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 13장 5화 대일 외교(2)
한가위에 칭제건원이 겹쳐서 7일이나 공식 휴일이 주어졌다. 평범한 백성들에게는 휴식이지만 관료들에게는 대규모 인사 변경과 조직 개편으로 인한 인사이동 시기이다.
기존 육조는 중앙 8부로 개편되어 경복궁에 신설된 궐내 양각사로 이동되었다. 기존의 육조는 건물을 새로 지어 중앙 8부에 소속된 아문이 자리할 예정이었다.
“낭군님께서는 이런 좋은 휴일에도 업무를 하시다니요.”
“왜인들을 접대하고 이들의 속내를 알아내라는 명을 황제 폐하께서 내려주셨소. 그리 하여도 염려하지 마시오. 며칠 뒤에는 은찬이를 데리고 나들이라도 다녀올 작정이니.”
물론 나는 쉴 틈이 없었다. 일본 사절단을 포섭하고 이들이 받을 수 있는 지원목록을 효명제가 내려주었으니까. 이 업무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일준이도 필요하였다.
연회가 끝나고 이틀을 내리 쉬었다. 업무를 진행하려 일준이를 찾아가니 녀석은 백작 작위 임명장과 대학 총장 임명장을 보여주면서 자랑스럽게 말했다.
“그랑제콜이 결국 학부 소속 국립이학(理學)대학으로 명칭을 개편했지. 국제 명칭은 여전히 그랑제콜이지만 내부 명칭은 성균관과 대응하여 이학 대학이 되었고. 서류를 좀 살펴봐라.”
이외에도 행정 체계의 변화는 많았다. 대한제국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교육과 관련된 요소도 변화하여 성균관은 학부(學部) 휘하 대학으로 편성되었으니 괜찮은 일이었다.
“성균관이 변화한 소식은 듣기는 했지. 이제는 기초 수학과 세계사도 가르친다 하던데.”
“과거 제도가 국가고시제도로 변경될 예정이니까. 앞으로 삼 년 뒤에는 학문 이수 체제도 변경되고 국가고시도 국학과 이학을 필두로 한 일곱 과목으로 분류될 예정이야.”
국학은 말 그대로 조선시대부터 이어져 온 유학을 기반으로 하여 새로 규정된 학문이다. 대한제국도 많은 고난을 거치며 학문을 받아들였고 예전처럼 사서오경에 얽매이지는 않는다.
국학을 이수하는 사람들은 사서오경 정도는 독파해야 하지만 여기에만 얽매이지 않는다. 최소한 중학생 수준의 수학실력과 세계사 그리고 최소 1개 이상의 외국어를 이수해야 한다.
그렇다고 이학이 아예 기존 교육을 무시하지는 않았다. 사서삼경에 대한 독파는 필요한데 이건 어휘력 함양과 기초 교양 학습을 위한 요소였다.
일준이는 이외의 대학 목록을 보여주며 말했다.
“그랑제콜에서 이수를 완료한 학사와 석사들이 이천 명이 넘어가는 건 알지? 이제는 각 지방의 서원을 개조한 지방 대학에 이들을 파견해 이학 교육을 체계적으로 실시할 예정이야.”
“지금까지 지방에서 이학을 배우는 사람들이 한양으로 올라와 강의를 들었는데 많이 편해지겠네. 그나저나 연구비와 교육 관련 예산 감당은 할 수 있고?”
“그랑제콜, 국립이학대학이 벌어들이는 돈이 얼마인데 그런 걱정을 하냐.”
하긴 일준이가 얻어낸 특허만 따져도 수백 개이고 이중 핵심 특허가 40개가 넘는다. 녀석은 찬장에서 통조림 몇 개를 꺼내서 뚜껑을 두드리며 말했다.
“청나라와 전쟁을 벌일 때 통조림 내부가 일 년이 지나자 삭아서 맛이 끔찍하게 변한 것 기억하지? 이제는 니켈 가공이 가능해서 부식 방지 코팅으로 돈을 뽑아먹을 수 있게 되었다.”
“스테인리스를 이 시대에 양산할 수 있다고?”
“스테인리스가 아니고 니켈 도금이야. 그럼 하나 뜯어 먹어볼까?”
