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명세자와 함께하는 조선 생활 - 31편
(3장 - 문호(文豪))
위대한 문호(文豪)이며 전 세계적으로 명성을 떨친 찰스 디킨스도 지금은 고작 속기사로 일하며 사설을 내놓는 애송이에 불과하였다. 그러니 첫 만남부터 호감을 살 준비를 해 두었다.
“세자저하께서 신으실 구두는 물론이고 나머지 구두들도 다 내어주시지요. 제가 영길리에 살면서 잠시 구두닦이 일을 해서 광이 번질번질하게 날 수 있도록 잘 닦습니다.”
좋은 것만 보기 시작한 사절단 일행들은 점차 모습이 변해갔다. 신발이 헤졌다고 구두를 사들이며 옷은 한복이었지만 새로 주문하여 입기까지 하였다. 당연히 구두가 내 앞에 쌓였다.
“군대에서 신형 전투화에 광을 낼 때는 미친 짓 같았는데 이럴 때에는 도움이 되네.”
군대에 있을 때 참 이해할 수 없는 짓을 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내 군번은 고어텍스 재질의 신형 전투화를 지급받았는데 여기에 굳이 광을 내려는 미친 짓을 하였다.
광이 나는 재질이 아니라 훈련은커녕 연병장만 뛰어도 광이 모조리 사라지는 일이 벌어졌다. 광이 안 나는 전투화를 죽어라 닦으라고 욕을 하던 병장을 떠올리며 구두에 광을 냈다.
“한센 박님 계십니까? 손님이 찾아 왔습니다!”
“알고 있으니 들어오라 하게!”
매캐한 구두약 냄새가 코끝으로 올라왔지만 디킨스를 맞이하려면 적당한 모습을 보이리라. 멀리서 마차에서 내린 디킨스가 성큼성큼 걸어왔는데 아직 애송이라 수염도 제대로 기르지 않은 몰골이었다.
“찰스 존 허펌 디킨스(Charles John Huffam Dickens) 인사를 드립니다. 한센 박이라는 분이 저를 찾아서 하루 휴무를 내고 도착했는데 왜 구두를 닦으십니까!”
그는 어린 시절 구두닦이로 일했던 기억이 떠올랐는지 표정이 찌푸려졌지만 내가 광을 낸 구두를 보더니 눈썹을 씰룩거렸다. 이를 유들유들하게 받아넘기듯이 말하였다.
“아, 조금 일찍 왔구려. 내가 재주가 좀 있어서 세자저하와 사람들의 구두를 닦고 있었는데 손님에 대한 예의가 아니지. 어서 손을 씻고 올 테니 조금만 기다리시오.”
“재주라 하셨습니까? 구두약 냄새를 보니 아침부터 하루 종일 구두를 닦으신 것 같은데 저도 함께 하겠습니다.”
구두약 냄새가 진동하는 것은 불광을 내려고 불을 붙였기 때문이지. 디킨스는 땅바닥에 걸터앉아 자연스럽게 구두를 닦더니 윤기가 올라오는 표면을 보면서 말하였다.
“어린 시절에 죽어라 구두약을 만들고 이를 광고한다고 길거리에 나가 구두를 닦았는데 아예 몸에 배어버렸군요. 제가 뺨을 때리러 왔는데 다 닦고 한 대 때리겠습니다.”
“마음대로 하시오. 그나저나 손놀림이 예사롭지 않은데?”
“한센 박이야 말로 손놀림이 날렵하시군요. 거기에 구두약에 불을 붙이는 것은 누구에게 배우신 겁니까? 침은 또 왜 뱉으십니까?”
“이게 내가 배운 방법이니 그쪽도 배운 방법을 쓰면 좋지 않겠소?”
군 생활을 하는 동안 매일같이 광도 안 올라오는 고어텍스를 닦은 나와 찰스 디킨스의 실력은 거의 같았다. 한 시간이 지나기도 전에 말끔히 광이 올라온 구두가 쌓였고 디킨스는 내 볼에 구두걸레를 문지르며 말했다.
“뺨 한 대를 때리려 했는데 손의 힘이 풀려버렸으니 구두약이나 드시지요.”
“손맛 대신 구두약 맛이구려. 그럼 이거나 받으시오!”
디킨스의 얼굴에 구두걸레를 집어던졌지만 그는 고개를 휙 젖혀 피해버렸다. 서로 낄낄거리며 들어가니 마침 군관들과 대화를 나누던 효명세자가 우리를 보고 말하였다.
“영길리에 건너오고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벗을 만들게 되다니. 만나게 되어 반갑소.”
