 절대 접근하지 말도록.”
“명심하겠습니다. 다만 뭘 하시기에 이리도 엄중한 집을 마련하셨는지 궁금합니다.”
“별것은 아니고 사소한 실수를 저지르면 불임이 되는 실험을 진행할 거라네.”
하인은 일준이의 말을 듣더니 사타구니를 감싸 쥔 채 두툼한 자신의 별채로 들어갔다. 일준이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문을 열며 말했다.
“모든 준비는 끝났다. 이 저택은 실험이 끝나면 내부를 일 년에 한 번씩 물청소로 제염작업을 하고 총 여섯 번의 제염이 끝나면 완전 철거해 바다에 수몰시킬 거야.”
“저택이 방사능에 오염되는 것을 전제로 계획을 세웠다면 네 몸도 오염될 텐데?”
“아 그게…….”
녀석은 말을 끊더니 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고는 변명하듯이 나와 눈을 마주치지도 못하면서 말했다.
“화학과는 핵을 거의 다루지 않아. 애초에 핵물질은 물리학과 항목이거든. 당연히 가이거 계수기 만드는 방법도 모르니까 좀 과격한 방법으로 안전을 추구하려고.”
“지식도 검사계도 없이 라듐을 추출한다고?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야?”
“일단 방사능 물질 누출 사고 대처 방법을 배우고 기본적인 수칙은 배우긴 했다.”
“기본 수칙은 실험과 다르다고 예전부터 말했던 것 같은데?”
일준이는 할 수 있는 것은 꼭 해내는 놈이다. 대신 못 하는 것은 아예 시도도 안 하거나 그 과정에서 얻어낼 수 있는 응용 학문까지만 연구하고 끝낸다.
그런데 갑자기 자신이 다뤄본 적도 없는 라듐을 추출할 것이라 했다. 녀석은 내 지적을 듣자 괜히 하늘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예전에 라돈 침대 사건 기억하지? 그 사건 때문에 우리 집의 침대를 교체했거든.”
“그 뭐라더라? 음이온이 나온다면서 방사능 물질을 기준치 이상 넣은 사건?”
“그 사건 때문에 마리 퀴리의 라듐 추출 논문을 몇 번 읽어봤어. 거기서 라듐 추출 과정을 배우기는 했고.”
“논문 몇 번 읽어보고 실험에 성공할 거라 생각해?”
일준이가 예전에 말해준 것이 있었다. 실험은 너무나 많은 변수가 있어서 수십 번 실패하는 경우도 있고 생소한 실험은 아예 숙련자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고.
자신이 세운 규칙도 깡그리 잊어먹었나 고민했는데 오히려 더욱 당당하게 말했다.
“그러니 라듐을 추출하는 걸 포기하고 라듐이 많이 들어간 화합물만 얻어낼 거다.”
“한 마디로 실험 정밀도를 포기한다는 소리야?”
“더 정밀하게 할 거야. 대신 최종 과정까지 진행하지 않고 내가 할 수 있는 한계까지만 실험을 진행한다는 소리지.”
녀석은 완전 무장을 갖추기 시작했다. 납판을 안에 덧씌운 셔츠와 바지를 입고 사타구니에는 이중으로 납 보호대를 착용하면서 말했다.
“베타선 입자는 납을 못 뚫지. 이 정도 두께면 납 중독을 걱정해야 할 수준이고.”
이 위를 가황고무로 만든 시커먼 옷으로 감싸고 단추로 엮은 뒤 두툼한 고무 벨트로 닫았다. 그러고는 고무로 만든 방독면까지 쓰더니 정화통을 장착하기 전 나를 보면서 말했다.
“이걸로도 감마선은 별로 못 막는데 라듐은 대부분 알파선을 내뿜어. 이걸 감안해도 꺼림칙하다면 돌아가.”
“그거 입으면 안전한 거 맞지?”
“아마도? 애초에 농축이 안 된 실험 초기라 방사능이 거의 나오지 않아.”
예전에 핵물질이 누출되어 인간 로봇을 사용한 국가보다는 훨씬 났다.
잠시 고민하다 고개를 끄덕여 참관할 것을 확답했다. 녀석은 캐비닛 하나를 열면서 말해주었다
“방진용 외피를 마흔 개, 납 방호복을 열 벌 주문했는데 첫날에 두 개씩이나 쓰네. 일단 입어 봐라.”
거의 30㎏은 될 것 같은 묵직한 옷에 숨이 턱턱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군대에서 입었던 침투성 화생방보호의에 완전군장 차림보다 더욱 무겁고 두툼한 옷이었다.
