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효명세자와 함께하는 조선 생활-152화 (152/345)

152. 14장 3화 머리를 지배하다

다음 일정을 위해 교토로 떠날 무렵에도 일대에는 대한 통신사를 칭송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니 교토에 가기 직전 저녁 에도의 식당 하나를 잡아두고 이이 나오스케를 초대하였다.

“이런 누추한 곳에서 저녁 식사를 즐길 작정이십니까? 더 좋은 곳도 많은데요.”

“일본을 즐기려면 이런 서민들이 머무는 곳에서 식사를 해야 하지 않습니까.”

실은 서민이 아니고 부유한 상인들이 식사를 하는 곳이지만. 오늘을 위해 며칠 전부터 주방장에게 이런저런 지시를 하여 새로운 음식을 만들게 하였다.

“대한에서는 튀김 요리가 많지 않으나 일본에는 튀김 요리가 많더군요. 다들 즐기시는 것 같은데 제가 여러모로 신경을 써서 요리사에게 주문을 시켰습니다.”

하인이 커다란 맥주잔에 파스퇴르가 창안한 맥주를 가득 담아주었다.

처음부터 술을 마시니 법도에 어긋난다 생각하는 이이 나오스케에게 잔을 들어 보이며 말하였다.

“건배부터 합시다. 맥주는 탁주(막걸리)보다 지극히 가벼운 술이니 빈속에 마셔도 됩니다.”

“예전에 소문을 듣기는 하였습니다. 먼 길을 항해하는 서역의 뱃사람들은 가벼운 술을 만들어 물 대신 저장해 둔다 하였지요.”

맥주에는 튀김이 정석이다. 이 시대 일본은 채종유(유채 기름)이나 참기름으로 튀김을 만든다. 정제가 부족해 기름 온도가 낮아 튀김이 바삭하지 않고 기름을 많이 먹은 튀김이다.

그러니 튀김 기름을 대한에서 제공한 면실유와 쇼트닝 혼합으로 바꿨지. 이이 나오스케는 젓가락으로 튀김을 잡아 한 입 먹더니 바삭거리는 질감에 당황하여 말하였다.

“이렇게 맛있는 튀김을 먹은 적이 없습니다. 참기름 향이 나지 않지만 튀김옷에 기름이 적고 너무나 바삭해서 혀에서 녹아내릴 지경이로군요.”

“대한에서는 북방 영토에 목화를 심어 씨앗에서 기름을 짜내고 있습니다. 그 기름을 계속 정제하면 이런 튀김을 만들 수 있는 기름이 되지요.”

“놀랍기 이를 데 없습니다. 이 기름을 수출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당연히 수출해 드리겠습니다. 좋은 음식은 누구라도 즐길 수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이 또한 정치였다. 튀김으로 시작하여 속에 간을 하는 곤포당(MSG)의 생산을 논하고 확약을 받으며 맥주를 들이켰다.

이이 나오스케는 내 제안을 다 듣고는 잔을 채워주며 말했다.

“대한과 인연을 맺은 것은 막부의 행운이 아닐 수 없습니다. 각 번에서 들불처럼 일어나는 놈들을 모조리 잠재우고 이 튀김처럼 튀겨 버려서 막부의 천하를 만들 수 있겠군요.”

“무력을 사용하는 것은 마지막 수단입니다. 정치는 어디까지나 남을 설득하고 자신을 비방하는 이를 교묘히 억눌러야 하지요.”

“역시 후작님이십니다. 저는 아직 배울 것이 많은 것 같군요.”

다시 잔을 마주치고 맥주를 넘기자 이이 나오스케의 복어 같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술에 약한 그는 취기가 올라 각 번에 대한 욕설을 아끼지 않았다.

“대한에서 증여한 텟포를 앞세우면 놈들도 꼬리를 말 것입니다. 텟포를 위하여 건배!”

요리사는 물론 하인들도 흠칫거리며 높으신 분의 대화를 듣고 식은땀을 흘렸다. 나는 이들을 배려하기 위해 손짓을 해서 아예 가게 밖으로 나가라 하였다.

이제 남은 사람이라고는 나와 이이 나오스케 그리고 통역을 위해 남은 세 명이 전부였다.

다음 술잔은 내가 채운 다음 잔을 들어 올려 중요한 이야기를 하였다.

