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명세자와 함께하는 조선 생활 - 23편
(2장 - 교역 (2))
박현상과 조일준 그리고 박규수는 로드 암허스트 호에 탑승한 동인도회사 직원들과 대화를 나누고 장계를 올렸다. 닷새 뒤 도착한 장계를 확인한 효명세자는 성정각(誠正閣)에서 이를 대소신료들과 논의하였다.
“박규수가 보내온 장계에 의하면 박현상과 조일준 둘이 대화를 나누어보니 답이 나왔소. 이들은 교역을 위하여 머나먼 천축에서 당도한 이들이며 서학(西學)에 관한 이야기도 있더구려.”
서학이라는 말이 나오자마자 예조판서 이지연의 표정이 변하고 눈이 가늘어졌다. 효명세자는 예상하였다는 듯이 이지연을 바라보며 말하였다.
“칼 귀츨라프라 하여 의술을 배운 서학 승려가 있었지만 조일준이 엄중히 경고하였소. 이 나라에서 서학이 금지되어 있다 하니 통교를 한 이후 허락을 받을 것이라는 답을 하더구려.”
“역시 조일준이옵니다. 모든 일을 순리대로 처리하니 제 마음이 놓였사옵니다.”
박현상이 지속적으로 실시한 경연은 서양에 대한 많은 정보를 알려주었다. 얼마 전 조정으로 돌아온 서유구를 제외한 대소신료들은 정보가 틀림이 없음을 알아차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혹여나 박현상과 조일준이 거짓을 논하여 멋대로 일을 처리할 수 있으니 한문으로 필담을 나누어 박규수가 재차 확인하였소. 말과 행동이 일치하니 큰 문제는 없을 것 같소.”
“하오면 교역을 허가하실 것이옵니까?”
“저들이 창칼을 앞세워 이 나라를 침범하려 하였다면 모르지만 교역을 논하니 받아들일 거요. 다만 이 나라를 얕잡아 보고 헛된 마음을 품으려 할지도 모르겠구려.”
무력으로 압박을 가하면 반발이 올라올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이 나라의 국력을 보여줄 필요성이 있었다. 효명세자가 잠시 고민하자 병조판서 홍석주(洪奭周)가 의견을 내놓았다.
“장연 현감 이원율의 장계에 의하면 첫 만남에서 크게 손상된 대호(大虎)의 가죽을 선물로 주었다 하였사옵니다. 이들이 호랑이를 두려워 할 것이니 착호군(捉虎軍)을 보내시옵소서.”
훈련도감과 어영청의 병사들의 장비를 새로 지급하고 훈련을 실시하였으나 부족함을 느끼는 효명세자였다.
최정예에 가까운 착호군이라면 평범한 병사들과 견줄 수 없는 기강을 보여주리라. 삼백 명을 호위로 동원하라는 말을 한 효명세자는 깊게 한숨을 쉬고 다음에 벌어질 일을 이야기하였다.
“내가 상업에는 지식이 부족하지만 임상옥이 논하기를 처음부터 모든 수를 보여주는 것은 아니라 하였소. 박현상과 조일준을 역관(譯官)으로 두고 임상옥을 앞세우겠소.”
“하오나 심히 염려할 일이 있사옵니다. 이들이 아편을 청나라에 팔아 이미 도탄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하였사옵니다.”
“그러하니 조약(條約)을 맺어야 하는 것이오. 박현상의 말이 틀림이 없다면 이들이 청에 매매하는 아편의 양이 일백오십만 근(약 1,000톤)이 넘는다 하였소.”
효명세자도 교역의 위험성에 대하여 충분히 염려하고 있었다. 의술이 뛰어난 정약용조차 두 달에 걸친 노력 끝에 중독된 사람을 치료하였지만 갖은 노력을 다 하였다.
대소신료들도 이를 알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 자리에서 아편에 대한 법까지 제정하기로 마음먹은 효명세자는 잠시 내용을 정리하고 말하였다.
