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명세자와 함께하는 조선 생활 - 22편
(2장 - 교역 (1))
효명세자가 진행하는 숙청에는 명분과 이를 진행할 힘이 있었다. 이미 몇 달 전부터 각 세도가들이 자신들의 잘못을 고변하였으나 조정에서 정식으로 진행되는 교역이 실패한 것이다.
그럭저럭 유한 태도를 취했던 순조조차도 이번 사건에는 분노할 지경이었다. 시간이 흘러 음력 2월이 되자 아예 작정을 했는지 형조판서조차도 가급적 세도가와 연관이 없고 지방에 대해 잘 아는 인물을 끌어들였다.
“형조판서 서유구(徐有榘) 주상전하께 아뢰옵나이다. 일전에 사로잡힌 죄인들의 증언을 통해 풍기군(豐基郡) 일대를 수색하였나이다. 결국 불민한 일을 저지른 사람을 여럿 추포하게 되었사옵니다.”
“불민한 일을 저지른 사람이라 하였는데 소수서원(紹修書院)에 속한 유생이 아니더냐! 퇴계 이황을 모시는 서원에서 나라의 법을 어기다니 더욱 엄히 벌하여야겠구나!”
숙청이 시작될 때에는 증거가 있음에도 대놓고 법을 어긴 사람들이 목표가 되었다. 이들은 세상 물정에 어두워 시기를 놓쳤고 어떤 비호도 받지 못 하고 축출되어 당진으로 귀양 당했다.
다음 목표는 힘 좀 있는 중앙 관리들이 아닌 각지의 서원에서 고립된 유생들이었다. 돈 좀 만져보려고 여럿이 힘을 합쳐 인삼을 기르고 밀매에 손을 댔다가 변을 당한 격이다.
서유구는 유배생활을 다녀온 사람이어서 순조의 말에 맞장구를 치며 다음 숙청 대상을 정했다. 실학자이자 지방의 현실을 잘 아는 사람이니 도리를 넘어서 백성을 수탈하는 서원을 눈여겨 보고 있었으리라.
“각지의 서원과 향교에 속한 서원전(書院田 - 서원에 할당된 농지)을 경영하는 소작농들이 산골로 끌려가 인삼을 재배한다는 소식이 입수되었사옵니다. 이를 엄히 벌하시옵소서.”
“이미 어사(御史)를 보내 여러 곳을 확인하여 보았다. 우암 송시열에게 제사를 올리는 화양동서원 일대에서 서유구가 말하였던 일이 벌어지고 있으니 이를 면밀히 조사할 것이다!”
순조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관리들이 웅성거렸다. 평범한 사립 서원을 수색한다면 몰라도 화양동서원은 조선에서 가장 힘이 강력한 서원 중 하나이다. 순조는 관료들의 표정을 살펴보다 말하였다.
“성현의 이름을 팔아 백성들을 핍박하고 나라의 일을 그르치는 행위를 막을 것이다. 이들이 옳은 일을 하였다면 병졸을 보내 조사하여도 아무런 문제가 없지 않겠느냐!”
좋은 말이기는 하지만 숙청의 본질이 흐려지고 있었다. 처음에는 홍삼 밀매로 인한 탈세를 막아낼 작정이었는데 어느 새 지방 세력에 대한 압박으로 변질되기 시작하였다.
저녁에 열리는 조회가 끝났지만 관리들은 답답하지만 뭐라 할 수도 없는 상황이라 한숨만 쉬어댔다. 퇴근하기 전 이를 어떻게 하나 고민하니 조만영이 슬쩍 다가와 말하였다.
“고민이 많은 것 같군. 얼마 전에 홍문관의 부수찬(副修撰 - 종6품 관원)으로 임명되었음에도 아쉬운 것인가 아니면 나라의 일이 염려되는 것인가.”
“나라의 일이 염려될 따름입니다. 처음에는 순리에 맞는 일이었지만 이제는 아닙니다. 계속 지방의 사람들을 억누르다가는 언젠가 큰 일이 터질 것입니다.”
“큰일이라 하면 지부복궐소(持斧伏闕疏)라도 일어난다는 말인가. 그러한 일이 벌어지면 아니 되지만 지금은 죄인을 만들어 계속 벌해야 하는 상황이니 방도가 없군.”
조만영의 말이 옳았다. 숙청을 실시하면 불만을 잠재울 수 있으며 지금 조정 관리들에게 팽배한 불만은 바로 팔리지 않고 비축된 홍삼이다.
