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효명세자와 함께하는 조선 생활-125화 (125/345)

125. 11장 11화 제국의 격식

순조의 양위 및 본인의 칭제건원(稱帝建元) 거부 선언은 적지 않은 충격으로 다가왔다. 이미 청나라와의 전쟁을 통해 외왕내제를 적용하고 대등한 관계를 맺게 만든 사람이 순조이다.

이 과정은 순조 입장에서는 그리 큰 치적이 아닌 것은 확실했다. 순조 본인은 물론이고 효명세자를 비롯한 국가 중신들은 살만 뒤룩뒤룩 찐 청나라를 마음대로 두들겨 팼다는 사실을 인지하였다.

“아바마마! 부디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소자가 대리청정을 수행한다 하여도 아바마마의 혜안이 아니라면 제대로 된 정무를 수행하지 못하고 있사옵니다.”

“신 정약용 간언을 올리옵나이다. 차라리 신을 죽여주시옵소서!”

“신 박현상 간언을 올리옵나이다. 폐하께서 속히 칭제건원을 행하시고 위엄을 만천하에 널리 알리시옵소서. 양위는 아니 되옵니다!”

이런 제반사항을 알고 있어도 모두 반사적으로 절을 올리고 통촉하여 주시옵소서라는 말을 하였다. 그만큼 양위는 쉽사리 논할 수 없는 일이다.

순조가 실권을 효명세자에게 넘겨주었어도 나라의 주인은 순조이다. 대리청정까지는 역할 분담이라 생각하여 신하들이 동의할 수 있어도 여기서 동의하면 역모에 준하는 행위다.

“이럴 줄 알고 있으니 지금까지 말을 아낀 것이로다.”

우리 모두가 절을 올리고 고개를 들지 않자 순조는 힘없는 목소리로 말하였다.

이건 정치적 기반을 세우기 위한 양위 소동이 아닌 진심을 담아 양위를 원한다는 뜻이기도 하였다.

순조가 역대 조선의 왕처럼, 이를테면 광해군을 정신적으로 압박한 선조나 사도세자를 압박한 영조처럼 효명세자의 정치적 영향력을 깎아내리려면 공개적 자리에서 양위를 논했으리라.

그러지 않고 이런 사적인 자리에서 지나가듯이 말했다는 것 자체가 속마음을 드러내는 행위고.

물론 효명세자는 지극한 효심은 물론 순조의 권위를 생각하여 자신을 낮추어 가며 말을 거듭하였다.

“아바마마께서는 지극히 강녕하시며 언제나 혜안을 보이시고 백성을 보살피고 있사옵니다. 소자가 아무리 정무를 수행하여도 아바마마의 그림자에도 미치지 못하옵나이다.”

“이 늙은 몸보다 세자의 몸이 더욱 건장할 것이 아니더냐. 더군다나 북방에서 청의 군대를 무찌를 적에 네가 모든 힘을 기울여 보급을 이어간 것을 잊을 것 같더냐.”

“소자가 아바마마를 겨울의 차디찬 북변에 나아가게 하였사옵니다. 이는 자식으로서의 불효이며 아바마마의 은혜를 입음에도 정무에 심사를 다 하지 않아 벌어진 일이옵니다.”

“차디찬 북변에 나아간 것은 내 뜻이다. 또한 산해관에 머무르며 청과의 협상을 논할 적에 태자가 즉각 달려오지 않았더냐. 그러니 태자 또한 같은 고생을 하였다.”

대화를 나눌수록 순조의 뜻이 명확해졌다.

순조는 공식 석상에서 외왕내제를 도입한 것을 만끽하듯이 대부분 짐(朕)이라 자신을 지칭하였다. 심지어 공식 교지에도 짐으로 칭하였는데 이 자리에서는 굳이 ‘나’라고 자신을 지칭하였다.

효명세자가 고개를 들지 않자 순조는 거듭 당부하듯이 말하였다.

“내가 몇 년을 더 살아갈 수 있을지 모른다. 칭제와 건원을 하여 격을 높인 황제가 몇 년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난다면 나라에 혼란이 일어날 수 있지 않겠느냐.”

“그럴 일은 없사옵나이다!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태자의 마음을 알고 있으니 더 이상 논하지 않고 뜻을 거둘 것이다. 물러나 정무에 임하도록 하고 외무승지는 잠시 남아 내의원 부제조와 함께 짐과 논의를 하자꾸나.”

“소자는 아바마마의 뜻에 감읍할 따름이옵니다.”

효명세자와 신하들이 물러나고 순조와 함께 칭제 이전에 필요한 과업을 수행하던 이들이 남았다.

