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8화. 雲外蒼天(운외창천)
이석의 몸에서 행덕을 뽑아 들자 시신이 벌렁 나자빠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적우가 한 마리 학과 같이 유려한 몸짓으로 교위들의 검을 피하니 순식간에 공터는 아수라장이 되었다. 가물거리는 횃불 사이로 멧돼지처럼 돌진하는 그의 모습은 악귀가 따로 없었다. 여섯이나 되는 교위들은 그저 방어에 급급할 뿐이었다.
“무생!”
그때, 지켜보던 이금의 다급한 외침이 들렸다. 장승처럼 서 있던 거대한 그림자가 쏜살같이 적우를 향해 들이닥치니 미처 운선이 막을 새가 없었다.
챙
챙
챙
황실 최고의 호위 무사의 개입으로 상황은 빠르게 정리되었다. 여섯 교위가 퇴로를 막고 무생이 공격을 퍼부으니, 약점이 없을 것 같던 적우의 동작이 점차 느려졌다. 양 날개를 접었다 피며 펄떡이던 그가 잠시 숨을 고르는 순간, 묵직한 무생의 검날이 옆구리에 정확히 꽂혔다.
“윽!”
“사형!”
퍽!
그제야 사정거리 안으로 들어온 운선이 일 권을 날렸다.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는 즉시 무생은 몸을 비틀었으나, 완전히 흘려보내지 못하고 어깨에 맞고 말았다. ‘뚝’ 하는 소리와 함께 왼쪽 팔이 골절되었다. 그러나 무생은 비명조차 지르지 않고 뒤로 물러났다. 임무를 완수했으므로 더는 운선을 상대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네 이놈!”
운선은 기어코 무생을 죽일 작정이었다. 아니, 그의 주인인 이금까지, 가능하다면 이곳에 모인 모두를 죽이고 싶은 분노가 치솟았다. 기혈이 들끓고 맥박이 빠르게 뛰더니 곧 온몸의 핏줄이 솟구쳐 올라왔다.
“선아, 아니다. 그게 아니야! 내 뜻을 그르칠 셈이냐?”
“형님!”
적우의 차가운 손이 닿는 순간, 불덩이 같던 운선의 몸에 바르르 경련이 일었다. 아득해지던 정신이 돌아오고 핏발이 섰던 눈에 눈물이 맺혔다. 아우가 완전히 마음을 가라앉을 때까지 기다리는 그의 얼굴에 은은하게 달빛이 내리비췄다.
“선아, 보았느냐?”
“네?”
“학유우다.”
“네?”
금방이라도 넘어갈 것처럼 숨을 헐떡이면서도 적우의 얼굴에는 웃음기가 가득했다. 가슴 속에 응어리졌던 무언가가 전부 해소된 표정이었다.
“나는 이제 학처럼 자유로워졌으니 복수는 필요 없다.”
“어째서, 어째서 이리 무모한 행동을 하신 겁니까? 형님 없이 저 혼자 무엇을 해내란 말입니까?”
원망과 자조가 섞인 아우의 울먹임에 형님의 마음이 먹먹해졌다. 그러나 천하의 쾌도난적 적우가 아니던가? 부러 더 큰소리를 치며 허세를 떨어보았다.
“기다리고 견디는 건 영 내 취향이 아니라서 말이다. 사내라면 응당 대의를 위해 칼을 휘둘러야 하며, 설사 죽을지언정, 물러서지 않는 법! 이것이야말로 나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끝이 아니겠느냐?”
“그럼 왜 옆구리를 내어주셨습니까? 왜?”
“그것이 바로 학유우의 초식이란다. 옆구리를 내어주고 날개를 얻는다. 우리 숙부님이 창안하신 무공의 뜻을 이 어리석은 질아(姪兒)가 이제야 이해했구나. 하하, 참으로 대단한 초식이었다.”
붉은 선혈을 울컥 뿜어내면서도 배시시 웃는 그의 모습은 진정으로 행복해 보였다. 반면, 운선의 얼굴은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았다. 사형 중 그 누구보다도 믿고 따랐던 적우였기에 이 끔찍한 결과를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이미 늦었음을 알면서도 어떻게든 살리고 싶어 연신 설이를 재촉했다.
“설아, 제발 도와다오.”
“아니다, 그만해라. 이미 틀렸다.”
“사형, 무시하지 말아요. 제가 누굽니까? 약선이잖아요. 기필코 살릴 거예요.”
