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명세자와 함께하는 조선 생활 - 32편
(3장 - 이간질)
윌리엄 4세와의 접견은 순조롭게 이루어졌다. 호위를 위하여 배정된 세 명의 군관을 포함한 우리 일행은 오전의 티타임을 윌리엄 4세와 함께 하였다.
“이번 차는 찰스 그레이 경의 추천을 받아 심혈을 기울여 배합한 차라네. 그 친구가 아삼의 홍차를 즐겨 마시는데 이번에는 홍삼을 차로 우려내 마시더군. 한 잔 받게나.”
“저에게 직접 차를 따라주시니 참으로 감사할 따름입니다. 공주님도 한 잔 받으시죠.”
서로 잔을 주고받았는데 예법에는 어긋나지만 참 좋은 자리가 아닐 수 없었다. 대놓고 불편한 기색을 드러낸 사람이 있기는 했으니 아서 웰즐리, 웰링턴 공작이었다. 그는 차에 부순 설탕을 몇 숟가락이나 넣으면서 말하였다.
“홍삼이 몸에 좋다고는 하는데 저는 그리 좋은 물건이 아닌 것 같군요.”
아예 홍삼차를 설탕 범벅 밀크티로 만드는 모습을 보니 미각이 정상이 아닌 것이 확실해 보였다. 13살에 불과한 빅토리아는 그 모습을 보며 쓰디쓴 홍삼을 들이켜고 인상을 찌푸렸다.
“알렉산드리나야. 네가 조만간 내 자리에 오를 것인데 더더욱 쓴 맛도 많이 볼 것이다. 사실 쓴 맛은 내가 보고 있지. 얼마 전 받은 선물은 참으로 감사할 따름이네.”
“아바마마께서 홍삼을 일천이백 근이나 보내셨다 하여서 저도 깜짝 놀랐습니다.”
순조는 자식사랑이 지극한 왕이어서 한 달에 한 번씩 편지를 보냈고 효명세자로 마찬가지로 답장을 보냈다. 심지어 얼마 전에는 어디서 났는지 몰라도 홍삼을 잔뜩 보내왔다.
일천 근은 효명세자가 자금으로 사용하라며 지급하였는데 요즘 광저우 홍삼 시세가 조금 떨어져서 운송비를 빼면 한 근당 은자 500냥이 되었다더라. 윌리엄 4세도 홍삼 100근을 선물로 받고 기분이 좋아서 말하였다.
“조선의 왕이 내 생각을 잘 아니 마음이 놓이는군. 내가 다른 것은 몰라도 우리 알렉산드리나가 성년이 되어 왕위에 오를 때 까지 이 목숨을 부지하려 하네. 가장 좋은 선물이 아닌가.”
“아바마마께서 그러한 심사를 보이지 않으셨으며 오로지 올바른 뜻으로 홍삼을 보내셨을 것입니다. 저는 오로지 아바마마께서 내리시는 은혜에 감읍할 따름입니다.”
윌리엄 4세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웰링턴에게 슬쩍슬쩍 따지고 들었다. 이 자리에 전직 총리로 억지로 끼어들었으니 미운 털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입헌군주제인 영국 입장이라 어디까지나 권고와 압박을 내리는 것이 전부였다. 자신의 말을 듣지 않는 웰링턴을 노려본 윌리엄 4세는 다음 일정을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티타임이 끝나고 알렉산드리나가 효명세자에게 선물 받은 갓을 쓰고 정원으로 달려가자 웰링턴이 본색을 드러냈다.
“조선의 왕자께 보여드리고 싶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 대영제국의 자랑이며 전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군대인 레드코트의 최정예를 엄선하였습니다. 이들의 화력시범을 보시지요.”
이미 정해진 일이니 우리도 웰링턴의 뒤를 따라 움직였다. 런던 근교의 평원에 도착하니 웬 러시아 억양이 묻어나는 인사가 들려왔다.
“러시아의 외교관 일원인 이바노프입니다. 조선의 왕자님께 접견을 청하였는데 하필 이런 자리에서 만나 뵙게 될 줄은 몰랐군요.”
조선의 북방에 위치한 러시아 대사에게 화력시범을 보여주는 꼴은 예의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효명세자는 잠시 고민하더니 웰링턴에게 따지듯이 질문하였다.
“러시아의 외교관이 방문하였음에도 굳이 이러한 자리를 마련하였단 말입니까?”