위에 잉크로 ‘1843.07.15. 시험용’이라 적힌 캔을 두드려 본 일준이는 이를 캔 따개로 따내서 내용물을 확인하였다. 이전의 통조림보다 쇠 냄새도 덜 하고 내부 부식도 보이지 않았다.
고기 조림이 담긴 통조림을 아예 화로에 얹어서 끓여버린 일준이는 이를 덜어서 나눠주었다. 맛은 영 부족했지만 예전보다는 훨씬 맛이 좋은 물건이 되었다.
“이게 과학이지. 이 통조림만 널리 퍼트려도 쓸 만할 것 같은데.”
“이거 파스퇴르랑 파브르가 학사논문용으로 만든 녀석이야. 대한제국에서 석사 박사 모두 이수하게 하고 싶은데 이하응이 유럽으로 훌쩍 떠나는 바람에 녀석들도 훌쩍 떠나려 하더라.”
학부생 주제에. 심지어 졸업반도 아닌 일 년 전에 이런 품질의 통조림을 만들 줄은 몰랐다.
일준이는 남은 통조림을 머슴들에게 준 다음 천장을 올려보며 푸념을 하였다.
“세상을 좀 보겠다면서 미국에서 통조림 사업을 추진하려 하고 있더라고.”
“미국에서 통조림 사업? 웬 생각이지?”
“얼마 전부터 요동에서 목화 재배가 성공적으로 된 거 알지? 여기서 최종 생산물로 공장제 직물과 비누 그리고 쇼트닝과 면실유가 나오잖아. 이 사업체가 미국 남부에도 생겼어.”
“그 사업체에 파견되어서 면실유를 이용한 통조림을 만든다는 소리였군?”
“생선을 통조림으로 만들어 판매하면 사업성이 있다 판단하고 논문을 작성했어. 대한제국 기준으로는 타당한 말이라 말릴 수는 없더라.”
생선 통조림이면 아마 참치 통조림 같은데 이 시대에 사업성이 있을 리가 없었다.
더군다나 대한제국이면 최신 학문의 정점을 섭렵한 나라인데 미국은 아직 과학 기술이 부족하다. 심지어 미국 남부 특유의 보수적인 정서를 생각하면 통조림을 받아들일 사람은 별로 없기도 하고.
일준이도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못내 아쉬운 듯이 말하였다.
“이하응만 있었어도 묶어둘 수 있었는데 어쩔 수 없지. 이번 기회에 미국에서 호되게 당해봐야 정신을 차리고 대한제국으로 돌아와 학문에 발을 들일 거야.”
“젊은 나이에 투자자를 섭외했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일이잖아. 다른 제자를 키우지?”
“다른 제자라? 네가 연회장에서 붙여준 그 일본 사절단이 제법 쓸 만하던데.”
“네 기준에서 쓸 만한 제자라고?”
일준이의 기준은 내가 명확하게 알고 있다. 아주 열정적인 제자이거나 기초 교육을 충실히 받았거나 아예 역사로 검증된 천재가 아니라면 주입식 교육을 실시하고 넘어가는 녀석이다.
그런 일준이는 아무 말도 안 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한참을 생각하였다. 그러고는 손으로 턱을 괴며 이틀 전의 일을 이야기하였다.
“우리가 처음 관직에 올랐을 때 내가 온갖 고생을 하다가 주입식으로 지식을 주입하고 넘어간 건 기억나? 놀랍게도 나와 대화를 나눈 녀석 중 네 명 정도는 기초 교육을 받았더라.”
“아마 막부에서 관리하는 난학(蘭學 - 네덜란드를 통해 전해진 서양 학문) 이수자일 거다. 아마 조슈나 사츠마같이 난학의 중심지에서는 절반 이상이 기초 교육을 받았겠지.”
“이번 정책은 제법 위험할 수도 있겠어. 대한제국은 유럽에 사람을 보내서 머리를 깨우치게 해야 할 수 있던 일이 일본에서는 자연스럽게 일어나고 있어서 무섭다.”
일준이의 평가를 들으며 고개를 끄덕여 동의하였다. 일본을 이대로 내버려두어도 개화를 추진하는데 대한제국의 영향을 감안하면 흑선내항 사태와 겹쳐 더욱 빠른 발전을 할 수 있다.
