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 13장 4화 칭제 건원(2)
박수갈채가 끝나고 모두가 조용히 침묵할 무렵 행사가 재개되었다. 칭제 건원의 이유를 표명하였으니 이제 효명세자도, 조선의 왕도 아닌 새로운 나라의 황제가 될 차례였다.
궁궐 안으로 들어간 종친들이 복식을 갈아입기 시작하였다. 잠시 휴식시간이 주어졌고 모든 신료들은 긴장이 풀려 한숨을 내뱉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벌떡 일어나는 사람도 있었다.
“처숙부님께서도 긴장을 많이 하셨군요.”
“아무렴, 긴장이다 뭐다 다 떠나서 선친께서 이 모습을 보았으면 얼마나 기쁘실까.”
“그 말이 지극히 옳습니다. 정종대왕님, 이제는 정조 대왕이 되신 분을 섬기던 분들이 보면 얼마나 마음이 놓이겠습니까. 또한 모든 열성조께서 이를 가호할 것입니다.”
“내 눈물이 다 나는군. 이 나라가 힘만 가지고 있었다면 이런 연설이 청의 말로 이루어졌을 것이네. 모든 것은 옛 조상이 지켜온 명백한 운명 덕분이 아닌가.”
명백한 운명은 참 좋은 말이다. 머나먼 동쪽에 있는 미국도 이 명백한 운명을 표방하며 서쪽으로 진군을 하고 있지 않은가.
당연히 다른 유럽의 외교관들은 감동하였지만 제임스 뷰캐넌은 쓴웃음을 지으며 경계의 눈초리를 아끼지 않았다. 그러고는 나를 슬쩍 바라보았는데 아마 내 전략이라 생각하리라.
물론 그런 조언 따위는 하지 않았고 효명세자가 알려준 여러 안건 중 하나를 택했을 뿐이지.
다시 나팔이 울리고 행사가 재개되려 하였다.
새로운 복식의 효명세자는 보라색 곤룡포를 입었는데 문양이 달랐다. 금실로 수놓은 용은 예전과 큰 차이가 없지만 옷감에는 조금 검은 색의 봉황 문양이 직조되어 있었다.
기존의 곤룡포와 차이는 크지 않지만 왜 이런 문양을 새겼는지 궁금하기에 이런 사소한 일을 관할한 정약용에게 질문을 하였다.
“에이다의 직조기로 만든 봉황 문양의 옷감에 금실로 용 문양을 새겼군요. 이유가 있으십니까?”
“그야 이 나라의 왕실을 상징하는 문양은 용이지만 이 나라에서 살아가던 조상들이 섬기던 국조는 봉황을 비롯한 새라네. 옛 고려는 삼족오를 섬기었으며 아직도 솟대를 세우지 않는가.”
“그러하면 용을 상징으로 유지하되 옛 조상의 얼을 지켜나갔다는 뜻이로군요. 그런데 제가 알기로 옛 중국에서 해동에 사는 새를 금계(金鷄 - 금색 새)라 하였는데 왜 검은색입니까?”
고구려의 삼족오도 아니고 자색과 흑색을 섞은 문양이라니 좀 이상하기는 하였다.
정약용은 헛기침을 하더니 변명하듯이 말하였다.
“사실 자색 바탕에 홍색으로 용과 대비한 봉황을 새겨두려 하였지만 요학자(고생물학자)들이 발굴한 화석이 문제였네. 가장 오래된 봉황의 깃털 색이 검다 하시었지.”
옷감에 수놓아진 검은 봉황의 정체는 어처구니가 없게도 시조새의 화석에 있는 검은 깃털이었다. 인류와 같은 시대를 살아간 적도 없는 생물체에서 따온 고증 색상이다.
이러다가 ㅎ 자로 시작하는 어떤 유사역사학자들은 환 제국이 일억 년이나 된 제국이라 말할지도 모르겠다.
자색 곤룡포를 입은 효명세자는 다시금 연설을 시작하였다.
“뜻은 갖추었으니 이제 격식을 갖출 차례이다. 새로운 제국의 일원이 되기로 뜻을 정한 이들은 모두 앞으로 나서 예의를 갖추도록 하라.”
