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9화. 自今爲始(자금위시)
입춘이 지나자 봄기운이 물씬 느껴졌다. 유난히 추웠던 겨울도 결국엔 물러가니, 뜻밖에 새로운 소식을 맞이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제 곧 강가장에도 매화가 흐드러지겠군.”
계정에서 가장 큰 객잔에 자리를 잡고 앉은 찬영은 활기찬 장터를 내려다보았다. 언제 올지 모르는 벗을 기다리는 일이 그리 지루하지만은 않았다.
“이 망할 오랑캐 놈! 뭘 잘했다고 눈을 부라리는 것이냐?”
“제가 아닙니다!”
객잔 건너편 포목점에 작은 소란이 일었다. 누가 보아도 심술궂게 생긴 건장한 체격의 중년 사내가 고작 열두셋쯤 될까 말까 한 소년을 몰아붙이고 있었다.
“네가 아니면 누가 이런 짓을 하겠느냐? 호시탐탐 남의 것을 탐내는 핏줄이 어디 가겠어?”
“내가 가져갔다는 증좌가 있습니까? 애먼 사람을 잡아 족친 게 밝혀진다면 응당 책임져야 할 것입니다.”
찬영의 안면 근육이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어쩐지 소년의 모습이 과거 자신을 보는 듯도 하여 눈길을 거둘 수 없었다. 때마침 객잔 점소이가 곁을 지나자 농처럼 몇 마디 말을 붙여 보았다.
“퍽 시끄러우니, 무슨 일이 있나 봅니다?”
“아, 또 사달이 났나 보군요.”
“또라니요?”
마침 손님도 없던 차에 수다나 떨까 싶었던 점소이는 신이 나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 또한 저 소년과 비슷한 또래인지라 사정을 잘 아는 모양이었다.
“저들은 계정 유지 대야당 당주의 권솔들입니다요. 저 덩치 큰 사내가 당가의 살림을 책임지는 시하인입니다. 아주 매정하고 깐깐한 사람이지요. 저 소년은 말단 하인인데, 수해 전 저 아이의 어미를 사 왔을 때 딸려왔다 합니다.”
“같은 식솔끼리거늘, 왜 저리 시장 한복판에서 싸운단 말입니까?”
“저 아이가 들어온 이후부터 벌써 세 번이나 가주님 물건이 사라진다지 않아요? 하여 시하인이 못 잡아먹어 안달이랍니다.”
“도둑놈이라면 매질하여 내쫓으면 되지, 굳이 데리고 있으면서 속 썩는 이유가 뭡니까?”
“그게…….”
점소이는 괜히 눈치가 보이는지 주변을 쓱 훑어보았다. 그러더니 가까이 다가와 목소리를 한껏 낮췄다.
“심증은 있는데 증좌가 없다 합니다. 매번 물건이 사라진 자리에 저 아이밖에 없었는데, 정작 아무리 뒤져도 물건을 못 찾는 식이었지요. 매질하고 괴롭혀도 억울하다 하니 답답할 수밖에요. 게다가 저 약은 아이가 시하인이 몰아붙일 때마다 부러 장터까지 쫓아 나와 사람들 앞에서 악을 쓰니 어쩌겠어요? 여태 내쫓지 못한 이유가 바로 그 때문입니다. 저 댁 가주님이 체면을 엄청나게 따지거든요.”
“흐음, 거참 흥미로운 이야기군요.”
찬영은 점소이의 친절이 고마워, 주인장 몰래 동전 두어 개를 챙겨주었다. 뜻하지 않게 횡재한 그는 신이 나서 더욱 떠들어댔다.
“장터 사람들 상당수는 아이가 불쌍하다고 생각한답니다. 그러나 시하인이 저번에 와서 말하길, 무조건 한 번만 더 이런 일이 생기면 무슨 핑계를 대서라도 잡아낸다 했으니, 이번에는 그냥 넘어가지 않을 거예요.”
“계정 유지라면 집안에 하인이 많을 텐데, 어째서 저 아이만 잡아 족친답니까?”
“뭐, 그야 려국인이니까요.”
