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명세자와 함께하는 조선 생활 - 1편
(3장 - 닐슨 조 (1) (4월 3일 수정))
효명세자를 필두로 영국으로 향한 사절단이 여러 수작과 이간질을 견딜 무렵, 예조판서 이지연을 필두로 한 프랑스 사절단은 배움에 몰두하였다.
다만 배움을 위해 꼭 필요한 물건이 있었다. 조일준은 파리에 콜레라가 유행하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바로 작업에 착수하였다.
“호열자는 열수환으로 다스릴 수 없는 끔찍한 병입니다. 만약 병을 앓게 되시면 이 경구수액을 하루 한 말(이 시대의 말은 6리터)씩 드시지요.”
“얼핏 보기에는 끓인 물에 소금과 설탕을 섞은 것인데 정말 약이란 말인가?”
졸지에 목숨을 건사하기 위해 경구수액을 개발하였지만 다들 심드렁한 눈치였다. 사절단에 배정된 의사만이 콜레라의 최종 해결책이라 생각하여 제조법을 익힌 것이 전부였다.
프랑스 입장에서는 동인도회사의 사람을 고용해 통역을 하는 것을 자존심 문제로 받아들였다. 그 대신 조선 사람들에게 프랑스어를 가르치는 것이 마땅하다 여겼다.
수많은 강사와 언어학자들이 조선 사절단이 머무는 저택에 드나들었다. 간단한 쪽지시험을 확인한 강사는 이지연의 모습을 보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배움이 무척 빠르십니다. 저희가 수많은 사람들에게 프랑스어를 가르쳤지만 이토록 재주가 뛰어나시며 집중력이 좋은 분들을 뵙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군요.”
“내 재주는 평범하지만 가르치는 사람들이 열과 성을 다하여 임하니 배움이 빠른 것일세.”
“발음이 아직 부정확하시지만 어느 정도 회화를 깨우치셨으니 다행입니다. 다음 강사가 들어올 때 까지 잠시 쉬도록 합시다.”
프랑스어로 간단한 대화를 나눌 정도가 되었으니 한 달 이내에 대화가 가능하리라. 강사가 나갔지만 이지연과 유생들은 물론이요 사절단 인원 전체가 책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조선에서 과거에 합격하거나 유생이라 자부하려면 수많은 경서(經書)를 탐독하고 암기하는 것이 당연했다. 김정희는 단어장을 보면서 옆에 있는 유생에게 슬쩍 물어보았다.
“불란서의 말이 난해하다는 말을 들었지만 한낱 단어에도 남성과 여성을 나누었으니 체계적이면서도 쓸모가 없는 것 같습니다. 왜 귀족(noblesse)은 여성이며 달걀은 남성인지요.”
“나도 모르는 일이니 외우고 말하기를 반복할 뿐이지. 이거 젊은 시절이 생각나는데.”
영어 기반으로 프랑스어를 빠르게 익힌 조일준의 학습이 가장 빨랐지만 큰 차이는 없었다. 이지연은 잠시 숨을 돌리고 프랑스에 대하여 좋은 평가를 내렸다.
“서학을 이 세상에 널리 퍼트리려는 의도를 가진 불란서이지만 스스로의 예절을 지키려고 노력하는군. 내가 보기에는 이들이 서학을 믿어도 그리 나쁜 마음을 품은 것 같지는 않다네.”
프랑스어의 발음을 가르친 강사도 두 시간이 흐르고 진땀을 빼며 사라졌다. 해가 떨어져 자율학습의 시간이 되었고 하나둘씩 스스로의 배움을 위하여 다른 방으로 이동하였다.
이지연을 비롯한 유생들은 조만간 언쟁을 벌일 천주교와 관련된 지식을. 김정희를 필두로 한 인원은 문화와 예술에 관련된 지식을 배웠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지식을 배우는 사람들이 있었다.