대기하고 있던 사람들이 절을 올리고 단 앞으로 걸어 나왔다. 이들은 각기 만주에 남은 채 입관하지 않은 만주족, 요동 일대에 살고 있던 한족 그리고 북만주의 소수 부족이었다.
이들은 고의적으로 옛 조상의 복식을 차려입었으며 한족들은 아예 명나라 시절의 복장을 대략적으로 고증하였다.
가장 먼저 무릎을 꿇은 이들은 한족이었다.
“명이 쇠락하고 여진족이 입관하여 옛 중화가 무너지게 되었나이다. 침통한 뜻을 모아 뜻을 올리오니 새 제국의 황제께서 저희의 복속을 받아들여 주시길 청할 뿐이옵니다.”
“옛 명의 후예들이 이 땅에도 남아 있으니 염려하지 말라. 이 나라는 오는 이를 막아서지 않으며 가는 이를 잡아두지 않을 것이다.”
다음으로는 각 만주족의 부족장들이 스스로를 여진이자 옛 조선의 신하로 칭하며 복속하였다. 시베리아의 부족들은 아무려면 좋으니 복속 의사를 표시하였고.
마지막으로 나온 사람은 단 한 명이었는데 바로 나우루에서 건너온 부족들의 대표였다.
가장 용맹한 전사 한 명이 대표로 나왔는데 더듬거리며 배운 대로 말하였다.
“조…… 조선 사나 남드리 저흐이를 보살벼, 벼 주시기를 청하니다.”
“이역만리의 머나먼 대양에 떠 있는 섬이라 하여도 복속을 청하면 받아들일 것이다.”
어떻게 보면 말도 모르는 야만인을 데려와서 복속을 받으니 각국 외교관들 사이에서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냥 총칼을 들고 적당히 죽이면 얻을 수 있는 영토라 생각했겠지.
물론 이는 나우루에 잠든 인광석을 캐내기 위한 방책이었다. 나우루에 거주하는 미크로네시안 들의 보호 요청을 받았으니 후일 협상에서 유리한 고지를 얻을 수 있으리라.
모든 이들이 절을 올려 복속을 청하였고 효명세자는 고개를 끄덕인 다음 이들과 악수를 나누고 각자에게 서신을 내려주어 허가하였다.
이제 다음 차례인 국호 확정이 시작되었다.
“이 자리에 모인 여러 세력이 복속을 청하여 새로운 제국의 일원이 되었으니 참으로 기쁜 일이로다. 이제 새로운 제국에 맞는 국호를 정하기로 하였노라.”
“이 나라에 있는 사람은 한인(韓人 - 한민족, 남방계)과 예인(濊人 - 예맥, 북방계)으로 비롯하였으나 애석하게도 예인의 맥은 끊어지고 한인에게 흡수되기에 이르렀다.”
“이는 옛적 이 나라에 있었던 삼한(三韓)의 혈맥이 끝없이 이어졌다는 말이다. 옛 고려는 물론이요 태조대왕께서 나라를 세우신 강역 또한 삼한의 영토를 기반으로 삼지 않았는가.”
“그러하니 국호를 칭하되 이 나라가 세워지고 기반으로 삼은 삼한의 땅을 기념으로 삼아 한(韓)으로 할 것이요 예인의 땅을 돌려받았으니 대한(大韓)으로 삼겠다.”
국가의 약칭은 한, 영어로는 Han이며 공식 명칭은 대한제국, 영어로는 Empire of Great Han이 되었다.
아직 고고학 발달이 부족하여 여러모로 애매한 내용이지만 이 시대에는 어쩔 수 없다. 현대의 연구결과라면 예, 맥, 한의 세 민족을 포용하였다는 말을 하겠지만 이 시대는 자료가 부족하니까.
대한이라는 국호가 표명되고 공개되자 우리 모두 정해진 대로 함성을 질렀다.
“황제폐하 만세! 대한제국 만세!”
-황제폐하 만세! 대한제국 만세!
마지막 순서로 제관(帝冠)이 옮겨졌다. 국호가 정해졌고 남은 것은 제위에 올라 연호를 제정하는 자리였는데 효명세자는 자신이 쓸 관을 바라보며 잠시 침묵하였다.