“우선 사사로이 앵속(罌粟 - 양귀비)의 봉우리를 약 대신 사용하는 일은 금하지 아니하나 아편은 다르오. 허락을 받지 않고 소유한 자는 장 오십 대로 다스리겠소. 만약 아편을 퍼트릴 경우에는 즉시 참(斬)하여 본보기로 삼을 것이오.”
한 가지 문제를 해결하면 다른 문제가 생겨나는 법이었다. 효명세자는 이후 무역의 기본 방침을 하나하나 논한 다음 마지막으로 말하였다.
“또한 영길리와 홍삼을 사사로이 매매하는 일을 엄금하며 각지에서 수확된 홍삼을 도성을 통하여 거래할 것이오.”
기본 방침을 정한 효명세자는 논의를 거친 내용을 정리하였다. 이번 일은 형벌과 관련된 일이니 형조의 업무를 관할하는 순조에게 보고를 올리고 허가를 받음이 마땅하였다.
조금 있으면 낮것상(점심)을 받을 때가 되기에 효명세자는 동궁에서 나와 순조의 거처로 향하였다. 마침 순조도 효명세자를 보려는 마음이 있었는지 두 부자(父子)는 문에서 만나게 되었다.
“아바마마께 청할 말씀이 있어 방문하게 되었사옵니다. 다름이 아니고 형벌과 관련된 일이오니 소자의 미욱한 의견을 들어 주시옵소서.”
“그렇지 않아도 너를 보려 하였는데 잘 된 일이로구나. 근래에 들어 네가 국수를 입에도 대지 않는다 하여 가장 좋은 냉면을 준비하여 두었다.”
조일준 때문에 요강 안에서 꿈틀거리던 흉물을 본 효명세자는 이후 국수를 입에도 대지 않았다. 너무나 끔찍한 일이라 이를 알릴 생각도 없었으니 순조가 모를 만 하였다.
졸지에 끔찍한 경험을 되새기게 된 효명세자는 놋그릇 안에 담긴 냉면을 보며 역겨움을 억누르려 하였다.
“조일준이 좋은 물건을 만들어내서 너에게도 알리고 싶었다. 질이 좋은 메밀과 소를 푹 고은 육수에 동치미 국물을 섞었지만 여기에 새로운 물건을 넣으면 맛이 더욱 좋아지지.”
“소자 아바마마께서 내린 은혜가 너무나 크나크니 몸 둘 바를 모르겠사옵니다.”
순조는 냉면의 육수에 약간의 녹색이 섞인 가루를 뿌렸고 이를 젓가락으로 섞었다. 효명세자도 그 가루를 조금 뿌렸고 순조는 냉면을 빨아들이고 행복한 표정을 지으며 말하였다.
“조일준이 상의원의 창고도 정리하였는데 곤포(昆布 - 다시마)가 습기에 훼손되어 쓸 수 없으니 만들어 보았다 하더구나. 일백 근에 달하는 곤포를 찌고 정제하여 이 물건을 한 냥을 만들었지.”
“고작 한 냥(37.5g)이 나오는 물건이라 하였사옵니까?”
효명세자는 처음에는 맛도 모르고 억지로 입에 넣었지만 점차 육수에서 올라오는 글루탐산나트륨의 맛을 느끼기 시작하였다. 이 시대의 사람들에게 극소량의 감칠맛은 맛의 폭탄처럼 다가왔다.
물론 가수분해 공정이 아니라 단가가 엄청났다. 조일준이 다시마를 끓여서 추출한 글루탐산나트륨의 원가는 한 근당 은자 320냥, 조선에서 수출하는 홍삼 시세의 3배에 달하였다.
그래도 조미료의 맛으로 냉면을 비울 수 있었던 효명세자는 웃으며 억지로 말하였다.
“처음에는 박현상이 재주가 있는 줄 알았지만 조일준도 비범한 인물이옵니다.”
“네가 중히 여기는 사람이니 당연한 일이 아니더냐. 그러고 보니 나에게 청할 것이 있다 하였느냐. 어서 장계를 내어주어라.”
장계를 읽은 순조는 큰 문제가 없으니 이를 그대로 적용하려 하였다. 경연에 항시 참석하는 효명세자와 달리 순조는 소문만 듣고 있었기에 걱정이 앞섰지만 이러한 대처를 보면 큰 문제는 없을 것 같았다.