그러니 이번 기회에 막부를 시작으로 일본을 포섭한 것이지.
일준이는 주변을 둘러보더니 그나마 다행이라는 듯이 말하였다.
“에이다가 애들을 데리고 영국 사절단을 만나러 가서 다행이지. 잘못하면 일본이 우리 손에서 벗어나 멋대로 근대화를 추진할 것 같은데 계획은 있냐?”
“여러 인물을 포섭할 계획도 있다. 이 시기면 슬슬 두각을 드러낼 애송이인 요시다 쇼인을 비롯한 조슈 번의 주요 인물만 포섭해도 충분한 효과가 있어.”
“난 들어본 적이 없는 인물인데 일본 근대사에서 그토록 중요한 인물이야?”
“죠슈 번은 이토 히로부미를 비롯한 메이지 유신 중진들의 출신지이고 요시다 쇼인은 그들의 스승이니 아주 중요한 인물이지.”
일본의 점진적 개화와 대한제국의 경제 예속화는 내 계획의 핵심이다. 대한제국이 일본을 강제로 병합하고 무력으로 점거하여 식민지를 만들어 보았자 별다른 이득도 안 된다.
경제적 종속을 시키고 친 대한파를 육성하여 머슴으로 삼아야지.
일준이는 이토 히로부미라는 말을 듣고 눈살을 찌푸리더니 손가락을 관자놀이에 대며 말하였다.
“그냥 이 세상의 평화를 위해서 다 암살하는 건 어때?”
“몇 명도 아니고 전체를 죽이면 반드시 들킨다. 적당히 엇나가는 놈들은 가급적 이득을 제공해 포섭하고 진짜 답이 없는 경우에나 일본 특유의 정서를 동원해야지.”
“일본 특유의 정서가 뭔데? 혹시나 신선조인지 뭔지 하는 암살자들이라도 동원하려고?”
“거의 비슷해. 중세시절의 관습이 저변에 깔려 있어서 자신의 뜻을 관철하려고 칼을 뽑거든. 하다못해 육식을 한다고 왕궁에서 유혈사태를 일으킨 놈도 있지.”
좀 과장하면 맘에 안 드는 놈을 칼로 찌르고 나중에 생각하는 수준이다. 암살과 테러는 밥 먹듯이 일어나고 유혈 진압은 일상다반사이다.
일준이는 내 눈을 피하면서 말했다.
“이러다가 내 제자를 자처한 양반들이 죄다 칼 맞고 변사체로 발견될 것 같은데.”
“그 정도로 사태가 악화되지는 않을 것 같아. 아직은 막부가 주도권을 쥐고 있고 지방 군벌들은 난학을 배우며 잠자코 힘을 비축하는 상황이니 조절만 하면 되겠지.”
“그럼 물어볼 게 하나 있어. 내가 알기로 일본은 결국 일왕이 권력을 쥐고 아래의 군부가 폭주해서 난리를 피웠거든? 막부는 무너지는 배인데 이들을 선택할 필요가 있을까?”
일준이가 좋은 질문을 했다.
난학을 중점적으로 배우고 개혁의지가 있는 지방 군벌을 포섭하면 흑선내항 사태로 막부를 뒤집고 대한제국의 입맛에 맞는 정부를 구성할 수 있다. 그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유혈사태가 일어나고 권력이 이반되며 혼란이 벌어진다.
이를 염두에 두고 있으니 일준이를 설득하기 위해 설명을 해 주었다.
“본래 역사의 일본이 기형적인 지배구조를 가지고 헛짓거리를 계속한 이유가 여기에 있어. 유신지사라는 작자들이 어떻게든 권력을 쥐려고 억압적인 체계를 만들어냈지.”
“손쉽게 기형적으로 뒤틀린 나라를 만드는 대신 조금 힘들더라도 정상 국가를 만들어 예속시키겠다는 의지로군.”
“일본을 머슴으로 부릴 생각인데 피 맛을 본 머슴보다는 순진하고 일 열심히 하는 머슴이 다루기 쉽지 않겠어? 물론 피 맛을 안 보는 건 아닌데 가급적 자제하려 한다.”