“저도 건배를 하겠습니다. 언젠가 이루어질 대정봉환을 위하여 건배.”

이이 나오스케는 잔을 들고 있는 채로 내 눈을 빤히 바라보았다. 대정봉환, 교토에 여전히 세력을 구축한 채 실권을 양도한 조정과 실권을 거머쥔 막부가 하나가 될 것이라는 뜻이었다.

“대한이 어찌하여 대정봉환을 논하시는지요.”

“언젠가는 반드시 해야 할 일입니다. 지금까지 얼기설기 엮은 나라의 체제를 되살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느닷없이 대정봉환이 나올 줄은. 후작님의 이야기나 들어봅시다.”

이이 나오스케는 취기가 싹 가신 눈으로 나를 째려보며 이야기를 경청할 자세를 취했다. 그러니 내 웅대한 계획에 대하여 논해 주었다.

“저는 일본이 영길리와 흡사한 체제를 갖추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

일본 정상화의 최종 계획은 정치의 영국화이다. 영국처럼 혐오스러운 성격을 가진 나라로 만드는 것이 아닌 효율적인 체계를 구축하는 방안이다.

“그러하면 덴노께서는 권력을 양도받고 이를 다시 백성에게 나누어 줄 것이군요.”

“그렇습니다. 교토의 옛 공가(公家)들은 귀족원을 창설하여 영길리의 귀족원과 같이 법률의 심의만 하는 것입니다. 실권은 없고 명예만 가지고 있는 집단을 창설하는 격이지요.”

“공가 놈들이 처음에는 좋아하다가 나중에 가서는 기겁을 하겠군요.”

“아무 권한도 없는 것은 아니고 덴노께서 가지고 있는 종교와 교육의 권한에는 개입할 수 있습니다. 어디까지나 개입이 끝이지만요.”

일본은 메이지 유신으로 억지로 나라를 만들며 중세 봉건적 지배체계를 유지한 채 의회 정치를 도입하였다. 그러니 나라가 폭주하는 것을 제지할 사람도 없이 폭주하였다.

반면 내가 제시한 의견은 귀족원의 권한이 조금 더 많을 뿐 영국식 의회정치로 넘어갈 길을 제시하였다.

이이 나오스케는 내 설명을 듣고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답해주었다.

“결국 권력을 하나로 합친 다음 합리적인 정치를 추구하여 서로 분할한다는 말씀이군요.”

“바로 보셨습니다. 제가 주장한 의견에서 가장 좋은 점이 무엇인지 아시겠습니까?”

“인구가 아니겠습니까. 실질적으로 이 나라를 지배하는 의회는 결국 소속된 지역의 투표를 통해 결정되는 것. 각 번에서 아무리 날뛰어도 막부를 이길 수 없을 겁니다.”

“질 수도 있습니다만 그렇게 되면 백성들을 다스리지 못하였다는 뜻이 아닙니까.”

다시 잔이 오가고 이이 나오스케는 내 말을 어느 정도 이해하며 동의하였다. 그러고는 대정봉환에 대하여 논하였다.

“백성을 시작으로 각 상인과 부호들 그리고 지주들을 구워삶아서 훗날을 대비해야 할 것 같습니다. 먼저 준비한 사람이 승자가 되는 법이로군요?”

“저 또한 같은 생각입니다. 그러니 이번 기회에 덴노께 청해 교육기관을 설립하고 각 지역의 신사와 사찰을 통솔하기를 청하겠습니다. 교토도 얻는 것이 있어야지요.”

“그럼 막부에서 계속 총리를 배출하기를 기원하며 건배를 나눕시다.”

이이 나오스케는 내 제안을 ‘인구를 앞세운 합법적인 막부 독재’로 받아들였다.

이러한 생각과 달리 막상 의회 제도를 도입하면 정치적 위기를 겪으리라. 각 번이 연합하여 야당을 세우고 필사적으로 대립하고 결국 여당인 막부는 더 많은 지지층 확보를 위해 대한에서 제공하는 혜택에 휘둘리며 정책 방향성을 대한에 의존하게 되리라.

설령 수십 년 뒤에 정신을 차려도 이미 대한에서 교육을 이수한 이들과 그들의 제자들이 학계를 장악하였다. 이쯤 되면 뇌가 파 먹힌 신세이니 대한의 충실한 머슴이 되겠지.