제관의 원형은 순학자들이 심혈을 기울여 발굴한 단 하나의 고구려 고분을 기반으로 결정되었다. 벽화에 중요하게 그려진 불꽃 문양을 옛 기록과 취합하여 만들어낸 것이다.
얇은 금관은 섬세하게 가공되었으나 그리 화려하지도 크지도 않다. 여기에는 각지에서 채굴된 보석들이 박혀 있었으나 지나치게 화려하지 않고 단아한 멋이 살아 있었다.
마음을 정한 효명세자는 제관을 쓰려 하였지만 관이 담긴 상자를 가만히 앉아 있던 순조에게 가져갔다. 그러고는 무릎을 꿇으며 청원을 하였다.
“제가 이 자리에 오르게 된 것은 아바마마께서 소자에게 양위하신 덕분이옵니다. 바라오니 소자에게 관을 씌우시어 태황(太皇)의 자리에 오르심을 경하(慶賀)하시옵소서.”
“금상은 어서 일어나지 않고 무얼 하시오. 이 아비를 대신하여 황제의 자리에 오르면서 이토록 몸을 낮춤은 예의에 어긋나는 일이니 어서 일어나시오.”
누구와도 권력은 나눌 수 없다는 말이 있지만 순조와 효명세자는 예전부터 권력을 분할하여 서로의 힘을 합친 부자 사이이다.
효명세자가 자리에 일어나자 순조는 고개를 숙이며 말하였다.
“나는 그저 옥좌를 덥히며 금상의 즉위를 기다린 사람에 불과하지 않소.”
“아니옵나이다. 아바마마께서 저를 믿어주시고 길러주신 은혜를 잊지 않는다면 금수만도 못 한 황제가 될 것이옵니다. 그러하니 아바마마께서 손수 관을 씌워주시옵소서.”
순조는 몇 번이고 머뭇거리다 효명세자의 머리 위의 면류관을 벗기고 금관을 올렸다. 종친을 시작으로 모두가 ‘즉위를 경하하옵나이다 전하.’라는 찬송을 올렸고 마침내 효명세자가 황제로 즉위하여 첫 명령을 내렸다.
“이제 조선은 대한제국으로 거듭났다. 첫 연호는 효명(孝明)이라 할 것이니 가장 깊은 뜻을 효심으로 삼아 만천하에 알리기 위한 마음을 담은 연호이다.”
조선의 효명세자는 이제 효명제가 되었다. 순조는 어떠한 묘호를 받을지는 모르지만 태황제의 자리에 올라 효명세자를 보좌하며 즐거운 노년을 보내리라.
효명제는 모두를 바라보며 황제로서의 첫 명령을 하달하였다. 순조를 잠시 바라본 효명제는 예정된 순서와 조금 어긋나지만 주변의 군관들에게 첫 지시를 하달하였다.
“짐의 첫 명령을 하달하겠다. 순서를 변경하여 축포(祝砲)를 발사하도록 하여라. 이런 날에는 사기를 물러나게 함이 마땅하니 염려하지 말고 계속 쏘아라!”
“명 받들겠사옵니다! 전 장병! 축포 서른여섯 발 발사!”
깃발이 휘둘러지며 축포와 공포탄이 발사되었고 흑색화약과 무연화약의 연기와 지린내가 주변을 메웠다. 그제야 효명제의 첫 명령이 어떠한 의도였는지 알 수 있었다.
“경양군은 괜찮은가? 내가 나이가 많아서 연기를 쐬면 눈물이 저절로 나온다네.”
“태황제께서 저를 배려해 주시니 저절로 눈물이 나올 지경이옵니다.”
감동에 북받쳐 눈물을 흘려대는 순조를 위한 배려 아닌 배려였다. 문제가 있다면 다른 국가의 외교관들은 괜찮은데 일본 사절단이 이 압도적인 포성에 혼절할 지경이라는 점이다.
이후 여러 행사가 거행되었다. 각 부처의 변경과 조직 개편 그리고 기존의 행정 구역에 대한 이야기였다.
다음의 행사는 종친들의 봉왕(封王 - 왕의 작위를 내림) 행사였다.
