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화
16장 9화 순한 빨간 맛(2)
마르크스, 이 젊은 철학자이자 사상가가 나를 어떠한 시선으로 보고 있을까 궁금했다. 지금까지 해온 일에 대한 냉철한 평가를 받을지도 모른다.
방 안에 있는 의자에 앉으니 마르크스도 반대편 의자에 앉았다. 그러고는 나를 바라보며 우물쭈물거리며 입을 달싹거리더니 의외의 답을 하였다.
“실은 여유당 대감님과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여유당 대감께서는 제 사상을 좋다고 하신 다음 냉철하게 비판하였는데 어떠한 사상인지 들어 보겠습니까?”
“물론, 아예 간단한 자기소개도 해주면 어떠한가?”
마르크스의 공산주의는 아직 완성되지 않은 학문이자 철학이요 사상이었다. 공산당 선언도 제대로 완성하지 못하였으니 할 말은 다 하였지.
한참의 설명이 끝나고 마르크스가 첫 질문을 하였다.
“국가 운영 철학 중에 연적 계획에 대해서 여쭈어보고 싶습니다.”
그가 가장 관심을 가질 계획이라 이미 답변을 머릿속에 정해두었다. 마르크스는 당장 쫓겨날 것이라 생각하고 눈을 질끈 감았는데 나는 일부러 웃으며 말을 흘렸다.
“가장 난감한 질문을 처음부터 꺼내는군. 내 입장에서는 난감한 질문이기는 하지.”
“국가 정책에 대해 논의하는 것이 싫으시면 답변하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그건 아니지. 자네가 생각하는 연적 계획의 가장 큰 문제점부터 물어보도록 하게.”
아마 프로이센 출신인 마르크스에게 가장 큰 문제점은 이주 그 자체이리라. 내 예상대로 그의 질문이 바로 튀어나왔다.
“각 지역에 살아가는 사람들을 조금씩 쥐어짜서 북방으로 이주시키는 정책이라니요. 기차 노선과 각종 설비에 지원금을 주어도 지나치게 가혹한 정책이 아닙니까?”
서양은 지역 특색이 강하다. 이탈리아는 아직도 갈피를 못 잡고 분열한 상태고 프랑스도 각 지역별로 자부심을 세우고 경쟁하는 관계이다.
그나마 영국이 좀 덜 한 편이나 이들도 다른 지역으로 이주하라 하면 반대부터 할 사람들이기도 하지.
나는 일부러 망설이는 척 잠시 뜸을 들이다 답해주었다.
“조선의 성군인 세종대왕의 치세부터 북방으로 사민을 꾸준히 하였네. 이 나라는 중앙집권 정부를 운영하여 사람을 마음대로 옮길 수 있지.”
“결국 머나먼 변방의 척박한 땅을 개척하라는 뜻 아닙니까. 조금이라도 더 가까운 지역으로 이주시킬 방법은 없었습니까?”
“나도 그럴 마음은 있는데 인구 증가율이 너무 높아서 답이 없더군. 옛 팔도 강역을 기준으로 매년 이 푼(2%)에 달하는데 매년 삼십만 명 이상을 보내야 인구 유지가 될 거라네.”
마르크스가 눈을 질끈 감고 도저히 안 될 일이라 생각해서 나는 찬장에 둘둘 말려 있는 지도를 꺼내다 주었다. 그러고는 지도에 연두색으로 색칠된 부분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 나라는 지난 십오 년 동안 황폐한 삼림을 개간하던 화전민을 북방으로 이주시키고 삼림을 원상 복귀시켰어. 또다시 삼림을 망가트리란 말인가.”
“그렇다 해도 너무 무책임합니다. 사람은 도구가 아니고 각각 생각을 가진 국민이 아닙니까?”
마르크스의 주장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국가의 뜻 이전에 국민을 생각하고 이들을 존중하라는 말이다.
이 주장을 듣고 그의 결정적인 변화를 알 수 있었다.
본래 공산주의는 모든 문화와 관습을 철폐하고 올바른 사회를 추구하는 사상이다. 그러나 지금의 마르크스는 그러한 학문의 완성에 발을 들이지 못하였다.
그는 1849년 프로이센에서 추방당한 뒤 런던에서 힘겹게 생활하였다. 그 과정에서 아이 셋을 병으로 잃고 굶주림에 시달리며 자신의 학문을 닦아나갔다.
