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명세자와 함께하는 조선 생활 - 44편
(4장 - 관짝의 못)
데이트를 마치고 돌아온 일준이는 다음날 아침부터 무언가를 준비하기 시작하였다. 사절단에서 환금용으로 남겨둔 홍삼을 챙겨오고 각종 지사제(止瀉劑)와 한약도 준비했다.
“갑자기 약을 준비하다니 무슨 일이야? 몸은 멀쩡한 것 같은데 역사가 뒤엎어져서 영입할 위인이 병에 걸리기라도 했어?”
“그런 건 아니고 어제 데이트를 하면서 만난 에이다 있잖아. 내가 눈 뜨고는 못 봐줄 정도로 상태가 안 좋더라고. 만난 것도 인연인데 아편중독이라도 치료해보려고.”
일준이가 의학을 제대로 배우지는 않았지만 아편 중독자들을 치료했던 정약용 아래에서 함께 연구를 했던 적이 있다. 그때의 경험을 떠올린 녀석은 이런저런 약재를 준비하였다.
이러다 사랑이 싹틀 것 같았지만 일준이는 연애세포가 죄다 뒤틀리고 파괴되어 그런 것을 모르는 것 같았다. 짐을 챙긴 일준이는 방안지를 가져오더니 뭔가를 그리기 시작했다.
“그건 또 뭐냐? 방안지에 웬 그림을 그리고 있어?”
“아편 중독을 끊어내려면 심리적 접근도 필요해. 다산 선생님은 중독자들에게 단순한 반복 작업을 다양하게 시켜서 아편에 대한 생각을 줄이고 스스로의 상태를 알아내게 했어.”
녀석은 방안지를 색칠하여 제법 복잡한 도형을 그리고 이를 검사하며 위쪽과 오른쪽에 숫자를 적어나갔다. 어디선가 본 것 같았는데 초등학교 때 유행하던 물건이었다.
“마침 수학을 좋아하니 아편중독으로 인한 심리적 증상을 수학 문제를 풀면서 억제하게 하려고. 그나마 수학을 좋아해서 다행이지 아니라면 평생 붙어있어야 했을걸.”
“이거 네모 그램 아니야? 우리가 했던 판은 16줄이었는데 32줄로 이걸 만들면 난이도가 끔찍하게 올라가잖아. 단순한 반복 작업 수준이 아닌데?”
“에이다의 수학적 재능은 나 따위는 상대도 안 돼. 내가 현대지식이 없었으면 그냥 상위권 과학자이지만 에이다는 격이 다르니 난이도를 높여서 대응해야지.”
가만 생각해 보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일준이가 말하기를 에이다는 수학을 배우고 3년이 지나지 않아 드모르간도 가르치기 힘들어 할 정도의 재능을 가졌다 하더라.
아편과 도박중독이라는 단어로 머릿속에 잠들어 있던 무언가가 생각났다. 마침내 이 시기에 막 만들어지고 있을 차분기관(difference engine)이 떠올랐고 에이다의 정체도 알 수 있었다.
“격이 다른 사람은 맞네. 네가 만난 에이다는 세계 최초의 프로그래머인 에이다 러브레이스잖아.”
“최초의 프로그래머? 내가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컴공과의 여신 아니야!”
일준이의 손에 힘이 들어가 딥 펜(dip pen)의 펜촉이 일그러지고 방안지가 찢어졌다. 녀석은 정신을 차리지 못 하더니 손에 묻은 잉크를 닦아내면서 호들갑을 떨었다.
“어쩐지 뭔가 이상하더라! 내가 재능도 다 개화하지 못 하고 역사에 가까스로 이름만 남긴 위인을 가만히 내버려 둘 리가 없지! 이 감정은 역시 숭배였어!”
“그건 아닌 것 같은데. 내가 장담하는데 네 머릿속에 숭배에 대한 감정은 없는 것 같아.”