“그야 조선은 러시아가 남하하면 이를 막아내야 하는 국가이니 당연한 일 아닙니까? 듣자하니 이백여 년 전에 러시아의 선발대가 조선군에게 호되게 당했다더군요.”
나선정벌 이야기를 웰링턴에게 듣게 된 효명세자가 눈을 번뜩였다. 본심을 숨기고 칭찬 일색으로 접근하는 웰링턴의 속내를 효명세자가 알 리가 없었다.
“조선은 산지가 험하고 기후가 극심히 변하는 나라라 하였습니다. 그런 나라에서 훈련을 받은 병사들은 산 속에서 누구보다 강할 것이 분명하지요. 그래도 결국 군대는 벌판에서 회전(會戰)을 벌일 힘이 있어야 합니다.”
가장 강력한 부대 중 하나인 제2 보병사단의 전열보병이 영국군 특유의 붉은 군장을 차려입은 채 도열하였다. 효명세자는 나를 통해 나폴레옹의 몰락에 대해 들었으니 흥미로운 표정으로 이를 지켜보았다.
반면 러시아 대사는 대놓고 무력을 드러내는 포함외교를 실시하여 불편한 기색이었다. 웰링턴은 도열한 병사들을 보며 단상으로 내려가기 전 다시 이간질을 시작하였다.
“러시아 대사도 우리 영국군의 위엄을 확인하시오. 아직도 구식 화승총을 쓰느니 나 같으면 브라운베스(brown bess) 머스킷을 대량으로 구매해서 병사들을 훈련시키겠소.”
“굳이 그럴 필요까지 있겠습니까. 저희도 머스킷을 만들 줄 알고 있습니다.”
“품질에서 차이가 나는데 인접국이 머스킷을 대량 구매해도 같은 소리를 할 수 있는지 두고 보자고. 조선의 왕자께서 보기 편하도록 제가 직접 지휘하겠습니다.”
웰링턴이 말에 올라 대열 사이로 끼어들었고 러시아 대사는 효명세자와 나를 번갈아가며 초조한 눈빛으로 지켜보았다.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고 있으니 나지막하게 말했다.
“세자저하께서는 태연한 표정을 유지하고 절대 당황한 기색을 보이지 마시옵소서. 다른 분들도 놀랄 것이니 배에 힘을 꽉 주고 겁에 질리면 아니 됩니다.”
“무엇이 대단하다고 그러는가. 기껏해야 세자저하께서 새로 고치신 어영청과 훈련도감보다 나은 수준이고 금위영과 견줄 수 있겠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였지만 앞으로 벌어질 일을 알고 있으니 안심할 수 없다. 이 자리에 참석한 군관들은 나름 금위영에서 엄선하여 기병 전술과 사격에 능숙한 사람들이니 더욱 많은 것을 알 수 있으리라.
- 부대! 포격 대응!
전열보병이 웰링턴의 명령 한 마디에 바닥으로 납죽 엎드렸다. 웰링턴의 명령을 들은 포병부대가 저 멀리서 포탄을 넣지 않은 훈련용 대포를 쏘았고 효명세자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말하였다.
“저렇게 하면 포격을 피할 수 있기는 하지. 대오를 유지하고 포화를 맞았다면 한 발에 열댓 명이 죽었을 것인데 엎드리면 피해가 적을 것일세.”
지금 동양의 군대로는 저런 세심한 명령을 내릴 수 없었다. 명령 전달속도를 생각하면 포격이 쏟아질 무렵 뒤늦게 포복을 실시하다 피해만 입으리라.
효명세자의 놀라움은 시작에 불과했다. 웰링턴은 계속 명령을 내리며 부대를 자기 마음대로. 마치 의지를 가지고 움직이는 붉은 진흙처럼 뒤흔들었다.
- 부대! 후퇴 이후 반전!
- 부대 방진 구성! 좌측으로 회전! 정지!
아예 모르는 사람들만 있었다면 넘어가겠지만 조선은 이미 어영청과 훈련도감을 개편하려 시도한 전적이 있어서 어느 정도 비교할 수 있으리라. 마침내 사격이 실시되었다.
- 부대! 선형진 구성으로 사격 준비!
“저게 말이나 되는 일인가? 전열이라 하면 여러 겹으로 구성하여 막아내야 하거늘 고작 두 겹의 병사로 화력을 쏟아낸다고?”