정약용은 물론이고 조만영이나 이희갑 같은 정조와 함께 일한 60세 이상의 중신들이었다. 이런 신하들 사이에 끼어 있으니 외무승지의 직책 따위는 우습게 보일 자리였다.

순조는 환관을 시켜 의자를 하나 가져오게 하고 나를 앉힌 다음 심각한 표정으로 물어보았다.

“외무승지라면 아직 불혹(不惑 - 40세)에도 미치지 못하였으니 생각이 트여 있을 터. 잠시 논의를 하면 어떠하겠는가.”

“나이가 젊다는 말은 판단이 미숙하고 의욕이 앞서는 것과 같사옵니다.”

“외무승지의 판단이 미숙하다 하였으면 이 세상에 사람도 아닌 것 얼뜨기들만 있겠구나. 그리 심각한 논의는 아니고 젊은 사람의 눈이 필요한 일이다.”

실제 내 신체 나이는 40이 넘었지만 현대에서 벌어놓은 외모 수명 덕분에 30대 초중반으로 조금 덜 늙었다. 어디까지나 이 시대 기준이지만 서류상의 나이와 외모는 일치하였다.

순조는 지금까지 정리한 직제(職制)와 관직명 변경 그리고 주요 관청에 대한 서류를 넘겨주었다. 그러고는 눈을 빛내며 나에게 질문을 하였다.

“지금은 아문(衙門)을 두어 주요 업무를 분담하고 있지만 조만간 중앙에 육조를 계승한 여덟 부서를 두어 이 업무를 내려줄 예정이다. 외무승지가 보기에는 어떠한가.”

“지극히 옳은 일이니 의견을 내놓을 필요가 없을 지경이옵니다.”

본래 역사의 대한제국은 중앙 7부를 두었지만 순조가 원하는 새 제국은 중앙 8부가 되었다. 내부, 외부, 탁지부, 학부, 군부, 법부 그리고 농상공부까지는 같았지만 한 개 부서가 신설되었다.

체신부(遞信部)였는데 담당 업무는 철도와 각종 우편 통신을 포함하여 현대의 국토교통부와 흡사한 업무를 담당하였다. 넓어진 영토로 인한 북방 관리의 필요성을 느낀 부서이리라.

이외에도 세부 사항이 달랐다. 외부에는 유럽과 동양의 부서를 따로 두었고 학부에는 순차적인 교육기관을 설립하였다. 여기에 세 부서가 합체된 농상공부에는 아문이 4개였다.

중앙 8부에 소속된 아문이 21개에 달하니 머리가 어지러워질 지경이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승전 이후부터 중건 계획에 들어간 경복궁을 생각하며 질문을 하였다.

“이대로라면 육조거리를 좁히고 새 관청을 설립해야 할 지경이옵나이다. 혹여나 중앙의 부처를 모두 중건될 경복궁 안으로 들일 뜻이옵니까?”

“역시 생각이 트여 있으니 마음이 놓이는구나. 경복궁을 옛 모습으로 되돌리지 않고 태자가 물려받을 제국의 격식에 맞게 더욱 키울 것이다. 이미 도면도 준비해 두었으니 보거라.”

내가 건축과는 나오지 않았지만 사학과에서 각종 건물 도면은 보았던 사람이다.

일준이가 서양보다 몇 년 앞서서 발명한 청사진 특유의 암모니아 냄새를 느끼며 도면을 살펴보니 할 말이 없었다.

“서역의 기술을 도입하니 참으로 마음이 놓이는 일이 많더구나. 덕분에 권위를 세울 수 있으며 주자가례(朱子家禮)의 원칙에도 어긋나지 않은 궁궐을 세울 수 있었지.”

“오문삼조(五門三朝)의 원칙이 아니옵니까?”

“그야 새로운 천명이 세워질 궁궐인데 당연한 일 아니더냐.”

이쯤 되면 경복궁의 중건(重建 - 보수)이 아닌 제국 궁궐의 신축이라 보아도 무방할 수준이었다. 천자국의 권위에 맞게 건물 배치를 북쪽으로 밀어서 경복궁의 후원 영역을 침범하였다.

격식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자금성의 주요 전각인 태화전이 2층 건물이지만 경복궁에 새로 세워질 근정전은 철근 콘크리트조의 3층 건물이었다.

이게 맞는지 궁금하여 근정전 단면도를 꺼내서 물어보았다.

“인공석분(시멘트)과 철근을 섞어 건물을 짓는 것을 연구하였다는 소문은 알고 있사옵니다. 하오나 근정전에 바로 적용하시면 이 일을 어찌하여야 할지…….”

“인공석분은 굳어서 돌이 되나 목재는 굳지 아니하고 삭아 들어가지 않더냐. 후일이 되면 돌도 바스러지는 법이나 적어도 목재보다는 오래 갈 것이다.”