암만 보아도 사랑이 싹튼 것 같았지만 일준이는 눈에 불을 켜고 네모 그램을 만들어냈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문제 하나를 푸는데 며칠 걸릴 수준의 문제를 열 장을 만들고 이를 검수까지 하면서 말했다.
“이 정도면 며칠 동안 아편 생각을 끊고 네모 그램에만 몰두할거야. 내가 영국에서 석 달 정도 머무르기로 했으니 그 동안 아편만 끊으면 첫 번째 문제는 해결되겠지.”
“이 시대의 아편이 에너지 드링크 수준으로 널리 팔리는 건 알고 있지? 길거리를 지나가다가 구멍가게에서 아편을 사면 네 노력도 말짱 도루묵이 될 텐데.”
“아편에 대한 심리적 의존만 남으면 자연스럽게 뇌 혈류가 활성화 되서 수학실력이 늘어날 거야. 여기까지 눈치 챈 순간부터 아편에 손도 안대겠지.”
일준이의 치료법은 나름 효과가 있을 것 같았다. 그러면 에이다 러브레이스가 얼마나 뛰어난 재능을 보여줄지. 이 재능을 사용할 수 있을지가 궁금하여 물어보았다.
“에이다는 완성되지 않은 차분기관으로 컴퓨터 프로그래밍을 시도한 사람이야. 네가 진공관으로 원시적 컴퓨터를 만들기만 해도, 아니면 컴퓨터 구조만 설계해도 성과가 있지 않을까?”
“컴퓨터 이전에 진공관 만드는 작업이 문제지. 내가 집에 있던 진공관 앰프의 내부 구조를 보여줄게. 진공관은 전구 내부에 박막과 전극을 넣는 녀석이다.”
제임스 린제이에게서 구매한 전구를 가져온 일준이는 이걸 분해해서 안에 종이와 홀더펜슬에 들어가는 연필심을 넣었다. 그러더니 구조에 대해 설명하였다.
“당연히 고열을 견딜 수 있는 유리 가공기술도 문제고 수명도 문제이며 비용도 문제야. 이런 복잡한 구조의 진공관을 분 단위로 갈아 끼우는 컴퓨터를 쓰느니 수학자를 쓰는 게 나아.”
“그럼 차분기관이라도 사용하면 어떨까? 프로그래밍에 재능이 있는데 이 재능을 썩힐 수는 없잖아. 잘만 하면 과학의 급격한 발전이 이루어질 수도 있어.”
“내가 결혼이라도 하거나 교제가 길어질 것이라고 망상하고 있는데 착각은 하지 말자고. 네가 말한 차분기관은 증기동력 기반이라 내 계산속도보다 훨씬 느리고 문제가 엄청나게 많을 걸?”
생각하여 보니 대영제국의 막대한 예산을 투자해도 만들지 못한 물건이 차분기관과 해석기관이었다. 최초의 프로그래머를 영입해도 정작 쓸 데가 없었는데 일준이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그 정도 재능이면 어디에 두어도 성공할거야. 이미 드모르간도 밑천이 털릴 지경이고 가우스의 이론을 독파하는 사람인데 쓸 데가 없겠냐. 일단 제대로 된 사람으로 만들자고.”
네모 그램을 검수한 일준이는 이를 끈으로 묶어 간단한 책자를 만들었다. 그리고 이를 서류봉투에 넣더니 다시 말쑥한 차림새로 저택을 나서며 말했다.
“아마 보름 정도면 육체적 금단증상은 대부분 사라지고 이후 심리적 의존만 남을 시기야. 그때부터는 너를 소개하는 자리를 만들어서 잡다한 생각을 못 하게 만들어야지.”
“암만 보아도 내 핑계 대면서 데이트를 하는 것 같은데.”
“아편중독 치료 과정이다! 이런 과학자와 인연을 만들면 새 인연도 생기겠지!”
“그럼 데이트 코스 중에 웨스트민스터 사원과 세인트 폴 대성당을 넣고 캔터베리 대주교와의 접견도 두어 번 정도 마련해봐. 이번 기회에 천주교 선교도 허가받을 방법이 있다.”
