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명세자와 함께하는 조선 생활 - 7편
(1장 - 환약(丸藥) (1))
녀석은 이런저런 물건을 많이 만들어 두었는데 대부분 납이나 도자기로 된 물건들이었다. 일준이는 내 몰골을 살펴보더니 피식 웃으며 말했다.
“집에 들어왔으면 씻기부터 해. 온 몸에 때를 덕지덕지 묻혔으니 네 고생을 알 만 하다.”
녀석이 장난스럽게 말하면서 건넨 물건은 비누였다. 무슨 기름으로 만들었는지 모르지만 손을 씻어보니 현대의 빨랫비누와 비슷한 느낌이 들었다.
“비누는 어떻게 만들었어? 내가 막 나설 때만 해도 잿물을 농축해 비누를 만들었는데?”
“르블랑 공정의 부산물로. 판매용이 아니고 우리와 주변사람들 위생문제를 위해 만들어서 대량 판매는 불가능하다. 여기에 유리도 만들었다.”
“유리? 정말 유리를 만들었다고? 이건 그냥 석영 조각 아니야?”
“내 손이 문제라서 이 이상은 못 만들었어. 해초에서 탄산나트륨을 얻어내는 것 보다 르블랑공법으로 얻어내는 게 불순물이 적을 거라 생각했는데 손재주가 문제더라.”
뭔가를 만들려 했는지 마치 불길에 녹아내린 돌덩어리 같은 물건을 줬는데 쌀뜨물처럼 뿌연 색상에 잔금이 잔뜩 가 있었다. 이걸 깨트린 부분을 보니 정말 유리와 흡사한 단면이 보였다.
“이 정도면 소개할 거리가 더 늘어났네. 유리 공예는 숙련도를 올리는 과정이 필요하지만 만드는 방법을 퍼트리기만 해도 조정에서는 좋아할 거야.”
“그러면 다행이네. 정로환은 지금 쥐로 실험할 단계를 넘어서서 개로 실험중이야. 덕분에 다산 선생님이 고생을 많이 하시지.”
현대와 흡사한 비누로 몸을 씻고 나오니 그 사이에 모든 준비가 끝나 있었다. 일준이는 코발트 광석을 살펴보며 말했다.
“운도 좋고 재주도 좋아. 금을 캐느라 광석을 완전히 분해하고 가열해서 분해 과정이 쉬워졌어. 코발트가 녹는 온도는 1,500도에 달해서 고스란히 남아있겠지.”
“그럼 화로로도 못 녹이니 화학반응으로 녹여내겠다는 소리야? 염산 같은 걸로?”
“물론, 코발트 클로라이드를 만들려면 광석 속의 코발트를 염화코발트로 만들어야지. 이미 금을 뽑아내려고 가열한 광석이라 오히려 가공하기 편하고······.”
광석에서 코발트로 추정되는 광물을 분해하고 녹이고 걸러내는 작업을 진행하자 보라색과 분홍색이 섞인 가루들이 나왔다.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것 같았는데 일준이가 설명을 하였다.
“실리카 겔에 간혹 들어있는 색 있는 구슬이 생각나지? 수분을 충분히 흡수한 염화코발트는 색이 변해서 실리카 겔의 수명을 가늠하는 용도로 사용했어. 나중에 가면 발암물질이라 사용이 거의 금지되었지만.”
“발암물질? 그럼 너 지금 발암물질을 다루는 거야?”
“처음 하는데 뭔 방법이 있겠냐. 최대한 안전하게 몸에 닿지 않도록 작업을 진행해야지. 나중에 여력이 남으면 흄 후드도 만들고 장갑도 만들 생각이지만 지금은 답이 없어.”
절구 안에 발암물질을 넣고 회색 가루를 섞어 빻아대는 모습을 보니 녀석의 수명이 걱정되었지만 내가 말릴 수 없었다. 혼합물을 초벌구이한 도자기에 넣은 일준이를 이를 다시 화로에 넣고 가열하며 말했다.
“성공하면 서양에서도 최신 안료로 분류되는 코발트블루를 동양에서 만들 수 있겠지.”
“안료가 완성되었다고 끝이 아닐세. 이걸 아교에 섞어 물감으로 사용할 수 있는지가 중요하지.”
완성된 안료를 다시 가루 형태로 빻아내자 완연한 청색을 띄고 있었다. 정약용은 이를 조금 떠내 아교를 섞어 물감을 만들어 한지에 칠해 보았고 놀랍도록 푸른 색상이 드러났다.
