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명세자와 함께하는 조선 생활 - 54편
(5장 - 비료 (2))
화전민을 최대한 사람답게 배려하기 위해 여러 준비를 하였다. 서른 명 정도의 병사를 선별하였으니 이들의 가족은 다이토 제도로 가지 않고 이 땅에 남아야 하는 사람들이다.
“여러분들은 병사가 된 사람들의 식구이니 여기서 대접을 받고 살 수 있을 겁니다. 다만 꼭 해야 할 일이 있으니 봄이 되어 물이 오르면 묘목을 심으시길 바랍니다.”
스스로 훼손한 산림은 스스로 복원하면 적당한 변명거리도 되겠지. 수입해서 묘목으로 기른 아카시아와 오리나무 그리고 소나무를 조합하면 그럭저럭 제대로 된 숲이 조성될 것이다.
나머지는 도성으로 옮겨져서 검사를 받았다. 영양상태도 좋지 않고 질병도 만연하였으니 정약용과 로버트 리스튼 두 명이 이들을 진찰하였다. 정약용은 간단히 문진을 하고 말하였다.
“모두에게 이와 벼룩이 들끓고 횟배도 불러 있으니 조치를 취해야겠군. 몸을 말끔히 씻은 뒤 숨이 막히더라도 저 움막 안으로 들어가 연기에 몸을 쪼이도록 하게.”
“자네의 손가락이 아무리 보아도 썩어 있군. 내 순식간에 잘라내 주지.”
난생 처음 진찰을 받게 된 화전민들은 제충국을 배합한 해인초 죽으로 몸 안의 기생충을 밀어내고 이와 벼룩을 몸에서 몰아냈다.
기존의 해인초 죽은 기생충이 살아서 튀어나왔지만 제충국이 배합되니 기절한 기생충이 좀 끔찍한 몰골로 밀려나왔다. 여기에 외과 치료와 조선 최초의 예방 접종이 실시되었다.
서양에서 들여온 우두 접종에 대해서는 반발이 심하였다. 그래서 죄수들을 시작으로 실험을 하려다가 아예 규모가 큰 화전민을 대상으로 우두를 접종시켜 버렸다. 정약용은 모든 작업을 마치고 한숨을 쉬며 말하였다.
“저들이 머무를 섬이 지나치게 험난한 곳이라면 아니 될 것인데. 다들 좋은 대접을 받아 마음이 놓인 것 같지만 하소연하기를 절해고도에 뼈를 묻게 될까 심히 염려하고 있네.”
“그러하면 승지인 제가 직접 나서서 이들에게 설명을 하면 좋을 것 같군요.”
“옳은 말일세. 그나저나 리스튼 저 사람은 조금 이상한 자란 말이야. 사람의 사지를 썰어내는데 흥에 겨워하니 대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모르겠군. 그래도 괜찮은 사람이야.”
정약용도 배운 것이 많았는지 진료가 끝나고 리스튼과 진료 기록을 논하였다. 효명세자에게 이를 이야기하니 수입한 전열함과 프리깃을 동원하여 화전민을 옮기겠다고 하였다.
이들은 조선의 백성이 된 사람이며 나라의 중요한 일을 진행할 자들이니 일종의 송별식까지 마련해두었다. 출발하는 날이 되어 황해도의 포구에 가니 사람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제가 글을 읽을 수 없는데 저 깃발에 적힌 글이 무엇인지 알려주실 수 있겠습니까?”
“나라의 근본을 세울 사람들이니 중히 여기라는 뜻입니다. 여러분들은 절해고도에 머물며 광물을 캐내고 남은 수입은 모조리 자신의 것으로 만들 기회가 생긴 것이지요.”
전열함을 앞세운 선단은 20일 만에 다이토 제도의 본섬에 도착하였다. 조선에서 명명하기를 대동중도(大東中島)라 명명한 섬이 화전민들이 살 본거지가 되었다.
“세상이 넓다 하였는데 이런 땅이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기화묘초는 물론이요 사람의 머리통보다 커다란 게(야자집게)가 거닐고 있으니 여기가 정녕 이 세상의 땅입니까?”
“이보다 더 신비한 곳도 많으니 염려하지 마십시오. 이 섬에서 마음대로 사시며 조정에서 보내는 곡물을 드시면 됩니다. 생필품도 모두 준비하였고 원하시면 더 드릴 수도 있습니다.”