“경양군은 그간 고난을 겪었으며 백성의 삶과 밀접하게 인연을 맺었소. 이를 감안하여 고려의 관직인 심양왕으로 봉할 것이니 북변으로 나아가 힘을 보태주시오.”
“폐하께서 신을 이토록 어여삐 여겨주시니 부흥할 것이옵나이다.”
“또한 남연군을 옛 고려의 영토에 속한 부여를 기념하여 부여 왕으로 봉할 것이오. 혹여나 불민한 일이 생기면 흥완군(이하응의 둘째형)을 봉할 것이니 염려하지 마시오.”
“신에게 이러한 은혜를 내려주시니 늙은 몸을 이끌고 필사적으로 임할 것이옵나이다.”
봉왕은 어느 정도 절제를 갖추었다. 종친 가운데 가장 세력이 약하고 촌수만 가까운 경양군, 본래 역사 철종의 아버지가 그나마 요동 일대를 관할하는 심양왕이 되었다.
물론 통치 능력이 전무하니 순조와 외모가 좀 닮았다는 점 하나를 앞세워 민심 이반을 막기 위한 수단이 되었지만.
여기서 끝나는가 싶었는데 효명제는 다음 순서에 들어갔다.
“태종대왕께서 제도를 정립하여 봉작(封爵 - 작위를 내림)을 중단하셨으나 제국에는 여러 작위가 필요한 법이 아니겠소. 전조 고려의 풍습을 본떠 후작 이하 작위를 내리겠소.”
불가능한 일은 아니지만 옛 전통을 지킬 줄 알았다. 그나마 공작으로 봉하는 사람들은 종친 가운데 거리가 먼 이들이었으니 정말 후작에 봉해질 수도 있었다.
“궁내부의 비서원 대신으로 임명된 박규수를 후작의 자리에 봉한다.”
“성은이 망극하옵나이다. 폐하.”
“다음으로는 가장 작위를 내리고 싶은 사람의 차례로구나.”
겉으로는 태연을 가장하였으나 효명제가 제발 백작을 내려주기를 기원하였다. 나보다 경력이 많은 박규수가 후작인데 내가 후작이 되면 뭔 꼴인가.
후작이 되면 호와 합쳐져 십덕후작으로 불리고 줄여서 십덕후라 불릴 수도 있으니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
내 표정을 확인한 효명제는 눈을 가늘게 뜨며 말하였다.
“형식상으로는 백작이나 자작에 봉하고 싶은 마음이 있지만 외교라 함은 상대에게 주눅이 들어서는 안 되는 자리일세.”
“폐하게 신 박현상 감이 간언하오나 형식과 격식은 구분되어야 하는 법이옵나이다.”
“짐이 알기로 서역에도 오등작과 흡사한 작위가 있었지. 변경을 수호하는 백작이 한 등급 높은 직위이니 후작과 대등하지 않겠나. 외교는 곧 이 나라를 수호하는 칼날일세.”
내 임명장에 마지막 자리에 후작(侯爵)이라는 글귀를 쓰고 옥새로 날인까지 한 효명제는 악수까지 하며 이를 건네주었다.
인사를 올리고 물러나는데 정신이 아득해지며 다리가 휘청거렸다. 내 다음으로 백작 작위를 받은 일준이가 내 귀에 속삭였다.
“십덕후님 납시오.”
“닥쳐!”
이게 다 내가 쌓아놓은 업보이다.
유럽에 퍼져 나갈 솜 남편들이 가져온 끔찍한 업보이며 종친도 아니니 평생 십덕 후작으로 불리게 되리라.
* * *
연회를 준비하기 위해 궁궐이 일시로 비워졌다. 관리들은 집으로 돌아가 연회를 기다리거나 새로 완공되어 한가위 휴일 동안 집기를 옮길 궐내각사에서 휴식을 취하였다.
물론 나는 휴식을 취하지 못하였다. 나를 비롯한 외부(外部) 관리들은 각국 대사들과 함께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었다.
오말레 공작 앙리는 궐내각사 내부를 보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대한제국의 궁궐은 격식이 극명하군요. 주요 전각은 절제된 미학을 가지고 있으며 이 궐내각사라 불리는 내부 업무공간은 미학보다는 효율성을 중점으로 삼았습니다.”
“그야 당연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제국을 이끌어 나가려면 업무가 가장 중요하지요.”