마지막으로 정화통을 착용하려 했는데 일준이는 정화통을 잡고 내용물을 확인하였다. 그리고 방에 들어가기 전 마지막으로 말하였다.
“사람을 더 고용할 수 있었으면 잠수부처럼 산소통을 착용할 수 있는데 별수 없지. 아무튼 실험은 간단해. 피치블렌드 원광을 이용해 라듐을 농축하는 거야.”
“그 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할 확률은?”
“없다고는 말 못 해, 문제가 발생하지 않게 철저히 관리해야지.”
녀석은 정화통을 끼우고 심호흡을 하였다. 별꼴이 다 있다고 생각했는데 어찌나 빡빡한 정화통인지 온 힘을 다 써야 심호흡을 제대로 할 수 있었다.
녀석이 스위치를 올리자 옆방에서 환풍기와 전구가 동시에 가동되었다.
“공기가 세 번 순환하고 남으니 내부에 누출된 라돈 가스는 다 사라졌다.”
마지막으로 정화통을 장착하고 방 두 개를 거쳐 우라늄 농축 실험실로 들어갔다.
우라늄 농축 실험실은 간단한 구조였다. 여러 개의 유리병, 납판을 비롯한 실험 기자재. 그리고 왼쪽 방향에는 피치블렌드가 쌓인 박스가, 오른쪽에는 수많은 시약들이 있었다.
일준이는 피치블렌드 광석을 소형 흄 후드 안에서 막자로 갈아내고 수산화나트륨을 섞어서 끓였다. 이 과정에서 불순물을 한 번 걸러내고 다시 염산을 부어서 처리하였다.
녀석은 온몸을 사용해 가며 이 과정을 8회 반복하였다. 고작 160㎏의 피치블렌드를 가공하는데 이미 서른 병에 달하는 시약을 사용하였다.
한 대학교의 학과장이자 동방콜라 판매로 돈을 벌어낸 자본가라서 가능한 일이리라.
녀석은 실험이 끝났다면서 방 밖으로 나오라고 손짓하였다.
나가는 쪽의 방은 사람 한 명이 설 수 있을 정도로 작은 방이었다. 일준이가 방 안에 들어가 문을 닫자 물 쏟아지는 소리가 들려오고 잠시 뒤 녀석의 외침이 들려왔다.
“들어와! 들어가서 레버 당기고 온 몸의 먼지 다 씻어내!”
방에 들어가니 위에는 거대한 샤워기가 있었다. 아마 온몸에 묻은 방사능 분진을 씻어내기 위한 장치이리라.
레버를 내리자 고무 외피가 벗겨질 정도로 많은 양의 물이 쏟아져 내렸다. 몸을 다 닦고 나오니 일준이는 낑낑거리며 고무 외피를 벗고 있었다.
녀석은 벗은 고무 외피를 <폐기물>이라 적힌 상자, 나무 안쪽에 납을 덧댄 상자에 넣고 다시 샤워실에서 몸을 씻었다.
녀석과 같은 행동을 한 다음 건물 밖으로 나온 다음에야 말을 할 수 있었다. 말 그대로 온몸을 납과 고무로 덧대고 박박 씻어대는 꼴이라 온몸이 녹초가 되었다.
“이 행동을 매일매일 실험할 때마다 할 거라고? 사람이 할 짓이야?”
온몸이 땀에 범벅이 되고 코에서는 아직도 고무냄새가 난다. 방독면 필터가 어찌나 두툼한지 숨이 아직도 차는 느낌이 들었다.
“이게 내 안전 수칙이다 이거야. 방사능 물질 접촉과 체내 유입을 원천 차단하고 납과 고무 외피로 모든 방사능을 막아내는 거지.”
“근데 왜 외피를 납 상자에 넣어서 폐기해? 재활용은 안 되나?”
“현대에는 세척해서 방사능 검사로 재활용 유무를 판단하는데 여기서는 방사능 검사를 못 하지? 그럼 재활용 불가 판정을 내려야지?”
저 방사능 보호용 외피 하나의 가격은 수백 냥 정도 할 거다. 이 외피를 일회용으로 쓰고 버리는 미친 행동이나 일준이는 냉정하게 말했다.
“가족이 있는데 덜컥 암에 걸려봐라. 그런 일 막으려고 필사적으로 안전 장구를 덧씌웠지.”
“이해는 했는데 미친 짓이네.”