“우리가 학문을 익히는 것이 아닌 잡기(雜技)에 가까운 산학(算學 - 수학)을 배워야 함을 이해할 수 없네. 정녕 산학 따위가 학문의 근본이라 하였는가?”
“서역에서는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세자저하께서 서역의 학문을 익히라 하였으며 이를 위해서는 바칼로레아(Baccalauréat – 졸업 시험)를 통과해야 하지요.”
조일준이 프랑스의 대학교에서 학문을 배우겠다는 뜻을 알리니 난생 처음 동양의 유학생을 받아들이게 된 대학들은 난색을 표하였다. 결국 이들은 시험만큼은 빼놓을 수 없다 하였다.
다만 어학이나 역사같이 지나치게 불리한 시험을 제외하고 수학과 기초 과학지식에 관련된 시험을 기준으로 삼는다 하였다. 조일준은 문제를 칠판에 적고 해설에 들어갔다.
“방정식(方程式)이라 함은 숨겨진 수를 찾는 학문입니다. 몇 번이고 실시해온 일이니 다음 산식을 풀어 봅시다.”
수학에 매진한 산관들이 아닌 젊은 유생들의 입장에서는 이차방정식도 배우기 난해하였다. 낑낑거리는 모습을 본 조일준은 당장에라도 근의 공식을 알려주고 싶었지만 한계가 있었다.
이 시대의 수학은 증명과 이해에 관련된 비중이 컸다. 근의 공식을 사용하려다가는 이를 설명하기 위해 더욱 많은 공식이 필요하여 함부로 쓸 수 없었다.
마침내 문제를 풀고 검사를 받았지만 정답률은 절반에도 미치지 못 했다. 실망과 좌절을 가득 담은 조일준의 표정을 본 유생들은 부끄러운 마음에 오히려 화를 냈다.
“고작 산학이 아닌가? 자네가 알고 있는 경지가 얼마나 높은지 궁금하니 알려나 주게.”
“알려드릴 수는 있는데 앞으로 한 시진 내내 칠판에 공식을 쓰고 지우며 알려드려야 합니다. 그러면 간단한 선형대수학을 알려드리도록 하지요.”
화공과 출신이라 증명과 이해에 대해 완벽히 이해하지 못 한 조일준이라 하여도 기본만큼은 숙지하였다. 프랑스 유학을 준비하며 현대에서 가져온 공업수학 서적으로 기초를 닦았으니 이를 알려주기 시작하였다.
한 시간 뒤, 최신 수학 지식을 강제로 주입당한 유생들은 경기를 일으키며 도망치려 하였고 방정식 강의가 재개되었다. 더 이상 조일준의 강의에 대해 이견을 제시하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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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이 지나고 양력 5월 15일이 되어 조선 사절단의 언어 교육이 끝났다. 간단한 시험을 통해 일상 회화가 가능할 수준이라 판단하였으니 프랑스 정부는 본격적인 환대를 시작하였다.
프랑스 정부는 팔레 루아얄(Palais-Royal)에서 이들을 맞이하였다. 이지연은 거대한 저택에 주눅들지 않고 동양의 예법대로 크게 절을 올리고 인사말을 시작하였다.
“조선에서 머나먼 길을 건너 불란서에 머무르게 된 예조판서 이지연이라 합니다. 모든 일이 불란서의 왕 루이필리프 전하의 덕과 통치 덕분에 온전하게 이루어졌으니 감사 인사를 전하옵니다.”
“동양의 예법을 잘 알지는 못하지만 지극정성이라는 사실 하나만큼은 알 수 있구려. 그나저나 동양에서는 나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는지 궁금하군. 혹여나 의미 없는 미사여구가 아닌가?”
“법과 도덕이 바닥에 떨어진 불란서에 고난을 겪으신 분이 다시 돌아와 왕좌에 오르셨으니 이는 지극히 합당한 일입니다. 즉위에 있어 모든 이들이 칭송하고 받들었다 하였으니 치세가 무궁무진할 것이 분명합니다.”