나라에서 임시로 홍삼을 거둬들여 이를 올바르게 배분할 것이라 하였지만 당장의 돈이 급한 사람이 없지 않았다. 이 불만이 싹트기 전에 새로운 희생양을 찾아 움직이게 되었다.
내리막길에서 한 번 달리기 시작한 사람이 급격히 멈출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숙청이 점점 진행된 것이다. 조만영도 한숨을 쉬며 말하였다.
“결국 화양동 서원을 시작으로 서원과 향교마저도 본격적으로 손을 대게 되었으니 올바른 일이지만 너무 급히 진행되는 일이라네. 대체 영길리의 상인들이 언제 방문할지 궁금하군.”
“정 방문하지 아니하면 청나라 남쪽이 아닌 청나라 동해안 일대로 나아가 인삼을 교역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이번 일을 우리 선에서 처리할 수 없을 것 같군. 어쩔 수 없으니 영돈령부사께 고견(高見)을 들어야 하지 않겠나.”
세도가들이 연합하였으니 이를 대표하는 사람은 김조순이었다. 이미 사건이 벌어질 때부터 김조순은 열정적으로 움직였으며 뜻이 일치하니 조만영도 김조순을 대표로 삼았다.
그 대가는 김조순의 수명이었다. 이미 몸을 가누지 못 할 정도로 병세가 심해져 순조조차도 정양을 권고하고 어의를 파견할 지경이었다. 이 어의들을 지휘하는 사람은 정약용이었다.
김조순의 집에 도착하자 마당에서 끓고 있는 탕약을 확인하던 정약용이 우리를 보며 한숨을 쉬었다. 그러더니 조만영에게 따지듯이 말했다.
“얼마 전에 제가 영돈령부사께 방문하지 말라 하였는데 어찌하여 또 방문하셨습니까.”
“그야 조정에서 사건이 하나 생겨난 덕분이지요. 직접 만나서 전해야 할 일입니다.”
정약용은 가급적 말리려고 하였지만 이미 김조순은 어떻게든 몸을 일으켜 방문을 열어뒀다. 김조순을 한참동안 바라본 정약용은 눈을 감더니 더 이상 말릴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말하였다.
“방 안에만 있어도 정세를 파악하려고 힘을 쓰는 분이니 차라리 만나 보는 것이 나을 것 같군요. 가급적 짧게 대화를 나누어 주십시오.”
우리가 방 안에 들어가 인사를 올리자 김조순은 앉아있기도 힘들어 하였지만 어느 새 정좌(正坐)하였다. 오늘 있었던 일에 대한 보고를 올리니 김조순은 한동안 생각하다 눈을 가늘게 뜨고 말하였다.
“일이 점점 안 좋은 방향으로 흘러가는군. 한 번 시작한 일을 중단할 수 없음은 알고 있지만 이대로 가다가는 변고가 일어날 걸세. 풍석(楓石 - 서유구의 호)은 지방의 생리를 잘 알고 있으니 철저히 수사할 것 같군.”
“다른 곳도 아닌 화양동 서원이 목표로 지목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거기에 속한 유생만 수백 명에 달하는데 이를 어찌해야 할지 고민입니다. 제가 개입하기도 힘들 지경이군요.”
“그야 적당히 한두 명 정도만 알아내고 나머지를 내버려 둬야지. 이를 주상전하께 고변할 것이니 염려하지 말게. 물론 박현상 자네는 모조리 쓸어버려야 한다 생각하고 있지 않나?”
김조순이 나를 바라보았는데 속마음을 들킨 것 같았다. 사실 대원군 수준의 서원 혁파가 필요한 상황이라 했지만 아직 국력이 부족해서 혁파까지 진행할 수 없었다. 그러니 적당히 얼버무리는 식으로 답했다.
“시시비비를 가려 옥석을 남기고 나머지를 폐하거나 국고로 환수해야 할 것입니다.”
“그보다 더 좋은 것이 있다네. 내가 처음 자네 이야기를 들었을 때 서역의 대학(大學)이라는 곳이 서원과 흡사하다 생각하였네. 그러하니 모조리 폐하지는 말게나.”
대학을 서원과 동일시하기에는 너무 나간 것 같은데 이건 조선시대 사람이니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닐까. 김조순은 한숨을 깊게 내쉬고 우리를 바라보며 말하였다.
“모든 사람을 다스릴 적에는 은혜를 내리거나 세상 물정을 파악할 시일을 주어야 한다네.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도 모르는데 갑자기 몽둥이를 들이대면 억울한 마음을 품겠지.”
