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효명세자와 함께하는 조선 생활-90화 (90/345)

< 9장 - 그루시의 전쟁 >

심양 남부의 본계 근처 벌판에서 벌어진 회전은 한 두 건의 사소한 문제를 제외하면 조선군의 완승으로 끝났다. 아직도 산발적인 교전이 벌어지지만 발악에 가까운 행동이었다.

마지막으로 돌격한 흉갑기병은 전차와 같이 전장을 돌파하여 남아있는 패잔병과 청나라 포병을 소탕하고 포로로 잡아왔다. 각 병과들의 보고를 들은 순조는 겉으로는 호탕하게 웃으며 말하였다.

“적을 가장 많이 도륙한 성부 사단의 모든 장병에게 포상을 내릴 것이다. 부상병을 수습하고 편히 쉬어 다음 전투를 대비하도록 하라.”

전장에 수없이 널브러진 시신도 후방에 대기하던 일만여 명의 예비대가 어느 정도 정리하였다. 순조는 해가 중천에 떠서 서서히 저무는 모습을 보며 나에게 질문하였다.

“단 두 시진조차 걸리지 않아 결판이 났구나. 이게 말이나 되는 일이라고 생각하느냐? 우리의 군이 나팔륜이 이끄는 불란서 최정예병과 대등한 수준이라 압도적인 승전을 거두었느냐?”

“아니옵나이다. 서역을 기준으로 삼으면 모든 군대의 평균보다 조금 처지는 군일 것이옵니다. 그나마 기병이 조금 강하지만 이 또한 약점이 있사옵니다.”

“그러하면 청나라 군대가 상식에 어긋날 정도로 약하다는 것이로구나. 이를 알고 있었느냐?”

전투가 진행될수록 상식이 붕괴된 순조는 이를 내가 알고 있었는지 물어보았다. 어떻게 보면 기군망상에 해당될 수도 있는 것이 군대 육성은 나와 효명세자의 정책이었다.

어떻게 보면 과도할 정도로 강력한 군대를 육성한 꼴이 되어버렸다. 물론 이 상황에서 할 변명은 미리 준비하였으니 고개를 숙이며 말하였다.

“청나라의 군대가 약졸이라 생각하고 있었사옵니다. 하오나 신은 모든 것을 알지 못 하니 예측을 벗어난 일 리(0.1%)의 변수를 생각하여 대처를 하였사옵니다.”

“일 리에 불과하여도 이 나라의 군대가 패퇴하는 일 보다는 나은 것 같구나.”

“실로 그러하옵니다. 모든 일을 행할 적에는 최악의 상황을 고려해야 하는 법이 아니옵니까?”

“옳은 말이로다. 최악의 상황을 고려하지 않은 영길리라는 나라가 있지. 영길리의 의회가 이 상황을 알게 되면 어떤 대처를 하겠느냐.”

순조는 모든 것을 이해했다는 듯이 내 손을 잡고 흔들었다. 나는 어떤 사태가 벌어질지 예상하였지만 순조는 입에 손을 대고 강조하였다.

“후일에 어떤 소식이 들려올지 모르니 즐거움으로 남겨두자꾸나. 이제 할 일이 명확해졌으니 계획대로 계속 진군할 것이다.”

더 이상 조선군의 진군에 걸릴 요소는 없었다. 전장 정리가 끝나고 각 장수들을 불러 치하한 순조는 그루시를 찾았지만 그루시 대신 달려온 포병 장교가 보고를 올렸다.

“지금 뭐라 하였는가? 그루시의 부관인 임 중위가 예비 말까지 가져갔다 하였느냐?”

“예비 말을 가져간 것으로도 모자라 며칠 어치의 보급품과 기마 포병에게 배정된 소구경 화포까지 가져갔사옵니다. 당시에는 전투가 진행되고 있어서 막지 못하였사옵니다.”

“이해할 수 있는 일이나 전령을 보내거나 합당한 이유를 논하여야지.”

진군 과정에서 적의 기습을 방지하기 위한 기병이 필수적인데 그루시는 이 부족한 기병 중 사천여 기를 멋대로 가져가 버렸다. 순조는 다른 기병 지휘관인 안드레이에게 물어보았다.