도가니 제련법을 익히는 장인들이 점차 좋은 물건을 만들어 내었고 이들에게 지급된 농기구와 각종 공구도 포함되어 있었다. 화전민들은 험한 땅에서 살던 이들이니 순식간에 적응하였다.
순식간에 숲이 벌채되고 불이 올라왔으며 나무를 다듬어 어설픈 초가집을 지었다. 태풍이 빈번한 다이토 제도에 적응하기 위해 제주도 출신 대목장을 몇 명 붙여주니 효과가 좋았다.
한겨울임에도 따스한 기후에 조정에서 지급한 식량도 풍족하니 낙원이나 마찬가지였다. 한가한 선원들은 낚시를 하며 주변 해역을 살폈고 의외의 어종을 발견하였다.
“승지 어르신께 꼭 드리고 싶은 물건이 있습니다. 물고기가 무슨 한 보(1.2m)가 넘는 크기인데 이토록 기름이 넘쳐나고 맛이 좋은지 모르겠군요. 어서 드셔보시지요.”
물고기의 정체는 기름치였다. 현대에는 간혹 사기를 치는 횟집에서 메로 구이라 속여 파는 고기이며 기름이 넘쳐나는 녀석이라 맛은 좋았다. 물론 뒷일이 문제였다.
나는 몇 점을 먹고 입에 맞지 않는다며 더 이상 먹지 않았지만 선원들과 화전민 모두가 끔찍한 일을 경험하고 살이 쏙 빠져버렸다.
약간의 사고를 겪고 이 물고기의 기름을 짜서 양초를 만들라 권고하였다. 어느 정도 적응이 끝났으니 나는 본론을 시작하기 위해 장정들을 선별해 안내하였다.
다이토 제도의 최남단에 있는 목적지에는 예전에 영국 선원들이 이미 라사(Rasa) 섬이라는 이름을 붙여두었다. 사람의 발길이 거의 닿지 않은 섬에는 수많은 새들이 둥지를 틀고 있었다.
“이 새들은 사람을 보고도 놀라지 않는군요. 그나저나 이 평평한 섬에 광산이 어디 있습니까?”
“광산이 따로 없지만 이 섬 전체가 광물 덩어리라 보면 될 겁니다.”
이항로가 파낸 구멍도 있었는데 네 곳 모두가 인광석이 가득하였다. 내가 기억하기로 다이토 제도의 인광석 총 매장량은 180만 톤에 달한다. 물론 이 광석을 모두 캘 수는 없다.
기록을 떠올려 보니 처음 80만 톤 까지는 쉽게 채굴했지만 그 다음부터는 바닷물이 유입되어 펌프를 돌렸다 하였다. 물론 요구량을 감안하면 40년은 너끈히 쓸 양이니 인부들에게 곡괭이를 지급하고 말하였다.
“여러분이 캐내야 하는 광물의 양은 매년 총 오백만 관(1관 = 3.75kg)에 달합니다. 한 번 캐내어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필요한지 확인해 보시지요.”
“곡괭이가 쑥쑥 들어가는군요. 간혹 질감이 달라지는 곳은 갈색 돌이 아닌 하얀색 돌이 나옵니다. 그리 어렵지는 않군요.”
강도가 약한 인광석을 캐내니 하루 정도면 각자 체중정도의 양을 캐내고도 여력이 남았다. 산출량을 머릿속으로 대충 계산하니 인원이 더 필요했다.
“유월부터 구월까지는 일을 할 수 없으니 나머지시기에 집중적으로 캐내셔야 할 겁니다. 여기에는 식수도 식량도 없으니 한 달 간격으로 사람과 물자를 보내야 할 것 같군요.”
“이 정도면 누워 거저먹기인 일 아니겠습니까? 다만 조정에서 보내오는 곡물이 문제군요.”
“일 년마다 한 사람 앞으로 쌀 두 석과 잡곡 두 석을 보내겠습니다. 그러니 염려하지 마시고 일을 하시면 될 겁니다. 앞으로 사람을 더 보낼겁니다.”
다이토 제도는 식량을 지원한다는 조건 하에 3,000호, 약 1만 명 정도가 머물면 적당한 섬이다. 광부를 각기 천 명씩 교대시켜 일하게 만들면 인광석 채굴은 문제 없이 돌아가리라.