“미친 짓을 시작한 원흉이 나니까 별수 없지. 최대한 안전을 추구할 수밖에.”
녀석은 백사장에 대자로 뻗어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 태연한 모습을 보고 이게 정말 제대로 된 실험이 맞는지 궁금해 질문을 하였다.
“그런데 우라늄 원광을 염산에 녹이면 라듐이 추출되기는 하나?”
“난 마리 퀴리의 라듐 추출 실험 논문을 몇 번 보았을 뿐이야. 전체 과정을 이십 단계라 치면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사 단계, 머리를 좀 굴려봐야 오 단계까지가 전부고.”
“그걸로 얼마나 농축할 수 있다고? 기껏해야 절반 농축 아니야?”
“잡다한 광석과 육십 퍼센트에 달하는 우라늄이 사라지니 최소한 열 배 농축, 라듐의 화학적 성질을 알고 있어서 조금만 더 가공하면 쉰 배까지 농축할 수 있을걸?”
일준이가 처음에 설명한 것을 떠올렸다. 1톤에 달하는 피치블렌드의 방사선량은 연간 약 24시버트이다. 이 광석의 방사선이 그대로인 채 질량이 2%로 농축이 된다면?
고작 20㎏, 쌀 한 되 부피에 불과한 광물이 매년 방사능 24시버트를 내뿜는다.
내가 목을 긁적거리자 일준이는 웃으면서 말했다.
“그 과정에서 절반 정도의 라듐은 사라진다고 가정해야지. 이걸 감안해도 쉰 배 농축된 피치블렌드, 정확히는 라듐 혼합물 약간이면 내부피폭으로 사람이 죽고도 남아.”
“방사능 홍차냐?”
“이대로 있다가는 몇 년 뒤에는 방사능 홍차가 나올걸? 라듐이 섞인 분진으로 가득한 공장에서 멋도 모르고 홍차에 방사능을 섞어 마시겠지?”
일준이는 위험성을 알고 있어서 철저히 관리하였으나 다른 사람은 위험성을 모른다. 피치블렌드를 채굴하며 폐암에 걸린 광부들처럼 방사능 물질에 손댄 모든 노동자들이 사형 선고를 받는 꼴이다.
녀석은 마스크 자국이 남은 이마를 긁으면서 말했다.
“이래서 내가 속이 타는 거야. 한 번 위험 물질에 손을 댄 과학자들이 직접 생산을 하겠냐. 성공한 실험을 개량해서 노동자들이 하루 종일 하지.”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많이 죽는 사람들은 하루 종일 실험하는 노동자들이라 이 말이군.”
“그다음에는 실험에 몇 달을 투자한 과학자들. 조금 빠르거나 아주 늦게 높으신 양반들이 죽을걸. 높은 양반 몇 명의 암 덩어리 아래에 수백 명의 선량한 사람이 죽어나가지.”
녀석은 이제야 기억이 났다는 듯이 ‘라듐 걸즈’라는 말을 중얼거리며 백사장에 침을 뱉었다. 그러고는 그 위에 모래를 덮으면서 말했다.
“실험을 보면 알 것 같은데 라듐의 분리 과정 중 초반부는 이 시대에도 할 수 있어. 이 시대의 석학들을 생각하면 아마 일 년 이내에 라듐 농축이 시작될걸?”
“그 라듐이 대한제국으로 번져올 수도 있겠네.”
“위험성 증명이 안 되면 황족부터 서민까지 모두 라듐을 퍼먹을 거다. 지가 원해서 퍼먹은 놈들은 죽어도 상관없는데 불운한 희생자는 막아내야지.”
녀석은 괜히 기어가는 소라게를 집어서 손 위에서 가지고 놀다가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켜면서 말했다.
“이번 일에 투자한 자금이 십만 냥이 넘어. 고작 한 번의 실험 증명을 위해서이지만 이 세상의 평화를 위해, 그리고 내 실수를 덮기 위해 쓸 예정이다.”
“생각해 보니 마리 퀴리가 라듐을 추출할 때 고생 많이 했었지. 그 고생을 너도 하네.”
“그 고생의 대부분은 자금난이야. 자금만 있다면 초기 추출은 안전하고 쉽게 할 수 있거든.”
그 초기 추출이 얼마나 안전할지는 두고 봐야 알 일이다. 일준이는 이틀에 한 번꼴로 개인 실험실에 드나들었고 실험을 계속 진행하였다.
