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무십일홍-206화 (206/209)

206화. 迷途知返(미도지반)

채찍처럼 출렁거리는 수월의 검기가 어둑해진 하늘 위로 펼쳐졌다. 운선의 몸짓은 우아하기 이를 데 없었으나 검기는 쉬지 않고 수십 개의 별자리를 만들어냈다.

“아아.”

묵묵히 지켜보던 백천이 낮은 신음을 뱉었다. 흡사 달빛이 쏟아져 내리는 듯한 화려한 검광의 빗줄기는 영락없는 매월검법이었다. 한때 검으로는 따를 자 없다던 매월 신양선이 살아 돌아왔다면 이러했을까? 고대산파 제자들의 눈에 경외심이 들어찼다.

“고문주님, 이 검법이 무엇입니까?”

“매월검법의 하현천무입니다.”

인경의 대답을 듣자마자 여기저기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도대체 고대산파의 내전 검법을 어떻게 익혔을까? 가르침을 받았든, 훔쳐 배웠든, 너무나 완벽하여 화도 나지 않았다. 그러나 아직 놀라기에는 일렀다.

“자, 그럼 이건 무엇입니까?”

허공에 별자리를 그리던 수월이 이번에는 수직으로 내리꽂히기 시작했다. 매 순간 수십 개의 지점을 정확하게 꽂으며 유영하는 검 끝이 하늘하늘 떨어지는 앵두꽃과 같았다.

“낙화유수로군요.”

기정의 대답이었다. 신교에 협조하지 않으리라 마음먹은 그녀였으나, 내전 검법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운선의 모습에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도 모르게 초식을 툭 뱉고 말았으니, 뒤늦게 입을 틀어막아도 소용없었다.

빙그레 미소를 지은 운선은 한쪽 구석에 앉은 용가현을 향해 다가갔다. 허리를 깊이 숙여 읍을 한 후, 정중하게 수월을 내밀었다.

“용문주님,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잠시 검을 바꾸어도 되겠습니까?”

“그렇게 하시지요.”

용가현은 수월을 받아들고 대신 허리춤에서 검 한 자루를 내어주었다. 청운검은 묵안 조상원의 유품인 동시에 용문파 대대로 전해지는 보검이었다. 평소라면 어림없는 요청이었을 테지만 어쩐지 마음에 짚이는 바가 있어 쉬이 빌려준 것이었다.

“감사합니다.”

청운검을 받은 운선의 검법이 또다시 바뀌었다. 가느다랗고 날렵한 수월과 달리 청운이 그리는 검기는 묵직했다. 손을 쭉 뻗어 크게 한 획을 그리니 하늘이 갈라지는 듯하고, 몸을 휘돌려 땅에 원을 만드니 바닥이 진동하였다. 검에 내력을 흘려보내자 검 끝에서 웅웅 울음소리가 났다. 주변을 둘러싼 소나무가 공명을 일으키니, 마치 숲 전체가 비명을 지르는 것 같았다.

“청운해소.”

묻기도 전에 용가현이 먼저 외쳤다. 이로써 운선의 의도를 완전히 이해했기 때문이었다. 평생 그를 괴롭혔던 묵안 사형의 수수께끼를 드디어 풀어낸 듯싶었다. 부끄러움, 죄책감, 형언하기 어려운 감정이 마음속을 헤집어 고개를 들 수 없었다.

“그리고 고장로님, 잘 보십시오.”

운선이 땅을 박차고 날아올라 단번에 황석파 앞으로 나아갔다. 수레를 향해 육방의 도형을 만들더니 다시 그 안에 사방형을 그려 넣었다. 검기가 지나간 자리마다 흔적이 고스란히 남으니 눈앞이 어지러웠다. 비월검법의 최고 초식, 천균이었다.

“으음.”

고유생은 거친 숨만 헐떡일 뿐 입을 꾹 다물고 대답하지 않았다. 감히 자신도 배우지 못한 비월검을 완벽하게 시연하는 운선에게 자존심이 몹시 상한 탓이었다. 입 밖으로 초식의 이름을 뱉는 순간, 그의 우월함을 인정하는 것과 같았다. 그러나,

“비월검의 천균입니다.”

밝고 낭랑한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우거진 노송 숲을 빠져나온 이들은 어딘지 모르게 낯이 익은 두 청년이었다. 앞 사람은 거대한 검을 짊어지고 있고 뒷사람은 축 늘어진 시신을 업은 채였다.

“숙부님, 너무 늦어 죄송합니다. 오는 길에 수십 구의 시체가 있어 묻어주느라 어쩔 수 없었습니다.”

