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효명세자와 함께하는 조선 생활-205화 (205/345)

205화

18장 4화 한편 세계는

미국으로 파견된 고생물학자들은 내 생각보다 훨씬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었다. 이들이 건너가고 첫 탐사가 시작된 지 3개월인 1850년 8월, 첫 보고서가 도착하였다.

“할 일이 넘쳐나는걸. 벌써 서른 곳이 넘는 광맥을 발굴했잖아.”

“그 뿐만이 아닙니다. 아메리카 원주민들과 평화 협정을 맺은 경우도 있다 하였습니다.”

미국은 서부 개척을 조금이라도 빠르게, 효과적으로 진행하기 위하여 대한제국과 협정을 맺었다. 상대적으로 기술자가 많은 대한제국의 기술자를 고용해 광맥 탐사를 진행하였다.

미국 정부의 생각은 간단하다. 험난한 황무지에서 금광이라도 발견되면, 하다못해 질이 떨어지는 은광이나 동광이라도 발견되면 어중이떠중이들이 몰려든다.

이들은 자연스럽게 마을을 형성하고 개척에 돌입한다. 이후 정부에서 관리를 파견하고 판사와 행정 인원을 배정하여 미국 정부의 주(state)로 승격시키는 본래 역사의 방법이지.

외부 관리들은 이곳저곳에서 보내온 고생물학자들의 보고서를 정리하여 전해주었다. 하나하나를 읽어나가다 의외의 사항을 발견하자 저절로 웃음이 나와 버렸다.

“외몽골에서 건너간 전사들이 청년들을 이끌고 기병대를 창설하였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일부 인디언, 해당 지역에 살던 원주민들이 외몽골 전사들을 숭배하며 함께 기마술을 배운다 하였습니다.”

“이러다가 미국 중앙에 아메리카 울루스라도 생기는 것 아닐까?”

“그렇게 되면 미국에서 내전이라도 터진다는 말씀이십니까?”

아래 관료들이 웃으며 넘겼는데 남북전쟁은 조만간 일어날 예정이다. 아마 내 계산대로라면 서부 개척이 가속화되며 흑인 노예들이 부족해지는 바람에 조금 더 빨리 일어나리다.

우리는 북 치고 장구 치면서 미국에게 필요한 무기와 물자를 팔아넘기면 된다. 군사적 개입은 아예 불가능한 것이 대한제국의 가용 병력을 모두 쏟아 부어도 전황을 뒤집을 수 없다.

양측에서 연인원 기준 90만, 총 병력 320만 명이 튀어나오는 곳을 어떻게 들어가겠는가. 그러니 320만 명에 달하는 사람들의 소모 물자를 공급하며 산업 역량을 확충해야지.

잠시 생각이 다른 곳으로 새었다. 아무튼 좋은 결과이며 미국 입장에서도 대한제국의 개척자들이 가진 역량을 확실하게 알게 되었군.

이걸 제대로 이용할 작정으로 말했다.

“내전이 터지면 더 좋은 일 아닌가? 남의 집 전쟁보다 남는 장사가 없지 않나.”

“우리 외부 입장에서는 아닌 것 같습니다. 전쟁 전 조율과 전후 처리가 가장 끔찍하니까요.”

“그러면 또 다른 전쟁을 시작해 볼까? 얼마 전 새로 부임한 미국 전권 대사와 러시아 대사와 함께 논의해야지. 알래스카 구매 계획을 다시 진행하자고.”

크림 전쟁의 조짐은 날이 갈수록 커지고 있었다. 러시아는 이전 대사인 푸시킨처럼 유동적이고 자유로운 문관 출신이 아닌 강직한 장군을 전권 대사로 파견하였다.

미리 서신을 보내고 대사관으로 향하였다. 잠시 뒤 대사들이 공용으로 사용하는 별채에 훈장을 주렁주렁 달고 러시아 제국 군복을 입은 장성 겸 전권 대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위대한 차르의 명을 받아 대한제국의 전권 대사로 파견된 리프란디, 인사를 올립니다.”

바로 나폴레옹 전쟁에 참가하고 이후 많은 공훈을 쌓은 파벨 페트로비치 리프란디(Pavel Petrovich Liprandi) 장군이다.

그는 이런 외교적 자리에도, 내가 굳이 옷을 정복으로 입고 올 필요가 없다 말했음에도 자신의 훈장을 모두 착용하고 막 다린 듯 날이 서 있는 군복을 입고 방문하였다.

“리프란디 장군의 위엄은 군인의 모범이자 러시아 차르께서 눈여겨볼 훌륭한 모습입니다.”