점소이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어깨를 으쓱 들어 올렸다. 아무리 억울해도 출신이 려국이라면 응당 의심을 받을 만하다는 암묵적인 동의였다. 눈치 없는 그는 찬영의 얼굴이 굳어지는 것도 모르고 몇 마디를 덧붙였다.
“저 아이도 참 딱하지요. 원래 불손하기는 했으나, 저리 안하무인은 아니었거든요. 지난겨울에 제 어미가 죽은 뒤로 지랄병이 난 탓이랍니다. 아무튼, 가주님 눈 밖에 났으니 제 명에 살기는 틀렸습니다.”
“하아.”
찬영은 점소이에게 동전 하나를 더 쥐여주고는 술 두 주전자를 시켰다. 헛헛한 속을 달래려고 주전자째로 술을 들이붓자, 그나마 좀 나아지는 기분이었다. 물끄러미 밖을 내다보니, 누그러지기는커녕 여전히 싸움이 한창이었다. 악을 쓰고 대드는 아이의 모습이 슬퍼 보이는 것도 같았다.
“단것만 찾는 어린애 입맛이 낮부터 술을 들이켜다니, 오늘은 해가 서쪽에서 떴나?”
“여어, 빨리도 나타나는군, 그래.”
뛰어왔는지 양 볼이 빨개진 서용이 숨을 헐떡거렸다. 오랜만에 만난 지기가 반갑기도 했지만, 표정이 썩 좋지 않은 것 같아 더럭 걱정이 앞섰다. 혹시 신교와 관련하여 큰일이 난 건 아닐까? 가슴이 쿵덕쿵덕 뛰었다.
“흥, 겁먹기는. 명색이 용문파의 차기 장문이라 추앙받는 이의 간이 이렇게 작아 어쩌나? 문파의 앞날이 뻔히 보이는구먼.”
“차기 장문은 무슨. 나는 다만 무학에 정진하고 싶을 뿐이네.”
“흥, 다시는 안 돌아갈 것처럼 굴어놓고는.”
찬영이 툴툴거리며 또 한 번 술을 들이부었다. 반가운 마음보다 서운한 마음이 앞서는 걸 보니, 그동안 벗이 꽤 그리웠던 모양이었다.
“그래, 교주님은 잘 계시는가?”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시지 뭐. 못 뵌 지 꽤 되었어. 나도 자네처럼 떠도는 소문으로 소식을 들을 정도라네.”
“흐음.”
거짓말임을 알았지만, 부러 캐묻지는 않았다. 신교의 일원이 될 수는 없었으나, 려국의 재건을 누구보다 응원하는 한 사람이었다. 하여, 가끔 여기저기서 신교와 얽힌 크고 작은 소동을 접할 때마다 은밀히 마음을 졸이곤 했더랬다.
“벌써 다섯 해가 지났군. 엊그제 있었던 일 같은데 말이야.”
“이금이 황제가 되어도 달라진 게 없으니, 그게 안타까울 뿐이지. 황좌에 앉게 해준 은혜도 모르고 말이야.”
그날 적우의 칼날이 이석이 아니라 이금을 향했더라면, 완전히 달라질 운명이 아니었던가? 그 은혜를 모르는 작금의 황제에게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차차 좋아지겠지. 작년부터 태봉을 경국에서 분리하고 군사도 물렸지 않았나? 또한, 객월(客月)에는 려국인의 사사로운 매매를 금지하였네.”
“과연 그럴까? 보게, 여전히 려국인이 짐승보다 못한 취급을 받지 않는가?”
대야당 소년의 이야기를 듣고 난 서용이 눈살을 찌푸렸다. 하필 용문파의 앞마당인 계정 한복판에서 일어난 일이라니, 더 지나치기 어려웠다. 심지어 삐쩍 마른 소년에게 매질하는 사내와는 일면식이 있었다.
“내가 가서 말려보겠네.”
“아니야.”
일어서는 서용을 막으며, 찬영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타인이 개입해서 말린다 한들, 저 아이의 모진 운명이 바뀌겠는가? 되레 얕은 친절이 독이 될 수도 있으니, 아예 간섭하지 않는 게 나았다.