“그렇다 하여도 무엇을 잘못하였는지 모른다는 말은 말이 안 됩니다. 이미 국법은 물론이고 여러 차례에 걸쳐 언질을 주었음에도 태도가 변하지 아니 하였습니다.”
“석애(石崖) 자네도 잘못 생각하고 있다네. 도성에서야 일이 급히 퍼져나가지만 머나먼 외지(外地)에 있는 유생들이 무슨 소식을 접하겠나. 더군다나 이들이 주상전하에게 받은 것이 무엇이 있는가?”
세도가는 홍삼 무역의 양성화를 대가로 높은 시세를 약속받은 상태였다. 만약 이 약속을 지키지 못 한다면 홍삼 무역에 부과되는 세금을 감면해서라도 더 높은 수익을 지급하기로 하였다.
반면 지방에 있는 유생들은 이러한 거래를 모르고 있었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자신이 불법을 저질렀지만 감정으로 생각하면 여태껏 문제 없이 해온 일에 갑자기 벌을 내린 격이다.
이 불만이 조만간 터져 나올지도 모른다. 나도 조만영도 한숨을 내쉬며 김조순을 바라보자 정약용이 그 사이에 들어와 탕약을 건네주었다.
“그만 쉬게나. 풍고 자네가 더 이상 나라의 일에 대해 논하였다가는 내가 자네의 상여(喪輿)를 보아야 할지도 모르네. 부탁이니 제발 자리에 누워서 정양을 취하게.”
“역시 다산이로군. 우리가 몇 년이나 산다고 상여를 조금 일찍 보는 것을 염려하는가. 자네는 걱정이 많아.”
정약용이 처방한 탕약을 먹은 김조순은 약기운에 휘청거리다 자리에 누웠다. 우리가 인사를 올리고 돌아가려 하자 김조순은 자리에 누운 채 죽어가는 목소리로 말하였다.
“결국······. 모두가 깨어나야 한다네. 박현상 자네가 말한 영길리와 서역의 열국(列國)들은 참으로 무서운 나라일세. 청나라가 이를 막아내지 못 하면 다음은 조선이 위태로울 것일세.”
김조순은 권력의 화신이기도 하였지만 진심으로 조선을 생각하는 신하였다. 정확히는 조선이 몰락하면 자신의 가문인 안동 김씨도 무너질 것이라는 생각이 분명하지만.
이미 내 이야기를 듣고 서양의 강대함에 대해 알고 있었으며 어떻게 보면 조선에서 가장 많은 정보를 입수한 사람이리라. 그나마 청나라가 방패가 될 거라 생각했는데 방패가 아니라 덩치만 큰 돼지라서 문제다.
조만영과 헤어지고 집으로 돌아가려고 터덜터덜 발걸음을 옮기는데 박규수가 나에게 다급히 뛰어왔다. 그러더니 다른 사람이 듣지 못하도록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미 집에 다녀왔으나 자리에 없어서 영돈령부사를 만나볼 줄 알았네. 세자저하께서 자네를 찾으시니 급히 입궐하도록 하게.”
“세자저하께서 저를 찾으신다 하셨습니까?”
“다른 곳에서 논할 수 없는 이야기이니 서둘러 들도록 하게. 이미 자네의 벗도 입궐하였네.”
아마 영국에서 서신을 보내왔거나 상인이 방문했을지도 몰랐다. 어스름이 깔린 동궁으로 들어서자 효명세자는 몇몇 신하와 함께 나를 기다리고 있었고 고개를 깊게 숙이며 인사를 올렸다.
“신 박현상 세자저하의 부름에 응하였나이다.”
“그리 늦지 않았으니 잘 된 일이로군. 장연현(長淵縣)에 이양선이 출몰하였다는 장계가 들어왔네. 자신들을 영길리의 사람이라 하였으며 배의 이름이 암허스트 군(君)이라 하였지.”
생각보다 숙청이 빠르게 진행되어 걱정했지만 동인도회사가 더 빠르게 움직였다. 흥분을 가라앉히며 효명세자가 말하는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처음에는 이들이 무력을 휘두를 줄 알고 장연 현감이 병졸을 보냈으며 말이 통하지 아니하여 필담(筆談)으로 대화를 나누었네. 이들은 아직까지 배에 머물며 피로를 풀고 있다네.”
“혹여나 원하는 것을 이야기 하였는지 참으로 궁금하옵니다.”
“그저 교역을 실시하길 원한다는 말을 하였네. 어떠한 마음을 품었는지는 몰라도 이 나라의 식량과 물을 사들이고 값을 시세의 세 배로 지급하였으며 사탕을 선물로 주었네.”