“이론대로라면 저러한 방식대로 조총을 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일이옵니다. 다만 한 귀퉁이라도 무너지는 날에는 옆으로 치고 들어온 적들로 인하여 모조리 격멸당할 것이니 쉽사리 할 수 없는 행동이옵니다.”
수많은 군대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영국 전열보병의 전술 씬 레드 라인(Thin red line)이 펼쳐졌다. 평원을 두 열의 얇은 벽으로 가로지른 영국군은 장전을 마쳤고 웰링턴의 목소리와 함께 사격이 실시되었다.
- 대열! 좌에서 우로 사격 실시! 오 회 연속 사격 실시!
다른 나라 군대에서는 엄두도 나지 않는 실탄 사격 훈련을 거듭한 레드코트는 모든 화력을 언덕을 향해 투사하였다. 희뿌연 흑색화약의 연기가 치솟아 올랐지만 그 속에서 계속 사격이 이루어졌다.
“이 마귀 같은 놈들은 초석이 땅바닥에서 솟아나나. 첫 탄환은 미리 장전해두었다 쳐도 나머지 네 발을 쏘는데 사십칠 초가 걸렸군.”
훈련 정도를 가늠하던 러시아 대사가 나를 흘겨보며 굳이 영어로 푸념을 늘어놓았다. 러시아 제국군도 레드코트를 경원(敬遠)시 하는 입장이니 당연한 일이었다.
러시아군은 좀 나은 형편이지만 조선군은 조총을 장전하는데 1분 정도가 소모되었다. 반면 레드코트는 장전 이후 사격시간이 평균 12초에 불과하였다.
규격화된 화약과 탄환 그리고 머스킷은 꽂을대로 탄환을 장전할 필요도 없는 탭 로딩(tap loading)을 실시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군관들은 억지로 용기를 내려는지 효명세자에게 당당하게 말하였다.
“화포를 빠르게 쏘는 것으로 훈련을 한 것이 분명하옵니다. 화살을 아무리 많이 날려도 적중하는 것은 한 줌에 불과하듯이 저들의 탄환도 마찬가지일 것이옵나이다.”
“내가 보기에는 저들이 조준을 하고 쏘는 것 같은데. 세 번째 탄환부터는 연무(煙霧)가 짙어져서 효과가 없겠지만 처음 두 발은 앞에 있는 적을 의식하고 쏜 것 같군.”
이후 각종 진영을 보여주며 사격을 실시하였고 그 때마다 효명세자와 군관들의 표정이 어두워지다가 억지로 밝아졌다. 웰링턴은 대열에서 나와 우리에게 돌아와 말하였다.
“아직 보여드릴 것이 남았습니다. 이번에는 조선의 왕자께서 직접 움직여야 하는 일이니 저를 따라서 내려오시지요. 러시아 대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렇게 당당한 군대를 상대로 무얼 할 수 있는지 궁금하구려.”
아직 표정을 유지하고 있는 효명세자는 억지로 태연한 모습을 보이며 말에 올라 웰링턴을 따라왔다. 웰링턴은 지휘봉을 효명세자에게 내어주면서 여기까지 데려온 목적을 설명하였다.
“스무 명을 아무렇게나 골라 이들의 사격 솜씨를 과녁을 통해 눈으로 확인하시지요. 러시아 대사도 스무 명을 고르면 어떠하겠나.”
효명세자는 말을 타고 대열을 돌아보더니 눈썹도 까딱하지 않고 부동자세를 유지한 레드코트를 체격과 외모에 상관없이 아무렇게나 스무 명 골랐다.
러시아 대사는 머스킷의 반동을 견디기 힘든 가급적 체격이 작은 병사들을 선별하였는데 웰링턴이 미소를 지었다. 마흔 명의 병사들은 따로 배정된 표적 앞에 서서 도열하였다.
“목표는 백오십 야드(약 137m)이다. 열 발을 쏘는데 십 분을 줄 것이니 침착하게 조준사격을 하도록. 조준사격 열 발 실시!”
이번 사격은 심혈을 기울여 조준한 사격이라 이전처럼 흑색화약의 연기로 주변이 메워지지 않았다. 다만 비가 내린 다음날이라 불발탄이 조금씩 생겨났다.
“사백여 발을 쏠 수 있었는데 모두 합치니 이백오십 발 가량이 명중하였군. 대단한 일이오.”