벽돌을 쌓아 만드는 조적조도 아닌 최신 기술을 넘어선 철근 콘크리트 전각이라니. 4층에 달하는 근정전의 높이는 딱 36m인데 내가 기억하는 태화전의 높이보다 더욱 높았다.

여기에 지붕은 우진각 형태로 구성하였지만 용마루는 알루미늄으로, 일반 기와는 구리로 만들어두었다. 심지어 부식 방지를 위해 지붕 아래의 마그네슘 덩어리를 계속 교체하라 도면에 기입하였다.

“이 비용을 어찌 감당해야 할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사옵니다.”

“외무승지가 괜한 걱정을 하는구나. 경복궁의 중건에, 이제는 경복성(城)이라 부를 궁궐의 증축을 논한 사람 가운데 가장 이견을 많이 제시한 사람이 누구 같더냐.”

순조가 고개를 돌리니 정약용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정약용은 ‘백성을 사랑하는 근본이 아껴 쓰는 데에 있다.’라는 주장을 하였던 사람인데 이 제안을 통과시켰다니.

정약용은 내 표정을 보고 변명하듯이 말하였다.

“선대왕께서 계실 적이라면 중건 비용이 나라의 이십 년 예산보다 많았지만 지금은 이 년 예산과 견주어볼 수 있을 지경이라네. 더군다나 장기적으로 보면 큰 손해도 아니지.”

“그러고 보니 나무로 만든 건물은 나무가 삭아서 십여 년 주기로 전체를 보수해야 하지요.”

“옳은 말일세. 내가 폐하의 뜻에 극렬히 반대하였지만 누차 다른 신료와 논의를 하여 뜻을 접었다네. 조금이라도 작은 궁궐이라면 좋으련만…….”

정약용이 탐탁지 않다는 듯이 고개를 돌렸고 순조는 웃으면서 다음 도면을 보여주었다. 전체적으로 건물 크기가 커지며 경복궁이 압축되어 자금성과 흡사한 모습이 되기는 하였다.

다만 주요 전각이 아닌 태원전이나 향원정 등은 위치가 변경되었을 뿐 예전의 형태를 유지하였다. 여기에 단가를 조금이라도 낮추려고 벽돌로 만든 조적조 건물도 눈에 띄었다.

“궐내각사를 어찌하여 삼 층의 거대한 건물로 구성하셨사옵니까?”

“그야 팔부의 일부를 이 안으로 들일 생각이니 그리 하였다. 업무는 여러 부처가 논의하고 내 재가(裁可)를 받아야 하는 법. 함께 일하게 하면 더욱 좋은 일이 아니더냐.”

근정전 좌우측에 ‘ㄱ’ 자로 구성된 두 개의 길쭉한 건물의 정체는 육조를 계승한 8부 관원들의 근무지인 우각사(右各司)와 좌각사(左各司)였다. 업무 효율을 위하여 신료를 갈아 넣는 지옥도나 마찬가지이다.

도면을 상세히 살펴보니 서양에는 아직 없을 단열재 개념까지 들어갔다. 영어로 미네랄 울(Mineral wool), 암면이라 번역된 물건을 사용했는데 최소한 석면은 아닐 것 같았다.

여기에 또 하나의 특징이 있었다. 동쪽에 위치한 우각사의 외형은 한옥의 것을 유사하게 만든 형상이었는데 서쪽에 위치한 좌각사는 외부에 석재를 덧대 서양식 건물로 변형했다.

“혹여나 서측의 건물은 서양식으로, 동측의 건물은 이 나라의 방식을 활용한 것이옵니까?”

“바로 보았구나. 같은 건물만 계속되면 격이 부족한 법이지. 안의 구조는 같아도 밖에서는 여러 형상을 보여주어 격을 높여야 하는 법이노라.”

완공 목표 기간은 3년이고 주요 전각 공사가 1년 6개월로 예정되어 있었다. 본래 역사의 경복궁 중건이 3년이 걸린 일이었는데 같은 공사 기간이라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본래 역사의 경복궁은 중건을 시작하고 쌓아놓은 목재가 모조리 불타서 공사 기간이 길어지고 2배에 달하는 자금을 소모하며 백성들에게 온갖 고통을 안겨주었다.

이런 고통과 달리 조선은 연해주에 건너간 화전민이 몇 년간 비축해둔 목재가 썩어들어 간다는 보고가 들려오니 목재를 빨리 사용하라 독촉할 수준이었다.

여기에 국력은 차원이 다를 정도가 되었으니 할 말이 있는가.

조만영은 예산을 총 집행한 장계를 건네주며 말하였다.