이야기를 나누느라 다 식은 튀김을 바라보던 이이 나오스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고는 오늘 나눈 것을 비밀로 하자는 듯이 입에 손가락을 대고는 말하였다.

“이토록 맛있는 튀김을 가축의 고기로 만들면 더욱 맛있을 것 같습니다.”

“그야 당연한 말씀이지요. 그러하니 쇼군 합하께 오늘 나눈 대화를 전해 주십시오.”

“여부가 있겠습니까! 박 후작님께서 오늘도 막부에 좋은 것을 선물해 주셨습니다!”

좋은 선물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이 되어 교토로 향하는 마차 대열에 오르자 저 멀리서 시험용 증기기관차가 증기를 뿜어 올리며 가동되었다.

“대한 통신사 여러분들께서 너무나 좋은 선물을 보내주셨습니다!”

5만 석에 달하는 미곡이 에도 일대에 공급되어 졸지에 ‘대한미’라 불리는 용어가 생길 지경이었다. 앞으로 에도로 계속 전해질 곡식들을 생각하며 교토로 움직였다.

* * *

교토에서도 대한 통신사를 맞이할 준비를 하였다.

며칠간의 접대와 환대를 받은 다음 일준이 그리고 초의선사와 함께 덴노를 접견하게 되었다.

“장막을 거두도록 하라.”

평상시에는 장막 안에서 얼굴도 비치지 않던 덴노이지만 막부에 선물을 제공한 우리를 눈여겨보았던 것 같았다. 장막이 걷히고 체격이 작고 피부가 새하얀 중년 남성이 드러났다.

“머나먼 조선에서, 이제는 대한제국에서 통신사를 보냈으나 여태까지 나를 접견한 적은 없었노라. 그러하나 청할 것이 있다 하기에 여기 모인 공가의 귀족들과 함께 자리를 마련하였다.”

“감히 덴노께 청할 것이 있사오니 교토에 있는 옛 왜추의 망령(妄靈)이 만든 흉험한 무덤을 대한의 품으로 되돌리고 싶을 뿐입니다.”

“귀무덤을 논하는 것인가?”

공식적으로는 귀를 담은 무덤이지만 실제로는 코를 담은 무덤이지. 전리품 삼아 시신의 귀를 챙기는 것은 중세시대의 감성으로는 할 수 있는 일이지만 코는 선을 넘어도 한참 넘어갔다.

지금도 덴노의 공식 입장과 현대 일본 정부의 공식 입장은 귀무덤이다.

그러하니 일준이에게 슬쩍 손짓을 해 말을 제지하고 답변을 하였다.

“어떠한 무덤인지는 이장을 하며 흙을 걷어내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옳은 말이다. 이런 흉한 물건이 있다는 것 자체가 심기가 거슬리는 일이 아니겠느냐. 다른 이들은 어떠한가?”

덴노도 이미 귀족들을 설득하였는지 모두가 고개를 숙이며 동의하였다. 뜻을 전달하기 위한 서신을 작성한 덴노는 잠시 침묵하다 일준이를 바라보며 말하였다.

“그러고 보니 수많은 난학자들이 조용태(조일준의 호) 백작과 대한의 스승들을 칭송하였다. 나 또한 배움에 몰두할 욕심이 있으니 가쿠슈인(学習院 - 학습원)을 만들 생각이 있었지.”

드디어 닌코 덴노가 떡밥을 물었다. 성공하면 교토의 귀족들과 덴노를 이사진으로 삼되 실질적으로는 대한의 학풍을 퍼트려 일본의 지배층을 포섭할 기관에 대해 논하기 시작했다.

“본래 귀족 자제를 가르치려는 목적에 힘을 덧붙여도 될 것 같구나. 국학(國學 - 일본학)을 배울 자와 유학을 배울 자 그리고 난학을 배울 자를 모두 다루면 좋을 것이다.”

“덴노께서 교육에 심혈을 기울이시니 일본의 앞길이 밝아오는 것 같습니다.”

일준이도 다 알면서 얼굴에 금칠을 하였다. 본래 닌코 덴노의 뜻은 일본 귀족들의 교육을 실시하여 자신의 권력기반을 강화하려 하였다. 이런 자리이니 사람이 많을수록 좋았다.