어디까지 자제할 수 있을지는 일본에서 번개 자르기를 얼마나 하느냐에 달려 있지만.
생각을 정리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일준이에게 권유하였다.
“연휴인데 우리가 할 일도 별로 없지? 일본 사절단과 함께 이런저런 물건이나 보자고.”
“십덕 후작님의 말에 따라야지요. 오덕 제자들을 만나러 가겠습니다.”
“너 자꾸 성질 긁을 거냐?”
“술을 마시면서 다섯 덕에 대해 논했지. 물리, 화학, 생물, 천문 그리고 수학이 내가 생각하는 다섯 덕이라고. 그러니 자기들을 고도쿠(五德, 오덕의 일본 음독)라 칭하던데.”
내 새로운 호를 만들어 이 사태를 끝내야겠다.
숙소에 머무른 일본 사절단에게 가니 이들은 이미 한양 길거리를 보면서 그림을 그리고 각종 기록을 남기고 있었다.
“이토록 찬란한 도시가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하다못해 집조차도 다르니 저희는 다다미에 가운데 화로를 두어 몸을 녹이는데 바닥 전체에 동관을 깔아두다니요.”
“이 동관이 어디서 나왔겠습니까? 일본의 수많은 광산에서 채굴된 동입니다. 이미 대한제국은 일본에 의존하고 있으니 일본 또한 우리에게 의존해도 될 것 같군요.”
이들은 공포를 극복하고 대한제국의 기술을 받아들여 막부의 권위를 높일 무한한 기대감에 부풀어 있었다. 개중 몇 명을 남겨두고 남포 인근에 있는 조선소로 향하였다.
난생처음 기차에 오른 일본 사절단은 기관실까지 돌아다니며 증기기관차의 구조를 파악하였다. 그러고는 우리가 있는 칸으로 돌아와 조심스럽게 말하였다.
“듣자 하니 대한제국에 기차가 제대로 돌아다닌 것이 칠 년 전이라 하였습니다. 일본에 기차 노선을 설치한다면 몇 년 정도 걸릴 것 같습니까?”
“일부 노선이 개통된 것이 칠 년 전이고 전체 노선 개통은 오 년 전입니다. 다만 기차 노선에는 막대한 자금이 들어가고 질 좋은 철 또한 필요하지요.”
“충분히 이해하였습니다. 아직 저희가 갈 길이 멀고도 험하군요.”
기차가 평양에서 멈추고 반나절 정도 마차를 타고 이동하여 남포 인근의 조선소에 도착하였다. 조선소와 남포를 통해 들어오는 철광석과 석탄을 이용한 평양 조선소는 매캐한 연기를 뿜어내며 쉴 새 없이 가동되었다.
법정 공휴일이지만 한가위 제사를 올린 일반 노동자들에게는 추가 임금을 받을 수 있는 기회이다.
거대한 전로가 벌컥거리며 움직이는 모습을 본 사절단은 열기에 몸을 주춤거리면서도 이를 확인하였다.
“저희는 기껏해야 바닥을 파내서 철을 녹이는데 저런 거대한 계란 형상의 철물로 쇳물을 만들어 내다니요. 용태 백작님, 저건 어떻게 만드는 물건입니까?”
“이미 제련한 무쇠를 다시 가공하는 전로입니다. 제가 창안하였으니 잘 알고 있지요.”
일준이가 설명을 하는 동안 다른 사람들은 나를 따라 발해급 철갑 증기선이 건조되는 도크로 향하였다.
이런 휴일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작업을 실시하던 이점버드 브루넬이 나를 맞이하였다.
“한센 박 후작님을 뵙습니다. 듣자 하니 십덕이라는…….”
“제 호를 새로 만들 것이니 그만 좀 말해주십시오. 발해급 철갑 증기선을 일본 사절단에게 설명하려고 방문하였습니다. 작업 진행 상황은 어떠하신지요?”
“내년에 유빙이 풀려날 무렵 바다로 진출할 겁니다. 이제 외부 건조는 거의 다 완료되었고 내부 작업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럼 설명을 시작하겠습니다.”