그러니 마르크스를 각성시키고 내 철학을 알려주기 위한 답을 하였다.
“난 국가를 국민이 살아가기 위한 도구로 보고 있네. 그리고 국민은 국가라는 거대한 도구를 구성하는 하나의 일원일 뿐이고. 나 또한 그 도구 가운데 하나이지.”
현대에 살 때는 더 자유분방하고 현실적인 행복을 추구하기는 했었지. 과거형인 이유는 과거로 시간을 거슬러 온 시점에서 이런 자유분방한 행복을 추구할 수 없어서이다.
나는 과거의 조선을, 지금은 대한제국이 된 이 나라의 미래를 생각하며 현재를 바꿔나가야 할 의무가 있다. 이 의무는 일준이도 공유하는 의무이기도 하고.
물론 내셔널리즘에 심취하거나 파시즘까지 나아갈 생각도 없다.
마르크스가 질린 표정을 해서 나는 케네디가 남긴 유명한 연설을, 앞으로 100년 뒤에 나올 말을 해주었다.
“국가가 당신을 위해 뭘 해줄 수 있을지 생각하기 전에. 당신이 국가를 위해 뭘 할 수 있는지 생각해 본 적은 있나?”
“생각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국가는 같은 문화를 향유하는 사람의 집합체이며, 모든 조직은 민의가 모인 자치단체 기준으로 구성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예상대로의 답변이 나왔다. 본래 공산주의는 독재자가 대를 이어가거나 연임을 하는 방식이 아닌 정말 민의가 모인 집합체이다.
마르크스는 이론을 온전히 정립하지 못하여 지배 체제에 대해서는 딱히 이론을 제시하지 않았다. 오히려 말년에는 자신의 이론을 비판하기까지 하였고.
그로 인하여 해석이 난립하였고 대부분의 경우는 ‘위대하신 영도자’ 동무께서 권력을 거머쥐시고 반대파를 죄다 숙청해 버렸다.
그러니 고개를 끄덕이며 답해주었다.
“그 또한 올바른 방법이지. 권력 배분과 완성에 대해 조금만 더 심혈을 기울이면 좋을 것 같은데 아직 젊은 사람이니 넘어가 줘야겠군.”
“저는 철학가이자 사상가인데 한 사상의 마침표를 찍을 수는 없습니다. 사상은 모두 대를 이어 발전하는 법 아니겠습니까?”
“그 또한 옳은 말이지만 최소한 형태 정도는 갖추어둘 수 있을 것 같군.”
마르크스는 내 말을 듣고 골똘히 생각하다가 특유의 악필(惡筆)로 메모를 적었다. 뭔지 알아볼 수 없으나 앞으로의 과정을 요약해 나타낸 것 같다.
공산주의의 문제점 중 가장 큰 사항을 어느 정도 봉합하였다. 다음 질문 또한 마르크스답게 날카롭고 예리하게 파고들었다.
“다음 질문은 인의라는 철학, 정확히는 부의 재분배가 가지는 의미입니다. 박 후작님의 생각을 보건대 인의를 아무런 이유 없이 적용하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인의 또한 국가의 이득을 위해 적용하였는데?”
“불만을 줄일 목적으로 국가 자본을 재분배하는데 국가의 이득이라니요?”
마르크스가 파악한 인의는 그저 ‘양보’나 ‘타협’에 불과한 단어이리라. 그가 보기에는 불만을 감소시키기 위한 궁여지책에 불과하겠지.
반면 나는 150년 이상 축적된 자본사회의 문제점과 이 해결책이 적용된 현대를 살다 온 사람이다.
나는 인의, 정확히는 자본 재분배가 어떻게 굴러가는지 알려주었다.
“우리 대한제국의 자본주의는 생산수단, 공장이나 병원 혹은 학교를 자본가들이 독점하지. 여기서 인의를 앞세워 생산수단의 일부 혜택을 노동자들에게 내어주네. 왜 그럴까?”
“그야 내어주지 않으면 불만이 터져서 자신들의 지위가 흔들리기 때문입니다.”
“자네는 대한제국을 보면서 느낀 것이 없나? 우리가 왜 노동자를 배려하는지 모르겠는가?”
카를 마르크스는 나를 잠시 바라보고 우물쭈물거렸다. 아무래도 아직 젊은 마르크스가 갈피를 못 잡는 것 같아서 답을 내놓았다.