이제 은결을 양성화하고 세금을 제대로 걷을 시기가 되었다. 올해는 신청률이 저조하겠지만 내후년인 1836년 부터는 수십만 결에서 거둬들이는 막대한 세금이 국고를 부풀리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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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의 상소에도 조정의 정책이 흔들리지 않았다. 이미 각지의 유생들에게 청나라와 전쟁이 벌어질 것이며 이를 위하여 나라의 기강을 바로잡을 것이라는 소문이 퍼져나갔다.
황해도와 경기도는 동인도회사의 교역으로, 경상도와 강원도 일대는 동인도회사의 포경선을 통하여 새로운 소식을 입수하였다.
반면 전라도는 일 년 가까이 지난 1835년 1월이 되었는데도 아직 소식이 늦은 형편이었다. 전라도의 장성도호부에서는 오늘도 유생이 언쟁을 벌이고 있었다.
“듣자하니 새로이 사절단을 파견할 예정이라더군. 이번 사절단의 대표는 종친의 일원인 남원군 대감이라 하네.”
“내 알기로 지난번 사절단에 응한 유생들이 지나치게 많아 다른 방도가 없어 세자저하께서 정사로 다녀오셨다는 말을 들었네. 이번에는 조금 나은 형편이로군.”
본래 역사에서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을 무사히 넘어간 장성 필암서원에서 유생들이 모여 갑론을박을 벌이고 있었다. 이 자리에는 본래 위정척사파의 거두가 될 기정진도 함께하였다.
언쟁을 벌이는 유생들을 슬쩍 바라본 기정진은 다시 책에 몰두하였다. 한때는 학문에 열을 올리고 도성에 지부상소를 다녀왔지만 자신의 부족함을 뼈저리게 알고 있었다.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관직에도 나가지 않았고 서역 사절단에 들어가는 것도 거절하였다. 그러나 영길리에 다녀온 자신의 벗의 이야기를 듣고는 눈이 트이게 되었다.
- 영길리는 천축을 지배하는 것이 끝이 아닐세. 청나라와 비교할 수 없이 강성하지.
- 앞으로 조선이 영길리에 대항할 힘을 기르지 못하면 순식간에 망국의 길을 걸을 거라네.
벗이 말하길 영길리라는 나라는 자신의 이해를 넘어선 강대한 국가였다. 심지어 청나라의 수도인 북경은 영길리와 비교하면 돼지우리와 견줄 수 있는 곳이라 하였다.
물론 이러한 사실이 모든 유생들에게 전해지지는 않았다. 이들은 시시각각 변하는 현실을 외면한 채 조정에 받아들여지지 않는 이야기를 논하고 있었다.
“듣기로는 군사 고문을 여럿 고용하였는데 고작 화전민 수천 호(戶 - 가구)를 해산하여 다른 곳으로 보낸 것이 전부라 하더군. 나졸들도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대단하다 하는가.”
“저들이 기이한 기술을 자랑하고 있지만 이는 진정한 도덕을 몰라서 꾀를 쓴 것에 불과하지. 머리가 나쁘면 잡다한 기술을 익히는 것이 아니던가? 노사(蘆沙) 자네도 말 좀 해보게.”
갑자기 기정진을 지목하게 된 유생들은 그도 서양을 얕잡아 보리라 생각하였다. 그러나 기정진은 자신이 읽고 있던 서적을 보여주며 답하였다.
“내가 아직 학식이 부족하여 저들의 산술을 스스로 익히고 있지만 보통 경지가 아니라네. 서책의 한 쪽을 넘길 때마다 새로운 지식이 용솟음치는 것 같군.”
“산술이 보통 경지가 아니라 하였는가. 대체 얼마나 대단하기에 그런 말을 하는가.”
기정진은 얼마 전 입수한 <기초 수학> 이라는 책을 두 권 보여주었다. 그랑제콜 분원의 교수 갈루아가 조일준의 요청을 받아들여 만든 강의용 서적이었다.
이 시대의 수학은 현대를 기준으로 초등학교 과정에서 갑자기 고등학생 과정으로 넘어가는 학문이었다. 이 중간 과정은 자습 혹은 교사를 통한 개인 학습으로 충당했다.
반면 동양의 수학은 중학교 과정까지는 어느 정도 배움을 얻을 수 있지만 이 이상의 수학이 존재하지 않았다. 기정진은 친구들에게 이를 설명하여 주었다.