찬영은 부러 큰 소리로 상황을 알리고는 운선의 앞으로 다가갔다. 그제야 그의 얼굴을 확인한 몇몇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탄식을 쏟아냈다.

“제가 누군지 아시지요? 일전에 태봉에서 여러분의 목숨을 구했던 그놈이 아닙니까? 지금 이곳에는 없지만, 풍림의 검도 그때 대가로 받았지요. 어때요? 고 아무개 영감님, 방금 숙부님이 보여주신 초식이 비월검의 천균이 맞지 않습니까?”

찬영은 보란 듯이 고유생의 코앞에서 비월을 흔들어댔다. 인정하지 않으면 절대로 검을 돌려주지 않겠다는 무언의 협박이었다. 아무리 부아가 치밀어 오른다고 하더라도 사문의 보물과 바꿀 수는 없는 법. 고유생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비월검법의 천균이 맞다.”

“역시 그렇지요?”

찬영이 박장대소를 하며 비월을 돌려주자 그제야 황석파의 제자들도 가슴을 쓸어내렸다. 연신 숨을 몰아쉬는 고유생을 부축하여 무리의 맨 뒤로 자리를 옮기니, 자연스럽게 태을신교를 중심으로 거대한 원이 만들어졌다.

“두타공파는 제가 무려 삼 년을 머물렀기에, 굳이 시연을 보이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또한, 활인검은 기원을 따져 보면 다른 검법과는 결이 다르니 제외하였습니다. 자, 제가 여러분께 드리고자 하는 보물은 이와 같습니다.”

“도대체 무슨 광대 짓인가? 무릇 오대산검의 검법은 고유의 내전 무공일진대 어디서 훔쳐 배웠느냔 말이냐?”

눈치 없는 이석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보물을 보여준다고 설레발을 쳐놓고 검무를 추는 꼴이 퍽 아니꼬웠다. 그러나 그를 제외한 황실과 무림의 사람들은 모두 짐작 가는 바가 있어 죽으로 자리를 지킬 뿐이었다.

“저하, 송구하게도 저는 이 무공들을 훔쳐 배운 적이 없습니다. 이 검법의 기원이 모두 같을 뿐이지요.”

“무슨 수작이냐?”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태자를 위해 운선은 다시 검을 바로잡았다. 이번에는 주운이 들고 있던 월심이었다.

“수중월영!”

물 위를 걷는 것처럼 유려하게 몸을 움직이자 검이 한 몸이 되어 나풀나풀 춤을 추었다. 찌르는 듯 베고, 베는 듯 찌르니 흐르는 냇물처럼 끊어짐이 없었다. 마침 어둑해진 하늘에 희미한 달빛이 고개를 내밀었다. 가느다란 검날은 달빛을 받아 하얗게 반짝거렸다. 분명 사파의 간악한 무공이건만, 그 아름다운 자태에 감탄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이것이 바로 수월심검의 정수 수중월영입니다. 존경하는 여러분께 보여드리고자 했던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제가 시연한 일련의 검법이 모두 한 못에서 비롯되었음을요. 잔잔한 물 위에 비쳤을 때, 비로소 달이 제 모습을 갖춘다고 하였습니다. 수월심(水月心)은 바로 그 마음가짐에서 시작하였지요. 이지러지고 차오르고 다시 이지러지는 달, 뭉쳤다 흩어지는 구름, 그리고 피었다 지는 꽃과 같이 말입니다.”

“아아.”

백천의 주름진 눈가에 굵은 눈물이 맺혔다. 운선이 매월의 원본 구결을 외워왔던 그때, 그는 이 모든 검법이 한 뿌리에서 나왔음을 알았다. 그리고 그 시작점이 수월심이라는 것을 깨닫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오대산검의 기원을 따라 올라가면, 전설 같은 이야기가 전해지더군요. 설산에 살던 심술궂은 노인 말입니다. 그 절세 고수가 누구인지는 아무도 몰랐으나 그의 제자들이 오대산검 중 세 문파의 사조가 되었다는 사실은 아실 겁니다. 그럼 그는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갔을까요?”

운선은 말을 멈추고 주변을 돌아보았다. 이미 그의 의도를 읽어낸 몇몇은 눈길을 피했고, 우매하여 알아듣지 못한 이들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 어느 쪽이든 다음으로 이어질 내용이 그들에게 불리하다는 것쯤은 아는 눈치였다.