지금이야 난학자들을 덴노와 귀족들의 충실한 하인으로 만들 계획이겠지만 핵심이 빠져 있다.

학문을 배우는 자들에게 자금과 혜택을 지원해도 이들에게 학문을 가르친 스승의 제자라는 정체성이 더 크다.

국립대학의 학생들이 예산을 지원한 정부에게 충성을 하지 않고 자신을 가르친 교수에게 충성을 다 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일준이의 답을 들은 닌코 덴노는 명령을 내렸다.

“내가 친히 나서서 무덤을 이장하는 동안 각 귀족가의 사람들은 조용태 백작과 논의를 하여 가쿠슈인의 설립 조건을 협의하라. 그러하면 닷새 뒤에 무덤을 이장할 것이다.”

약속대로 닷새 뒤, 현대까지 이장되지 않은 교토의 대형 코무덤 세 개가 모두 이장 작업을 실시하였다.

현임 덴노인 닌코 덴노가 신토 특유의 제사를 올리며 이장의 뜻을 알렸다.

“……이에 의하여 옛 조선 사람들이 자신의 땅으로 돌아가 영면을 청하기를 원하는 바이다. 한 줌의 흙과 덤불이라도 소중히 여기어 유해와 함께 대한제국에 전하도록 하라.”

교토의 화족들은 이번 행사에서 막부에게 보여주려는 듯이 솔선수범하여 행사에 자금을 대었다. 비단 직물이 무덤 주변에 둘리고 수많은 삼나무 상자가 준비되었다.

이들이 옛 조상들로부터 축적하고 이어져 내려온 자금력과 영향력이 강대하다는 과시 행위이다.

다음 순서로 승려들이 나서서 합장을 올리고 행사를 거행하였다.

“지금껏 법도를 지키지 못하고 제사만 올렸으니 변명을 할 수 있겠는가. 뒤늦게라도 천승재(千僧齋)를 거행하여 넋을 위로할 것이니 모두 대한의 품으로 돌아가 영면하시오.”

“모두 대한의 품으로 돌아가 영면하시오!”

초의선사를 시작으로 천 명에 달하는 승려들, 이 무덤에 천 명이지 다른 두 개의 무덤에도 오백 명의 승려들이 동시에 제사를 올리고 있다. 이들은 불경을 낭송하며 무덤을 해체하였다.

코무덤은 조금씩 해체되어 삼나무 상자에 봉안되었다. 혹여나 바닥에 떨어진 흙이 생기면 빗자루를 들어 정성껏 쓸어 담았고 마지막에 흙이 묻은 비단도 제공할 계획이라 하였다.

천 명에 달하는 승려가 작업을 실시하니 잘못하다가는 삽 한번 놀리지 못하는 승려가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초의선사는 몇 번 삽을 놀리다 대열 뒤로 빠져나와 내 손을 잡으며 감사의 인사를 올렸다.

“황제폐하께서 명을 내리시었으나 이 어찌 감사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여유당 대감께서 진일 후작과 연을 맺으셨고 이 연이 여기까지 흘러왔으니 그저 감읍할 따름입니다.”

“선사님께서도 영길리에 나아가시어 많은 일을 행하지 않았습니까. 저는 발판을 마련했을 뿐이고 거두어들인 성취는 온전히 선사님의 것입니다.”

초의선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불경을 외우며 감동의 눈물을 한 줄기 흘렸다. 그의 입장에서 대한 불교의 명예회복과 수계를 받은 승려를 양산하였으니 할 일을 다 하였다 생각하리라.

코무덤의 봉분이 해체되고 이제 사람의 유해가 묻힌 땅이 파헤쳐졌다.

그러던 중 한 일본 승려가 기묘한 물건을 발견하여 덴노에게 전해주었고 덴노는 나를 불러 질문을 하였다.

“귀무덤에 왜 이런 녀석이 있는가. 여기는 분명 시신에서 귀를 잘라서 담은 무덤인데…….”

닌코 덴노에게 전해진 기묘한 물건은 나무를 깎아 만든 코의 형상이었다. 아마 정유재란 당시에 코를 베어오던 왜군이 수급을 부풀리려고 나무로 코를 조각하여 넣었으리라.

“제가 이전부터 귀무덤이 아니고 코무덤이라 하였습니다. 당시에 얼마나 수급에 몰두하였는지 가짜 코를 만들어서 증거를 남기게 되었군요.”