눈물이 차올라 연신 소매로 닦아내면서도, 설이의 손은 멈출 줄 몰랐다. 그러나 갈라진 상처에서는 여전히 폭포수처럼 피가 쏟아졌다. 금창약을 아무리 쏟아부어도 소용이 없었다.
“선아, 나는 내 방식대로 대의를 이루었다. 그러니 이제 네 의지대로 뜻을 펼치려무나.”
“형님…….”
흐려지는 눈 속에 오직 운선을 담은 채, 적우는 마지막 힘을 짜내어 호탕하게 웃어 보였다. 평생을 갈망하던 자유를 마침내 이루니, 조금도 슬프지 않았다. 다만 어린 아우에게 남긴 무거운 짐 때문에 미안할 따름이었다.
“그만, 인제 그만 말씀하세요.”
설이가 작은 두 손으로 상처를 꽉 누르며 울부짖었다. 숨을 들이쉬고 내쉴 때마다 울컥 피를 토해내니, 그의 목숨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 수 있었다.
“형님, 이 못난 아우를 두고 가시면 아니 됩니다.”
“선아, 미안하다.”
마지막 숨을 뱉어내며, 적우의 커다란 눈이 스르르 감겼다. 마치 깊은 잠을 자는 것 같이 평온한 얼굴이었다. 행덕이 아닌 사랑하는 아우의 손을 꽉 그러쥐고서.
“사형!”
슬픔을 이기지 못한 설이가 적우의 시신을 감싸 안았다. 서글픈 곡소리가 숲을 가득 메워 메아리가 되었다. 그런데도 운선은 차마 목놓아 울지 못했다. 믿어지지 않아서, 이 모든 게 자신의 탓인 것 같아서, 그의 얼굴을 바라보기도 힘이 들었다.
“운선아.”
“…….”
그때, 부드러운 손이 어깨 위에 살포시 내려앉았다. 누구보다 그의 슬픔을 잘 아는 주운이 바로 곁에 있었다. 운선의 무거운 머리가 천천히 그녀의 품을 파고들었다. 가슴 속에서 커다란 바윗덩어리가 울컥 튀어 올라 꾹 눌러 두었던 감정이 쏟아져 나왔다.
“그의 표정을 보렴. 내가 본 중에 가장 행복한 얼굴이구나. 선아, 그의 선택일 뿐 절대로 네 탓이 아니다. 그러니 울어도 된단다.”
“아아…….”
그제야 터져 나온 울음은 쉬이 멈춰지지 않았다. 소리도 내지 못하고 숨죽여 우는 모습이 마치 어미를 잃은 어린아이 같았다. 모든 것이 멈춰 버린 가을밤, 오직 비명 같은 곡소리만이 적막한 숲속을 가득 메웠다. 그 장면이 너무 처연하여 그 자리에 있는 누구도 그의 죽음을 비난할 수 없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횃불이 아니어도 서로의 얼굴이 보일 때쯤, 기나긴 울음이 잦아들었다. 암묵적으로 만들어진 소강상태가 끝이 나자, 하나둘 부스럭거리며 현실로 돌아왔다. 여태 눈치를 보던 이금은 드디어 자신의 차례가 왔음을 깨달았다.
“서로 목숨을 나눠 가졌으니, 일단 물러서겠다. 그러나 감히 경국의 태자를 시해한 죄는 차후 반드시 묻겠다.”
눈물을 주르륵 흘리는 이금의 연기는 나무랄 데가 없었다. 그러나 그의 속내를 모르는 자 또한 없었다. 그토록 격렬한 황위 다툼이 뜻하지 않게 일단락되었으니, 결국 이 지루한 싸움의 승자는 누가 뭐래도 이금이었다.
‘강운선, 약속한 대로 물줄기를 막지는 않으마. 그러나 주제도 모르고 강이 되려 한다면 둑을 쌓고 모래를 부어 말려 버릴 것이다.’
일국의 태자가 죽었다는 슬픔을 형식적으로나마 표현하고 난 후, 황실의 사람들 모두 자리를 정리했다. 눈치만 살피던 다른 이들도 너나 할 것 없이 떠날 채비를 하니, 적막했던 공터가 다시금 부산스러워졌다.
“아아, 여기까지 온 수고가 다 헛일이 되었다. 되레 스승님만 잃고 말았으니 비참하고 부끄럽구나.”