“조선의 왕자님을 뵙습니다. 이 저택에 저같이 누추한 사람이 방문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찰스 디킨스에게 머나먼 동방에서 건너온 조선의 왕자는 글의 소재가 될지도 몰랐다. 그러나 아직 신문기자도 아니고 고작 속기사에 불과한 사람이 취재할 수는 없으리라 생각하고 자신의 소개만 간략하게 하였다.
“부끄러운 일이 되었지만 한센 박의 요청으로 잠시 대화를 나누러 오게 되었습니다. 제가 부족한 재주를 보여드릴 수 없으니 욕심을 참겠습니다.”
“부족한 재주라 하였는가? 박현상이 알고 지내는 사람은 모두 출중한 사람 외에는 없네. 그런 점에서 자네의 재주를 알아차린 것이 분명하군.”
“세자저하께서 옳은 말씀을 하셨사옵니다. 이 친구는 시성 두보(杜甫)와 견줄만한 자질을 보이고 있기에 신이 친해지려 하였사옵니다.”
“그것 보게. 자네의 재주가 언제쯤 드러날지 모르지만 여기 머무는 동안 편히 있게.”
두보가 누구인지는 몰라도 동방의 위인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린 디킨스는 내 옆구리를 찌르며 칭찬을 그만 하라 하였다.
나에게 배정된 방에 간단한 다과상이 놓이고 차는 조선에서 가져온 홍삼차를 내어주었다. 디킨스는 난생 처음 맛보는 홍삼 맛에 인상을 찌푸리며 말하였다.
“대체 저를 왜 보려고 하신지 모르겠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려서 편지 글귀가 너무 마음에 들어서 응하였으나 저는 그리 잘난 사람이 아닙니다.”
“사설과 답신을 보니 변호사 아래의 속기사로 일하시면서 제법 많은 것을 알고 계시는 것 같더군요. 이를테면 아편의 위험성이나 빈민들의 생활에 대해서요.”
“그야 제 생활이 험난한 편이어서 알고 있었습니다. 물론 정말로 험난하였다면 글을 깨우치지도 못 하고 지금쯤 길바닥에서 뒹굴고 있을 겁니다.”
찰스 디킨스의 인생사에 대해 듣게 되었는데 그는 부모가 조금 잘 살아서 어린 시절 교육을 받은 덕을 톡톡히 보았다. 이후 아버지가 채무로 파산하자 그의 신세도 무너져 내렸다.
학교를 다니다 12세부터 구두공장에서 일하여 갖은 고생을 하고 가까스로 주변의 도움으로 다시 학교를 다니고 여기까지 올라왔다더라. 그는 한숨을 푹 쉬고 말하였다.
“그나마 제가 열 시간을 일 한 것은 아버지가 예전 해군 경리로 일하신 덕분입니다. 그렇지 않은 친구들은 열네 시간을 일 하고도 급료를 저보다 못 받았지요.”
조선은 다 같이 못 사는 형편이지만 영국의 빈부격차는 전 세계에서 최고를 달린다. 아마 중산층에 속하다 나락으로 떨어진 인생사 때문에 더욱 심한 격차를 느꼈으리라.
자신의 이야기를 마친 디킨스는 이제 내 이야기를 듣고 싶다는 듯이 내 속내를 캐 묻기 시작했다.
“그럼 이 보잘 것 없는 속기사에게 뭘 원하시는지요. 제가 미천한 신분에서 조금 평범한 삶을 살게 된 경험담? 아니면 런던에 비일비재한 송사(訟事)에 관련된 이야기? 무엇입니까?”
“런던의 밑바닥이지요. 바닥 아래에는 지하실이 있는 법이 아닙니까.”
내가 조금 돌려 말했지만 런던의 빈민가를 보겠다는 제안을 하니 디킨스는 금세 표정이 누그러졌다. 그리고 잠시 생각을 하더니 힘든 일이라는 듯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어린 시절 알게 된 사람이 여럿 있지만 대부분이 죽어나가서 소개하려고 해도 제법 시일이 걸릴 일이니 당장은 할 수 없습니다. 궁금한 것이 있는데 그걸 왜 보시려 합니까?”
“그야 영국에서는 보기 좋은 것만 보여주고 즐길 수 있는 것만 알려주기 때문이지요. 사절단 사람들이 이런 일을 계속 겪으면 어떻게 되겠소? 이는 거짓으로 가득 찬 기만행위요.”
찰스 디킨스의 문학은 이 시대의 영국에 팽배한 부조리와 빈곤층의 험난한 인생 그리고 좌절에 대하여 소재를 삼았다. 내가 설명한 영국의 태도는 그에게 있어 최악의 접대 방식이리라.