웬 사탕인가 했는데 노란색 알약에 가까운 형태였다. 효명세자가 한 입을 먹어보고 인상을 찌푸렸고 나와 일준이를 비롯한 관리들도 한 알씩 먹으라고 권하였다.
입에 넣자마자 표면이 살짝 녹아내리고 진한 계피향이 콧속을 가득 메웠다. 일준이는 눈물을 찔끔 흘렸고 나는 현대에서 먹어본 맛을 기억하며 이를 혀 위에서 굴리고 말하였다.
“알토이즈(Altoids)라는 사탕이옵니다. 천축에서 설탕을 많이 만드니 영길리 사람들은 이를 수입하여 여러 가지 사탕을 만들어 판매하옵니다.”
“사실은 사탕에 대해 알 생각은 없었네. 박현상과 조일준이 거짓으로 출신을 속였다는 상소를 올리는 자가 있었는데 사탕의 명칭조차도 알고 있으며 이것이 옳다면 증좌로 삼을 수 있을 걸세. 참으로 다행이로군.”
효명세자야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지만 이건 안 좋은 신호다. 조정은 물론이요 각지에서 쌓이는 불만이 김조순과 친밀한 관계인 나를 목표로 삼았다는 뜻이다. 효명세자는 다시 알토이즈 사탕을 삼키며 말하였다.
“이들은 간혹 뭍으로 나아가 여러 곡물의 종자를 건네주고 물산을 사들이며 간혹 서양포(西洋布 - 공장제 면직물)를 보여주며 환심을 사고 있다네. 자네들은 말이 통한다 하였으니 박규수와 함께 나아가 이들을 상세히 알아보게.”
“하오면 교역을 허가한다는 말씀이시옵니까?”
“이를 상세히 물어봐야 할 것이네. 도성에 방문할 수 있는 사람은 스무 명으로 제한할 것이며 가급적 높은 관직을 가진 이들로 엄선하도록 하게.”
“세자저하의 명을 받들어 모든 일을 온전히 처리하도록 할 것이옵니다.”
마침내 때가 되었다. 조운선에 올라타 한강에서 출발해 뱃멀미에 시달리며 몽금포에 도착하였다. 아직 로드 암허스트 호가 보이지 않았지만 우리가 도착하는 것을 알아차린 장연 현감이 이미 기다리고 있었다.
“관찰사께 장계를 올렸는데 보름이 되기도 전에 사람이 올 줄은 몰랐네. 관찰사이신 벽곡(碧谷 - 김난순의 호) 영감께서 보낸 장계를 바로 확인하셨군.”
“이는 참으로 중대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서역의 사람이 당도하여 머무른 적은 있었지만 철저히 준비하여 교역을 논하는 일은 흔치 않았습니다.”
“그야 당연한 일이 아닌가. 도성에서 바로 올라왔다면 뭐라도 준비했을 터. 직접 배로 향하겠는가 아니면 이들을 뭍으로 불러들이겠는가.”
“저희가 배에 올라가서 논의를 해 봐야 알 것 같습니다.”
박규수는 질색을 했지만 지금 상황을 주도하는 사람은 나이다. 우리가 다가와 소리를 치자 배에서는 밧줄로 만든 사다리가 내려왔고 이를 잡고 배에 올랐다.
이 배의 선장은 휴 린지라는 사람이었는데 그리 젊은 사람은 아니고 바닷바람을 많이 맞은 뱃사람이었다. 그는 나를 확인하고 외모를 살펴보더니 통역관을 불러 필담을 시작하려 했다.
“저는 영국의 말을 알고 있으니 필담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지금 뭐라 하였나? 자네들이 이 나라의 말을 알고 있다고?”
“혹시나 발음이나 억양이 익숙하지 않으신지요.”
휴 린지는 물론이요 항해사나 통역관까지 서로를 살펴보며 의문을 품었다. 나는 의문 대신 악수를 청하며 말하였다.
“저는 주상전하께서 임명하신 관료인 현상 박이며 지금은 왕립 도서관의 사서 중 한 명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나머지 두 명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하급 관원이지만 왕립이니 왕실이 붙으면 대접도 달라지는 법이다. 대대로 이어오는 지방 귀족도 아니고 능력을 인정받은 중앙 관료라는 뜻이니까. 휴 린지는 우리와 악수를 나누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 머나먼 조선에서 어떻게 말을 익혔는지 모르지만 훌륭하십니다. 더군다나 닐슨 조라는 분은 체격만 보아서는 척탄병(擲彈兵)으로 일하실 체격인데 이사님께 논문을 보낸 학자이더군요.”