“훌륭한 말씀입니다. 그나저나 옆방에서 소리가 들려오는데 아직 벽이 완공되지 않았습니까?”
“집기에 따라 벽을 옮겨야 하니 지금은 합판에 회칠을 하여 임시로 막아두었을 뿐이지요.”
각 관청이 배정되면 합판으로 벽을 만들고 사이에 솜을 채워 넣어 방음재로 삼을 예정이다. 옆방에서는 영국의 전 총리 윌리엄 램이 지난 조선-청 전쟁에 대한 사과를 끝없이 하였다.
오말레 공작 앙리는 궁궐을 더 돌아보고 싶었는지 나에게 다른 사람을 접대하라 하고 프랑스 사람들과 함께 안내를 받으러 나갔다.
그런 나에게 다가온 이들은 의외의 사람들이었다.
“십덕 후작님이시지요? 다른 일이 아니고 설명이 좀 필요하여…….”
일본의 사절단은 난학자, 네덜란드의 문물을 수용하여 일본에서 연구하던 사람들이 아닌 막부에서 보내온 관리들이었다.
이들은 평상시에 동래를 오가며 교역을 실시하던 이들이었고. 프랑스어와 영어 정도는 익혀 둔 사람이 제법 있었다. 그래도 이들은 새로운 문물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였다.
난학자들이 조선의 광경을 보았다면 각 번의 번주들과 협력해 급진적 대책을 세우겠지만 막부 출신이니 어중이떠중이들의 집합체이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이들이 질문을 시작했다.
“대체 조선이, 대한제국이 어떠한 나라가 되었는지 알 길이 없습니다. 한양에 당도하고 한 달이 지날 때까지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으며 국력을 가늠할 수조차 없더군요.”
“저희도 수십 년 동안 많은 고난을 겪어오며 나라를 발전시켰습니다. 삼십삼 년 전 통신사가 마지막으로 당도한 이후에 끝없는 시련을 겪었지요.”
조선이 변화한 것은 길게 잡아서 15년, 짧게 잡으면 10년이지만 아무려면 좋을 일이다.
이들은 증기기관차부터 보일러 심지어 소총과 포탄까지 모든 것에 대한 질문을 시도하였다. 이들이 아무리 어중이떠중이라 해도 보고 배우는 것이 있게 마련이다.
나는 이들의 질문을 대략적으로 답변한 뒤 요약해서 정리해 주었다.
“제가 막부의 사람들을 여기에 들인 이유를 아시겠습니까? 지금 일본은 거대한 폭풍우를 앞두고 있는 나라입니다. 이러한 천재지변에서 어느 한쪽을 택해야 하지요.”
“그 천재지변이 대한제국이라는 말씀이로군요. 예전 임진년에 히데요시의…….”
“죽어 없어진 자이며 옛 원한은 일본의 지배자인 도쿠가와 막부가 화의를 택하여 사라지지 않았습니까. 그러하니 막부가 있는 한 묵은 원한을 앞세울 생각은 없습니다.”
말 한마디에 많은 뜻이 담겨있었다. 원한은 남아 있지만 화해를 한 당사자의 후손이 권력을 쥐고 있으니 무력을 행사하지 않을 것이라는 뜻이다.
바꿔 말한다면 도쿠가와 막부 대신 다른 세력이 권력을 얻으면 무력을 행사한다는 뜻이기도 하고.
이런 협박에 가까운 말 다음에는 당근을 내밀어주었다.
“더군다나 일본은 거대한 방파제가 아니겠습니까. 황제 폐하께서 세상의 여러 정세를 알아보시며 일본의 막부가 무너지면 이 나라도 위험에 처한다 하셨습니다.”
“방파제라니요? 막부에 어떠한 위기가 닥친다고 그런 말을 하십니까? 여러 변명을 앞세워 부족한 사람들을 철저히 이용해 먹고 버리겠다는 말씀 아니십니까?”
당연히 이럴 줄 알았다. 이용해 먹고 버리겠다는 뜻을 공표하면 어느 누구라 하여도 반발하리라.
그러니 이들이 왜 조선의 방파제이며 거대한 위기가 찾아오는지 알려주려 하였다.