이석의 죽음으로 가장 낭패를 본 이는 누가 뭐래도 천서국이었다. 자홍은 아쉬운 마음을 감출 수 없어, 쉬이 자리를 뜨지 못했다. 자신의 능력만 믿고 자만한 결과치고는 너무 과한 대가였다. 언젠가 다시 만난다면 결코 허망하게 당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씁쓸한 마음을 안고 돌아서는 발걸음이 무겁기만 했다.
그의 뒤를 사호세주의 남은 둘이 묵묵히 따라나섰다. 사형제들의 수급을 품 안에 안은 금형권은 연신 눈물을 쏟았다. 남의 것을 탐한 죄가 이토록 클 줄 알았다면 함부로 욕심내지 않았을 텐데. 후회와 죄책감이 가슴을 무겁게 짓눌렀다.
‘예, 려국을 너무 우습게 본 탓입니다. 가는 물줄기도 바다에 이를 수 있음을 간과하였습니다.’
평소와 달리 축 처진 오라비의 등을 따르며, 아란이 아련한 눈길로 운선을 바라보았다. 문득 가슴 속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몽글몽글한 감정이 샘솟았다. 비록 적으로 만났으나 깊은 감동을 준 그를 평생 잊지 못할 것 같았다.
황실의 사람들이 모두 떠나고 난 뒤, 정파의 무인들도 더는 이곳에 있을 이유가 없어졌다. 각자 해독약을 받아들고 무리를 지어 흩어지니, 아무 일도 없었던 것 같았다.
“아아, 악귀 적우마저 죽었으니 신교도 끝이구나.”
“이제 더 따질 이유도 없다.”
다수의 형제를 잃었음에도 정파의 무인들은 대부분 가슴을 쓸어내렸다. 악명을 떨치던 칠원성군이 모두 죽은 마당에, 신교에 대해 더는 두려울 게 없어졌다. 그나마 찝찝함이 가신 덕인지 표정이 한결 밝아 보였다. 희대의 살인귀 적우의 죽음으로 태자의 죽음이 묻혀 버린 격이었다.
“강교주, 고생하였습니다.”
모든 사람이 흩어지고, 드디어 고대산파만이 자리에 남았다. 늙고 지친 몸을 움직이기도 힘들었으나 백천이 먼저 운선에게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한참 어린 후배에게도 존경과 신뢰를 담아 예를 다하니, 그 관홍한 인품에 절로 고개가 숙어졌다.
“선배님, 몸은 어떠십니까? 사실 선황련의 독은 몸에 남지 않습니다. 이 환을 복용하시면 혹여 생길지 모를 부작용도 없을 것입니다.”
“압니다.”
백천이 껄껄 웃으며 그의 손을 가만히 잡아주었다. 평생 죄책감과 책임을 지고 가야 할 그가 안타까워, 위로라도 전하고픈 마음이었다.
“부디 몸조심하십시오.”
“선배님, 감사합니다. 후배, 언제고 꼭 찾아뵙고 다시 가르침을 청하겠습니다.”
백천의 인사에 운선은 큰 절로 답하였다. 그와 고대산파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억울한 누명을 어찌 벗었겠는가? 그 은혜를 반드시 갚겠다고 다짐하며, 진심으로 예를 다한 인사였다.
“강교주님, 인연이 닿거든 또 뵙는 날이 있겠지요. 그때까지 부디 무탈하시길.”
“네, 문주님은 언젠가 오대산검의 큰 기둥이 될 것입니다. 지금처럼 곧은 마음 변치 마십시오.”
어느덧 깊은 신뢰가 쌓인 두 사람은 간단한 인사말로 이별을 고했다. 비록 나아갈 방향은 다르지만, 뜻이 같은 그들이었기에 많은 말이 필요치 않았다. 그리고,
“언젠가 강가장에 다시 매화가 피거들랑, 우연처럼 다시 만나자꾸나.”
“주운.”
눈물 대신 미소를 남기고, 주운마저 그의 곁을 떠났다. 한 번 끊어진 인연은 다시 이어붙일 수 없기에, 여전히 그리우면서도 떠나보낼 수밖에 없었다. 그 애절한 마음을 아는 설이만이 홀로 눈가를 훔칠 뿐이었다.
“하여, 이제 어쩌실 겁니까?”
찬영이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괜히 방정을 떨었다. 모든 일이 마무리되었으니, 다음을 도모해야 할 터였다.
“그래, 은병과 보물은 모두 잘 숨겼느냐?”
“네, 양이 너무 많아 하마터면 제때 끝내지 못할뻔했습니다. 습지의 안개가 도왔으니 망정이지요.”