“한센 후작께서 본관(本官)을 지나치게 칭찬해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내가 알기로 이 양반은 부임한 직후부터 차르의 명령을 이해할 수 없다며 불만을 토로했다더라. 러시아 사람치고는 의외로 아래 사람을 잘 다룰 줄 알고 처벌을 적게 내리는 편이라던가.

이 시대 러시아의 지배층은 민중을 쥐어짜고 자유주의나 계몽과는 담을 쌓고 산다. 반면 이 양반은 전권 대사로 부임되자마자 우수리스크에 방문하였다.

명목상으로는 우수리스크에 유배된 시베리아 유형수들의 관리요 실제로는 내 부탁을 받은 결과물이다. 이렇게 유연한 사고방식을 지닌 사람은 러시아에 흔하지 않다.

물론 니콜라이 1세의 생각이 어떤 꼴인지 이 양반의 복장이 증명한다. 재능이 있는 사람을 전권 대사로 파견하여 유사시에 동부 전선 지휘관으로 삼으려는 속셈이지.

“두 분이 먼저 와 계실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미국 정부에서 파견한 전권 대사 제퍼스 데이비슨 인사를 드리겠습니다.”

미국 전권대사는 미국 남북전쟁의 남부 연합을 이끈 대통령, 제퍼슨 데이비스이다. 아직 정치적 역량을 드러내지 않은 사람이나 장인어른인 재커리 테일러가 임명해 주었다던가.

우리 모두가 원탁에 앉아 서로를 살펴보았다. 이미 몇 차례에 걸쳐 니콜라이 1세와 현 미국 대통령 재커리 테일러와 서신을 주고받아 서로의 입장은 알고 있었다.

가장 먼저 운을 뗀 사람은 알래스카를 사는 사람인 나와 제퍼슨이 아닌 리프란디 장군이었다.

그는 헛기침을 몇 번이고 하더니 진중하게 말하였다.

“대한제국에서 알래스카를 구매할 예정이라 했을 때는 참 이상하게 생각했습니다. 나중에 차르의 명을 받고 곰곰이 생각하여 보니 전술적으로는 합리적인 판단이더군요.”

“제가 처음부터 말씀을 드리지 않았습니까. 영국이 러시아의 힘을 빼놓기 위해 영국령 북아메리카(훗날의 캐나다) 군대를 이용해 알래스카를 공격할 것 같습니다.”

“바로 보셨습니다. 험난한 베링해협을 넘어 병력을 증원하는 것도 문제이고, 설령 병력을 증원해도 우수리스크 일대가 공격을 당할 것 같군요.”

“동양에서는 계륵(鷄肋)이라 합니다. 맛은 좋으나 손은 많이 가고 양은 얼마 안 되지요.”

리프란디 입장에서 알래스카는 계륵과 같지. 애초에 러시아는 기초 과학도 부족하며 전문 인력 파견도 못 하는 수준의 나라이다.

시베리아 개척은 자유나 계몽을 논하는 지식인을 닥치는 대로 체포한 뒤 쏟아부어서 진행한다. 그 과정에서 아까운 인재가 죽건 말건 지배층 입장에서는 관심이 없다.

“계륵이라니요? 제가 보기에는 제국의 가장 외곽에 달라붙은 얼음 덩어리 같은 겁니다. 제 훌륭한 콧수염에 겨울이 되면 달라붙는 얼음처럼 말이지요.”

“그것참 훌륭한 말씀이군요.”

이미 러시아는 미국과 대한제국이 알래스카를 구매한 돈으로 전쟁 자금을 준비하려 하였다. 이제 미국만 구매에 동의하면 되는데 제퍼슨 데이비드가 우물쭈물거리며 말했다.

“참으로 난해한 말씀이지만 의회 표결 결과는 찬성이나 대통령 각하의 서명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아시다시피 최종 결정권자는 대통령 각하 아닙니까.”

“재커리 테일러 대통령께서 불만이 많은가 봅니다.”

“리프란디 전권대사께서 말씀하신 바가 옳습니다. 대통령 각하께서는 알래스카를 단독 구매하면 서명할 것이라 하였는데 단독 구매는 표결 반대, 공동 구매는 찬성이더군요.”

둘의 대화를 듣고 심드렁한 표정으로 머나먼 동쪽을 바라보았다. 지금쯤 소식이 전해졌어야 하는데 제법 늦게 전해지는 것 같다.

현 미국 대통령인 재커리 테일러는 미국-멕시코 전쟁의 영웅이자 군 출신이라 온전한 미국을 원한다. 한마디로 다른 나라의 의견이 개입된 미국을 반대하는 사람이었다.