“잠시만 옆방에 가서 숨을 죽이고 기다리고 계시지요. 일본에 찾아올 위기에 대해 논하도록 하겠습니다.”
마침 아래층에 미국 사절단이 있으니 대화를 나눌 차례였다.
미국은 1823년부터 먼로 독트린을 주장하여 서부를 개척하였고 이제 대통령이 될 제임스 포크가 이를 명백한 운명이라 포장하여 선거 운동을 실시하였다. 마침 조선도 대한제국이 되며 명백한 운명을 주장하였으니 서로의 의구심을 풀 자리가 필요하리라.
내 요청에 응한 제임스 뷰캐넌이 내가 있는 방으로 들어왔다.
“훌륭한 행사였습니다. 이제야 한센 박 더 십덕 후작을 접견하게 되었군요.”
“그냥 한센 박이라 해주시지요.”
공작으로 올라갈 수도 없고 백작으로 내려갈 수도 없으니 짜증이 밀려왔다. 이런 내 시선을 받아넘긴 제임스 뷰캐넌은 의자에 앉아 태연하게 말했다.
“명백한 운명이라는 단어가 참 마음에 듭니다. 제가 몇 번이고 곱씹어 보아도 훌륭한 말이더군요.”
“대한제국의 명백한 운명이 자주성이라면 미국의 명백한 운명은 서부로의 진격이지요. 조만간 대통령의 자리에 오를 제임스 포크의 선거운동 표어가 54도 40분까지 영토를 확장하겠다는 말이었지요?”
상대는 나를 흘겨보며 이 정도 지식은 갖추고 있을 줄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전 기억을 떠올리니 이 양반의 시력이 이상해서 사람을 흘겨봐야 그나마 잘 보인다 하던가.
잠시 말을 멈춘 뷰캐넌은 팔짱을 끼고 내가 말하기를 기다렸다. 그가 하고 싶은 말이자 미국의 대다수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사상에 대해 털어놓았다.
“미국은 서부로의 개척을 운명으로 생각하는 나라입니다. 북미대륙 전체를 동서로 연결하여 그 막대한 생산력을 소모하여 태평양으로 진격하지 않겠습니까.”
“그래 보았자 이류 열강에 불과한데요.”
“그 이류 열강이 이 대한제국과 영토가 닿아 있다 가정하고 전쟁을 벌이면 오 년 내에 너끈하게 승리를 거둘 수 있지 않겠습니까? 제가 보기에는 충분히 가능한 일이군요.”
솔직히 오 년도 너무 긴 시간이다. 지금 미국의 생산력과 잠재력이 총동원되면 3년조차 버티지 못하겠지.
영토가 붙어있어서 총력전을 벌인다는 의미 없는 가정이기는 하지만 좋은 주제인 것 같았다.
내 말을 들은 제임스 뷰캐넌은 인정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다 진실을 털어놓았다.
“틀린 말은 아닙니다. 지금 이 상황이라도 저희의 명백한 운명은 서부를 넘어서 태평양 전체로 향할 것이며 대한제국이 전력을 다해도 막아내기는 쉬운 일이 아닐 것 같군요.”
“좋은 말을 하셨습니다. 일단 커피라도 한 잔 마시면서 이야기를 계속합시다.”
옆방에서 숨을 죽이고 있는 일본 사절단은 이 말을 듣고 공포에 질려 있으리라. 대한제국만 따져도 아득한 격차가 보이는데 동쪽에서 다가오는 미국이라는 위협을 보여줬으니까.
잠시 커피를 만드는 동안 방을 막은 합판 틈을 보았는데 눈동자가 보였다.
뷰캐넌은 시력이 안 좋아서 이를 못 보고 옆방에 아무도 없거나 대화가 들리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커피에 각설탕을 두 개 넣어 마신 뷰캐넌은 본론을 시작하려 했는지 입맛을 다시며 나를 바라보았다. 이제 일본을 공포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을 본론이 시작될 차례이다.
#작가의 말
대한제국의 제관은 덕흥리 벽화고분의 불꽃 문양을 참조하였습니다.
출처 - 한국문화정보원 문화포털
https://www.culture.go.kr/tradition/traditionalUseOrigin.do?did=101689&reffer=shape&gubu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