“그루시가 어디로 갔는지 말이라도 하였느냐?”

“저도 모르지요. 어젯밤에 만나보기는 하였는데 드디어 숙원(宿願 - 오랜 소원)을 이룰 수 있다고 흥분하여 사방으로 돌아다니고 있었습니다.”

그루시의 돌발행동은 나도 순조도 안드레이도 마르몽도 예측하지 못 하였다. 대체 어디서 뭔 짓을 하는지 모르겠는데 마르몽이 나서서 순조에게 요청을 하였다.

“옛 버릇을 버리지 못 하고 똑같은 일을 하다니 좀 맞아야 정신을 차릴 것 같습니다. 놈들이 멋대로 돌아오면 백린탄을 사격할 수 있게 허가를 내려주십시오.”

“그런 흉험한 짓을 왜 하는가? 성과를 거두거나 합당한 이유가 있었다면 용서하겠지만 아니라면 즉각 불란서로 압송할 것이다.”

그루시가 이끄는 기병이 사라진다고 해서 전쟁에서 질 상황은 아니다. 더군다나 그루시에게도 본대로 복귀하지 못 할 사정이 있다면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순조는 이를 감안하여 명령을 하달하였다.

“그러고 보니 지금과 비슷한 상황이 있었지. 당시에는 나팔륜 한 명이 외쳤기에 그루시가 말을 듣지 못하였지만 수만 명의 장졸이 외친다면 들을 지도 모르겠구나.”

잠시 뒤 본영에서는 프랑스 어의 발음을 어설프게 따라한 함성이 울렸다. 그루시가 부대에서 십 킬로미터 이내에 있으면 반드시 들을 수준의 거대한 함성이었다.

- 우! 웨! 그! 루! 시! (Où! est! Grou! chy! - 그루시는 어디에 있지!)

함성은 사방으로 퍼져나갔고 이윽고 산에 충돌하여 메아리가 되어 만주 벌판으로 퍼져나갔다. 부상병 수습을 위해 이틀 정도는 그루시를 기다려 줄 생각이었는데 언제 돌아올지는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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셍게린첸과 휘하 기병들은 그루시의 맹렬한 추격을 따돌리고 가까스로 도주에 성공한 것 같았다. 엄청난 힘과 순발력으로 추격했던 조선 기병들이지만 몽골 말의 우수한 지구력에 간격이 벌어졌다.

물론 이 과정에서 입은 피해는 무시무시했다. 후열에 있던 병사들이 기병도와 창 그리고 사격에 죽어나가는 모습을 목격한 셍게린첸은 숨을 돌리고 보고를 들었다.

“팔백여 명이 낙오하였습니다. 그나마 추격이 끊겨서 다행이군요.”

“다행이 아니지. 우리는 예비마도 없는 입장이니 조선군이 증원을 하여 추격하면 덜미가 잡힐 거다. 어서 이동하자.”

“아예 이탈한 우리를 추격할 놈들이 있겠습니까?”

- 우와아아아!

저 멀리서 들려온 함성을 들은 셍게린첸은 함성의 근원을 파악하였다. 따돌렸다고 생각한 조선군이 어느 새 예비마를 보급하여 추격에 성공하였다.

그루시는 리볼버를 허공에 발사하며 다시 진격을 명령하였다. 총성을 들은 셍게린첸은 물주머니를 내려놓고 질린 표정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저 영감탱이가 노망이 났나! 아니면 저 미친 영감탱이의 조상이 황금씨족에게 살해당하기라도 했나! 본진에 가서 싸울 것이지 왜 우리를 노려!”

“아마 우리가 정상적인 상대라 판단해서 반드시 죽이려는 생각 아닐까요?”

“팔기군 십만 명을 죽여도 우리보다 못 하다 판단할 수도 있지. 참 좋은 판단이지만 당하는 입장이니 짜증이 밀려오는군.”

사기를 떨구지 않으려 짜증이라 하였지만 명백한 위기였다. 상대는 경험이 풍부한 지휘관이니 어지간해선 속지 않을 것이며 예비마를 끌고 왔으니 지구력으로 따돌릴 수도 없었다.