“얼핏 보면 구장산술을 비롯한 산술 서적과 흡사하지만 점점 내용이 변한다네. 이를테면 도형을 만드는 법이나 집합이라는 개념 그리고 함수나 수열이라는 항목으로 들어가지.”
“큰 차이가 없는 것 같은데. 자네가 산학에 몰두하여 학문을 그르칠까 염려되는군.”
“저자가 말하기를 이 기초수학이라는 서적은 네 권으로 나올 예정이라 하였네. 듣자하니 사람이라면 마땅히 이를 독파하는 것이 옳다 하였는데 다음 권이 기다려지는군.”
조일준은 수학을 조금이라도 쉽고 편하게 가르치기 위해 현대의 교육방식을 택하였다. 대략 중학교 3학년 과정부터 대학교 1학년 과정까지를 기초수학이라 명명하였다.
현대에서 배운 교육과정의 지식과 현대에서 가져온 수학서적이 기반이 되었다. 갈루아는 이를 최대한 상세히 풀어서 설명을 첨부한 서적으로 만들었고 유생들도 이를 이해할 수 있었다.
“구장산술보다 나은 서적이니 적어도 기본은 있는 것 같군. 한 번 배워나 볼까.”
“이거 제법 재미있는 것 같군. 설명이 훌륭하고 누구나 이해할 수 있게 문구를 넣었어.”
선비의 덕목인 육예(六藝)에는 수학이 끼어 있으니 유생들은 이를 즐거운 유희라 생각하였다. 이는 조일준이 의도한 것과 일치하나 갈루아의 생각과는 조금 달랐다.
갈루아의 독선적인 성격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 그는 대다수의 사람이 자신의 천재적인 재능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저열한 수학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가 교과서를 적극적으로 만든 이유는 자신의 천재성을 드러내기 위해서였다. 기초수학을 독파하고 그랑제콜에 들어온 사람들에게 심화 수학을 강의하며 뇌에 과부하를 일으키기 위한 사악한 목적이기도 하였다.
“대수(對數 - 로그)가 무엇인지 모르겠군. 큰 수를 줄여서 나타내는 것이라 하였는데.”
“많은 자리를 가지는 수는 한 번에 계산하기 번잡하니 이를 응축하는 것이지.”
졸지에 사람들을 가르치게 된 기정진은 어떻게든 자신이 이해한 내용을 알려주며 진땀을 흘렸다. 한참동안 논의를 하니 점심때가 되었고 관아에서 사람이 와서 소식을 전하였다.
“주상전하께서 새로운 공법에 대해 포고를 내리셨습니다. 이를 모두 적용할 것이 아니며 스스로 택하여 응하라 하였는데 저는 도통 무슨 뜻인지 모르겠습니다.”
“대동법을 대신한 새로운 공법이 내려올 것이라 하였지. 백성들의 생활이 어찌 변모할지 궁금하니 어디 한 번 보기라도 할까.”
다들 토지를 소유한 양반계층이니 이문에 민감했다. 백성의 삶이 궁금하다면서 은근슬쩍 다가가 종이가 뚫어져라 쳐다보니 적힌 내용이 다음과 같았다.
- 새로운 공법을 토지세로 삼을 것이며 여기에는 농지의 측량이 필요하다. 수확이 끝난 다음 신청자에 한해 측량을 실시할 것이며 이를 통해 토지의 면적을 명확히 파악한다.
- 납부하는 세금은 수확량의 2할로 정하며 흉년일 경우 1할로 절감한다. 여기에 매년 지세로 토지 가격의 1푼에 해당되는 금액 혹은 미곡을 납부하도록 한다.
- 소작료는 지세를 제외한 생산량의 오 할로 하되 세금은 지주와 소작인이 절반씩 납부한다.
- 토지의 측량을 하거나 세금을 온전히 납부하면 조정에서 만든 두엄을 지급할 것이다. 최소 조건은 반 결 이상의 토지를 소유하는 것이며 이를 유용(流用)하면 엄히 벌할 것이다.
새로운 공법(貢法)의 내용을 살펴본 유생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서로를 바라보았다. 소유한 은결을 절반이나 내놓으라는 말이니 한 유생이 기가 차다는 듯이 말하였다.
“세금을 납부하면 토지 결수에 따라 조정에서 만든 두엄을 하사할 것이라 하였지? 고작 두엄을 받아서 이런 막대한 세를 납부하고 은결을 토해낼 이유가 있는가?”
