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효명세자와 함께하는 조선 생활-194화 (193/345)

194화

17장 4화 여유당 학회(2)

정약용은 내 이야기를 듣더니 한참을 아무 말도 없이 생각에 잠겼다. 그러고는 화들짝 놀라며 나에게 타박을 늘어놓았다.

“광고가 너무 지나치지 않았나? 이백 명도 까마득한 와중에 이천 명이라니!”

“아예 기술 박람회 수준의 인파가 몰려들 것 같습니다.”

“내 말이 그 말일세. 이를 어찌하면 좋겠나?”

정약용은 전통적인 한옥이 많은 경운궁, 훗날의 덕수궁 인근에 거주하였다. 경운궁은 이 시대에 사용하지 않는 궁궐이라 각국 대사관 및 부속시설이 자리하였다.

오히려 그 과정에서 궁궐 면적이 증가하였다. 토지를 구매하고 옛 전각을 복원하는 방식으로 자리를 만들어 낸 덕분에 본래 경운궁 면적의 10배가 대사관에 할양된 면적이다.

효명제가 허가한 생일잔치에 덕수궁을 임시로 빌리는 것이 가능하겠지. 어차피 방문객들에 대한제국에 머무르는 각국 대사들도 포함되어 있으니 나쁜 일은 아니다.

“황제폐하께 건의하여 경운궁을 임시로 사용하면 어떠하겠습니까?”

“궁궐을 사용해 생일잔치를 실시한다고?”

“대사관이 자리 잡고 나서 각 전각이 서양식으로 새로 만들어져 옛 모습이 사라진 장소입니다. 그렇다고 이천 명의 인파를 여기에 머무르게 할 수도 없는 노릇 아닙니까?”

경운궁은 사실상 궁궐이 아닌 인조가 즉위한 기념장 역할이 전부이다. 효명제에게 의사를 물어보니 아주 통 크게 답하였다.

“생각하여 보니 경운궁은 궁궐도 아니지 않느냐. 인근의 경희궁과 통합하면 더욱 좋을 것 같으니 이번 기회에 경운궁과 경희궁 사이의 모든 저택을 구매하도록 하겠다.”

경희궁은 순조와 효명제 모두의 취향에 안 맞는 궁궐이라 조정에서 별로 중요하지 않은 부처들이 머무르는 곳이었다. 이 경희궁을 합병하면 오히려 더 좋은 결과이다.

경희궁은 흔히 일제가 훼손하였다 했는데 이는 진실이 아니다. 흥선대원군이 부족한 나라 살림에도 억지로 나라를 쥐어짜 내 경복궁을 중건하며 경희궁에서 자재를 가져갔다.

반면 풍족한 나라 살림으로 경복궁을 중건하여 경희궁은 멀쩡히 남아 있었다.

효명제는 아예 지도를 가져와 경운궁과 경희궁 사이를 가리키며 말하였다.

“그렇지 않아도 경운궁의 면적이 비좁아 이야기가 많았는데 잘된 일이다. 즉각 추진하라.”

“명을 받들겠사옵나이다.”

“또한 조정의 사람을 보내 식자재와 각종 필요 물자를 지급하겠다. 남은 물자는 모두 경운궁 통합공사를 할 때 소모하면 충분하니 염려하지 말도록 하라.”

효명제도 정약용을 아끼고 있었다. 젊은 시절 자신을 몇 년 동안 괴롭힌 위궤양을 치료한 사람이니 그 은혜를 보답하려는 은혜이리라.

모든 문제가 해결되어서 정약용은 경운궁의 부속 전각 중 하나로 거처를 옮기게 되었다.

생일잔치가 열리는 8월 8일이 아닌 7월 말부터 수많은 이들이 인천을 통해 입항하였다.

“아주 장관이 따로 없군. 숙소는 어떻게 정했냐?”

일준이는 미리 인천 항구에서 서양의 과학자들을 맞이하고 인솔하는 작업을 진행했다. 녀석은 그랑제콜 신축 기숙사에 삼백여 명을 할당한 뒤 나에게 물어보았다.

“대한제국 사람들은 한양의 자기 집이나 친척 집 혹은 다산 선생님 지인들의 저택에 머무를 예정이야. 대신 외국인으로 한양 내부에 숙박업소는 이미 다 미어터지고 있지.”

“이거 완전 국제 박람회 수준인데.”

