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7화. 季布一諾(계포일낙)
“흥! 그래서 뭘 어쩌겠다는 거냐? 이깟 석판으로, 려국이 다시 일어선다고 천명이라도 할 셈이냐? 그래봤자 이 후진 땅덩어리에 고작 너희 신교만이 꿈틀거릴 뿐이다. 네놈이 자만하여 잊었나 본데, 여기 있는 수많은 무인이 너희를 가만둘 성싶으냐? 차라리 잘 되었다. 이따위 것들의 출처를 알게 뭐냐? 네놈 입만 닫으면 될걸. 내 이 자리에서 다 쓸어 버려주마.”
대단한 생각이라도 난 것처럼, 호기롭게 일어선 이석이 운선을 향해 연신 삿대질을 해댔다. 사실 그랬다. 이 석판 따위가 뭐라고? 그저 오늘의 일을 지우면 되는 일. 저 건방진 신교 놈들을 다 죽여버리면 망한 나라 따위 역사에서 영원히 사라질 것이었다.
“저를, 신교의 형제들을 죽인다 칩시다. 그러나 여기 계신 이분들, 그리고 저하의 가슴에 남은 기억은 어쩌실 겁니까? 석판을 태운다 한들, 역사가 사라지겠습니까?”
“뭐야?”
이석은 순간 움찔하였으나 곧 다시 노발대발하였다. 기세가 수그러든 오대산검 수장들을 다그치는 한편, 옆에 멀뚱히 앉은 이금을 향해 일갈했다.
“아무리 우리가 동복형제가 아니라 해도, 형님이 이리 모욕을 당하는데 구경만 할 테냐? 네가 나서서 저 벌레들을 박멸하여라!”
“하아, 저는 그러고 싶지 않은데요.”
“뭐야?”
선뜻 나서지는 않아도 거절할 줄 몰랐던 터라 이석은 사뭇 당황하였다. 오냐, 투기심에 네가 정신이 나간 모양이구나. 경국이, 황실이 모욕을 당하는 상황에서도 알량한 자존심 때문에 뒤로 물러서는 아우에게 화가 치밀어올랐다.
“저자의 말이 맞습니다. 석판은 보물이 맞습니다. 여기에 있는 모두를 죽이지 않는 한 그 사실은 변하지 않아요. 아, 모두에는 형님과 저도 포함이지요. 게다가 아까 저자에게 약조하지 않았습니까? 보물을 내어주면 군사를 물리겠다고요. 그것마저 깬다면 저 많은 강호의 백성들이 황실을 뭐로 생각하겠습니까?”
“뭐? 너, 너!”
자못 당황한 이석의 눈동자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자신의 편이 또 누가 있을까? 당연하게도 자홍 쪽으로 시선이 돌아갔다. 어쨌든 동맹을 맺었으니 도움을 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었다. 그러나,
“저하와 약조한 바는 보물을 얻어가는 것까지였으니, 저는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신화정과 무역권에 대한 것은 차후 다시 논의하지요. 또한, 사호세주의 죽음과 관련한 책임도 말입니다.”
자홍은 웃음기 하나 없는 얼굴로 대답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차피 강운선과 신교가 날뛰어봤자 이미 망한 나라가 하루아침에 재건되지는 않을 터, 이 망신살을 유예하여 계속 치욕스러움을 느끼고 싶지 않았다. 호위에 일러 석판의 일부를 챙기고 사호세주의 수급을 거두는 것으로 자리를 정리하고자 했다.
“이, 이! 여봐라. 신교와 강운선을 죽여 경국의 위상을 바로잡을 것이다. 명을 따르지 않는 오대산검의 장문들은 즉시 참수한다.”
이석은 포기하지 않았다. 이금이, 염자홍이 도와주지 않아도 괜찮았다. 약조고 나발이고, 가슴속에 치받쳐 올라오는 분노를 풀어야만 숨이 쉬어질 것 같았다. 어차피 강호인들이야 경국의 백성이 아닌가? 이들을 움직이면 몇 명 되지도 않는 신교 따위야, 한주먹거리였다.
아니나 다를까, 태자가 펄쩍펄쩍 뛰며 발광하자 강호인들 역시 태도가 바뀌기 시작했다. 황명을 거역하면 역심을 품은 것과 다르지 않았다. 그 핑계로라도 신교를 없애고 싶은 마음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아, 그리고 선물이 하나 더 있습니다. 저하께서 혹여 그러실까 봐 저도 대비를 했지요. 설아!”
분위기가 험악해지자 운선이 다시 입을 열었다. 당황하기는커녕 한껏 여유 있는 말투였다. 누가 보아도 조롱 가득한 얼굴로 설이를 불러 세우니, 기다렸다는 듯 그녀가 성큼 앞으로 나섰다.