루이필리프는 성품 하나는 좋은 사람이었다. 이지연의 어설픈 프랑스어를 듣고 그 뜻을 되새긴 다음 지극히 만족한 표정으로 말하였다.
“조선의 사람들이 나에 대해 칭찬하니 이거 몸 둘 바를 모르겠군. 다만 궁금한 것이 있으니 여기에 온 목적 가운데 천주교의 선교에 관한 논의가 있다 하였지. 왜 논의를 하는가?”
“서학이라는 학문이 조선에 퍼지게 된 다음부터 여러 문제가 벌어졌사옵니다. 무부무군(無父無君)을 논하며 다른 나라의 군대를 들여오라는 밀서를 보내려는 역도까지 생겨나기에 이르렀사옵니다.”
“내가 알기로 조선에 선교사를 파견한 적은 없었는데 스스로 천주교를 깨우치고 저런 행동을 보였다는 말인가. 이는 제대로 된 스승이 없어서 벌어진 일이지만 잘못은 우리에게 있군.”
루이필리프의 대답을 들은 이지연이 고개를 끄덕이며 침묵하였다. 사실 루이필리프는 아무런 개입을 하지 않은 일이지만 왕이라면 마땅히 잘못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하는 법이었다.
“애석한 일이네만 선교의 중핵인 파리 외방전교회는 내 명령에 따르지 않는 독자적인 기관이라네. 그렇다 하여도 자네들이 온전히 논의를 할 수 있도록 배려를 아끼지 않을 것일세.”
“말씀만 들어도 그 은혜에 감읍할 따름입니다. 그러하면 파리 외방전교회라는 곳의 서역 승려들과 논의를 시행할 것이니 염려하지 않으셔도 될 것입니다.”
“염려할 일은 따로 있다네. 조선의 왕자가 영국에 머물며 맛없는 음식과 어설픈 문물을 보며 유럽에 대한 평가를 좋지 않게 내리겠지. 그러니 좋은 사람을 불러 들였다네. 로시니! 어서 나오도록 하게.”
하얀색 쫄쫄이 바지를 입은 후덕한 체격의 사람이 당당하게 걸어 나오니 이지연은 어색하게 웃었다. 그는 멋들어진 자세로 루이필리프에게 인사를 올렸고 자신을 소개하였다.
“페사로에서 태어난 저, 조아키노 안토니오 로시니가 루이필리프 전하에게 인사를 올립니다. 미리 명을 내리신 대로 이들에게 진정한 프랑스의 문화를 알려줄 것입니다.”
“자네가 파리에 돌아오는 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네.”
“저 또한 전하께 가곡(歌曲)을 알려드리는 날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제 인맥을 따라 수많은 미술가들과 연주가들이 파리에 방문하기로 하였으니 즐거운 일정이 가득할 겁니다.”
조선에서 그리 대접받지 못 하는 악공(樂工)이라 생각한 사절단이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지만 로시니는 이 시대 문화를 집대성한 인물이었다. 오페라 극장으로 들어간 사절단은 잠시 뒤 눈을 번쩍이며 밖으로 나왔다.
“서역은 회화와 아악(雅樂)에 능숙하다 하였는데 이는 대체······. 내가 뭘 본 것인지 모르겠군. 추사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이 나라에서 악공을 별달리 대접하지 아니하였는데 서역은 융숭히 대접하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모두를 이해할 수 없지만 웅장한 목소리와 열정만큼은 본받아야 할 것입니다.”
수많은 인파가 밖으로 나온 로시니를 향해 몰려들었으니 그의 인기를 알 수 있었다. 김정희는 물론이요 단원 김홍도의 아들이자 화가인 김양기(金良驥)도 기대감에 부푼 눈을 하였다.