대신 순조의 눈으로 보니 다른 문제가 효명세자에게서 느껴졌다. 순조는 이를 어느 정도 알아차리고 이를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네가 산적한 문제를 처리하고 있음을 알고 있다. 아마도 화양동 서원의 일에 관여하며 삼정(三政 - 전적, 군정, 환곡)의 문란에도 관여하려는 것 같더구나.”
“반드시 해야 할 일이옵니다. 박현상의 서적으로 사람들을 깨우치고 세도가가 전횡을 일삼는 것을 막아냈으니 다음에는 뭇 백성들을 편안하게 해야 할 일이 필요하옵니다.”
“그럴 수도 있지. 다만 깨우치지 아니하고 어떠한 은혜도 내리지 아니한 이들을 억누른다면 반발이 생겨날지도 모르는구나. 이를테면 서북의 변란(變亂) 말이다.”
자신이 진압한 홍경래의 난을 떠올린 순조는 괜히 시선을 돌려 하늘을 바라보았다. 효명세자 또한 지방에서 불만이 솟아오르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었다.
아직 정치적 고려가 부족하여 세도가의 힘을 빌렸으니 불만이 솟아오를 법 하였다. 새로운 소식도 각 지역에는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고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조선을 빠르게 정상으로 되돌리려는 마음 하나로 산적한 업무를 처리하니 부작용이 여기저기서 생겨난 것이다. 효명세자의 마음을 알아차린 순조는 이를 되돌리려 하였다.
“네가 정무에 임하며 사력을 다함은 알고 있다. 다만 외방(外方 - 지방)의 백성은 물론 유생들이 어떠한 마음을 품는지 고려는 해야 할 것이다.”
“소자가 아직 미욱하여 아바마마께 심려를 끼쳐 드렸사옵니다.”
“아니다. 내가 정무에 임하였다면 네가 하였던 일의 절반조차 하지 못 했겠지. 그저 이 나라를 이대로 다스리며 천천히 침잠(沈潛 - 가라앉다)될 것이 아니더냐.”
순조도 자신의 능력을 알고 있었다. 감정에 쉽게 휘둘리고 가까스로 형조의 일에 관여하고 있었을 뿐 나머지 업무에는 손을 댈 수 없는 사람이었다.
홍삼의 판매 같은 사소한 일이 아닌 나라의 일을 논하려던 순조는 생각을 거듭했지만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다 손뼉을 치며 말하였다.
“이미 박현상과 조일준 두 젊은이가 서역에서 왔는데 우리가 같은 일을 할 수 있지 않겠느냐. 오십 명 정도를 선발하여 서역을 정탐하고 오게 하면 어떠하겠느냐.”
“대소신료들도 간혹 서역에 사람을 보내보겠다는 말을 하였지만 기껏해야 가문에서 관직에 오르지 못한 젊은이들을 보낼 것이라 하였사옵니다. 이들이 잘못하면 서역의 괴뢰(傀儡)가 될지도 모르는 일이옵니다.”
“내가 너무 나간 것 같구나. 백문이 불여일견이요, 백견이 불여일각이며, 백각이 불여일행이라는 말이 있다. 깨우치지 못한 외방의 사람들도 한 번 다녀와 보면 많은 것을 배울 텐데.”
사람을 모으는 것도 문제이며 이들을 설득하는 것도 문제이다. 여기에 아직도 학문에만 파묻힌 지방의 유생들을 도성까지 올라오게 하는 것도 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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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명세자의 대처는 훌륭하다고 할 수 밖에 없었다. 호랑이로 겁을 먹은 휴 린지는 열흘 뒤 도착한 착호군의 기세를 보고 휘파람을 불며 평가하였다.
“세포이(인도 출신 징집병)들이 호랑이를 잡았다 하였는데 조선의 호랑이는 훨씬 더 크지 않습니까. 이들을 전문으로 상대하는 부대와 함께하다니 마음이 놓입니다.”