“이 정도면 국제 박람회 개최도 가능한 거 아니야?”

지나치게 많이 모인 사람들을 정약용의 아들, 손자들과 함께 하나하나 분류하였다.

이 과정에서 몇몇 부류의 사람들은 자신들이 가장 먼저 인사를 올릴 것이라 하였다.

“저희 영국 왕립 지리협회는 닥터 여유당의 생일을 맞이해 인사를 드리러 방문하였습니다. 추후 일정으로 한반도의 지리적 특성을 확인하려 합니다.”

“그러하면 몇 달 정도 머무르실 예정이로군요.”

“당연합니다. 이 머나먼 곳 까지 왔는데 적어도 여섯 달 정도 이곳저곳의 관(tour)…… 이곳저곳의 지질학적 특징을 모두 함께(tout ensemble) 관측하려 합니다.”

일단 왕국 지리협회와 프랑스 지질학 아카데미 회원들은 목적이 분명한 사람들이라 정약용에게 먼저 인사를 올리기로 하였다. 뭔가 어색한 분위기가 느껴지는데 내 억측일지도 모른다.

이들은 나이대가 맞지 않는 남녀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유를 더 모르겠네.

“닥터 여유당의 생일을 기념하며 동시에 한반도의 지리 연구를 위하여 방문하였습니다.”

“무슨 이유로 방문하였는지 잘 알 것 같구려. 그러하면 어디를 볼 생각인가?”

“저희 왕립 지리협회는 설악의 거대한 화강암 암반을 조사하려 합니다.”

“저희 지질학 아카데미는 금강의 골짜기를 탐사하려 합니다.”

정약용은 이들의 면모를 살펴보고 실없이 웃다가 한참을 또 확인하였다. 그러더니 하인을 시켜 방 안에서 지도를 한 장 가져와 한참을 바라보고 답해주었다.

“학문을 익힐 사람들이 그런 험한 곳에만 머물면 기력을 낭비하는 법이지. 내 속리산과 주왕산을 추천할 것이니 여러 산을 옮겨가며 다니도록 하게나.”

정약용은 아예 자신이 추천서를 작성하여 건네주었다. 이들은 고개를 꾸벅 숙이고 추천장을 받아들고 다시 인사를 올렸다.

“사람이 너무 많고 번잡하여 먼저 인사를 드린 점을 진심으로 사과드리겠습니다.”

“오히려 내가 사과해야 할 일이 아니겠소. 나이가 많고 제자들이 번성하여 허명만 세상에 퍼트리게 되었는데 참으로 불민한 일이지.”

120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정약용은 이들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한참 동안 웃더니 배를 부여잡고 숨을 골랐다.

“뭐가 그리 우스운 일입니까?”

“자네는 우습지 않단 말인가? 그러고 보니 자네…….”

정약용은 가느다랗게 눈을 뜨고 나를 한참 살펴보았다. 그러더니 한숨을 쉬며 말하였다.

“자네는 눈치가 있는 것 같으면서 없다니까. 저 사람들이 진정으로 학술을 논하러 왔다면 태반이 남성들이었을 거라네. 왜 귀부인들이 섞여 있겠는가?”

뒤늦게 이들이 생일잔치에 방문한 이유를 알아차렸다. 이들은 정약용의 생일과 지리학 관련 학술 모임을 핑계 삼아 대한제국에서 불륜을 저지르려는 것이다.

평상시라면 대한제국에 여행을 올 때 가족들과 함께 방문하리라. 대신 엄숙한 학술 모임을 핑계 삼으면 혼자서 여행을 올 수 있다.

이 과정에서 미리 약속한 사람과 배에서 합류하거나 아예 배에서 새로 만나게 된 것이다.

정약용은 내 표정을 보면서 말하였다.

“자네도 뒤늦게 알아차린 것 같군. 내가 저런 마음을 알아차려 속리산과 주왕산 같이 오르기 편하고 주변에 놀 거리가 많은 산을 추천하였네.”

“봉치에 포도군사라는 속담이 생각나는군요.”

“옳은 말이야. 본래 잔치가 열리면 이웃 마을 주당들이 초대를 받지 않아도 가서 술 좀 마시겠다고 쌈짓돈을 털어내지 않나.”

순간 정약용에 대한 야사가 떠올랐다. 널리 알려진 야사는 아니고 유배지인 강진의 주막에서 주모의 딸과 정을 통하여 후사를 보았다는 이야기이다.