“정말 코를 잘라냈다니 너무나 흉한 일이로군. 이런 가짜 코를 증좌로 남길 것이니 몇 개 정도는 내가 담당하는 신궁에 위패 대신 봉안하여 같이 넋을 위로하도록 하겠노라.”

“훌륭한 결정입니다. 가짜 코라면 움직일 수 없는 증거가 아니겠습니까.”

당시 일본군이 얼마나 광기에 사로잡혀 있었는지 알 수 있는 명백한 증거가 출토되었다. 히데요시 본인이 코의 수를 계산했는데도 이런 짓을 저질렀다면 전공에 미친놈들이 아니겠는가.

출토된 흙에는 코를 묻기 위해 넣은 삼베조각이나 나무파편들도 출토되었고 이 또한 상자에 봉인되었다.

6m에 달하는 거대한 구덩이가 만들어질 무렵 승려들이 보고를 올렸다.

“덴노께 말씀을 드리니 헤집은 흔적이 없는 생땅이 나왔습니다.”

“그 땅도 한 자를 파내도록 하라. 이 끔찍한 일이 벌어진 땅 모두를 거두어내고 싶으나 언덕 하나를 옮기는 일은 너무나 거창한 일이 아니겠느냐.”

이미 흙과 유해를 담은 상자가 사천 개가 넘게 쌓였으며 가짜 코도 형상이 멀쩡한 것 기준으로 백 개가 넘게 출토되었다. 다른 무덤까지 합치면 만 개에 달하는 막대한 양이다.

모든 작업이 끝나자 거대한 구덩이만 코무덤이 위치한 자리에 있었다.

덴노가 마지막으로 제사를 올리고 나를 불러 구덩이를 확인하며 말하였다.

“이토록 흉한 물건을 담아낸 자리는 재액을 불러오는 터이니 다른 신기(神氣)가 깃든 물건으로 막아내야 하지 않겠는가. 박 후작은 어떠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가.”

“가장 큰 자리인 이곳에는 포은 정몽주의 사당을 세워야 할 것 같습니다.”

“포은 정몽주라 하면 고려의 신하가 아닌가. 나 또한 그의 명성을 익히 알고 있었노라.”

일본과 외교관계를 주선한 충신 중의 충신인 정몽주보다 나은 인물이 없겠지.

닌코 덴노는 잠시 생각하더니 다른 두 개의 코무덤이 있는 방향을 지목하고 말하였다.

“다른 하나는 임진년의 변에서 조선의 백성들을 구하기 위해 방문한 사명대사의 사당을 세우면 좋겠군. 다른 한 곳은 대한의 올바른 뜻을 담은 사당을 만들도록 하겠다.”

“사명대사의 사당은 이해할 수 있으나 대한의 올바른 뜻을 담은 사당이라 하셨습니까?”

“그야 박 후작이 정몽주와 사명대사를 이은 외교관이 아닌가. 박 후작의 호의 음독을 따와 쥬우도쿠(じゅうどく - 十德, 십덕) 사당이라 하겠노라.

이젠 아예 십덕이라 박제를 하는구나. 엄청난 반발심이 몰려왔는데 생각해보니 짓도쿠와 십덕의 발음은 엄연히 다르다.

그러니 고개를 숙이고 감사를 표시하였다.

“덴노께서 저를 이토록 중히 보아주시니 차마 거절할 수 없는 노릇입니다.”

“그러하면 되었네. 후일 자네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 될 수도 있겠군.”

그러면 좀 위험하긴 하지만 다른 호를 만들면 충분하겠지.

이틀에 걸친 이장작업이 끝나고 초의선사를 따라온 조선의 승려들의 수계식도 거행되었다.

덴노는 너무나 흉한 일을 겪었다고 하며 교토의 모든 사찰과 신사에 제사를 올리게 하였다. 이 중간중간에 육식금지령의 폐지에 대해서도 논하였고.

“너무나 오랫동안 유지된 금지령인지라 단번에 해제할 수는 없다. 그러하나 대한이 이토록 충실한 나라이니 제안을 고려해 보겠노라.”

육식금지령은 해제 대기상태이지만 아마 해지될 것 같았다. 이러한 훈훈한 분위기 속에서 일준이는 귀족들과 교육기관인 가쿠슈인 설립에 대하여 논의하였다.