대한제국이 고생물 학자를 파견한 행위는 지질학적 탐사로. 외몽골 군인은 일종의 이민자로 받아들일 수 있는 한계선이었다.

나는 책상을 손가락으로 딱딱 두드리며 제퍼슨에게 말하였다.

“미국의 단독 구매로 방향을 선회하면 어떻습니까?”

“단독 구매에 들어가는 팔백만 달러가 뉘 집 강아지 이름도 아니고. 지금 대한제국 덕분에 구매하자는 소리라도 나오는 겁니다.”

중립 외교가 이런 점에서 재미있다. 양 측의 이해득실을 조율하면서 중간자적 입장으로 사태를 관망할 수 있지. 물론 한 발자국만 어긋나면 양쪽에서 공격을 당한다.

결국 이번 협상도 파투가 난 것 같다. 재커리 테일러 이 양반이 예상보다 오래 살면 정말 알래스카를 미국이 단독 구매할지도 모르겠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 대사관을 담당하는 서기관이 정신없이 뛰어와 소식을 전하였다. 귓속말을 들은 제퍼슨 데이비스는 얼굴색이 몇 번이고 변한 다음 중얼거렸다.

“대통령 각하께서……. 지난 7월 9일 서거하였습니다.”

“지금 뭐라 하셨습니까? 대통령 각하께서 서거하였다니요!”

“독립기념일 행사에서 무더위에 시달리다가 우유를 드셨는데 복통을 호소하시다…….”

제퍼스 데이비슨은 대통령이자 자신의 장인어른의 급사에 고개를 숙이며 책상에 머리를 찧었다. 그를 위로하듯이 먼저 리프란디가 나서 위로의 뜻을 담은 말을 하였다.

“러시아를 대표하여 고인께 삼가 조의를 표합니다. 이 소식이 이미 차르께 전해졌을 것이니 국가 공식 조의가 전달될 겁니다.”

“저 또한 황제폐하께 보고를 올려 조문단을 보내드리겠습니다. 고인과 오래 언변을 나누어 본 적은 없으나 항시 강건하고 미국을 위하여 사력을 다하던 분이었습니다.”

“참으로 고맙습니다. 잠시 대사관으로 돌아가 기도를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나와 리프란디는 위문을 표시하였지만 서로를 보면서 웃고 있었다. 알래스카 구매에 가장 큰 장벽인 재커리 테일러가 숨을 거두며 서로의 이해관계가 일치한 것이다.

한창 확장공사가 진행되고 있는 경운궁, 훗날에는 덕수궁이라 불리는 곳을 리프란디와 함께 걸어갔다.

그는 웃옷에서 산호석 파이프를 꺼내 담뱃불을 붙이며 말하였다.

“일이 잘 풀리는 것 같아서 다행입니다. 한센 후작께서 고대하시던 알래스카 구매로군요.”

“중립국의 위치를 지키기 위하여 손을 많이 써보았습니다. 저희 입장에서도 손해입니다.”

그 손해는 아마 알래스카에 고생물 학자를 파견하고 5년 이내에, 늦어도 10년 이내에 메꾸고도 남으리라. 리프란디는 두툼한 코트를 벗고 편안한 와이셔츠 차림으로 말하였다.

“차르께서 이번 전쟁에 사활을 걸게 되어 참으로 유감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나저나 말씀하신 대로 우수리스크를 시찰해 보았는데 결과가 참 재미있더군요.”

“결과가 재미있다 하셨습니까? 리프란디 전권대사께서 재미있다 하시니 더 흥미가 돋는군요.”

이미 결과는 알고 있으나 굳이 말하지 않았다. 우수리스크는 이미 대한제국의 영향권이며 연해주 전체로 그 영향권이 확대되고 있는 지역이다.

리프란디는 땀을 뻘뻘 흘리며 담배를 다시 한 모금 빨아들였다. 희뿌연 연기가 허공으로 솟구치며 그의 말이 시작되었다.

“우수리스크에 처음 건너온 옛 조선의, 지금은 대한제국의 유랑민들은 초기 인원 이십칠만 명에서 이제 삼십구만 명으로 인원이 늘어났습니다.”

“참으로 고무적이로군요. 저희는 관리 파견도 안 하고 거래만 하고 있어서 잘 몰랐습니다.”

“또한 카자크 기병들도, 머나먼 길을 유배 온 시베리아 유형수들도 모두 이들의 압도적인 생산력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이미 카자크 기병이나 유형수와 혼인한 가족들도 많더군요.”

“서로 간에 통혼을 하면 이미 볼 것은 다 봤군요.”