“마음이 놓이셨다니 다행입니다. 그러하면 육로(陸路)로 움직일 것인데 길이 불편하여도 조금 참아 주십시오. 조선은 여러모로 불편한 점이 많아서 길이 험합니다.”
조선시대의 도로인 십대로(十大路)는 정비가 덜 되어 있어 불편하였다. 길가에 돌이 튀어나와 있고 진창이 있었지만 휴 린지는 이해하였다는 듯이 주변 산을 돌아보며 말하였다.
“산골마다 호랑이가 돌아다니는데 인부들을 동원할 때마다 군대를 움직여야 하지 않습니까. 오히려 이 정도로 정비한 것이 대단합니다.”
칭찬인지 거짓말인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의심은 하지 않는 것 같았다. 착호군은 효명세자의 명을 듣고 호랑이가 돌아다닌다는 것을 증명하려 하였다.
두 부대로 나뉘어서 한 부대는 인근 산에서 호랑이를 사냥해 이를 보여주었다. 운 좋게 대호(大虎)가 걸렸는데 체중이 오백 근(300kg)에 달하는 녀석이었고 휴 린지는 호랑이를 매만지면서 말하였다.
“벵골의 호랑이도 맹수로 손꼽히지만 조선의 호랑이는 더하군요. 벵골 호랑이를 간혹 킹 타이거라 부르지만 이제는 대공(prince)으로 명칭을 변경해야 할 것 같습니다.”
휴 린지는 나와 박규수를 통해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며 조선의 물정을 기록하기 위해 계속 펜을 놀려댔다. 반대로 일준이는 언쟁을 벌이고 있었다.
“저는 믿을 수 없습니다. 홍삼이 그토록 좋은 약이라면 모든 인삼 종류는, 이를테면 아메리카에서 수입한 인삼도 같은 효과를 보여야 하지 않습니까?”
“이미 말씀하셨다시피 예전에 나온 의서에도 해독 효과라고 뭉뚱그려 표현하였다고 하셨지요. 저야 체계적으로 분석하였지만 예전에 의서를 저술한 사람은 체계적인 분석이 없었습니다.”
“그러하면 누구에게서 배웠는지 말씀해 주시지요. 어지간한 대학 교수들도 저러한 논문을 쓸 수 없는데 혹여나 통계를 갈아치우셨습니까?”
“그야 자습으로 배웠습니다. 여러 서적을 읽고 이를 외웠지요.”
의사이자 선교사인 칼 귀츨라프는 일준이의 지식을 의심하고 계속 질문을 하였다. 일준이가 말하길 이 시대의 이공계 인물들에게 자신이 밀리는 것은 수학에 대한 이해가 전부라 하던가.
자신이 수학과를 나오지 않아 증명 과정에서 밀리니 당연한 일이라 하였다. 오히려 공식 사용으로 순수한 문제풀이 실력은 견줄 사람이 없을 수준이라 하였지.
열흘 동안 천천히 움직인 대열은 마침내 한양에 도착하였다. 휴 린지를 포함한 스무 명의 인원들은 따로 마련된 숙소에 머물렀고 며칠의 휴식을 가진 뒤 효명세자를 접견하였다.
“머나먼 천축에서 여기까지 당도하느라 고생이 많았소. 이미 장계를 통하여 보고를 들었으니 서로를 소개하는 자리를 마련하였소.”
“조선의 왕자께 저 휴 해밀턴 린지가 인사를 올리옵니다.”
이들이 한쪽 무릎을 꿇고 서양식 인사를 올렸는데 대소신료들이 서로를 돌아보며 웅성거렸다. 인사를 마친 휴 린지가 일어서자 효명세자는 당연하다는 듯이 대소신료들에게 말하였다.
“이들은 이 나라의 사람이 아니며 신하도 아니오. 그저 교역을 위하여 이 나라에 방문하였으니 서역의 예절을 적용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소.”
“저희의 풍습을 받아들여 주시니 참으로 감사할 따름입니다.”
“내 박현상을 통하여 이야기를 들었소. 청나라에서는 그저 접견을 위하여 방문한 사람에게 삼궤구고두례(三跪九叩頭禮)를 강요하였지만 이 나라는 아니오.”