모든 것을 보여주겠다고 공언을 하였으니 빈민가도 한 번 쯤은 방문해야 하는 법이다. 디킨스는 내 말을 듣고 잠시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
“이 나라는 거짓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아편팅크를 먹는 사람들이 죽어나가는데도 독성이 없고 개인의 인내심 부족으로 인한 의존성이라 말을 하지요. 이는 시작에 불과합니다!”
그나마 휘그당의 찰스 그레이가 총리가 되어서 조금 나아진 형편이지만 거기서 거기였다. 온갖 부조리를 알고 있는 찰스 디킨스는 얼굴을 시뻘겋게 물들이고 열변을 토했다.
“구빈원이 이제는 이스트엔드로 옮겨졌으니 더 큰 비극이 시작될 겁니다. 그래놓고 부호들은 자신의 물건을 세우려고 홍삼을 먹고 있지요! 이런 말을 누가 듣기나 한답니까?”
“머나먼 나라에서 온 사절단을 자신의 입맛대로 만들려고 나라 전체를 속이고 있는데 말을 한다고 듣기나 하겠소? 그러니 당신의 힘이 필요하게 되었지.”
하루 온종일 속기사로 일하는 디킨스를 위해 효명세자에게 받아둔 금화를 건네주었다. 100파운드의 돈을 받게 된 디킨스는 눈을 굴렸고 나는 문호의 각성을 위해 말하였다.
“이 돈은 취재비용이오. 지금 영국 정부에서 우리 사절단에게 부리는 수작을 막아낼 작정이니 이스트엔드에서 사람들이 가장 많이 죽어나가는 시기에 방문할 거요.”
“그때까지 자료를 수집하고 인맥을 만들어 두어 안전하게 모시라는 말씀이군요. 대체 몇 명이나 되기에 이렇게 많은 돈을 주십니까?”
“그야 여기에 파견된 사절단 이백이십이 명 전원이오. 조선 사절단이 이스트엔드를 방문하여 극도로 분노하였다. 이런 기사가 퍼지면 영국 정부도 조금은 움직일 것 같은데 아예 이번 기회에 신문사를 만들어 보는 것은 어떻겠소?”
삼정의 문란에 시달리는 조선의 백성들은 삶을 힘겹게 이어가고 있다. 그나마 삶을 이어갈 수는 있지만 영국 빈민가는 이것보다 훨씬 심각해서 삶 자체가 죽음과 함께 하고 있다.
효명세자를 비롯한 사절단은 이런 몰골을 보고 경악할 것이다. 당연히 이 사실을 알려준 디킨스를 칭찬할 것이고 그의 후원자가 될 가능성이 높았다.
자신이 어느새 신문사 사장의 자리에 오르게 될 것이라 상상하던 디킨스이지만 입을 꾹 다물고 냉정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제안을 하였다.
“속내를 알 길이 없으니 술이나 한 잔 하지 않겠습니까? 잘 아는 술집이 있는데 거기서 서로 진탕 취해서 속내를 모두 드러내 보아야겠군요.”
“원하던 바요. 어서 안내하시오.”
처음에는 디킨스가 나를 경계하는 것 같았지만 술을 마셔보니 아니었다. 그는 내 앞에 놓인 잔에 브랜디를 가득 따르고 자신의 잔에도 가득 따르더니 잔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살 길을 찾다 소매치기가 된 소년을 위하여 건배.”
“공장에서 팔을 잘려 거지가 된 노동자를 위하여 건배.”
서로 잔을 주고받으니 다시 브랜디가 따라졌다. 작은 잔인데다가 내가 술이 센 편이지만 순식간에 술기운이 올라올 정도로 잔이 오갔다. 그는 자신의 속에 있던 울분을 털어놓았다.
“이 개놈들이······. 아니 글쎄 한슨 팍 들어보시오. 어린 시절에 함께 일하던 구빈원 출신 아이가 있는데! 그 아이가 죽을 한 그릇! 한 그릇만! 더! 달라고 했다가 뺨을 맞고 죽었소!”
영국에서는 이러한 일이 정상이고 지극히 합당한 일이라 생각하였다. 몇몇 깨어있는 사람들이 빈민을 구제하여도 힘이 부치기에 이르렀다.
이런 상황에서 먼 나라에서 온 사람이 이런 부조리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한 것이다. 디킨스는 자신의 속에 담고 있던 울분을 털어놓으려는 듯 술을 마셔댔다.