내가 알기로 영국군 전열보병의 명중률은 정예병 기준으로 175야드에서 명중률 75%에 달하였는데 거의 일치하였다. 물론 조준사격 기준이라 대열을 이룬 연속 사격에서는 명중률이 떨어지리라.
이걸 감안하여도 조선 기준으로 레드코트는 최정예를 넘어서서 견줄 수준이 없었다. 군관들은 나에게 눈치를 줘서 자신들의 대화를 번역하지 말아달라고 신호를 보내고 평가하였다.
“처음에는 저 얇은 대형을 기병으로 무너트릴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였는데 아니었사옵니다. 약 일백이십 보에 달하는 거리에서 과녁에 육 할 이상을 명중시킨다면 기병은 모조리 죽어나갈 것이옵니다.”
“신 또한 같은 마음이옵니다. 저들이 기력이 쇠하고 군기가 빠져있는 틈을 타서 움직이면 모를까 대열에 돌진하는 기병들이 첫 대열부터 무너져 모조리 붕괴할 것이옵니다.”
자신이 심혈을 기울여 개선한 어영청과 훈련도감이 폐물(廢物)수준이 되어버린 효명세자가 심각한 표정으로 병사들을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웰링턴이 여기에 불을 질러버렸다.
“왜 이리 심각한 표정이십니까. 생각하여 보니 조선은 산이 많고 길이 좁아 저런 부대가 마음대로 활보할 수 없는 곳이 많기는 하겠군요. 제가 실수를 하였으니 용서하여 주시지요.”
“용서라 할 것 까지 무엇이 있겠소. 아무리 산이 많아도 평야가 있으니 사람이 사는 나라요.”
“말씀을 들으니 더욱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러하니 제가 제안을 하나 하겠습니다. 대영제국이 자랑하는 브라운베스 머스킷을 삼만 정 정도 구매하시는 것이 어떠합니까?”
러시아 대사의 표정이 일그러졌고 웰링턴은 대사를 바라보며 입술을 뒤틀었다. 그러더니 군관들을 살펴보며 흥미로운 표정으로 지켜보았다.
내가 그렇게 말했는데도 군관들은 웰링턴과 눈조차 마주치지 못 하였다. 이들의 태도를 통해 조선군이 익숙한 산악 전투는 몰라도 평원에서는 싸울 수 없다는 사실을 유추한 웰링턴은 망설이는 효명세자에게 진지한 표정으로 권고하였다.
“저희 레드코트가 사용하는 것과 동일한 최신품 브라운베스를 한 정당 2파운드 5실링에 판매하겠습니다. 다만 대량으로 구매하시니 1파운드 15실링으로 가격을 낮추겠습니다.”
나조차도 가격으로 뭐라 할 수 없었다. 가격 자체는 조선에서 통용되는 은자 기준으로 9냥 정도이니 신품 머스킷치고는 오히려 값싼 편이기는 하다.
더군다나 순조가 인삼 일천 근을 효명세자에게 보냈으니 인삼 판매가격의 절반만 투자해도 즉석에서 구매할 수 있었다. 다만 초조한 눈빛을 보내는 러시아 대사가 문제였다.
“이거 참으로 좋은 제안이구려. 잠시 생각을 해 보겠소.”
효명세자도 지금 상황을 알아차리고 섣불리 말을 하지 못 하였다. 삼만 정에 달하는 머스킷을 구매한다면 주변에 화력을 투사해 이 손해를 메꿔야 하는데 목표는 청나라 영토를 드나드는 러시아 개척단이 되리라.
그렇다고 거절할 수도 없었다. 웰링턴이 군관들의 표정을 읽고 조선에 대규모 회전을 벌일 정예군이 없다는 사실을 알아차렸으니 무력으로 압박을 실시할 것이 분명했다. 그러니 내가 나서서 병사에게 질문을 하였다.
“머스킷이 왜 발사되지 않은 것인지 궁금하군. 듣자하니 모두 표준 공정을 거쳐서 만들어졌다 하는데 자네 것은 물론이고 간혹 발사되지 않은 것이 있지 않나.”
“평상시에는 작은 불똥으로도 점화가 되어서 몰랐지만 습기가 올라와서 불똥이 더욱 작아졌기 때문입니다. 이런 단점을 제외하면 브라운베스는 최고의 무기이니 꼭 사용하시지요.”