반면 조일준은 횡재를 한 표정을 숨기며 로시니를 바라보았다. 미식가로 명성을 떨치는 사람들을 투자자로 삼기 위해 글루탐산나트륨을 숨겨왔는데 접점이 생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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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랑제콜의 입학시험 결과는 조일준의 예상과 달리 절반 이하의 합격을 하였다. 총원 20명 가운데 고작 8명만이 난이도가 완화된 입학시험에 통과하였다.
“열두 분은 입학 자격이 없으니 더욱 배움에 매진하셔서 다음 시험을 통과하시지요.”
“이게 말이나 됩니까? 시험 문제 가운데 세 문제가 제가 배우지도 않고 여태껏 시험에 나오지도 않은 문제로 나왔습니다. 형평성에 어긋나는 일 아닙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점을 받은 사람이 있습니다. 닐슨 조가 만점을 받았는데 여러분들은 왜 만점을 받지 못 한 것입니까?”
텃세를 부리기 위해 미적분 관련 문제를 셋이나 끼워 넣었으니 합격률이 저조할 만 하였다. 오히려 머나먼 동양에서 이 문제를 완벽하게 푼 조일준이 주목의 대상이 되었다.
입학이 아닌 편입에는 굳이 행사가 필요 없었다. 각 강의실을 돌아다니며 학교의 구조와 교수진에 대해 익히게 된 사람들은 난생 처음 서양의 복식을 입고 대화를 나누었다.
“그랑제콜이라는 학교가 무과(武科)를 겸하는 학교인 줄은 몰랐네. 과목 가운데 궁시(弓矢)가 있는지 궁금한데 혹시 있을 것 같은가?”
“아마 없을 것이네. 서역에서 활은 몇몇 기인(伎人)이나 사용하는 무기가 되었다더군.”
“그러면 참으로 난감한 일이로군. 그나저나 학교이면 면신례(免新禮)가 있음이 마땅한데 우리를 가르칠 선배님들은 언제 방문하시는 건가.”
면신례라는 말을 들은 조일준이 단추를 채우며 심각한 표정으로 주변을 돌아보았다. 박현상의 말이 틀리지 않다면 조만간 여러 명분으로 신고식을 하려는 자들이 오리라.
사절단은 외국 사신이지만 배움을 청하는 학생이기에 어느 정도 수준이 완화된 신고식이 시작될 것이라 하였다. 예상대로 키가 훤칠한 생도가 다가와 인사를 하였다.
“조선에서 방문한 편입생들에게 나 마티아스(Mathias)가 대표로 나서서 인사를 하겠네. 자네들이 이 프랑스의 위대한 문물을 배우기 위하여 방문한 것이 맞는가?”
“그렇습니다 . 저희에게 많은 지도편달을 부탁드립니다.”
“동양 사람들을 처음 맞이하게 되었지만 태도부터 올바르군. 어서 뒤뜰로 오도록 하게.”
이들의 속내를 알고 있는 조일준은 피식 웃으며 대열의 맨 뒤에 섰다. 뒤뜰에는 제법 화려한 탁자가 있었는데 요리 대부분이 닭으로 만든 요리였다.
“혹시 프랑스의 국조(國鳥)에 대해 아는 사람 있나?”
“늠름한 수탉이라 알고 있습니다. 희망과 믿음을 상징한다더군요.”
“그러니 여러 요리를 준비했네. 코코뱅(Coq au vin)은 물론이고 심혈을 기울여 우리가 만든 요리이지. 아직 식탁에는 앉지 말고 격식을 지키게나.”
면신례가 아닌 식사 대접을 받게 되어 감동한 유생들이었지만 어디선가 퀴퀴한 냄새가 밀려왔다. 신고식에 나선 생도들이 낄낄거리며 가리킨 곳에는 말똥 무더기가 있었다.
“말똥을 왜 여기에 두셨는지요?”
“그야 자네들을 닭으로 만들기 위해서이지. 프랑스의 문화를 체험하려면 스스로 닭이 되어야 하지 않겠나. 말똥 무더기에서 알몸으로 뒹굴고 다시 닭털에서 뒹굴고 식사를 먹게.”