“금천 습지에서 모두 독한 경험을 하셨지요? 왜 그랬을까, 내가 혹시 미쳤나 싶으셨을 겁니다. 당연히 아니지요. 바로 려국의 진귀한 꽃 때문이거든요. 자, 여기 보세요.”
뭐가 그리 신나는지 설이는 연신 히죽거렸다. 손에는 작은 보라색 꽃잎의 풀을 든 채였다.
“일명 깽깽이꽃, 선황련이라고도 하지요. 이게 우스워 보여도 독성이 꽤 강하답니다. 만약 제가 해약을 드리지 않으면 열흘 뒤에 다시 발작을 일으킬 거예요. 그다음엔 닷새, 그다음은 사흘, 나중엔 한 시진마다 환각을 볼 테니 차라리 죽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들지도 몰라요. 아! 해약은 저에게만 있으니, 허튼 생각은 애초에 하지도 말아요.”
“이런 망할!”
발을 동동 굴러보아도 더는 방법이 없었다. 그 역시 끔찍한 습지의 광란을 경험하고 난 후였다. 그 지옥을 또다시 겪느니 차라리 자존심을 굽히는 게 더 나으리라. 잔뜩 경계하고 선 교위들을 뒤로 물리고 주섬주섬 석판을 챙겼다. 무리한 원정길에 수십의 수하를 잃고 망신만 당했으니, 처참한 심경을 감출 수 없었다. 그러다 문득 또 다른 생각이 들었다.
‘돌아가면 이 일의 책임을 금이에게 돌려야겠다. 그의 수하가 천서국의 태사를 죽였으니, 그 책임을 물면 그만. 혹여 의심이 든다 해도 폐하께서는 응당 내 편을 들어주실 터, 그리 나쁜 상황은 아니다. 서이국을 잘 달래 손해를 최소화한다면 어찌어찌 잘 넘어갈 것이다.’
이석마저 꼬리를 내리고 돌아서자, 이제 누구도 그들을 향해 병장기를 겨누지 않았다. 세차게 들어선 불안과 공포는 그 어떤 욕망보다 강렬했다. 하물며 세상 당당하던 오대산검의 고수들도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입술을 달달 떨었다.
“이대로 선물을 받아서 떠나시지요.”
운선의 마지막 선심이 기가 막히게 맞아떨어졌다. 난동 피우는 사람 없이 순순히 그들의 지시에 따라 움직이니 그 어느 때보다 평화로웠다. 문파 별로 이동하여 순서를 정한 뒤, 천천히 왔던 길 방향으로 줄을 섰다. 이대로라면 더 이상의 희생은 없을 터였다.
“강교주, 뜻대로 되셨습니까?”
“부족하나 만족하였습니다.”
이금의 날카로운 질문에도 운선은 온화한 미소를 잃지 않았다. 이석을 살려두게 되었으니, 완전하게 성공한 계획은 아니었으나 더 큰 희생이 없는 것만도 다행이었다. 어찌 보면 서로에게 공평한 거래였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 밖의 일은 경국 안에서 해결하면 될 일, 그 승자가 좀 더 려국인에게 관대하기를 바랄 수밖에.
“훗날 제가 황위에 오르더라도 순전히 제 운과 실력이지 강교주의 도움은 아니게 되었군요. 거래는 없던 일로 하지요. 또한, 백형진의 죽음으로 더한 위기를 맞게 된 부분도 책임을 물어야겠습니다.”
“그 일련의 과정이 제 탓은 아니나, 정 그러시겠다면 막을 도리가 없지요.”
운선의 정중한 인사를 마지막으로 두 사람의 날 선 대화는 끝이 났다. 씁쓸한 마음을 삼킨 채로 이금의 등을 바라보고 선 그의 모습이 어쩐지 처량 맞아 보였다. 아직 경국 안에서 핍박받는 수많은 려국인이 있을진대, 그들이 살만한 곳을 마련할 때까지 그 길고 끔찍한 삶을 어찌 견뎌줄지 아득하기만 했다.
“설아, 운선이가 원하는 게 공생이더냐?”
“네, 안타깝지만 이게 최선입니다.”
웬일로 얌전히 물러나 있던 적우가 설이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뭔가 석연치 않은 표정이었는데, 그렇다고 흥분하거나 화가 난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그럼 저 두 황자 놈을 다 살려 보낼 작정이냐?”
“본래는 아니었지만 일이 꼬였으니 어쩔 수 없지요.”
“어느 쪽이냐?”
“네?”
“운선이에게 필요한 쪽 말이다.”
숲의 어둠은 금세 찾아와서 어느덧 주변이 캄캄하였다. 신교도들이 준비한 횃불을 하나씩 밝혀 어둠을 쫓으니 무리가 둘러선 동굴 앞 공터만이 대낮처럼 밝았다. 가장 침울한 분위기의 두타공파부터 순서대로 빠져나가니 금세 긴 꼬리가 만들어졌다.