다 알고 있는 사실이나 억지로 놀란 척을 하였다. 리프란디는 저 멀리 확장공사가 진행되는 건물을 보면서 중요한 이야기를 하였다.

“차르께 그대로 보고 드리면 우수리스크에서 강제 징병을 실시할 것 같습니다. 그렇게 되면 대한제국과 영구히 적대적 관계로 돌아설 것이 분명하여 보고를 왜곡하였지요.”

우리가 조선시대로 넘어오기 전 보였던 광경이 떠올랐다. 길거리에서 끌려가는 사람들과 병자건 노인이건 닥치는 대로 징집하는 어떤 나라의 미친 몰골이.

그 나라가 170년을 후퇴한 건지 아니면 전통이 이어진 것인지 모르겠다.

아무려면 좋은 일이니 리프란디에게 농담하듯 웃음을 섞어가며 말하였다.

“지엄한 차르의 명령을 어기고 법을 어긴 것이 아닙니까?”

“아직 어긴 것이 아닙니다. 그저 우수리스크의 사람들이 시베리아의 혹한에 시달려 가까스로 입에 풀칠을 하며 비루한 삶을 살고 있다는 말이 전부입니다.”

“상대적으로는 맞는 말이로군요.”

“그렇지요. 저는 굳이 ‘대한제국과 비교하여’라는 말을 하지 않았을 뿐입니다.”

리프란디는 머나먼 훗날을 생각하는 인재였다. 그는 아무 생각 없이 차르의 명령을 이행하기보다는 그 명령으로 인한 파장과 훗날 러시아가 겪을 시련을 염려하였다.

만약 고집불통의 장성이 왔다면 일이 복잡해진다. 우수리스크로 이주한 사람들을 대피시키거나 강제 징집을 취소시키기 위해 뇌물을 제공해야 했을지도 모르지.

자신의 지위가 박탈당할 위기에 처했음에도 러시아를 생각하는 그 훈훈한 마음이라니.

나는 리프란디에게 지나가듯이 말하였다.

“만에 하나 우수리스크가 대한제국의 영토로 할양되어도 자유시 몇 개 정도는 남겨드리지요.”

“만에 하나가 아니라 이런 구도를 원하신 것 같은데요.”

“들켰군요. 눈앞에 이토록 식견이 넓은 장군이 있는데 러시아가 승리할지도 모르겠군요.”

리프란디는 할 말을 마치고 파이프 안에 들어 있던 불똥을 바닥에 떨궈놓았다. 그는 한창 확장 공사가 진행되는 박물관을 바라보며 마지막으로 말하였다.

“저는 언젠가 전선에 설 사람입니다. 그때가 되면 후작님의 양심을 믿을 수밖에 없습니다.”

“정치인이나 외교관에게 양심은 지옥에서나 찾을 수 있는 단어 아닙니까.”

“그러면 대한제국 황제폐하의 양심을 믿어보겠습니다.”

악수를 나눈 리프란디는 다시 대사관으로 돌아갔다. 오늘 회의의 결과를 정리하기 위해 내각사로 돌아가려는데 공사현장에 익숙한 얼굴이 있었다.

“어…… 현상이냐?”

“네가 왜 여기 있어?”

일준이는 창백한 몰골을 한 채로 공사현장을 지켜보고 있었다. 녀석은 고민이 있을 때면 이런 혼잡한 장소를 찾아 뭐라 중얼거리곤 하는데 표정이 완전 시체 몰골이다.

“동양 문화의 정수와 최첨단 과학 그리고 이 시대에 발굴할 수 없는 화석과 고고학적 유산까지 모두 집결한 박물관이 차츰 완공되고 있잖아. 뭐 이리 죽상이야?”

일준이는 똥 씹은 표정으로 한참 동안 공사현장을 지켜보았다. 그러고는 웬 납으로 만든 자그마한 상자를 주머니에서 꺼내더니 안에서 작은 유리조각을 보여주며 말했다.

“죽상을 넘어서서 과학이 인류를 해롭게 만드는 꼴이 보고되어서 그래. 이 유리조각의 정체가 뭐 같아?”

“고작 유리 조각 하나 가지고…….”

자세히 보니 색이 반투명하게, 마치 바셀린 색상과 비슷한 초록색 유리였다. 보자마자 불길하다는 생각을 했는데 이 유리가 어떤 물건인지 과거의 기억을 금방 떠올렸다.

“그거 방사능 유리 아니야?”

“정확히는 방사능 물질인 산화 우라늄을 넣은 유리지.”

“그 유리를 네가 만든 거야?”

“내가 이딴 흉물을 왜 만들어!”