“선운검파 소식은 들었는가?”
“얼마 전 영장문이 본파에 찾아와 뵈었지. 허리 아래쪽을 아예 움직이지 못하더군.”
“흥, 그 요망한 년만 신났겠네.”
소소정의 유언대로 선운검파의 장문은 영인이 이어받았다. 그러나 불구의 몸이 된 그녀는 장문으로서 턱없이 부족했다. 가장 아끼는 사제를 부장문에 앉히니, 기가 막히게도 가은이었다. 사실상 선운검파의 실세와 다름없어, 강호에서 그녀의 위명을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였다.
“엄밀히 따지면 자신의 몸을 상하게 한 원흉이건만, 한없이 의지하고 신뢰하더군. 너무 딱하여 아무 말도 못 하였어.”
“그러고 보면 인과응보란 말도 다 거짓이야.”
지금도 가은의 악행을 생각하면 소름이 돋는지, 찬영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조만간 선운검파의 관할인 고창에서 임무가 있기에 걱정도 되었다. 어쩐지 악연이 이어질 것 같은 불길한 예감 때문이었다.
“그래도 선운검파의 재정이나 위상은 더 나아졌다네. 아무래도 황석파의 간섭이 덜해진 탓이겠지. 고장로의 죽음 이후, 장문 감을 찾지 못해 난항을 겪지 않았나? 어찌어찌 장은과 같은 항렬에서 찾았으나 깜냥이 아니었던 모양이야. 예전의 황석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이 가라앉았네.”
“부자는 아무리 망해도 십 년은 간다고 하더니만, 천하의 황석파가 그리되리라고는 상상하지도 못했어. 그에 비하면 두타공파는 타격이 덜한가 봐?”
“정암 장문이 학문과 무공에 뜻이 깊으니, 제 문파에서 유학을 온다고 하더군.”
“하하. 세상 참 오래 살고 볼 일이야.”
지나간 일과 그동안의 안부를 묻고 답하니, 어느새 뉘엿뉘엿 해가 지고 있었다. 서용은 아쉬운 이별이 다가오자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차마 헤어지자는 말은 꺼내지 못하고, 해가 너무 빨리 사라지는 계절을 탓했다.
“이제 또 언제 보려나?”
“글쎄, 내달이 백 어르신의 생신이시니, 선물을 전하러 고대산으로 갈 예정이네. 그때 또 보세나.”
“그럼 나는 좀 더 일찍 출발하여 고문주님을 봬야겠군.”
“이제 어엿한 맹주님을 사사로이 뵙겠다니, 간이 배 밖으로 나왔구먼.”
두 사람은 헤어지기 싫은 마음에 속없는 농을 한참 더 주고받았다. 그러나 헤어짐이 있어야 다음 만남이 있는 법. 더는 지체할 수 없을 때까지 뭉그적거리던 그들은 드디어 자리를 떨치고 일어났다.
“이제 어디로 가는가?”
“글쎄, 발길 닿는 대로?”
친우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서용은 결국 마음에만 담아두었던 그 말을 꺼내기로 했다. 그것은 경국인이자 용문파 제자로서가 아닌, 찬영을 아끼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얼마 전 망운표국의 국주가 문주님을 찾아왔네. 누군가가 귀한 물건을 훔쳐 가겠다, 예고장을 보냈다더군. 아마도 요즘 소문이 자자한 녹우(綠雨)가 아닐까 의심하고 있네. 혹여 그쪽으로 가거든 몸조심하게.”
“하하, 어디 구름이 가는데 비가 안 올 수 있겠는가? 내리면 맞고, 그치면 말릴 테니 아무 걱정하지 마시게.”
친우의 염려하는 마음을 어찌 모를까? 찬영은 되레 큰소리를 치며 정다운 인사를 건넸다. 이제 헤어지면 언제 다시 만날지 모르는 이별의 순간은,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았다.