마침내 닷새가 더 지나 교토에 당도하고 보름이 지났다.

평상시에는 잘만 논의하던 녀석은 일정이 다 끝나갈 무렵 투덜거리며 오늘의 이야기를 말해주었다.

“이 양반들 다른 것은 죄다 좋다고 말하면서 마지막에 투정을 부리네.”

“마지막에 투정을 부린다고? 혹시나 대한 사람은 우리를 가르칠 자격이 없다 하나?”

“그런 식으로 말했다면 닥치고 유학을 보내게 하면 충분하지. 대한 국립이학대학이 황명으로 건립된 대학이니 분원 역할인 학습원 총장은 황실에 속한 왕공족이 담당해야 한다더라.”

이들도 생각이 있어서 명분과 실리를 모두 챙긴 제안을 하였다. 지식을 전달하는 대한제국이 교육 수준을 낮추거나 여러 명분으로 지원을 줄이면 분원의 격이 떨어진다.

그러니 총장으로 예전 용어로는 종친, 새 용어로는 왕공족을 배정하여 많은 지원을 받고 분원의 격도 끌어 올리려는 계획이다.

일준이는 내가 답하기도 전에 말해주었다.

“명분도 있고 실리도 있는 건 아는데 총장으로 배정될 왕공족의 개인사가 문제야.”

“네 말이 옳아. 왕공족이면 정치적 영향력이 있는 사람들인데 일본에 와서 총장 자리를 역임하면 정치적 영향력이 소멸되겠지.”

“나도 같은 생각이다. 분원의 이사장은 덴노인데 그의 명령을 받으면 정치적 영향권이 소멸하잖아. 그렇다고 머나먼 촌수의 왕공족을 내세우거나 부마를 내세우면 격이 안 맞고.”

마지막에 찬물을 끼얹어 버렸지만 상대의 체면도 세워줘야 하니 정말 종친을 내세워야 하리라.

내가 머리를 굴리고 있으니 일준이는 이 자리에 가장 알맞은 사람을 골라내었다.

“이하응은 어때? 지금 유럽에서 감자 역병을 막아내고 있는데다 서열도 제자 가운데 가장 높은 종친이지. 이 정도면 실력도 혈통도 명성도 충분한데?”

“본인이 응해야 보낼 수 있지. 나중에 대한에 돌아오면 총장 자리를 추천하도록 하고 응하지 않으면 양녕대군이나 효령대군 계열 종친을 입적(入籍)시켜서 왕공족으로 만들어주자고.”

이하응이 가쿠슈인 총장으로 부임했을 경우의 일을 생각해 보았다.

대한제국에 운석이라도 떨어져 왕공족 모두가 몰살당하지 않는 한 정치적 발언권은 영원히 소멸하리라.

대신 얻을 수 있는 것은 위대한 교육자의 명성이다.

일준이의 제자를 자처하는 수많은 난학자들은 최고의 제자인 이하응을 사형(師兄)으로 모시면서 대접해 줄 것이 분명하다.

물론 다른 마음을, 예를 들어 일준이나 대한 황실을 배신하려 하면 답이 없다. 일본 특유의 감성으로 날카로운 비판 대신 날카로운 칼날을 찔러주겠지.

“어떻게 되었든 간에 십 년은 세심하게 조절해야 할 계획이 네 덕분에 편해졌다.”

“이제 넌 미국 사절단을 신경 쓰면서 편안히 일하면 되겠지? 난 새 대학 설립이 남았는데 내 업무를 좀 많이 도와주면 안 될까?”

“에이 무슨 소리야. 이제 청나라에서 아편이 퍼져 쿨리(Coolie)들이 수십만 단위로 튀어나오고 아편이 대한에 퍼질지도 모르는데. 이거 외교적으로 막아내려면 골치가 다 아프다.”

일본에서 일정이 끝났지만 내 할 일은 너무나 많이 남아 있었다.

본래 역사보다 10년 이상 빠르게 제조되는 청나라의 아편이 가져올 국제적 파장을 대비해야 하니까.

앞으로 입수할 미국과 청나라의 정보를 활용할 방법을 모색하며 수많은 사람의 유해가 잠든 흙과 함께 대한으로 돌아왔다.

일본 문제는 당분간 손을 댈 필요가 없어서 다행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