지금 생각하면 신뢰성이 낮은 야사이기도 하다. 정말 후사를 보았다면 현대에 정약용의 다른 후손들이 유전자 감식이라도 해서 자신이 후손임을 증명했겠지.

야사가 거짓이라 생각하여 정약용을 바라보았다.

문제는 정약용이 나와 눈이 마주치더니 괜히 성을 내기 시작한다.

“왜 그렇게 보나? 내가 그러한 일을 한 적이 있는 것 같은가? 다 주변에서 풍문으로 들었네.”

“그러시면 굳이 화를 내실 필요가 없을 것 같습니다만?”

정약용은 고개를 돌려 주변을 바라보았다. 불행 중 다행으로 아내 홍 씨는 여름 더위가 너무 심해 저 멀리서 하인들의 시중을 받고 있어 이 대화를 듣지 못하였다.

아무래도 야사는 반 정도 진실인 것 같았다. 후손을 안 보되 정을 통하기는 했겠지. 이건 정약용의 명예를 위해 꾹 참고 넘기기로 하였다.

정약용이 잘 아는 부류의 사람들 외에 다양한 이들이 참석하였다.

의외로 성직자들이 많이 따라왔는데 외방전교회의 사람이 인사를 올렸다.

“파리 외방전교회의 장 조제프 페레올입니다. 여유당 대감의 생일을 감축하러 왔습니다.”

“이 나라에도 천주교 사제가 있는데 왜 파리에서 방문하였는지 알 것 같구려.”

정약용은 대놓고 불쾌함을 드러내진 않았다. 그저 불편한 심기를 슬쩍 드러내 은연중에 압박하다 지나가는 듯이 대수롭지 않게 말하였다.

“혹여나 서학(西學)을 다시 믿으라는 말을 하러 왔으면 믿을 자격도, 이유도 없다 답할 거요.”

“저희 외방전교회는 여유당 대감께서 당시에 처하신 상황과 황 알렉시오(황사영)의 행위를 고려하였습니다. 당시의 배교 선언은 강압에 의한 것이라 판단하게 되었지요.”

“배교뿐이라면 옳은 말이지. 나는 박해 당시에 노비와 아이들을 중심으로 심문하라 하였소. 은전 서른 닢에 예수를 팔아넘긴 유다보다 더한 행적 아니오?”

장 조제프 페레올 신부는 정약용을 바라보고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숙였다. 정약용은 이 모습을 지켜보며 답하였다.

“불란서에서, 설령 이태리의 법황(法皇 - 교황)께서 나를 용서하였다 해도 난 돌아갈 의지가 없소. 다만 내 자식과 후손들은 신자로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으니 이들을 돌봐 주시오.”

“좋은 날에 이토록 불편함을 끼쳐드려서 송구할 따름입니다. 그러하면 물러나 보겠습니다.”

천주교 신부들이 물러나자 다음으로 온 사람은 내가 자주 보아온 사람이었다.

영국에 있는 로버트 리스턴과 의사들은 머리가 스트레스로 다 벗겨진 채로 정약용에게 인사를 올렸다.

“닥터 여유당께서 여든여덟 번째 생일을 맞이하였다기에 방문해 보았습니다.”

“다른 꿍꿍이가 있는 것 같구려. 의사는 물론이고 젊은 학자들과 함께 방문할 줄이야.”

“그놈의 종의 기원이 문제였습니다. 종의 기원을 저술한 찰스 다윈이야 성직자들의 공세에 당할 줄 예상했었지요! 그런데 찬성하였던 사람들 전체가 공격을 당하다니요!”

로버트 리스턴은 구구절절한 사연을 내뱉었다. 그를 비롯해 수많은 이들은 신부와 목사 심지어 철학자들이나 인류학자들의 맹폭격을 당하고 있다더라.

“그러하면 찰스 다윈이라는 젊은 학자는 왜 안 왔소?”

정약용은 괜히 볼을 긁적거리며 물어보았다. 사실상 정약용의 생일을 핑계 삼아 대한제국으로 도피를 왔는데 왜 찰스 다윈이 안 왔을까.

리스턴은 이 말을 듣고 발을 동동 구르며 말했다.

“중간에 교회로 납치당했습니다. 마차가 갑자기 경로를 꺾더군요.”