“부디 고대산에서 다시 만나세.”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찬영의 뒷모습을 쫓으며, 서용은 남몰래 눈가를 훔쳤다. 언젠가 푸른 비가 모여 냇물이 되고, 물줄기가 흘러 바다로 가는 그날을 기원하면서.
휘익!
대야당을 뛰어넘은 찬영은 곧바로 소년이 갇힌 창고로 숨어들었다. 얼마나 인정사정없이 매질했는지 숨이 붙어 있는 게 신기할 정도였다. 그런데도 소년의 정신은 말짱했다. 낯선 이가 지붕에서 뛰어내렸는데도 놀라기는커녕 안광을 빛내며 노려보는 것이었다.
“누구십니까? 혹시 제 목숨을 거두러 온 겁니까?”
“흐음, 네가 남몰래 죽여야 할 정도로 대단한 녀석은 아닌 것 같은데?”
찬영은 소년의 기개가 마음에 들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 모습이 당가의 사람은 아닌 듯하여 이내 소년의 긴장이 풀어졌다.
“가주의 금두꺼비를 네가 훔쳤느냐?”
“…….”
“보다시피 이쪽 사람이 아니니, 솔직히 말하렴.”
“훔쳤습니다.”
“하하, 요놈 봐라. 아주 앙큼한 도둑놈이로구나.”
“그러나 도둑질이 아니라 복수입니다.”
“뭐?”
“어차피 도둑질하든 안 하든, 귀한 것이 없어지면 제일 먼저 의심을 받는 건 접니다. 제가 려국인이기 때문이지요. 하물며 어머니까지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마당에, 어찌 홀로 분노를 삭인단 말입니까? 뭐라도 갚아주고 싶을 뿐입니다.”
“고놈 참. 킁!”
찬영은 코끝이 시큰해져 괜히 코를 크게 풀어 보았다. 보면 볼수록 자신과 똑 닮은 모습에 진심으로 마음이 쓰였다. 부당한 대우를 받으며 목숨을 다하기에는 아까운 인재이기도 했다.
“이름이 무엇이냐?”
“길선(吉善)입니다.”
“성은?”
“없습니다.”
“자, 받아라.”
“어?”
소년의 손에 쥐여준 것은, 약지만 한 크기의 은병 하나였다. 세상 수전노인 찬영이 내어주었을 때는 진정 큰 결심이 필요한 일이었다.
“태봉으로 가는 여비로 써라. 그곳에서 약선을 찾아 녹우(綠雨)의 소개로 왔다 하면 받아줄 것이다. 그곳에서 사람답게 살아보아라.”
“태봉이요?”
더는 대답하기도 귀찮은지 찬영이 옷자락을 툭툭 털며 일어섰다. 창고 한 편 벽 위에 잠시 머무는가 싶더니 푸른 빛으로 雨(우) 자를 적어놓았다.
“어째서 저처럼 보잘것없는 이를 구해주십니까?”
“향기로운 패랭이꽃이 꽃을 피우도록 지나가던 녹우가 잠시 머물렀다고 생각해라. 원래 내가 귀한 것을 훔쳐 갈 때 표식을 남겨두는데, 오늘이 어느 때보다 그러하구나. 길선아, 네 이름을 되새겨 보아라. 너는 아주 귀한 사람이란다. 그러니 꼭 이름처럼 살아야 한다.”
“…….”
길선은 차마 대답하지 못하고 고개를 떨궜다. 멍들고 상처 난 발등 위로 굵은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세상에 모두 붉은 모란꽃만 사랑하여 정원에 가득 심고 가꾸는구나. 누가 이 거친 초야에 좋은 꽃 떨기 있는 줄 알기나 하랴. 예쁜 모습은 연못 속의 달을 꿰뚫었고, 향기는 밭두렁 나무의 바람에 전하는구나. (정습명, ‘석죽화(石竹花)’중에서)”
은인의 모습이 점점 멀어져 어느덧 보이지 않게 될 때까지, 길선은 허리를 깊이 숙이고 일으킬 줄을 몰랐다. 작고 거친 손에 은병 하나를 꼭 쥐고서.
*** 자금위시(自今爲始)
: 지금부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