“색이 청화백자(靑畫白磁)와 견줄 정도로 푸르른 색이로군. 옛적에 사용했던 토청(土靑 - 한반도의 청화안료)과 견줄 수 없으니 내가 한 번 시험해 볼 것이네.”
“청화백자 말씀이십니까? 안료의 내열성은 백자를 굽는 온도보다 높은데다 쉽게 변색되지 않으니 아무데나 쓰일 수 있습니다. 다만 불순물을 걸러낼 수 없어 색이 탁하군요.”
정약용이 안료를 시험하는 동안 일준이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녀석이 성공을 했는데도 저런 모습을 보여 이상했는데 일준이는 손을 씻고 돌아와서는 푸념을 늘어놓았다.
“상황이 좋아보여도 문제가 많아. 각종 실험도구도 없이 억지로 르블랑 공법을 진행해 나가서 불순물도 있고 최종 생산물 효율도 시원치 않아.”
“가장 큰 문제가 뭔데? 내가 해결할 수 있다면 좋을 것 같은데.”
“기구 문제가 가장 크다. 서양이라면 유리 가공기술이 발달해서 중학교 과학실 수준의 실험도구는 갖추고 있는데 지금 조선은 임시방편으로 사용하는 것이 전부야.”
“과학의 발전에는 후원자가 필요하지. 성과가 나올 때 까지는 어마어마한 자금을 잡아먹는 구렁텅이로 인식할 거야. 그러니 돈 벌 구석이 생겨야지.”
서양의 과학 발전에는 귀족이 끼어 있었다. 대부분의 재력가들은 인맥을 만들기를 원하여 협회에 가입하고 최소한의 장비를 사서 실험을 해 본다.
여기서 재능이 있는 사람은 과학자가 되어 명성을 떨치며 다른 회원을 끌어오는 방식이었다. 일준이는 코발트블루 안료를 시험하는 정약용의 뒷모습을 보면서 말했다.
“다산 선생님과 대화를 나누어 보니 내가 엄청난 견제를 받을 거라 하더라고. 현실을 보지 못 하고 서적에만 얽매여 살아가는 사람이 온갖 핑계로 나를 공격할 거라 하였지.”
“조금만 참아. 조만간 역사의 흐름이 바뀔 때가 오니 여기에 발을 올릴 거다.”
“역사의 흐름에 발을 올려?”
“1832년에 이양선(異樣船)이 오는데 동인도회사에서 무역을 목적으로 파견한 배야. 몇 개월 정도 조선에 머무른 암허스트 호를 기회로 삼아 조선을 개화시킬 계획이야.”
동인도회사에서 보낸 무역선인 암허스트호는 조선에게 있어서 좋은 기회였다. 이 좋은 기회를 효명세자의 죽음과 김조순의 죽음 그리고 대응을 안 한 순조로 날려버렸지.
제대로 된 기회를 잡아 영국을 비롯한 서양과의 외교 통상을 실시하면 개화의 물결이 열리리라. 내 이야기를 들은 일준이는 코웃음을 치면서 말했다.
“이양선이 오면 저은하 아니되오옵니이다아아아! 하면서 유생들이 한양으로 몰려와 난리를 피우지 않을까? 기껏해야 관직에 막 오른 우리가 뭘 할 수 있다고.”
“당연히 우리의 힘으로는 힘들고 정치적으로 파고 들어야지. 네가 말한 일이 벌어지더라도 효명세자가 내 말을 들어주고 충분한 의지를 가진다면 어떠한 반대도 소용이 없어.”
“사극에서는 군약신강(君弱臣强)이 어쩌고 했는데 그건 아닌가 보네?”
“그 소리를 했던 청나라 강희제 기준으로는 군주가 약하고 신하가 강한 것이 맞아. 중국 왕조는 황제가 이십 년 이상 업무를 안 해도 신하들이 아무 말을 못 했거든. 조선은 최소한 올바른 모습을 보여야 하니 그런 평가를 내렸지.”
20년 이상 태업을 저지른 만력제조차 어찌 해 볼 생각을 못 한 것이 명나라의 황제이다. 심지어 청나라는 이보다 더 나아가 문자의 옥(文字之獄)처럼 온갖 변명을 내세우며 사람을 죽여도 아무도 반대하지 않았다.
조선의 왕은 명분만 있으면 무고한 사람을 죽이거나 죄를 없앨 수 있는 법 위에 있는 존재다. 반대의 목소리가 있지만 목소리에 불과하니 명분을 앞세운 순간 사라져 버린다. 일준이는 이해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충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 명분만 있다면 무슨 소리를 해도 욕을 안 먹는 수준이냐?”