“옳은 말이라네. 두엄이야 소작농이나 하인들이 알아서 만드는 것이 아닌가. 설령 두엄을 조금 적게 주어도 큰 차이가 없을 것이네. 백성들이야 응할 것 같은데 우리는 아니지.”
양반 지주들에게 부과되는 세금은 소유 토지의 절반조차 되지 않았으며 이마저도 대충 거두어갔다. 이들의 기존 세금 납부량은 생산량의 5%에 불과하니 아무도 응하려 하지 않았다.
“주상전하께 송구한 말이지만 권고에 불과하니 응할 필요가 없겠군. 백성들이야 세금을 절반으로 줄일 수 있지만 우리는 세금이 네 배 혹은 그 이상으로 늘어나지 않겠나.”
“세금이 네 배로 늘어나도 이득이 생긴다면 응해야 하지 않겠는가?”
“고작 두엄 따위가 어떻게 이 할에 달하는 세금을 충당하고 남는단 말인가?”
이미 변화해가는 세상을 조금이나마 알고 있는 기정진은 결단을 내렸다. 다음 날 관아로 나아가 자신의 뜻을 밝혔고 한 달 뒤에 겨울 추위를 뚫고 영국 출신 측량사를 포함한 사람들이 내려왔다.
이들은 반나절 정도 기정진이 소유한 토지를 측량하였다. 기정진은 이들이 측량하는 방식이 자신이 막 발을 들인 삼각함수를 기반으로 한 것임을 알고 흡족해 하였고 결과가 나왔다.
“기 생원님이 소유한 토지는 도합 스물일곱 결이며 측량에 응하였으니 이를 조금 줄여 스물여섯 결로 정하겠습니다. 조정에서 조만간 두엄을 보낼 것이니 이를 즉시 사용하십시오.”
토지의 상세가 적힌 도면이 함께 첨부되니 쉽사리 속일 수 없었다. 갱신된 토지 문서를 확인한 기정진은 자신이 알려준 모든 은결이 양성화되었음을 알고 한숨을 쉬었다.
지금까지 매년 26석의 세금을 내던 기정진에게 156석이나 되는 세금이 부과될 예정이었다. 이마저도 은결에 대한 공식적인 토지가격이 정해지면 약 190석으로 늘어나리라.
그래도 후회는 없었다. 주상전하가 손해를 끼치지 않겠다고 공언하였으니 평상시에 수확하던 800석보다 많은 양이 자신의 손으로 들어올 수 있으리라 생각하였다.
이후 몇 달이 흐르고 산천에 물이 오르고 모내기가 시작될 무렵 두엄이 도착하였다. 조선 최초의 인산 비료는 시비(施肥) 방법과 함께 전달되었고 기정진은 이를 소작농에게 알려주었다.
“두엄 한 섬을 모내기를 하거나 작물을 파종하기 보름 전 한 결의 땅에 골고루 뿌리고 뒤섞으라 하였다. 여기에 두 배 분량의 재나 네 배 분량의 녹비를 섞으라 하였지.”
다른 유생들은 기정진을 비롯하여 조정의 두엄을 뿌린 농민들의 논을 살펴보며 관심을 가졌다. 보름 뒤 모가 심어졌으며 모내기가 끝나고 한 달이 지나자 비료의 효과가 증명되었다.
같은 시기에 모내기를 한 다른 논과 견주면 기정진의 벼들은 한 뼘은 더 성장하였고 잎의 폭은 반 배 가까이 두툼하였다. 나이를 먹은 마름은 기정진에게 다가와 말하였다.
“제가 예순 평생 농사를 지었는데 콩을 심으며 오래 묵힌 농토에서도 이런 작황을 보인 적이 없습니다. 제 생각이 옳다면 아마 사 할 까지 작황이 증진될 것 같습니다!”
“세금이······. 세금이 고작 이 할이었는데 작황이 사 할이 늘어나면 무조건 이득이로군.”
이러한 일은 조선 방방곡곡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유생들은 너나할 것 없이 관아로 달려들어 측량을 신청하였고 사람을 파견해 달라 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효명세자가 유스투스 리비히와 측량사들에게 포상을 내렸으며 탁지(度支) 승지로 발탁된 김좌근은 자신에게 부과된 막대한 책무에 짓눌리기 시작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