“닐슨 조라 하셨습니까? 제 이름은 일준 조인데요.”
“저희가 발음하기 조금 힘들어서 말입니다. 조선 사람들은 제 이름인 휴 린지도 후인지라 부르던데 서로 이해하고 조금은 넘어가 줍시다.”
졸지에 일준 조에서 닐슨 조가 된 현상이가 눈썹을 꿈틀거렸는데 내 이름도 현상 박에서 한센 팍으로 변질되기 시작했으니 그냥 넘어가 줘야 하리라. 박규수는 말이 통하지 않았지만 현상이가 내 말을 번역해 알려주기로 하였다.
“브랜디라도 한 잔 하시겠습니까 아니면 포트와인은 어떠하십니까? 술을 마시며 대화를 나누도록 하지요.”
“포트와인으로 주십시오. 환재(桓齋)께서는 영길리의 소주와 포도로 만든 술중에 뭘 원하십니까?”
“아무거나 적당히 주면 될 것 같군.”
흔들거리는 배 위에서 간단한 술자리가 열렸다. 휴 린지는 나에게 술을 한 잔 따라주었고 자신의 잔에도 술을 채우더니 품속에서 작은 병을 꺼내 말하였다.
“아편팅크를 넣으면 술이 잘 들어가지요. 넣으시겠습니까?”
“이 나라에서는 아편을 금지합니다. 여기는 배 위이니 관여치 않겠습니다만 제가 아편을 마시고 뭍으로 돌아가면 국법에 의해 엄히 처벌받을 겁니다. 또한 저는 아편을 싫어합니다.”
“이거 국제법도 잘 알고 계시는 분이시군요. 배는 엄연히 배를 소유한 국가의 영토이지요. 저도 조선에서는 아편을 먹지 않겠습니다.”
아편팅크를 떨궈 브랜디에 섞은 휴 린지는 이를 단숨에 들이켜고 다시 아편 칵테일을 만들었다. 그의 입장에서 말이 통하는 사람이 있으니 일이 급격히 진전되었다 생각하리라.
박규수는 그 모습을 보며 질색하였고 일준이는 아편의 효과로 급격하게 수축하는 휴 린지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그는 아편기운에 취하여 당당하게 말하였다.
“말이 통하니 얼마나 편합니까. 저희 동인도 회사는 수많은 물류를 영국부터 인도 식민지까지 관리하고 납품하며 이미 청나라와의 교역을 하고 있습니다. 이제 조선도 교역을 실시하면 어떻겠습니까?”
“그 교역상품이 홍삼이겠군요. 홍삼을 사고 은을 내놓을 생각은 아닌 것 같습니다. 이를테면 청나라처럼 아편을 주력으로 팔아서 무역수지를 흑자로 돌릴 작정이십니까?”
“솔직히 말해 아편을 길러서 이득이 얼마나 됩니까? 양귀비를 기를 땅에서 다양한 물건을 만들어 팔아야 건전한 무역이 되는 법이지요. 저희 상품을 보시면 알 겁니다.”
휴 린지가 손뼉을 치자 갑판 위에 수많은 물건들이 쌓였다. 공장제 면직물과 모직물을 시작으로 양초, 시계, 유리거울, 망원경, 인도산 차 그리고 각종 향신료가 즐비하게 나열되었다.
“이 물건들을 팔아 조선의 홍삼을 사들이고 싶습니다. 저희 동인도회사는 이번 교역으로 새로운 시장을 개척할 용의가 있습니다.”
“저희 입장에서도 교역이 이득으로 다가올 것 같군요. 다만 시세를 속일 수 있으니 이 나라 사람을 동인도회사 본사와 영국에 머물게 하며 시세확인을 해야 할 겁니다.”
은근슬쩍 시세를 후려치려던 휴 린지는 상대를 잘못 만났다는 듯이 표정이 일그러졌고 박규수도 의심을 하며 바라보았다. 나는 브랜디를 한 잔 따라주며 조심스럽게 권유하였다.
“일단 도성에 들어오셔서 홍삼의 약효를 확인하시면 어떠합니까? 아편을 먹어도 설 수 있는 좋은 약이 아닙니까?”
이 시기 동인도회사의 한계는 물론이요 이들이 처한 위기와 이들이 할 수 있는 수법도 알고 있었다. 졸지에 코가 꿰인 신세가 된 휴 린지였지만 아직 털어낼 것은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