삼궤구고두례의 이야기가 나오자 인조의 치욕을 알고 있는 조선 관료들도 효명세자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이해하였다.
아직도 명나라의 연호(年號)를 사용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로 청나라를 싫어하니 이는 당연한 일이리라. 휴 린지는 나는 물론이요 한자를 아는 사람을 통해 필담(筆談)을 하며 본격적인 이야기를 하였다.
“저희 동인도회사는 영국에서 가장 큰 기업이며 조선 무역을 통하여 새로운 개척을 실시할 것입니다. 이를 위하여 본국에 계시는 회장님과 이사진에게 연락을 해 놓았습니다. 그러하니 조약(條約)을 맺음이 어떠하십니까?”
벌써부터 파고들 틈을 마련해 두었다. 이 시대의 조약(條約)이라 하면 법적 구속력을 가지는 약속이다. 당연히 휴 린지가 처리할 일이 아니니 효명세자에게 상세한 설명을 덧붙여 말해주었다.
“방금 전 말에서 본국을 논하였지만 영길리의 대신들에게 소식이 전해지지 않았을 것이옵니다. 이들은 조약을 맺을 수 없으니 추문(推問)을 하시옵소서.”
효명세자는 나를 보며 미소를 짓더니 휴 린지가 얼버무린 말을 파고들었다.
“그러하면 정식 사신(使臣)이 아니라는 말이로군. 교역을 실시하면서 가급적 영길리와 논의를 거쳐 서로 국서를 주고받아 이를 조약으로 정하면 어떨까 하는데 가능하오?”
“무······. 물론 가능합니다. 오히려 저희 쪽에서 바라고 있던 일입니다.”
여러 대화가 오갔지만 휴 린지를 포함한 동인도회사 사절단은 자신들이 어떻게든 조선과의 교역에 대하여 영국 정부의 전권(全權) 양도받은 사람들이라 주장하려 하였다.
물론 그 주장은 나로 인해 모조리 차단되었다. 회장이나 이사진이 영국의 귀족이며 나라의 일을 겸직(兼職)하고 있지만 국가 대 국가의 관계를 처리할 수는 없었다.
이런 애매한 틈을 파고들어 영국 정부의 조선 정책을 날름 집어삼키려는 시도였지만 통할 리가 없었다. 효명세자는 이야기를 다 듣고는 실망한 듯이 말하였다.
“그러하면 상단과 이 나라의 상단 사이의 거래 물목과 시세를 정할 것이니 상인과 논하는 자리를 마련하겠소. 영길리와 국서를 주고받는 일이 아니니 당연하지 않소.”
“하오나 저희는 왕자님을 통한 조약(條約)을 원하고 있사옵니다.”
“이를 원하면 국서를 가져오시오. 멀리서 온 손님들이라 정중히 맞이하였을 뿐 관료들과 함께 논의할 일이 아니구려.”
졸지에 조약은커녕 거래만 성사하게 된 휴 린지는 나를 노려보았지만 채찍 다음에는 당근이 필요한 법이었다. 동인도회사가 가장 필요한 일을 속삭였다.
“이 나라의 해역에는 고래가 많습니다. 서양에서 가장 진귀하게 여기는 물품이 경유(鯨油 - 고래 기름)이니 여기에 대한 독점(獨占) 권한을 십 년 정도 드리면 어떻겠습니까?”
동인도회사는 2년 뒤인 1833년 청나라와의 무역 독점권이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 꿩 대신 닭이라고 새로운 경쟁자를 밀어낼 포경 사업을 주장한 것이다.
내가 내민 당근을 먹은 휴 린지는 자신의 코가 꿰이는 것도 모르고 표정이 풀어졌다. 어차피 조선은 고래를 잡을 정도로 숙련된 선원도 선박도 없는 형편이라 협상 카드로 쓸 만 했다.
동해안 일대의 포경을 독점하여도 결국 보급과 손실되는 선원을 채우기 위해서 조선에 방문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조선이 대양으로 나아가기 위한 선원 양성을 공짜로 얻어내는 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