일부 병력을 희생시키는 방법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최악의 사태를 도주 시작부터 대비한 셍게린첸은 병사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무순(撫順)으로 향한다. 거기서 강을 도하하여 아예 몽골로 도주하자.”

“될 리가 없습니다. 무순까지 도주 정도는 가능하지만 도하를 하는 준비시간은 어떻게 버틸 생각이십니까? 잘못하다가는 전멸합니다.”

“거기 있는 머저리들이 시간을 끌어줄 테니 염려하지 마라. 어서 진군해!”

심양의 동쪽에 있는 도시인 무순은 본래 청나라를 건국한 누르하치가 중요히 생각하던 도시이며 그의 능묘가 있었다. 이 도시는 당연히 주요 진군경로가 아니었다.

그러니 본진에서 탈주한 팔기군이 있었다. 약탈한 물건을 쌓아두고 잡아온 사람들을 가두어 두었으며 온갖 비행을 저질렀다. 셍게린첸을 확인한 팔기군은 침을 바닥에 뱉으며 욕설을 퍼부었다.

“더러운 몽골 놈들이 왜 여기까지 오지? 네놈들에게 줄 것 없으니 꺼져!”

예상했던 광경이니 셍게린첸은 아무 소리도 안 하고 주변을 살펴보았다. 다행이도 도하를 할 만큼 많은 나룻배가 있었으니 도망칠 수 있으리라.

양심도 실력도 없는 팔기군과 달리 셍게린첸은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여기에 있는 팔천여 명의 팔기군을 제물로 삼을 예정이니 가는 길이라도 편히 가라고 무기를 내어주었다.

“우리는 아무 성과를 거두지 못 하였으니 빨리 돌아갈 예정이오. 힘이 넘치는 군마와 나룻배를 내어 주시면 우리가 가진 무기와 말을 모두 내어 드리겠소.”

“거 남는 장사네? 이 친구들 돌아갈 때 먹도록 쌀도 좀 내놓게.”

사실상 맨 몸에 최소한의 식량만 지참한 셍게린첸의 팔기군은 강을 건너 바로 도주하였고 용의주도하게 사용한 배들을 반대편에 둔 채 돌아갔다.

셍게린첸의 도하가 절반 정도 진행될 무렵 외곽의 병사들에게 이상한 징후가 포착되었다. 아편을 피우던 병사는 남서쪽의 벌판을 바라보며 느긋하게 말하였다.

“어이쿠. 지금 귀찮아서······. 잘 보이지는 않는데 금려팔기가 온 것 같은데.”

“정군왕께서 우리를 소집하기 위해 금려팔기를 보냈나보군. 뇌물이나 준비해.”

뇌물로 해결하려던 팔기군이었지만 상대는 그루시가 이끄는 조선 기병이었다. 셍게린첸의 도주 경로를 추적한 그루시는 포격 명령을 하달하였다.

“도시에 숨으면 나를 피해 달아날 수 있으리라 생각했나? 포격 개시!”

“이제 본영으로 복귀하시는 것이 나을 것 같습니다. 갑자기 공성전이라니요?”

“놈을 죽이지 않고서는 조선의 군주께서 머무는 대열이 언제나 기습을 당할 염려가 있다! 임건보 자네는 조선 사람으로서 왕에 대한 충성심이 없는가?”

순조가 각 장수들에게 군대 통솔권을 준 상황이니 임건보도 어쩔 수 없이 그루시의 명령을 받아들였다. 본래 견제 용도로 사용하는 기마포병의 소구경 화포가 불을 뿜었다.

무순은 제대로 된 성벽이 없는 도시이니 대신 목책을 세워두었다. 이 목책은 소구경 화포 일제사격에 파괴되었고 그루시는 진격로가 뚫리자 마자 명령을 내렸다.

“지금부터 시가전을 실시한다! 배운 대로 철저히 적들을 유린하도록!”

시가지에서 벌어지는 난전을 염려한 그루시였지만 제대로 된 병사들이 존재하지 않았다. 아편이나 술에 취해 온 몸을 흐느적거리며 억지로 말에 오른 상대는 무조건 북쪽으로 도망쳤다.