“강교주, 무엇 하나만 묻겠습니다.”
“네, 말씀하시지요.”
그다음 행렬의 순서는 용문파였다. 고작 십여 명의 제자만을 거느리고 나서는 용가현은 착잡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그런데도 그에게는 아직 마지막 할 일이 남아, 쉬이 떠날 수 없었다. 비장한 얼굴로 운선의 앞에 마주 섰다.
“제 둘째 아우 송현을 죽인 이가 누구입니까? 정말 천추 이서문이 맞습니까?”
“아닙니다.”
“증좌가 있습니까?”
“비록 증명할 수 없으나 대사형은 비겁한 수를 쓰실 분이 아닙니다.”
“하아.”
용가현의 눈동자에 붉은 불길이 아른거렸다. 이 비참한 싸움의 시작은 바로 금왕 용송현의 억울한 죽음이었다. 비록 모든 것이 오대산검의 잘못이었다고 인정하더라도, 아우의 한까지 모른 척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때,
“아닙니다. 사숙님을 해한 이는 장은이었어요.”
두 사람 앞에 나선 이는 다름 아닌 서용이었다. 그리고 그 뒤에는 처연한 얼굴의 가은이 함께 있었다.
“네 맞습니다. 장은이 풍림 대협을 시켜 벌인 일입니다. 하여 강교주님, 절대로 그자를 살려두지 말아야 합니다. 네?”
가은이 굳이 증언하고 나선 목적은 단 하나였다. 장은의 목숨을 끊는 것. 그것이 바로 친 오라비 같던 은률의 복수이며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발판이었다. 자신의 치부를 모두 아는 장은이 살아나 나불거린다면 어떤 가시밭길이 펼쳐질지 몰랐다. 혹여 운선이 살려두더라도 용가현까지 나선다면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우리라. 그녀의 간악한 속셈이었다.
“아아, 정말 어리석었구나.”
자초지종을 다 들은 용가현은 바닥에 머리를 박으며 울먹였다. 편협한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고 제자들을 사지에 몰았으니, 이 자리에서 머리가 터져 죽어도 갚지 못할 죄였다.
“사부님, 잘잘못을 따져 무엇하겠습니까? 이곳에 있는 그 누구도 어리석지 않은 자가 없거늘, 깨닫고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으면 될 일입니다.”
“아아, 너는!”
가현은 한눈에 서용을 알아보았다. 흐려진 마음에 내친 제자건만, 한시도 후회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죽은 줄 알았던 그가 살아 눈앞에 있으니 실로 구원을 받은 기분이었다.
“습지에서 사숙의 아드님 시신을 찾았습니다. 이 모든 게 인과응보려니 여기시고 부디 다시 일어서십시오. 저는 한때 버림받았으나, 지금껏 사부님을 존경하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아아.”
가현은 봉명의 시신과 서용을 동시에 끌어안은 채로 한동안 눈물을 멈추지 못했다. 모든 것이 크나큰 업보이니, 고작 자신의 목숨 하나로는 갚을 수 없었다.
“그래, 살겠다. 살아서 갚아나가겠다.”
모처럼 그의 얼굴에 옅은 희망의 빛이 비쳤다. 그것은 죄책감을 초월한 속죄의 다짐이었다. 그리고 그 시작은 서용에 대한 고마움이었다. 따뜻한 그의 손을 또 한참 잡아 쥐었다가 드디어 발걸음을 옮겨보았다. 석판에 새겨진 청운검법의 한 구절이 가슴에 탁 들어박혔다.
“운외창천, 어두운 구름을 벗어나면 맑은 하늘을 볼지니.”
때마침 밝은 달이 구름 밖으로 고운 얼굴을 내밀었다. 의기소침해진 강호인들의 머리 위를 가만히 쓰다듬으며 은은한 미소를 짓는 것도 같았다.
“으아아아!!!”
그때, 벼락같은 외침이 적막한 분위기를 일순간에 깨뜨렸다. 전혀 예측하지 못한 상황에, 운선은 물론이고 그곳에 있던 그 누구도 멍하니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으억!”
“생각해보니 이건 내 체질이 아니란 말이지!”
“사형!”
운선이 한달음에 뛰쳐나갔을 때는, 이미 적우의 행덕이 이석의 가슴을 꿰뚫고 지나간 다음이었다. 행덕의 칼날을 타고 검붉은 피가 뚝뚝 바닥에 떨어졌다.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절명한 이석의 고개가 뚝 떨어지는 순간, 여섯 교위의 검이 한곳으로 몰려들었다.
“죽어라!”
*** 계포일낙(季布一諾)
약속을 반드시 지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