“급료를 더 많이 지급해야 여유를 가지고 소비가 가능하지 않겠나? 또한 급료를 쓸 시간이 있어야 다른 공장의 생산물을 사들여서 제품 가격을 더 올릴 수 있겠지.”
처음에는 반강제로 근로기준법을 만들어내고 적용하였는데 내 예상대로 잘 굴러갔다. 생산성에 있어서 10시간을 일하나 휴식을 충분히 취하고 7시간을 일하나 별다른 차이도 없더라.
물론 급료 때문에 인건비가 좀 많이 들어가기는 하였지. 그 인건비도 인구가 썩어 넘치는 조선 기반이라 유럽과 비교하면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였다.
극도의 효율성을 추구한 수정자본주의를 적용하기 가장 좋은 땅이다.
내 설명을 들은 마르크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였다.
“인의는 어디까지나 국가 발전을 위한 수단에 불과하군요.”
“바로 보았네. 유럽에서는 보이지 않는 손이 경제를 알아서 통솔할 것이라 생각하였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점, 과점 그리고 담합의 행위가 일어나며 모든 사람들이 고통을 받고 있어.”
물론 본래 역사와 다르게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 영국을 기준으로 하면 아일랜드 대기근의 지원도 신속히 실시되었으며 노동법도 20년 이상 앞선 1870년대 수준에 근접하였다.
이게 대한제국이 일으킨 자본주의 사회의 변화이다. 마르크스는 목이 말라서 옆에 있는 콜라 시제품을 벌컥벌컥 들이켜고 말하였다.
“결국 박 후작님이 보시기에는 인의라는 두 글자가 전 세계에 퍼져나갈 거라 생각하십니까?”
“아마 수십 년 뒤에는 퍼져나가고도 남을 거야. 궁극적으로 더 큰 이득을 거머쥘 수 있다면 국가가 여러 명분을 들어 시장에 개입하고도 남을 것 같은데?”
“자본가들의 타협이 계속되는 한 프롤레타리아의 단결은 일어나지 않겠군요.”
극단주의를 부추기는 것은 극단적인 환경과 불만이다. 사람이 배부르면 왜 혁명이 일어나는가? 프랑스도 불만을 품고 혁명을 일으키지 아무 이유 없이 혁명을 일으키진 않는다.
마르크스는 자신이 추구하는 공산주의 대신 이론도 없이 그저 다 같이 잘 살자고 주장하는 선배님들이 이룩한 업적을 생각한 것 같았다.
그는 실실 웃으며 말하였다.
“결국 제가 일으킬 수 있는 혁명은 다람쥐 혁명에 불과한 것 같습니다. 프롤레타리아가 단결하는 것도 불가능하지요. 정말 일억 명에 달하는 노동자가 죽으면 모를 일입니다만.”
이런 희망찬 예측을 내놓았으나 세상일은 녹록지 않았다. 언젠가 욕심을 부린 자본가들의 폭주로 인해 끔찍한 사회가 열릴지도 모른다.
최소한의 빨간 맛을 남겨두기 위해 마르크스를 다른 곳으로 보내야 할 것 같았다.
나는 잠시 침묵하며 그가 생각을 정리하기 기다린 후 추천을 시작하였다.
“내가 추천하고 싶은 국가가 둘이 있지, 인도 식민지와 러시아인데 여기에 방문하지 않겠나?”
“인도 식민지에 러시아? 그 동네에서 제가 뭘 배울 수 있습니까?”
마르크스는 황당하였는지 눈을 크게 뜨고 나를 노려보았다. 이 시대 지식인들에게 두 국가는 사회학적 가치가 거의 없는 미개한 국가로 인식되고 있었다.
인도 식민지는 각 국가와 세력이 내전을 벌이다 수천 명에 불과한 영국 군대와 관리에게 서서히 점령당한 국가이다. 사실 국가도 아니고 몰락한 부족 연합에 불과하다.
러시아는 유럽의 끄트머리에 있는 촌뜨기들의 동네다. 신의 대리자인 차르께서 지주를 앞세워 바보 이반들을 통치하고 있다.
당연히 카를 마르크스는 다시 답변하였다.
“제가 생각하는 공산주의는 자본가들의 횡포가 극에 달한 국가에서 태동할 새로운 사상입니다. 자본주의는커녕 봉건주의에서도 밑바닥을 달리는 국가를 보라니요?”