* * *
마침내 두 달이 지날 무렵 결과가 나왔다. 녀석은 이제는 방호복이 아닌 평상복을 입고 자그마한 유리병 다섯 개를 나에게 보여주었다.
“사 단계까지 농축하고 나름대로 분류해 본 라듐들이다.”
“이거 안전한 것 맞아?”
“납 상자에 넣고 납 코팅한 장갑 낀 채로 집게로 다루잖아. 절대 손대지 마라.”
잿빛 가루가 들어있는 유리병을 꺼낸 일준이는 심호흡을 하였다. 최종 실험을 위해 안개상자를 준비하고 비교 대상으로 피치블렌드와 우라늄 유리까지 가져왔다.
안개상자에 들어간 우라늄 유리는 아주 가끔 굵은 방사선 궤적을, 가끔 지렁이 같은 궤적을 남겼다. 다음 단계로 피치블렌드를 넣었고 좀 더 많은 궤적이 생겨났다.
“다음으로는 일 번 라듐 샘플.”
일준이가 농축한 라듐은, 정확히는 라듐이 많이 섞인 혼합물은 피치블렌드와 격이 달랐다. 마치 수십 개의 침이 뛰쳐나오듯 수많은 궤적이 안개상자를 메웠다.
일준이는 2번, 3번 샘플은 넣었고 비슷한 결과가 나왔다. 마침내 4번 샘플이 들어간 순간, 방사능이 수백 개의 칼날처럼 퍼져나가는 입자 궤적이 관측되었다.
“이것이 생명력이다! 이 유럽의 유사 과학자 놈들아!”
과학적 지식이 별로 없는 내가 봐도 대성공이다. 일준이는 자신의 승리를 만끽하며 흥분을 가라앉힌 다음 말했다.
“성공이다. 사 번 샘플에는 제대로 라듐이 농축되었는데.”
“성공 이전에 너 몸 괜찮아? 피폭된 건 아니지?”
염려해서 물어보니 일준이는 피식 웃으면서 마스크의 정화통이 달려있던 자리를 두드렸다.
“혹시 몰라서 정화통의 활성탄을 검사했는데 몇 개에서 방사능 궤적이 검출되기는 하더라. 다만 최종 필터에서 검출된 방사능은 없고. 외부 피폭은 무시해도 될 수준이지.”
일준이는 집게로 라듐 샘플을 집어 납 상자에 넣고 장갑을 벗었다. 그러고는 한숨을 쉬며 덤덤하게 이야기했다.
“나야 돈을 펑펑 쓰며 실험을 진행했는데 마리 퀴리는 가난에 시달리면서 끝끝내 순수 라듐을 얻어냈잖아. 직접 해보니 위인 자격이 아니고 성인 자격이 있네.”
“성인이건 위인이건 괜찮은데 앞으로 얼마나 더 추출해야 라듐을 얻어낼 수 있는데?”
“최종 추출물이 십사 킬로그램이 조금 넘으니까 앞으로 오만 분의 일로 추출하면 될걸?”
일준이는 손을 휘적거리며 자신은 엄두에도 안 난다는 듯이 호들갑을 떨었다. 그리고 라듐을 담은 상자를 다시 납 상자로 밀봉하고는 말했다.
“남은 라듐 혼합물은 죄다 두꺼운 납 상자 안에 콩 종자와 같이 밀봉했다.”
“앞으로 일 년이 지난 다음 그 콩의 발아실험을 할 예정이냐?”
“물론, 아예 유럽에 가서 파스퇴르의 실험도 같이 진행할 거고.”
일준이는 자신이 간혹 보아왔던 생명공학과 실험을 떠올리면서 앞으로의 일을 털어놨다.
“난 식물 종자의 방사능 내성 수치까지는 몰라. 다만 이 콩 종자들 대부분은 방사능에 절어버려서 죽었고, 싹이 터도 정상적인 식물로 자라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은 있다.”
“뭐 혹시 이빨이 달리고 침을 뱉는 식물이 나오나?”
“글쎄다. 그건 하느님이나 되어야 알 걸? 만약 콩의 싹이 다 돋아나면 쥐에게 먹여서 암에 걸리게 해야지.”
일준이는 이번 기회의 생기론이라는 세 글자를 유럽 학계에서, 이후 전 세계 학회에서 말살시키려는 마음을 품은 것 같았다.
녀석이 염려하는 방사능 물질 농축 실험에 대한 정보는 없었다.
다만 녀석이 유럽 방문을 준비할 때쯤, 아주 불길하게도 유리로 만든 장신구가 불티나게 팔린다는 소문이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