일준이는 지금까지 일어났던 일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다. 영국에서 우라늄을 넣은 유리병이 만들어졌다는 사실, 이 유리병이 하필 콜라 원액을 담는 용도로 사용된다는 사실도.

마이클 패러데이가 일준이에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자문을 요청하였다. 녀석은 거의 절망한 표정을 하면서 자리에 쭈그려 앉아 당시의 일을 말하였다.

“나도 나름 꾀를 써서 안개상자를 만들어냈어. 이론적 바탕은 없는데 머리를 굴려 다산 선생님이 이야기한 ‘기(氣)’를 측정하는 도구라고 뻥을 섞어서 방사능 측정기를 만들어냈지.”

“그러면 안개상자로 방사능을 측정할 수 있잖아? 그러면 위험성을 누구나 알 거 아니야?”

“그걸로 끝나겠냐. 이 시대에는 생기론(生氣論)의 영향력이 커서 아주 난리가…….”

생기론은 나도 공부한 적이 있는 요소이다. 솔직히 말해 현대의 유사과학 가운데 이 생기론에 기반을 둔 철학이 너무나 많다.

간단히 말해 생물에는 ‘생명력’이 있으며 이것을 통해 여러 본질이 발현된다는 말이다. 당연히 철학자들의 공격과 과학자들의 실험결과로 타격을 받고 몰락하였다.

갑자기 말이 끊긴 일준이는 나와 눈도 마주치지 않으려고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나도 본래 역사를 잘 알고 있는 사람이라 녀석이 굳이 말 하지 않으려는 사실을 이야기했다.

“혹시나 유럽의 과학자들이 생기론적 관점으로 방사능 물질에 생명력이 있다고 하나 보지?”

녀석은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 나를 한참 동안 쳐다보았다. 그래서 청산유수처럼 본래 역사에서 벌어진 일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다.

“그 안개상자라는 물건이 방사능 측정도 가능하다면서? 더 많은 방사선이 발생할수록 더 생명력이 많다고 하면서 불티나게 팔려나가지 않아?”

“맞아. 어떻게 알았어?”

“거기다가 우라늄 원석을 가공해서 목걸이나 팔찌도 만들고. 우라늄을 가득 담은 유리병에 이것저것 넣어 먹고. 아예 우라늄을 물에 녹여 타서 마시지?”

“그걸 어떻게 예측했냐?”

“예측이 아니야! 본래 역사에서 일어났던 일이니 잘 알고 있지! 우라늄도 아니고 라듐을 퍼마셨잖아!”

본래 역사에서는 1898년에 발견된 라듐은 점차 세상에 알려져 상업적으로 쓰이게 되었다. 위험성을 마리 퀴리가 경고하여도 꾸준히 쓰였다.

시간이 지나 1920년대쯤 되어서 라듐은 만병통치약이 되었다. 그 결말은 라듐이 함유된 생수를 과도하게 복용한 사람이 온몸이 암으로 범벅되어 죽으면서 끝났다.

일준이는 자신이 방사능을 관측할 수 있는 도구를 만들어 이 끔찍한 사태를 일으켰다고 자책했다.

아예 틀린 말은 아닌 것이 일준이의 안개상자가 아니라면 방사능은 먼 훗날 발견되었겠지.

“일단 네가 어떻게든 사태를 수습해야 할 것 같은데. 위험성 입증 실험은?”

“준비는 했는데 시간이 오래 걸려. 피치블렌드 원광을 받아와서 고농도 라듐 혼합물을 만들어낼 계획이다.”

라듐이라니? 일준이의 몸이 괜찮을까 염려했는데 녀석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라듐의 완전 농축은 방사능 물질이 많이 유출되지만 단순 농축은 그리 큰 문제는 아니다. 염려하지 마.”

“그다음은?”

“콩 종자를 농축물질과 같이 보관해서 안개상자에서 입자가 관측되게 만들어야지. 여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일 년이야.”

“왜 일…… 아 맞아, 방사능이 콩 종자에 축적되어야 해악을 증명할 수 있지?”

앞으로 유럽에서는 수많은 방사능 상품들이 불티나게 팔리리라. 그나마 프랑스는 일준이의 말을 무조건 믿으니 조금 덜 팔리리라.

“다산 선생님이 나에게 양심을 가르치라 했는데 그 날이 이렇게 빨리 올 줄이야.”

“그래도 다행이라고 생각해라. 지금 가르치지 않으면 먼 훗날 더 큰 문제가 될 거잖아.”

일준이는 불길한 초록색의 방사능 유리를 다시 납으로 만든 상자에 넣었다.

이 방사능의 광기가 어떻게 이어질지 모르지만 일 년 뒤의 유럽은 어떠한 몰골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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