“조금 무리하면 명분 없이도 국정을 운영할 수 있어. 정말로 신하에게 눌려 지냈던 왕은 헌종과 철종인데 이건 평범하지 않은 사례고.”
아직 시작단계에 불과하고 나와 함께 할 중신들과 만나지도 못 했다. 효명세자의 수명연장이라는 첫 목표를 달성한 다음 목표인 조선의 근대화 까지는 많은 것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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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보름 정도가 지나고 개를 이용한 동물실험도 끝났다. 이제 남은 것은 임상실험인데 일준이는 거의 완성된 정로환을 보여주며 말했다.
“이제 임상실험을 할 차례야. 현대에는 최소 네 차례에 걸쳐서 임상실험을 하는데 여기서는 방법이 없으니 우리가 해야지. 이 약은 현대 정로환의 절반 정도의 약효일거야.”
독한 냄새가 나는 환약을 받자 덜컥 겁이 났다. 일준이의 실력을 알고 있지만 실험기구도 없는데 문제가 생기지 않을까? 가만히 보니 한약재 파편이 보여 정약용에게 물어보았다.
“선생님께서 이 정로환에 다른 한약을 넣으셨는지요?”
“약의 효능이 부족할 것 같아 보강하는 약재를 넣었네. 진피(陳皮 - 귤껍질) 약간과 감초 그리고 조황련(朝黃蓮)을 넣었지. 독성이 강한 것은 법제한 목초액 외에는 없다네.”
“믿어 보아야지 방법이 있겠습니까. 위험하지는 않겠지요?”
“혹여나 변비가 심해질지도 모르니 다른 준비를 하였다네. 피마자기름을 한 술 먹으면 정로환의 약효가 어찌 되건 모조리 변소에서 나올 것이 아닌가.”
일준이와 시선을 나누고 동시에 알약을 입에 넣은 뒤 바로 물로 삼켰다. 입 안에 제대로 닿지도 않았는데 올라오는 독한 냄새가 현대에서 먹은 정로환과 흡사했다.
“무슨 느낌 오냐? 크레오소트유가 신경을 마비시키기도 하는데 큰 문제는 없나보네?”
“냄새가 너무 독한데. 하긴 어렸을 때 정로환 먹으면 온 몸에서 냄새가 났지.”
“내가 만든 정로환은 정제가 좀 부족하니 냄새가 더 독할 거야.”
아침저녁으로 한 알씩 먹고 다음 날이 되자 결과가 나왔다. 의외로 약효가 강하지는 않았는지 화장실에서 변을 보고 조금의 불쾌감을 느낀 것이 끝이었다.
“약효가 안 느껴지는데? 현대 정로환의 절반 정도 효과라 부족한가?”
“안전성 검사를 위한 양이니까 이제 두 배로 늘려서 정상적인 양을 먹어야지.”
첫 단계는 통과했지만 일준이는 대량 복용과 장기 복용 부작용도 고려해야 한다 하였다. 다음으로는 아침저녁으로 두 알씩 먹어보고 약효를 체험하며 며칠 동안 인체실험을 계속하였다.
마침내 약효가 드러났는지 속이 불편해지며 변비가 시작되었다. 일준이는 나흘 째 되던 날에도 실험을 이어가자 했지만 나는 기분이 좋지 않아 중단하였다.
“더 이상 먹었다가는 대장 질환에 걸릴지도 몰라. 여기서 중단하고 조금 약하게 만들자.”
“그럼 약효를 조금 낮춰서 만들도록 할게. 열 알씩 묶어서 팔고 판매자에게 먹는 방법도 꼭 설명하라고 하자. 어떤 멍청이가 열 알을 한 번에 먹더라도 크게 다치지는 않을 양이야.”
최종 생산을 위해 갈려진 약재와 양을 늘리기 위한 곡식 분말에 저울로 몇 번을 반복 계량하여 정확도를 높인 크레오소트유가 섞였다. 일준이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완전히 정제한 크레오소트유를 만들지는 못한 것 같고 대략 ph4 정도의 약산성이야. 벤젠을 만들고 이걸로 무수 아세트산을 만들어서 아스피린을 만들려면 한 세월이 걸리겠네.”
“내가 취미로 제빵을 좀 배워 봐서 아는데 지금 네 심정 이해한다. 아프리카 초원에 떨어져서 마카롱을 만들라는 소리 아니야. 지금은 고생을 해서 가까스로 팬케이크를 만들었고.”