“그 자본가들은 횡포에 빠르게 대처하지 않는가. 다람쥐 혁명은 시작에 불과하고 영국 노동당을 비롯한 이들이 수많은 명분을 들어 자본가들의 생산 수단을 분배할 거야.”
“그러니 덜 발달한 인도를 보라, 좋은 말씀입니다.”
아마 인도에 방문하면 마르크스는 고혈압이나 뇌일혈 혹은 심근경색 같은 심혈관계 질환에 걸릴지도 모른다. 영국의 정책은 넘어갈 수 있어도 인도 내부의 분열은 못 넘어가리라.
러시아에 방문하여 포악한 지주들과 절대 충성하는 바보 이반들을 보면 위에 구멍이 뚫릴 수준으로 스트레스를 받을 거다.
나는 마르크스가 나아갈 길을 마련해 주었다.
“자네의 사상은 기묘한 수단으로 민중을 탄압하고 착취하는 자본가들을 견제할 수단이며, 다른 구제방법이 없이 방황하는 국가를 정상으로 되돌릴 최후의 방법이라 생각하네.”
솔직히 인도와 공산주의가 붙으면 공산주의가 패배할 거다. 아마 러시아는 공산 혁명을 두들겨 맞고 개선이 될 것 같고.
마르크스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내 방에 붙어 있는 동양 3개국 지도를 확인하였다. 그리고 가장 끔찍한 말을 스스럼없이 내뱉었다.
“그럼 청나라에 공산주의가 퍼지면 좋겠군요.”
“아니야! 절대! 그 생각만큼은 절대 하지 마! 절대!”
이 빨갱이가 지금 빨갱이를 최악의 장소에 퍼트리려 하네. 내가 좋게 넘어가려다 도저히 안 되겠어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답하였다.
“청나라를 비롯한 중원 국가는 천명이라는 사상을 가지고 있네. 공산주의가 청나라에 넘어가면 수십 년도 지나지 않아 변질되고 완벽한 독재 국가가 형성될 거야.”
“그걸 미리 보고 오신 것처럼 확신을 하시는군요.”
미리 보고 왔지! 북쪽도 그렇고 서쪽도 그렇고 둘 다 자기들끼리 숭배 잘하더라!
이걸 이야기할 수는 없어서 심호흡을 하고 답해주었다.
“내 말 명심하게. 국가를 구성하는 세력의 일부면 몰라도 공산주의 국가가 되면 천자 개념과 결합할 걸세. 결국 권력을 숭배하여 종교로 삼는 끔찍한 일이 생겨나겠지!”
누가 전문가냐? 내가 더 전문가다! 마르크스는 내 눈치를 슬쩍슬쩍 살피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자신의 사상 정립에 도움을 준 사람의 말이라 가급적 들으려고 애쓰는 것 같았다. 그러고는 못내 아쉬운 듯이 말하였다.
“어쩔 수 없는 일이로군요. 그러하면 박 후작님의 훌륭한 고견을 잘 들어 두었습니다.”
그러고는 콜라병을 기울여 콜라를 다 따르고 단숨에 들이켰다. 이제야 분위기가 좀 풀어져서 좀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려고 콜라 한 병을 꺼내주고 말하였다.
“그나저나 콜라 맛은 어떠한가?”
“너무나 짜릿한 자본주의의 맛입니다.”
병따개로 콜라병을 젖히자 뿅 소리와 함께 뚜껑이 열리고 탄산 마개 역할을 하는 유리구슬이 병 아래로 가라앉았다. 천천히 한 잔을 따라주고 마르크스와 건배를 나누며 말하였다.
“자본주의의 합리적 발전을 위하여.”
“공산주의의 완성과 사상 정립을 위하여.”
다음 날, 마르크스에게 후원금으로 신냥 3만 냥, 약 1,200파운드를 지불해 주었다. 이 돈을 신 페인 운동가에게 보낸 마르크스는 자신의 다음 행선지를 인도로 정하였다.
앞으로 10여 년, 길게 잡으면 15년 이상 마르크스는 공산주의 이론의 정립과 실천을 위해 소모하리라.
앞으로 세계사가 어떻게 격변할지 기대되었다.
“아무튼 동양으로 오지만 말아라. 제발 좀 부탁한다.”
대한제국에는 정치적 다양성을 위해 공산당이니 노동당이니 사회당이니 하는 이익 배분과 공동 권익 추구 계열 정치인도 필요한 실정이다.
이 과정에서 공산주의가 제발 중국에 들어가지 않기를 빌고 또 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