유생들이 경악하였지만 이 정도면 프랑스 기준으로는 매우 약화된 신고식이었다. 뒤에서 가만히 있던 조일준이 앞으로 나서서 질문을 하였다.
“그럼 닭이 안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여기서 편입을 포기하거나 아니면 결투로 자신의 힘을 증명하게. 칼도 있으며 권총도 있으니 원하는 물건을 고르면 되지. 자네가 남자라면 결투에 응하게!”
“제가 가문의 유일한 사람이라서 무기를 사용한 결투를 할 수 없군요. 대신 다른 결투를 하겠습니다. 권투는 어쩌신지요?”
“덩치가 좀 있다고 권투를 제안할 줄은 몰랐는데. 자네를 두들겨 패는 손맛이 좋겠군.”
귀족간의 결투에도 규칙이 있었다. 가문의 대가 끊길 때 까지 결투를 하면 안 되니 대가 끊기기 직전이라면 권투로 사람이 죽는 일을 최대한 방지하였다.
생도들이 결투를 준비하는 동안 조일준은 잠시 밖에 다녀와 물건을 가져왔다. 그리고 이 시대에 존재하지 않을 물건이 담긴 상자를 바닥에 쏟아버리며 말하였다.
“동방에는 신체발부수지부모라 하여 부모에게 물려받은 신체를 온전히 건사하라는 가르침이 있습니다. 결투를 하여 주먹을 주고받아도 결국 상대의 몸을 훼손시키는 죄가 아닙니까.”
“이 글러브를 착용하고 싸우라고? 이걸로 상대를 때리는게 말이나 돼?”
가죽으로 만들고 안에 솜을 채운 복싱글러브와 어설프게 가죽을 덧대 만든 마우스피스 그리고 헤드기어가 땅바닥으로 쏟아졌다. 이를 하나씩 집은 조일준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마우스피스를 착용하면 이가 뽑힐 염려가 없으며 머리에 헤드기어를 두르면 뇌진탕에서 보호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글러브를 착용하면 더더욱 안전해지지요.”
“그래서 나보고 이걸 착용하라는 말이지? 너는 맨 손으로 싸우고.”
“저는 착용할 것이니 마음대로 하시지요. 제가 마음대로 정한 규칙을 남에게 강요할 수 없지 않습니까.”
결투를 신청하고 종목을 권투로 정했음에도 자신이 불리한 상황을 자처하는 조일준의 모습을 지켜본 생도들의 이마에서 핏줄이 솟아올랐다. 마티아스는 글러브를 집고 말했다.
“그루시(Grouchy) 후작가의 일원인 내가 이런 제안을 거절할 것 같아? 대등한 입장에서 너를 때려눕혀 줄 것이니 염려하지 말도록!”
이 시대의 복싱 규칙은 프라이즈 링(Prize Ring Rules)이 전부였다. 이 규칙에 의거하면 박치기, 손가락 찌르기, 발차기 그리고 허리 아래의 타격이 금지될 뿐이었다.
여기에 조일준이 제시한 규칙이 더해졌다. 1라운드를 3분으로 규정하며 휴식시간은 1분으로, 쓰러진 선수가 일어날 때 가지 10초의 여유를 더하는 정도였다. 마침내 시합이 시작되었다.
“글러브가 있어도 너는 돌주먹이잖아! 후려쳐서 놈을 때려 눕혀!”
“저 동양 놈은 가드도 안올리잖아! 저게 뭔 자세라고!”
팔을 양 옆으로 내리고 가볍게 몸을 위아래로 흔들며 스텝을 밟는 조일준과 달리 마티아스 그루시는 베어너클 특유의 자세를 취하고 몸을 굳건히 유지하였다.