일준이는 성공회의 본산인 두 장소에 다녀와야 되니 묘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것도 방법이다. 명예 프랑스인 대접을 받는 일준이가 성공회 신도가 되려는 움직임을 보이면 프랑스에서는 어떻게 대응하겠는가.
보통 나라라면 대수롭지 않게 여기겠지만 프랑스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격이다. 찰스 디킨스를 이용해 이를 이슈화 시킬 생각을 하였는데 일준이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지금 이지연 대감이 파리 외방전교회 주교들과 계속 교리로 싸움을 벌이는데 주교들이 단번에 고개를 숙이겠군. 좋은 방법이니 몇 번 다녀와 볼게.”
대화가 끝나고 저택을 떠나 에이다에게 향한 일준이를 보며 효명세자는 한동안 생각을 하였다. 그러더니 나를 바라보며 이를 평가하였다.
“아무리 보아도 코가 단단히 꿰인 것 같군. 간혹 잡기(雜技)에 빠진 남자가 올바른 여인을 만나 마음을 고치고 혼사를 올리는 이야기를 들었지. 보통 여인이 이런 남자를 두고 가만히 있을 수 없다 하더군.”
“실로 그러하옵니다. 다만 잡기에 빠진 여인이 올바른 남자를 만난 격이 되었사옵니다.”
일준이는 며칠마다 한 번씩 에이다의 저택으로 찾아가 점점 더 밝은 표정으로 돌아왔다. 다행이도 정약용이 제시한 아편 중독 해독법이 어느 정도 먹히는 것 같았다.
그동안 나와 효명세자는 프랑스 정부에서 전해준 조선발전기금. 대외적으로는 프랑스 정부의 투자 어음을 받아 영국과의 거래에 나섰다. 52만 파운드나 되는 이 어음으로 사들일 물건이 많았다.
“인도산 초석을 대량으로 구매하고 싶습니다. 벵골 지역의 동인도회사를 통하여 매년 십오만 근을 구매하도록 하지요. 초기 물량으로 육십만 근을 일시불로 구매하겠습니다.”
“매년 이십만 파운드 무게의 초석이군요. 여기에 운송료와 수수료를 감안하면 매년 은자 삼만 냥, 육천 파운드의 가격으로 책정하겠습니다. 초기 물량은 당연히 이만사천 파운드입니다.”
프랑스에서 발행된 천 파운드 어음 24장을 건네주니 동인도회사 직원들은 나와 악수를 나누며 거래를 마쳤다. 다음으로 거래할 대상은 옆에서 우두커니 나를 보고 있던 러시아 대사 이바노프였다.
“다음으로 시베리아 개척단을 통하여 매년 이천 필의 준마(駿馬)를 구매하겠습니다. 기병들이 타고 다닐 말이어야 하며 농사를 위한 말의 추가구매도 가능합니다.”
“평상시라면 방금 전의 초석 구매로 소름이 돋았을 것인데 조선의 결단을 알고 있으니 이해하겠습니다. 영국의 계략으로 청나라와 전면전을 벌이게 되었으니 안타까운 일입니다.”
러시아 정부도 청나라와 조선의 전쟁을 도저히 상대할 수 없는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라 이해하였다. 그래도 적의 적은 아군이라는 논리에 의거하여 나름 괜찮은 거래를 제안했다.
“시베리아 개척단에게 가장 필요한 물건은 차(茶)입니다. 홍차보다 몇 배는 강렬하고 떫은맛이어도 좋으니 어음 대신 동방의 차를 구매하여 주시면 어떻겠습니까?”
“강렬하고 떫은 차라 하면 오래 묵은 차나무의 잎으로 만드는 녀석이 아닙니까?”
“저희가 보낸 시베리아 개척단의 사람들은 오래 묵은 찻잎을 계속 끓여 마시는 습관이 있습니다. 이런 차도 제대로 된 가격으로 구매해 드리겠습니다.”