일본 사절단은 네덜란드의 무역선과 접촉한 경험이 있었지만 철갑 증기선의 위용에 짓눌려 버렸다. 그야 당연한 것이 일본에 지금까지 오간 무역선은 효율을 추구한 500톤급이다.
반면 발해급 철갑 증기선은 1,650톤에 달하는 이 시대 기준으로 표준보다 조금 커다란 선박이다.
이점버드 브루넬은 발해급에서 가장 먼저 건조된 배를 가리키며 말했다.
“첫 이름은 발해급 발해함이었으나 국명인 발해(渤海)를 이어받게 되며 발해급 대조영함이 되었습니다. 이중 외피를 두어 내파성을 강화하였으며…….”
크레인으로 옮겨져 갑판에 설치된 활강포는 24㎝ 구경의 초대형 화포였다. 영국의 네메시스급의 32파운더보다 여러모로 부족한 점이 있지만 대한제국 자체기술로 개발한 화포였고.
이 외에 측면에 달린 화포도 있으며 내부에는 콜리스식 대형 증기기관까지 있었다.
모든 설명을 마친 이점버드 브루넬에게 질문 공세가 쏟아졌다.
“철판을 두 겹으로 두른 이유가 무엇입니까?”
“청나라에서 벌어진 일 때문에 철갑 증기선이 격침되었지요. 대형 폭약을 올린 배를 돌진시켜 여러 차례에 걸친 자폭을 실시하였고 이를 대응하기 위해서입니다.”
“조금 전에 대응방어라는 말씀을 하셨는데 이 의미를 알고 싶습니다.”
“쉽게 말씀드리자면 이 배의 방어력은 동급 선박의 주력 화포 직격에 버틸 수 있다는 말입니다. 같은 크기의 배라면 같은 크기의 화포를 사용하기 마련 아닙니까?”
마침 신형 화포인 24㎝, 조선 명칭으로는 개력(改曆)포라 명명한 화포도 그가 담당하였다. 브루넬은 배에서 내려 멀리 있는 시험 사격장으로 다가가 시험 사격을 실시하였다.
“동시에 함포 세 문을 발사해 보겠습니다. 한 개는 흙더미에, 다른 한 개는 십 인…… 이십오 센티미터 두께의 참나무 합판에, 나머지 하나는 발해급의 강판에 발사합니다. 사격 개시!”
우레와 같은 포성과 함께 함포가 발사되고 결과가 극명히 드러났다. 흙더미에 파고든 포탄이 폭발하며 주변을 흙먼지로 뒤덮었고 다음으로는 참나무 합판에 구멍이 뚫리고 내부에서 폭발이 일어났다.
반면 발해급 철갑 증기선에 설치된 강판은 찌그러지고 리벳이 튀어나왔을 뿐 포탄을 튕겨냈다.
이점버드 브루넬은 고개를 끄덕이며 일본 사절단에게 말했다.
“이 정도 되며 앞가림을 할 수 있을 것 같군요. 생각 같아서는 이천 톤 이상의 철갑 증기선으로 만들고 싶었습니다만 예산이 부족하니 어쩔 수 없지요.”
“질문이 있습니다. 미국이라는 국가의 전함은 얼마나 거대합니까?”
“미국이요? 최근에 건조된 USS 미시시피함이…….”
이토록 강대한 전함을 가지고 있는 대한제국이라면 미국을 몰아낼 수 있으리라 생각했으리라. 그러나 이점버드 브루넬은 이런 기대를 바로 무너트려 버렸다.
“배수량 삼천이백 톤, 발해급의 두 배라 보시면 됩니다. 화력 또한 우수하지만 미국 녀석들은 크기만 키울 줄 아는 놈들이니 제가 만든 선박이 곧 앞지를 수 있습니다!”
일본 사절단의 눈빛은 비에 홀딱 젖은 강아지 꼴이 되어버렸다. 지금 몸으로 체험한 발해급 전함 세 척만 따져도 일본의 목줄을 틀어쥘 수 있는데 이보다 두 배 거대한 함선을 가진 나라가 미국이었다.
이제 절망을 충분히 맛보게 하였으니 희망을 줄 차례였다.
증기기관의 실체와 제철소를 모두 확인하고 엄청난 격차에 주눅이 들어 있는 이 상황이 설득하기 가장 좋은 시기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