“납치?”

“나중에 서신이 왔는데 이틀 내내 시달리다 기절해서 병원으로 실려 갔다 했습니다.”

정약용은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는 듯이 괜히 헛기침을 하며 리스턴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저 멀리서 대기하고 있는 신부와 목사들을 슬쩍 바라보고 말하였다.

“아무리 보아도 대한제국에서도 시달릴 것 같으니 만주로 올라가 잠시 휴식을 취하시오.”

“제 생각도 같습니다. 한양에서 또 시달리면 정신이 나갈 것 같습니다!”

다시 한 무리의 사람들이 사라졌다. 생일잔치 대신 다른 꿍꿍이로 방문한 사람들. 자신이 그리 중요한 사람이 아니라 생각하는 사람들이 점차 사라져갔다.

마침내 생일잔치 전날이 되자 2,000여 명의 인파 가운데 800여 명이 사라졌다. 마지막으로 8월 7일 저녁에 방문한 이들은 농민 출신이 분명한 노인들이었다.

정약용도 이들의 정체는 모르는 눈치였다. 열 명에 불과한 이 노인들은 아예 절을 올리며 인사를 올렸다.

“다산 대감님의 제자분이 이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어주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다산이라? 예전에는 내 호가 다산이기는 하였지.”

정약용은 한참 동안 이 노인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탄식하듯이 말하였다.

“자네는 내가 다산초당에 있을 당시에 여러 잡무를 보아주던 유진수 아닌가?”

“바로 보셨습니다. 이제는 손자가 열둘이나 되는 노인이 되었습니다.”

“자네는 주영훈, 또 자네는 양석…… 양일석이었나?”

“기억해 주시니 너무나 좋은 일이 아니겠습니까. 저희 모두가 다산 대감님을 모시던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정약용의 생일잔치에 가장 어울리는 사람들이다. 예전에는 가혹한 수탈을 당하며 삶을 근근이 이어가던 농민들이 나이를 먹고 도성까지 올라온 것이다.

정약용은 거의 40년 전에 유배지에서 만났던 사람들을 돌아보고 한 줄기 눈물을 흘렸다. 그러고는 억지로 화를 내며 고함을 쳤다.

“환갑이 넘은 노인들이 한양까지 올라오다니! 그러다가 객사라도 하면 어떻게 하려고!”

“올라가고 내려오는데 길어야 닷새가 걸리는데 객사를 할 이유가 있습니까? 마을에서 돈을 모아 기차표를 구매하였지요.”

“기차를 타기 전까지는 배를 통해 왔습니다. 비록 돌아가는 기차까지 타면 집안 쌈짓돈이 거덜 날 기세지만요.”

옛날이라면 꿈도 못 꿀 일이나 이제는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정약용은 자리에서 일어나 이들과 하나하나 악수를 나누며 말하였다.

“고생이 많고도 많았어, 삼정이 문란하고 나라가 부패하여 자네들 모두가 크나큰 고초를 겪었지. 이제는 그러한 고초가 옛말이 되었군.”

“예전에는 농사를 지어도 절반을 수탈당했습니다. 이제는 제도가 바뀌며 농사를 지은 만큼 세금을 내서 얼마나 평안한지 모르겠습니다.”

정약용은 하인에게 손짓을 하여 이들에게 충분한 돈을 지급하였다. 그리고 한참 동안 유배지에서 머무른 추억을 나누고 마지막으로 말하였다.

“물자가 형통하고 사람이 왕래할 수 있으니 이것이 진정한 경세제민(經世濟民)이 아니겠는가.”

“저희는 어려운 한자는 모르고 있습니다만 손자 녀석들은 알고 있더군요.”

“그 또한 좋은 일이지. 언젠가는 이 나라 사람들 모두가 언문에 형통하고 한자를 익혀 고서에 통달하며 태평성대를 누릴 수 있어야 할 걸세.”

인사를 마친 정약용은 이들을 되돌려 보내고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한참을 머뭇거리다 말하였다.

“내가 자네를 믿은 이유는 백성을 헛되이 보지 않아서일세. 냉정하게 선을 긋고 정책을 추진하며 언제나 백성들에게 살길을 열어주었지.”

“많은 국가들이 그러한 실패를 하여 농민을 붕괴시켰지요. 미리 오답을 보아 두어서 정답으로 접근할 수 있었습니다.”