예상대로 웰링턴은 내 움직임을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아직도 효명세자의 답을 기다리고 있는 척 가만히 있던 웰링턴은 몸을 돌려 대놓고 나를 견제하듯 말하였다.
“어차피 비가 내리는 날에는 머스킷을 쓸 수 없지. 이는 큰 문제가 아니라네.”
“조선은 장마라 하여 6월부터 9월까지 이틀에 한 번 꼴로 비가 내립니다. 이렇게 습기가 많은 시기에 주력군의 병기가 무용지물이 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웰링턴은 내 말을 듣더니 피식 웃으며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으로 말하였다.
“변명 한 번 거창하게 하는군. 우리가 인도는 물론이고 버마(미얀마)와도 전쟁을 벌였는데 우기(雨期)라 하여도 매치 락(화승총)보다 부싯돌을 사용하는 브라운베스를 사용했지. 화승이 물에 젖어 스스로 꺼지는 일은 모르고 있나?”
“더욱 좋은 물건이 있는데 이를 보여주시지 않아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퍼커션 캡이라 하여 어떠한 상황에서도 격발되는 기술이 있다 하였지요.”
웰링턴이 이 질문까지는 예상하지 못하였지만 히죽거리는 표정을 보니 내가 함정에 빠졌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1807년 발명된 퍼커션 캡은 뇌산수은, 조선시대의 말로는 뇌홍(雷汞)을 이용한 격발장치이다.
부싯돌이나 화승 같은 격발장치가 아닌 아예 작은 폭약이 터지는 구조이기에 물에 젖은 상황이 아니라면 무조건 격발되고 명중률도 상승하는 효과가 있다. 다만 가격이 문제였다.
“있기는 하지. 다만 아직 실전에 적용되지 않은 기술을 논하다니 자네의 지식이 대단하군.”
“조선의 기후는 다변(多變)합니다. 그러하니 장마철에도 겨울의 칼바람도 견딜 수 있는 브라운베스 머스킷이 아니라면 세자저하께서는 구매하지 아니할 것입니다.”
“옳은 말이야. 다만 점화약으로 쓰이는 뇌홍 가격을 알고 있을 텐데? 부싯돌이 빠지니 총 자체의 가격은 떨어지겠지만 한 발을 쏠 때마다 재정이 날아가는 소리가 들릴 걸세.”
“그러하니 양을 줄여 일만 정만 구매하겠습니다. 조선은 나라를 지킬 역량만 있으면 충분하니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효명세자는 내 제안을 듣고 만류하려 하였지만 일준이의 이야기를 하니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하였다. 러시아 대사도 웰링턴과 나의 대화를 듣고 안심하는 눈치를 보였다.
웰링턴을 비롯한 영국 관료들은 조선의 기술이 뒤쳐진다 생각하고 있었다. 최신 기술인 뇌홍을 조선에서 생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으리라.
일준이가 제법 많은 물건을 만들어 냈지만 아직 화학자로 두각을 드러내지 않았으니 더더욱 얕잡아 보리라. 웰링턴은 즉석에서 계약을 체결하며 말하였다.
“처음 총을 보낼 때에 한 정마다 훈련용으로 퍼커션 캡 스무 개를 동봉하여 보내겠습니다. 이후 퍼커션 캡은 알아서 구매하시거나 매치 락으로 개조하시던가 하시지요.”
웰링턴은 뇌홍 때문에 화약 가격이 세 배로 들어가는 퍼커션 캡 머스킷을 사용하면 아예 조선을 기반부터 쪽쪽 빨아먹을 수 있으리라 생각한 것 같았다.
새로운 패턴의 머스킷의 생산에 시간이 걸린다는 말을 남긴 웰링턴은 극도로 만족하여 돌아갔고 러시아 대사는 나에게 감사하다고 인사를 하고 돌아갔다.
피로한 몸을 이끌고 숙소로 돌아가니 프랑스에서 여러 통의 편지가 도착했고 마침 일준이의 편지도 있었다. 편지를 뜯어보니 내가 기다리고 있던 내용이 있었다.
[프랑스어 습득을 완료하고 입학에 성공했다. 몇 명 박살내고 왕따가 되었는데 상관없고 이제 그랑제꼴을 사로잡을 차례다.]
내가 영국 정부의 수작을 막아내는 동안 일준이가 활약할 차례이다. 아마 몇 달 이내에 그랑제꼴 교수들도 일준이의 아래에서 기술을 받아먹으려 애쓰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