“네놈은 왜 알몸으로 쳐 튀어나와!”

“이놈의 새끼들 백성을 잡아서 방패로 삼습니다!”

“그럼 우회해서 죽여! 사람을 사방에 둘러서 방패로 삼았나!”

도망치던 벌거벗은 팔기군의 뒤통수에 총알을 선물해준 그루시는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말을 움직였다. 임건보 또한 사람을 방패로 삼은 팔기군의 등판에 기병도를 찔러 넣었다.

조선군은 말 그대로 허수아비를 두들기는 기분으로 시가지를 유린하며 진군하였다. 죽일 수 있는 적이 너무 많아 진군이 늦춰질 지경이었고 마침내 요하(遼河)의 지류 중 하나인 혼하(渾河)까지 도달하였다.

“셍게린체에에엔!”

- 미친 영감탱이! 난 네놈과 싸울 생각 없으니 거기서 늙어 죽어 자빠져라!

어떻게든 배에 올라 도주하려던 팔기군을 도륙한 그루시였지만 셍게린첸은 이미 강을 건너간 뒤였다. 그루시는 강 건너로 리볼버를 난사하며 명령을 내렸다.

“이 개놈의 새끼! 배 당장 가져와라! 도하를 시작한다!”

“배의 수가 너무 적습니다. 놈들에게 역으로 당할 겁니다!”

셍게린첸은 강 건너편에 있는 배에 기름을 뿌려 불태웠고 결국 강을 건너는데 두 시간은 걸릴 지경이 되었다. 망연자실한 그루시는 주변을 살펴보다 한 팔기군과 눈이 마주쳤다.

“저······. 도망쳐도 되겠습니까?”

“도망? 네놈은 장수면서 뭔 몰골이냐!”

그루시의 옆에는 하반신은 벌거벗고 웃옷은 대충 갑주를 입은 팔기군 장수가 있었다. 그는 은근슬쩍 강물을 건너려 하였지만 그루시의 기병도가 목에 닿았다.

흥분이 가라앉은 그루시는 주변 광경을 지켜보았다. 공격을 당하여 피해를 입은 무순의 백성들과 여기저기서 잡혀온 포로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그루시와 프랑스-조선의 혼성 기병대를 환영하였다.

포로를 사로잡고 무순의 시가지로 들어온 그루시는 눈을 부비며 주변을 확인하였다. 시가지에서 기병들이 수많은 적을 도륙하였지만 내부의 흔적은 전쟁의 참상보다 더욱 끔찍하였다.

“저건 뭔가? 왜 사람을 죽여서 목을 쌓아놓았는가?”

“반항하는 사람은 허수아비를 만들었다 하더군요. 안 보시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쉰 개 정도의 목이 광장 한 구석에 뒹굴고 있었고 반항한 놈들의 최후라 적혀 있었다. 옆에는 시신이 있었는데 살가죽이 모조리 벗겨져 있었다.

나무 장대 위에 매달린 물건을 살펴본 그루시는 대차게 구토를 하였다. 있어서는 안 될 물건이고 상상조차 하지 못 한 끔찍한 물건이었다. 이외에도 수많은 폭력의 흔적이 있었다.

그나마 군의 기강이 제대로 있을 무렵의 병자호란에서도 청나라 군대는 어린아이를 학살하는 짓을 저질렀다.

반면 기강이 땅에 떨어진 이 시기에는 사라진 혹형(酷刑)을 접목하여 온갖 끔찍한 방식의 살육을 자행하였다. 그루시는 시가지 한복판의 단상을 지목하며 명령을 내렸다.

“지금부터 재판을 시작한다! 피고는 팔기군이요 원고는 여기에 있는 주민이다!”

“대령님께서 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죄인에게 벌을 내리는 것은 주상전하께서 해야 할 일이 아닙니까?”

“임건보 자네는 이놈들이 사람으로 보이는가? 조선 백성에게 처벌을 내리는 것은 조선의 군주께서 할 일이지만 사람보다 못 한 짐승을 도축하는 것은 아무나 가능하지.”

그루시는 나이를 먹어 성향을 숨기고 있었지만 한때 공화주의자이자 보나파르트 주의자였다. 그는 나폴레옹을 추종하는 사람이며 젊은 시절 목격한 프랑스 혁명 또한 마음속에 남아있었다.