“연간 공사비가 첫해에는 일천칠백만 냥, 다음 두 해에는 육백만 냥에 달할 것이나 이 정도면 그리 큰 문제가 안 된다네. 한 해에 거둬들이는 세금이 얼마인지 알고 있지 않나.”

“지방에 비축한 미곡을 제외하면 일천이백만 석의 미곡이 아닙니까. 여기에 각종 조세를 감안하면 부족할 일은 없을 것 같습니다.”

“옳은 말이지. 이번 기회에 나라에 한 번 물산을 유통시켜 백성들에게 혜택을 나누어주어야 한다네. 지난 몇 차례의 기회를 잡지 못한 이들이 위축되어 있지 않겠는가.”

지금까지 백성들에게 여러 기회가 있었다. 농사를 짓는 사람들은 비료의 도입으로 수입이 올라갔고 어업이나 상업은 영국에서 헐값에 구매한 선박을 임대받아 사업의 발판으로 삼았다.

이러한 기회를 노려 발전한 사람도 있지만 기회를 잡지 못하여 소외된 사람도 존재하였다. 이들을 노동력으로 삼아 경기 부양을 촉진하려는 방침이었다.

정약용 입장에서는 백성들이 자신들의 토지를 가지고 평범한 삶을 이어가는 것을 원하고 있으니 반론을 하였으리라.

이런 자리에서 뜻을 거두었다는 말은 경복궁, 정확히는 경복성 건축에 대한 이견이 없다는 말이었다.

“중신 여러분들의 옳은 말을 들으니 아직 미숙한 저로서는 도저히 반론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폐하께 삼가 아뢰오니 새 궁궐을 축조하여 이 나라의 위엄을 만천하에 떨치시옵소서.”

“새 궁궐이 아닌 경복궁의 격을 올리는 것이다. 아직 터에 남아 있는 석재를 활용하여 외부 전각의 격을 높이고 새 전각의 공사를 시작해야 하지 않겠느냐.”

공사 시작일은 한 달 뒤인 1842년 10월 12일이 되었으며 음력으로는 9월 9일의 절기인 중양절로 최종 결정되었다. 순조는 못내 아쉬운 표정으로 말하였다.

“일 년 하고 여섯 달 뒤에 새 궁궐이 완공되면 칭제와 건원을 행할 것이다. 그 이전에 태자가 양위를 받으면 얼마나 좋은 일이겠느냐.”

다시 신료들 모두가 절을 올려 ‘통촉하여 주시옵소서!’라고 합창하자 순조는 싫증을 내며 모두를 물러가게 하였다.

퇴청하라는 명을 받았으니 정약용과 함께 궐 밖으로 나가게 되었다.

“세상이 더욱 변했으니 나날이 늙어가는 나로서는 더 이상 세상을 따라갈 수 없게 되었군.”

“아닙니다. 다산 선생님께서 세상을 따라갈 수 없다 하였으면 이 나라의 모든 사람이 변화를 따라잡지 못하고 주저앉았을 것이옵니다.”

“이 늙은 몸을 너무 칭찬하는군. 내가 지난 세월 동안 쌓은 지식이 점점 쓸모가 없게 되었으니 이 노구(老軀)가 쉴 곳을 슬슬 마련해야겠지.”

정약용은 본래 역사보다 6년이나 오래 살았다. 그가 이토록 오래 살아간 것은 새로 저술할 문물을 받아들이고 외부 세력이 개입된 조선을 염려하여 정신을 가다듬은 덕분이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날이 갈수록 늙어가는 모습을 보이니 마음이 아파왔다. 억지로 지팡이를 짚고 가마에 오르는 정약용에게 조금이라도 더 기운을 내라는 듯이 말하였다.

“쉴 곳이 어디 있다 하십니까? 모든 신료들이 맹렬히 업무에 종사하는 모습을 보시면 부끄러운 일이 아닙니까?”

“희수(稀壽 - 77세)를 넘어서서 만 나이로 반수(81세)를 앞두고 있거늘 너무 한 말 아닌가. 자네의 뜻이 그러하면 내 노력해 보겠네.”

정약용을 집으로 바래다주니 하인에게 부축을 받아 억지로 방 안으로 들어가기까지 하였다.

그동안 쌓아놓은 수많은 발견과 주먹구구식인 한의학을 개선하기 위한 노력이 언젠가 빛을 발할지도 모르겠지.

올해 마지막으로 북방에 올라갈 화전민들이 한양 외곽을 통과하여 인왕산의 기차역으로 향하였다.

칭제 건원이라는 위업만큼은 정약용이 꼭 보기를 기원하며 둘째를 임신한 아내를 보러 집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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