“쌓인 피로가 모두 해소되는 것 같군. 내가 여든을 넘게 살아온 보람을 찾게 되었네.”

다음 날 아침이 되고 본격적인 잔치가 열렸다. 수많은 교자상이 놓이고 정약용은 상석에 앉아 사람들을 바라보며 말하였다.

“이 잔치의 주인은 제가 아닌 여러분 모두입니다. 서로 대화를 나누어 학문을 논하는 대화야말로 제가 가장 듣고 싶은 말이니 눈치를 보지 말고 토의를 하십시오.”

“모두 잘 들으셨습니까? 여유당 대감님의 여든여덟 번째 생일을 축하드립시다!”

저택 10여 채의 담장을 허물어 둔 정원에 모인 사람들은 잔을 들어 올리며 축하인사를 각국의 언어로 보냈다. 그리고 정약용의 말 대로 술과 음식을 먹으며 토론을 시작하였다.

상석에 앉아 이 광경을 지켜보던 정약용에게 사람들이 한 무리씩 몰려왔다. 이들은 인사를 올리고 대화를 나누며 자신들이 어떠한 가르침을 얻었는지 알려주었다.

“닥터 여유당께서 만들어낸 학질렬(虐疾裂 - 학질을 찢다, 아르테미니신) 덕분에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구했습니다.”

“내 덕이겠소? 계기를 마련해 준 사람은 저기 있지 않은가?”

정약용은 한창 치고받고 싸우는 프랑스 과학자와 영국 과학자 사이의 권투 심판을 보는 일준이를 가리키며 말하였다. 그리고 과학자와 악수를 나누며 말하였다.

“내가 자질이 부족하여 약재에서 추출한 성분 육십여 개의 사용법을 명확히 판별하지 못하였소. 이 성분들을 분석하여 제대로 된 약으로 만들어주시오.”

“여부가 있겠습니까!”

다음으로 온 사람들은 대한제국의 지방 관료들이나 관료로서 흠흠신서를 보아 수사를 진행한 사람들, 아예 정약용의 기초 교육을 이수한 사람들도 있었다.

여기에 김정호를 비롯한 지리학자들, 성공을 거둔 고고학자나 고생물학자들도 인사를 올렸다.

가장 의외의 인물은 인도 총독 찰스 네이피어와 그와 함께 방문한 카를 마르크스였다. 네이피어는 마르크스와 함께 인사를 올리고 말하였다.

“여기 있는 카를이라는 친구가 닥터 여유당과 철학을 논한 적이 있다 하더군요.”

“논한 적은 있으나 제자라 볼 수는 없소. 솔직히 말해 나보다 더 나은 사람이라 보는데.”

마르크스는 인도에 머무르며 얼마나 고생을 하였는지 얼굴 이곳저곳에 흉터가 생겼다. 그는 예전보다 훨씬 짧아진 곱슬머리를 자랑하며 말하였다.

“박 후작님의 가르침으로 인도에서 세상을 배웠습니다. 거기서 카스트 제도의 불합리성을 알게 되었고 여유당 대감님의 말씀을 마음속 깊이 새겨 두었지요.”

“일억에 관한 이야기인가?”

“바로 보셨습니다. 인도의 불합리함과 계급 단위의 분업, 그리고 각종 악습과 미신으로 고통받는 사람을 보면서 세상을 다시 알게 되었습니다.”

아무래도 카스트제도가 마르크스의 머릿속에 깊게 새겨진 것 같다. 그는 나에게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시하고는 말하였다.

“그래서 네이피어 총독님과 함께 사티(sati, 남편을 따라 아내를 순장하는 악습) 풍습을 없앴습니다.”

“이 친구 덕분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사람을 산채로 태워 죽이려는 놈들이 있다면서 제 앞에서 이틀 내내 무릎을 꿇고 있더군요. 심지어 그…… 지인 상소였던가?”

“지부상소요. 과감한 수단을 활용하였군.

“큰 칼을 가져와서 자신을 찔러 죽이거나 악습을 중단시키라 하였습니다. 마침 좋은 명분이라 받아들이게 되었지요.”

어찌 보면 마르크스가 정약용의 마지막 제자가 아닐까.

스승과 제자는 서로 눈빛을 마주치고 고개를 끄덕이며 머나먼 훗날을 예상하는 듯이 악수를 나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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