여기에 프랑스 출신 기병들은 대다수가 귀족 가문의 자제들이거나 부르주아 출신이었다. 이들은 청나라의 귀족(실제로는 세습만 하는)들인 팔기군의 행동에 격분하였다.

이 재판이 의미 없는 행동은 아니었다. 병사들의 휴식이 필요하였으며 현지의 민심을 끌어 모아 보급을 자발적으로 충원하려고 재판을 하였다. 마침내 첫 피고가 그루시 앞에 서서 증언을 하였다.

“지금부터 재판을 시작한다! 피고는 뭘 하던 놈인가!”

“저는 이 군대를 이끄는 버일러(貝勒 - 패륵, 지방 팔기군의 지휘관)입니다.”

“그럼 이 사태의 책임을 지고 사형에 처해야지! 변명은 필요 없으니 놈을 죽여라!”

폭행, 약탈, 살인, 강간, 고문 심지어 비역질(남색)까지 인류가 저지를 수 있는 죄악의 대다수가 팔기군과 함께하였다. 여기에 프랑스 출신의 혁명을 듣고 자란 장교들이 보조 재판장이 되었다.

한족 백성들과 잡혀온 사람들은 사형 판결을 들을 때 마다 환호성을 질렀다. 그나마 덜 약탈당한 만주족 주민조차도 재판에 환호하였으며 창칼을 들고 사형을 대신 집행하였다.

이윽고 여섯 시간에 걸친 재판이 끝났다. 그루시는 혐의가 사형에는 해당되지 않는 사천여 명의 팔기군을 포로로 규정하여 감금하고 무순에 머무르게 된 백성들을 보며 말하였다.

“조만간 심양을 함락하고 청나라와 일전을 벌일 것이니 조선의 통치를 저항하지 말고 받아들이도록. 포로를 잘 모아 두었다가 조선군에게 팔아치우면 더욱 좋은 일이고.”

“포로를 때려죽여도 모자를 판인데 참아 보겠습니다. 그나저나 조선의 통치라 하였습니까?”

“이미 청나라의 십만 대군을 모조리 무너트렸는데 조선 땅이 될 것 아닌가.”

그루시의 말을 번역해서 알려주자 만주족은 물론이요 포로에서 풀려난 백성들도 서로 머리를 맞대고 대화를 나누었다. 그러더니 그루시에게 청원을 하였다.

“조선의 통치가 끔찍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북쪽에 있는 철령(鐵嶺)에 머무는 팔기군보다는 끔찍하지 않겠지요. 지도에 위치를 표시해 드리겠습니다.”

“철령이라는 도시에도 이런 약탈이 자행되고 있다고?”

만주족이 표시한 위치는 북쪽으로 제법 떨어진 장소였다. 기병에게는 반나절 정도면 느긋하게 다녀올 곳이었지만 임건보는 초조한 표정으로 본대 귀환을 원하였다.

“저기······. 돌아가시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지도를 보니 너무 먼 곳에 있군요.”

“당치도 않은 소리를! 이런 팔기군 하나하나가 모이면 마침내 수만 명에 달하는 대군이 생기는 법이야! 이들이 기강이 엉망일 때 기습해서 도륙해야지!”

아예 말이 안 되는 전략은 아니니 임건보도 말릴 수 없었다. 그루시는 각지의 도시들을 요격하며 매일 적게는 수천 명, 많게는 만 명 단위의 팔기군을 도륙하였다.

보급은 현지에 쌓인 물자로 충당하였으며 주민들이 기병들의 수발을 들어줄 지경이라 걸릴 것이 없었다. 심양 외곽의 소도시들을 모두 무너트린 그루시는 마지막 목적지를 정하였다.

“심양의 남서쪽에 있는 도시인 안산(鞍山)에 가장 많은 팔기군이 있다고! 당장 출병한다!”

닷새에 달하는 광란의 질주는 마침내 안산까지 닿았다. 하필 이 도시에는 가까스로 퇴각한 정군왕 자이콴과 부관인 키샨이 병력을 소집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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