“그의 마지막은 짐작이 가시지요? 세 명의 사형제가 닿지 않은 그곳, 바로 용문산. 즉, 그 노인이 바로 용문파의 사조이고, 그의 방계 제자가 두타공파의 사조입니다. 이 다섯 문파가 바로 경국 무림의 뿌리이니, 후대에 비로소 오대산검이라 불리게 되었습니다. 맞습니까?”

“그렇습니다.”

운선의 눈빛이 향한 곳은 용가현이었다. 애초에 이 모든 사실을 알고 있던 그였기에 굳이 부정할 이유가 없었다.

“그럼 그는 왜 하필 용문산으로 갔을까요? 아주 옛날, 역사서에 기록된 바에 의하면 용문산은 려국의 땅이었지요. 네, 그 노인이 바로 려국인이었기 때문입니다.”

“감히!”

이제야 의도를 깨달은 이석이 버럭 호통을 쳤다. 그렇다면 경국 무학의 근간이 된 오대산검의 시작이 려국이란 뜻인가? 참을 수 없는 모욕감에 온몸을 부르르 떠는 이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수십 년 전에 망한 나라를 들먹이며 기원을 논하다니, 그야말로 개수작이었다.

“제가 여러분께 드릴 보물이 그 증좌입니다.”

운선이 살포시 고개를 끄덕이자, 찬영이 발 빠르게 나섰다. 동굴 안에서 여러 개의 석판을 끌고 나오는가 싶더니, 이석과 이금의 앞에 쫙 펼쳐 나열했다.

“제가 훔쳐 배우지 않았다는 증좌. 이 동굴 안에서 수백 년, 아니 그 이상을 기다렸을지 모르는 이것들이 바로 오대산검의 기원입니다.”

석판에는 무공의 비급만 적혀 있지 않았다. 경국과 천서국에 관련된 오랜 풍습, 문화, 학문 등이 빼곡히 적혀 있어 하나하나가 살아 있는 역사와 같았다. 이석은 차마 확인하고 싶지 않아 뒤로 물러섰다. 대신 이금이 용기를 내어 들춰보니, 과연 운선의 말이 맞았다. 오대산검의 원로들도 하나둘 다가가 확인을 청하였다. 아무리 후안무치한 그들이라 해도, 확실한 증좌 앞에서는 모두 꿀 먹은 벙어리였다.

“이것이 바로 려국이 숨겨 왔던 전설의 보물이며 제가 드리는 선물입니다.”

“아아.”

소란스럽던 공터에는 이제 침묵만이 흘렀다. 누구 하나 섣불리 대거리하는 이가 없었다. 이것이 보물이 아니라 하면 사문을 욕보이는 것이며, 역사를 거부하는 것과 같았다. 되레 원본을 쉬이 내어주는 운선에게 감읍해야 할 일이었다. 그러나 순순히 받아들고 돌아가는 순간, 경국의 역사와 문화가 려국보다 못하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꼴이기도 했다. 그 모욕감과 수치심을 견뎌야 한다니, 끔찍하고 처참한 심정이었다.

“무릇 물줄기는 시작점이 같아도 어디를 거쳐 흐르느냐에 따라 질과 맛이 달라지는 법입니다. 저는 그것이 비단 자연의 이치만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역사와 문화도 이와 같아서 시작은 려국이었다고 해도 각자의 땅에서 제 특색을 갖추어 새로워지니, 그 또한 고유의 것이라 해야겠지요. 제가 바라는 것은 하나입니다. 역사의 시작점이 려국이었다는 사실, 하여 물줄기가 아무리 갈라져도 최초의 못이 존재했다는 사실만큼은 절대로 부정할 수 없다는 것. 그 진실을 여러분께 알리고자 할 따름입니다.”

그들을 둘러싼 신교의 교도들, 아니 려국의 백성들이 눈물을 뚝뚝 흘렸다. 나라를 잃고 산 수십 년간, 언제 다시 올지도 모를 이날을 위해 참고 기다렸던 그들이었다. 벅찬 감동과 자랑스러움이 마음에 새겨져 오래도록 지워지지 않을 자존감이 되는 순간이었다.

반면, 경국과 천서국의 사람들은 모두 시선을 아래로 떨궜다. 인정하고 싶지 않으나 인정하게 만드는 이 거지 같은 상황이 역겹기만 했다. 무엇 하나 반박할 수 없는 자신과 자신의 나라에 대한 원망만이 가슴을 꾹 짓눌렀다.

‘졌다. 완전히 당했구나.’

이금의 한쪽 입술이 귀밑까지 쭉 찢어졌다. 난생처음 느끼는 패배감이었다.

*** 미도지반(迷途知返)

: 바른길을 찾다 못 찾으면 근본에서 다시 생각할 줄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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