“그러게 말입니다. 다들 독 향과 안개에 취해, 그 밑에 진짜 보물을 파묻는데도 모르더이다.”
“뿐입니까? 애초에 열쇠는 우리가 전부 가지고 있었건만, 가은 낭자가 가진 가짜 열쇠를 철석같이 믿더란 말입니다. 덕분에 보물을 숨길 틈을 내었으니 참으로 대단한 계획이었습니다.”
운선은 대답 대신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이 얼마나 오랜 준비였던가? 일부러 가은에게 가짜 열쇠 네 개를 빼앗긴 때부터가 본격적인 시작이었다. 기실, 보물의 존재가 무엇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으나, 적어도 려국을 재건할 기반이 될 정도의 가치라는 것에 강한 확신이 있었다. 그리고 모든 것이 예상대로 완벽하게 들어맞았다. 무엇보다 그들에게 필요한 건, 틈. 운선이 자홍과 이금을 만나 협상하는 동안, 찬영과 서용의 임무는 따로 있었다. 동굴 속에 있던 수백 개의 은병과 보물을 숨기는 것.
“만약 다시 하라고 한다면 차라리 다리가 부러지는 게 낫겠습니다.”
볼멘소리하면서도 찬영의 얼굴에는 뿌듯한 미소가 가득했다.
“모두의 힘을 합하지 않았다면 절대로 성공할 수 없는 계획이었다.”
그러나 운선은 마냥 기뻐하지 못했다. 적우의 마지막 희생으로 완성된 대의가 아니었던가? 목숨을 바쳐 운선의 뜻을 따라준 그를 위해서라도 반드시 려국을, 려국인을 구해내겠다는 다짐을 해보았다.
‘강이 되고 바다가 되기까지 그치지 말고 흘러갈 것이다. 수많은 이의 처절한 희생을 결코, 헛되게 만들지 않을 것이다.’
산등성이에서 붉은 해가 서서히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어느덧 금천의 구정에도 짙은 안개가 걷혀, 갈대 이파리마다 맑은 이슬이 맺혔다. 곧 밤이 낮보다 긴 겨울이 오겠지만, 그리 오랜 기다림은 아닐 것이었다.
“설아, 태봉으로 가자.”
“…….”
설이는 대답 대신, 운선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그에게는 이보다 더한 응원과 위로가 없었다.
“차라리 나를 죽여라!”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다 못해 목에서 피가 날 지경이었다. 장은은 진심으로 죽고 싶었다. 어둡고 습한 동굴 안은 자그마한 틈 사이로 비치는 햇빛이 전부였다.
“감히 나를 가두고도 무사할 성싶으냐? 내가 누구냐? 오대산검의 무림 맹주다!”
“그전에 나라를 팔아먹고 동족을 배신한 매국노이지요.”
장은의 독설에도 운선은 표정 하나 바뀌지 않았다. 차분하게 조곤조곤 반박하니, 더 매정하고 독해 보였다.
“이곳에서 당신이 그토록 없애고 싶던 려국의 역사를 지키십시오. 그것이 저와 려국의 백성들이 내리는 벌입니다.”
“뭐? 차라리 죽여! 죽여달란 말이다.”
“죽음으로 갚기에는 당신이 저지른 죄가 너무 크지 않습니까?”
물끄러미 그를 내려다보던 운선의 입가가 실룩거렸다. 바닥을 뒹구는 장은에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리고는 그의 옹졸한 귀를 잡아당겨 마지막 한 마디를 덧붙였다.
“자업자득(自業自得)”
“안돼, 싫어!”
절망으로 몸부림치는 장은을 남겨두고, 운선은 동굴을 떠났다. 이제 이곳으로 향하는 출렁다리까지 끊어버리면 완전한 고립이었다. 누구도 나갈 수 없고 들어올 수 없는 이곳에서 자신을 들여다보는 것. 그것이야말로 완벽한 속죄가 아닐까?
“어?”
걸음을 멈춘 운선의 머리 위로 차가운 무언가가 톡톡 떨어졌다. 어쩐지 마음이 시큰하여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스승님, 백부님, 그리고 사형들의 얼굴이 차례로 스쳐 지나갔다.
“운선아, 네 이름대로 살아라.”
“네, 그리하겠습니다. 스승님.”
정체 모를 그것을 소매로 쓱 닦아내며, 운선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새로운 려국의 땅에 내린 첫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