조선이 단독으로 찻잎을 생산하면 이 물량을 만들기 힘들겠지만 일본에서 찻잎을 수입하는 중계무역을 하면 더욱 큰 이득을 볼 것 같았다. 다음으로는 일준이가 구매할 물건을 말했다.
“황과 수은은 십 톤을 오 년 이내에 보내주시고 구리도 삼십 톤 이상이 필요합니다. 최신 공작기계와 제도판 그리고 측량기를 비롯한 정밀기기를 각기 오십 개 구매하겠습니다.”
“최신 공작기계와 제도판 말씀이십니까? 당장이라도 구매하실 수 있는데요.”
“단위가 야드와 파운드가 아닙니까? 조선에서는 앞으로 미터법을 사용하기로 했으니 프랑스 표준 원기를 동원하여 미터법으로 수정해 주시지요.”
“거 참 이상한 사람을 다 봤네. 아무리 과학자라지만 너무 한 것 아니오?”
일준이가 말하기를 기술 발달에는 정확도가 생명이라 하였다. 기술을 발전시키려면 가장 정밀한 공작기계를 만들고 다시 더 정밀한 공작기계를 만드는 발전을 거쳐야 한다더라.
졸지에 자신의 공작기계의 모든 수치를 수정하게 된 상인이 투덜거렸지만 다음 거래 물건도 있었다. 일준이는 영국 과학협회의 일원을 바라보며 슬쩍 말하였다.
“듣자하니 아이슬란드에서 채굴되는 빙정석(氷晶石)에는 불소(弗素)가 들어있다 하더군요. 불소 분해실험을 하고 싶으니 삼 톤 정도를 구매하고 싶습니다. 여기에 백금도 필요하지요.”
“지금 제정신이십니까? 앞날이 창창한 사람이 뭔 생각인지 모르겠군요.”
“충분히 가능할 것 같으니 염려하지 마십시오.”
이외에도 각종 식물의 종자와 묘목을 비롯한 수많은 물자들을 예약 구매해 버렸다. 한 달에 걸친 광란의 구매는 마침내 52만 파운드의 어음, 실제로는 조선에 대한 지원금을 모두 소모하며 막을 내렸다.
웰즐리는 마지막 날 우리가 프랑스를 통해 더더욱 많은 채무를 짊어진 것을 기념하려는지 연회를 제안하였다.
아직 프랑스로 돌아가지 않은 과학자들도 이 연회에 참석하였고 졸지에 국제 교류의 장이 되었다. 웰즐리는 가장 높은 신분의 효명세자에게 다가와 이번 일을 평가하였다.
“프랑스에서도 차관을 받으시다니 대단한 일이로군요. 그 차관으로 영국의 기술을 많이 사들였다 하였는데 혜안이 남다르십니다.”
“그야 당연한 일이 아니오. 프랑스에서도 많은 물건을 구매하였지만 기술에 있어서는 아직 영국이 제일이지. 프랑스는 발상이 뛰어나고 독특한 재주를 가진 사람이 많은 것이지.”
산업혁명으로 기술발전이 가속된 영국의 기술수준은 프랑스보다 한 수 앞서있었다. 이 앞선 기술도 조만간 일준이에 의해 점차 따라잡히겠지만 아직은 모를 일이다.
효명세자가 웰즐리와 대화를 나누는 동안 주변을 돌아보니 흉측한 물건이 또 탄생했다. 이전 만남에서 웰즐리가 내놓은 오이 케이크는 영국인의 입맛에도 영 아닌 것 같았지만 이번 물건은 더욱 끔찍했다.
“이 흉악한 물건은 또 뭐야. 이건 아무리 봐도 라임이 아닌 오이 마카롱이네.”
마카롱 중 썩어문드러진 오이처럼 짙은 초록색을 자랑하는 마카롱이 있었는데 프랑스 과학자는 이를 한 입 먹고 헛구역질을 하였다.