술에 취한 채 흐느적거리는 몸으로 내 뺨을 때렸다. 사실 때린 것도 아니고 건드리는 것에 불과했지만 경험이 담겨 있는 일이리라. 그는 어느 새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죽 한! 그릇 더 달라 하면 뺨을 때리는 놈은 내가 쓸 소설에 꼭 넣을 거야. 아무렴 넣어야 하고말고. 그러고 보니 조선에서는 빈민들이 어떻게 사는지 궁금한데.”
“그야 비슷하게 살기는 하더구려. 간혹 착취를 일삼는 지방관 아래의 사람들은 스스로를 거세하여 세금을 덜어내려 하지. 참으로 슬픈 일이오.”
“그거 참 비극적이네! 스스로를 거세하는 사람을 위해 건배!”
삼정의 문란이 정상으로 돌아오면 사라질 일이지만 엄연히 현실이었다. 다시 술을 마신 디킨스는 딸꾹질을 하며 주변을 돌아보다 서로의 잔에 술을 채우며 말했다.
“근데 말이야. 조선이라는 나라가 이 대영제국의 입맛대로 돌아가면 말이야. 결국 식민지가 되겠지? 내 말 틀리지 않지?”
“당신의 염려대로 그렇게 안 되려고 노력하고 있소.”
“아니지 아니야. 내 말 끝까! 지! 드러봐. 조선 사람들이 이스트엔드 빈민가 사람들보다 못 한 신세가 될 거잖아! 내 말 맞잖아! 그럼 인도 식민지도 같은 꼴인가?”
본국보다 식민지가 잘 산다면 말이 안 되는 소리이다. 디킨스는 술에 취해서 허우적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내 팔을 잡고 술집 문을 가리키며 주정을 부렸다.
“내 친구 한센! 야! 인도 가자! 인도 가서 카레도 먹고!”
“그렇게 가고 싶으면 나중에 배를 타고 직접 가시오.”
휘청거리며 뻗어버린 디킨스는 엉엉 울면서 팔다리를 허우적거리다 술에 곯아떨어졌다. 그를 들쳐 업고 마차에 태워 빈 방에 재우니 다음날 점심이 되어서야 일어났다.
“어제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백 파운드를 받은 것 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필름이 끊겼으니 차라리 다행이리라. 아직 대문호가 아닌 23세의 젊은 청년인 디킨스를 위해 모든 말은 하지 않고 꼭 필요한 말만 해 주었다.
“속내를 털어놓고 대화를 나누지 않았소. 술이 약한 것 같으니 과음을 하지 마시구려.”
아리송한 표정의 디킨스였지만 자신의 속내가 뭔지 알고 있으니 그저 고개를 끄덕이기만 하였다. 그의 마음속에 담긴 진실을 알고 있기에 배웅해주며 말하였다.
“일이 험난하게 되어도 우리가 드나들 경로는 꼭 마련해 주시구려. 간절히 부탁하겠소.”
“받은 돈이 있는데 당연한 일이지요. 어제의 일은 기억나지 않지만 가슴 속이 편안해진 것 같습니다. 참으로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야 홍삼차를 마신 덕분이 아니겠소. 살펴 가시오.”
디킨스의 말대로라면 빈민가의 사람들이 가장 많이 죽어나가는 때는 안개가 심해지고 매연이 거세지는 11월 무렵이라더라. 앞으로 6개월 정도 남았으니 영국이 수작을 부리기에 딱 좋은 시기였다.
얼마 뒤로 정해진 윌리엄 4세의 접견과 관련한 서신도 도착하였다. 이전 총리이자 1834년에 총리가 될 아서 웰즐리가 효명세자에게 서신을 전해주었다.
[윌리엄 4세 폐하께서 버킹엄 궁전으로 여러분을 초대하셨으니 방문에 응해주십시오. 다만 번잡한 일을 피할 수 있도록 최소한의 인원만 방문하시길 부탁드립니다.]
[또한 윌리엄 4세 폐하를 접견한 이후에도 일정이 있습니다. 러시아의 대사가 조선의 사절단을 접견하기를 원하여 저 웰링턴 공작 아서 웰즐리가 이 자리를 마련할 것이며 보여드릴 것도 있습니다.]
아마 전열보병의 훈련을 보여주고 병장기를 보여주며 조선의 이권을 강탈할 야욕을 드러내겠지. 언젠가는 제국주의자의 선조 격인 웰링턴 공작이 움직일 줄 알았는데 잘 된 일이다.
프랑스의 화려한 연회에 초대 받아도 영국 요리가 아니면 관심을 보이지 않는 최악의 식욕을 자랑하는데다 나폴레옹을 이긴 장군이라니. 그를 상대할 방법도 고민을 좀 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