“야생 밀을 채취해서 돌로 갈아내고 들소를 잡아서 젖을 짜내고 프라이팬 대신 돌로 굽는 격이지. 유럽에 갈 수 있다면 빵 좀 만들어 볼래?”
주제가 생겼으니 유럽에 갈 수 있다면 뭘 할지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고개를 돌리니 밖에서 누군가가 큰 소리로 외쳤다.
“다산 영감님 계십니까! 풍고(楓皐) 대감님께서 서신을 보내셨습니다!”
정약용을 영감이라 부를 사람은 평범한 사람이 아니다. 정약용은 신유박해에서 배교(背敎)를 택하고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지만 관직이 말소되고 진출이 막힌 폐족 신세가 되었다.
상대는 젊은 시절의 정약용과 친분이 있는 사람이리라. 밖을 보니 덩치 큰 사람 셋이 대기하고 있었고 정약용은 대문으로 나가 이들을 맞이하였다.
“무슨 연유로 비변사 제조(提調)께서 폐족이 된 나에게 서신을 보내신단 말인가.”
“대감께서 말씀하시길 예의를 갖추어 인사를 올리라 하였습니다. 또한 대감님의 관직은 영돈령부사(領敦寧府事 - 정1품 돈녕부의 명예직)와 홍문관 대제학을 겸하고 계십니다.”
“홍문관 대제학이라니 감축드릴 일이로군. 자네들 고생이 많았네.”
정약용이 품 안에 서신을 넣자 서신을 가져온 사람들은 아예 절을 하듯 꾸벅 인사를 올렸다. 방으로 들어가 한참동안 편지를 읽은 정약용은 당황한 표정으로 말하였다.
“내 벗인 풍고가 서신을 보냈는데 여러 물건을 사들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졌던 것 같군. 자네들이 알기 쉽도록 성명만 말하자면 김조순의 귀에 들어갔다네.”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김조순이라면 가능한 일이다. 조선에서 왕을 제외하면 최강의 권력자인 김조순이 정약용의 행방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면 불가능하지 않다.
아마도 자신의 후임인 현 비변사 주교사(舟橋司)를 통해 물자의 흐름을 유추할 수 있었으리라. 일준이는 나에게 배운 이 시대 주요 인물을 떠올리며 호들갑을 떨었다.
“이거 큰 일 난거 아닙니까? 안동 김씨라 하면 나는 새도 떨어트리는 권세가가 아닙니까.”
“틀린 말은 아니지만 김조순이 이를 막고 있다네. 김조순은 실권을 장악해 정국을 주름잡고 있지만 적을 만들지도 않고 소극적인 태도로 임하는 사람이지.”
옛 친구의 부름을 들은 정약용은 한숨을 쉬었다. 정조 시절에 함께 활약한 추억을 되새기는 것 같더니 이내 마음을 정리한 듯이 말했다.
“김조순은 내가 뭔가를 만들려 하니 궁금하다 하였네. 다른 사람의 눈에 띄지 않게 새해가 오기 전에 만나 이야기를 논하기를 바라니 문제는 되지 않을 것 같다네.”
“저희도 함께 방문하면 아니 되겠습니까? 어차피 뭘 하려 하면 김조순의 눈을 피할 수 없으니 이번 기회에 저희를 소개하고 정로환도 소개하면 어떠하겠습니까?”
정약용이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는데 이건 위기가 아니라 기회다. 나라의 실권을 주름잡으면서도 소극적인 태도로 정권을 운영하는 김조순과 먼저 연줄을 만들면 이득을 챙길 수 있다.
또한 김조순은 그리 오래 살지 못하니 이용해 먹고 다른 정치세력으로 넘어가기 가장 알맞은 인물이다. 일준이는 어느 새 다가와 말리기 시작했다.
“잘못 얽히면 우리 출신부터 문제고 아예 일이 틀어질지도 모르지 않아? 너무 과감하게 나서는 것 아닌가? 잘못해서 우리를 범죄자로 엮으면 어떻게 대처하려고?”
“우리가 잘못한 일이 뭐가 있어? 서양에서 산 넘고 바다 건너 부모님의 유언을 이행하려 조선까지 온 사람인데 무슨 잘못을 저질렀다 할 수 있느냐 이 말이야.”
우리가 죄를 지은 것은 없다. 불법 밀입국? 애초에 조선에 입국한 벨테브레와 헨드릭 하멜도 억류를 당했지 죄인으로 취급당하지는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