“우욱! 영국 놈들의 미각은 다 뒤틀려있어! 레몬 맛은 먹을 만 했는데 이건 너무 역겨워!”
용감한 희생자가 화장실로 사라졌고 마카롱 안에는 크림 대신 설탕에 절인 오이가 있었다. 웰즐리의 역겨운 식성을 다시금 확인하며 주변을 돌아보니 사람들이 놀라고 있었다.
“닐슨! 닐슨 어디에 있나요! 이런 연회가 벌어졌으면 저를 초대하셨어야죠!”
에이다가 연회장 안을 가로지르며 패러데이와 대화를 나누던 일준이에게 달려들었다. 일준이에 말에 의하면 며칠 전 까지도 금단증상에 시달렸는데 회복이 너무나 빨랐다.
“에이다! 며칠 전 까지만 해도 몸이 안 좋았는데 벌써 회복되었다고? 정말 회복된 거야?”
“이게 바로 사랑의 힘이에요. 닐슨을 생각하니 아편은 역겨운 물건이 되었어요! 아편을 끊으니 머리도 맑아지고 초조함도 사라지면서 가슴이 콩닥거리고 속병도 가라앉았어요!”
공개적인 장소에서 사랑을 고백하는 에이다에게 당황한 일준이는 어쩔 줄 몰라 뒤로 물러났다. 그러나 연회장에 있던 앤 이사벨라 웬트워스(wentworth) 여남작이 다가와 말했다.
“내 딸아이가 혼약을 맺을 생각을 하니 가슴이 뿌듯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닐슨 조 같이 세계를 진동시키는 천재 과학자라면 오히려 제가 감사 인사를 드려야 하지 않을까요.”
다시 관 뚜껑에 못이 하나 박혔고 일준이는 나를 애처로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여기에 개입하려고 해도 자신이 관에 들어가 스스로 누운 신세이니 도와줄 방법도 없어서 그냥 고개를 흔들었다.
음악이 울리고 일준이와 에이다는 손을 맞잡은 채 춤을 추기 시작했다. 평상시에 아편을 다량 복용하여 창백한 얼굴이라 일컬어지던 에이다의 모습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그녀는 아편을 끊고 혈액순환이 정상으로 돌아와 더욱 빼어난 미모를 뽐냈다. 이 모습을 확인하던 신사가 자조적인 말로 중얼거렸다.
“아편을 고작 한 달 만에 끊었다니. 사랑의 힘일지도 모르지만 내 입장에서는 기적과도 같은 일이로군. 내가 석 달 넘게 고생한 것은 의지력이 부족해 벌어진 일이었나.”
어느 영국인 아편쟁이의 고백이라는 자전적 수필, 자신의 아편중독 극복과정을 저술한 토머스 퀸시가 먼저 박수를 쳤다. 이윽고 연회장 전체가 박수로 가득 차 버렸다.
웰즐리도 박수를 쳤고 효명세자는 아예 춤을 다 추고 떨어진 둘의 손을 맞잡아주며 못이 다 박힌 결혼이라는 관을 구덩이에 넣었다.
사람들은 당장 결혼식장으로 보내자 하였지만 사촌이 결혼이라는 무덤에 들어갔으니 구덩이에 흙을 넣을 수 없어서 조금이라도 숨통을 틔우려는 제안을 하였다.
“이 축복받은 자리에서 약혼(約婚)을 하고 혼사는 조선에 가서 치르면 어떠하겠습니까? 저희는 조선으로 돌아갈 사람들이니 머무를 곳에서 결혼을 해야지요.”
“좋은 생각이야. 아무렴 좋은 생각이고말고. 조선에서 고생이 많겠지만 닐슨 조와 함께라면 내 딸이 불행한 일을 겪지는 않을 것 같군.”
웬트워스 여남작이 약혼을 허가하였고 아예 프랑스에서 일준이가 개발한 신형 사진기가 도착하였다. 30분이면 사진을 찍을 수 있는 신형 사진기 앞에서 일준이는 멍한 표정으로 피사체(被寫體)가 되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