하반신을 단단히 굳히고 주로 쓰지 않는 팔을 앞으로 내밀어 턱을 보호한다. 그리고 자주 쓰는 손은 언제나 여유를 두어 상대를 공격할 준비를 마치는 것이 이 시대의 복싱이었다.
상대가 견제를 위해 주먹을 휘둘렀으나 조일준은 가볍게 몸을 젖히며 이를 피했다. 몇 번의 헛손질 끝에 앞으로 치고 나가려는 순간 조일준이 움직였다.
102kg에 달하는 체중을 실은 주먹이 마티아스의 복근을 꿰뚫었고 다시 안면을 가격하였다. 상상조차 하지 못 한 충격에 마티아스의 몸이 새우처럼 굽어버렸다.
어퍼컷이 턱에 꽂히자 마티아스는 실이 끊어진 꼭두각시처럼 바닥에 널브러져 버렸다. 단 세 방에 결투를 끝낸 조일준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생도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저를 너무 우습게보신 것 같습니다. 다음 사람은 누구입니까?”
“나다! 마티아스 저 놈이 허우대만 좋았으니 제대로 된 결투가 아니야!”
글러브는 물론이요 헤드기어와 마우스피스까지 착용하는 다음 상대를 본 조일준은 코너에 기대 옅은 미소를 지었다. 이 싸움에서 자신이 질 이유는 피로 누적 외에 어디에도 없었다.
평범한 사람이 맨주먹을 가지고 싸워도 손뼈가 골절되는 경우가 자주 있다. 하물며 격투기를 배워 스텝을 이용해 체중을 더한 주먹을 날리면 샌드백을 상대로도 골절되는 경우가 있었다.
글러브는 이런 사태를 막는 보호구이자 무기나 마찬가지이다. 더욱 강력한 힘으로 주먹을 휘둘러도 손뼈가 골절되지 않으며 충격을 몸 깊숙이 전달할 수 있다. 물론 이 무기의 사용법을 숙지한 사람은 이 세상에 조일준 한 명이었다.
“이런 무거운 글러브를 끼고 휘두르는 주먹에 세 대를 맞고 자빠져? 덤벼봐!”
자신감이 넘치는 두 번째 상대는 주먹 몇 발을 휘둘러 조일준을 적중시켰지만 타격이 없었다. 베어너클을 익혀 온 몸의 힘을 전달하는 방법을 모르니 글러브는 이들의 족쇄가 되었다.
조일준은 몇 발의 잽으로 정신을 빼놓은 뒤 위빙(weaving)을 하며 주먹을 피했다. 상대가 다급해진 마음에 몸통을 비우자 다시 왼쪽 몸통에 묵직한 주먹이 꽂혔다.
간장치기(간 부분을 공격하는 기술) 대신 조금 더 안전한 위를 노렸지만 효과는 확실하였다. 배를 부여잡고 링 위에 구토한 상대가 침몰하자 조일준은 거리낌 없이 말했다.
“빨리 치우고 다음 사람 올라오십시오.”
이제야 흘러내린 땀을 유생이 건네준 수건으로 닦은 조일준이 대놓고 실망감을 드러내며 말하였다. 어느 새 그랑제콜에서 주먹 좀 쓴다는 생도들 모두가 이 대결에 참가하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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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의 복싱 규칙은 베어너클이었습니다. 회화로 남긴 기록은 다음과 같더군요.
온 몸을 이용해 주먹을 날리면 자신의 손뼈가 무너지니 하반신을 굳히고 상반신의 힘을 이용해 온 몸을 두들겼고 약점인 턱을 막았습니다.
주먹의 위력이 부족하니 서로 온 몸이 찢어지고 멍들어 피칠갑을 하고 누가누가 더 오래 버티나의 싸움이 되었다더군요. 89라운드를 싸운 시합도 있었다 합니다.
출처 : https://en.wikipedia.org/wiki/Bare-knuckle_boxing#/media/File:Cribb_vs_Molineaux_1811.j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