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5화. 善惡不二(선악불이)
형진의 장력을 쳐낸 것은 주운의 월심이었다. 월영의 초식을 사용하여 검기로 작은 돌풍을 만든 뒤 장력을 흩어냈다. 덕분에 운선의 하복부를 보호하는 한편 형진의 몸뚱이를 한 장 이상 밀쳐내니 대응하기에 한결 여유가 생겼다.
“복수라니요?”
“…….”
주운은 대답 대신 옛 정인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제야 운선도 그리운 그녀의 얼굴을 자세히 살필 수 있었다. 해쓱해진 얼굴, 핏발이 선 눈. 분명 주운이 맞았으나 어딘지 모르게 낯설어 보였다. 극심한 마음고생을 겪지 않고서야 이렇게 초췌할 리가 없었다. 그때, 운선의 머릿속에 한 가지 무서운 생각이 떠올랐다. 제발 아니기를 바라면서도 떨칠 수 없는 불길한 예감이.
“서, 설마……. 아니지요?”
“…….”
“아아…….”
복수라고 했다. 주운이 복수를 떠올릴 만한 존재가 누가 있겠는가? 사숙이 돌아가셨구나. 운선의 마른 입술 사이에서 신음이 새어 나왔다. 저 살인귀를 기필코 죽여야 하는 가장 큰 동기가 생긴 셈이었다.
“제가 하겠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아니다.”
주운은 떨치고 나서려는 운선의 손을 잡았다. 승패는 상관없었다. 혹여 목숨을 걸어야 할지라도, 이 일만큼은 오직 자신이 끝내야 했으므로.
“보십시오. 그는 사람이 아닙니다. 위험합니다.”
“스승님은 나의 부모였다. 너라면 부모의 복수를 다른 이에게 맡기겠느냐?”
“주운.”
운선의 손에서 스르륵 힘이 빠졌다. 그녀의 말이 맞았다. 이 세상 그 누구도 부모를 잃은 슬픔과 분노를 대신 치러줄 수 없을 테니까. 하여 그에게는 끼어들 자격도, 명분도 없었다.
“고맙다.”
슬픈 미소를 마지막으로, 그를 등지고 돌아선 주운은 원수를 향해 검날을 겨눴다. 초점을 잃은 눈동자, 힘줄이 튀어나와 넝마가 된 저고리. 과연 자신이 아는 백형진이 맞나 싶을 정도로 망가진 몰골이었다.
“월훈!”
그렇다고 동정할 마음은 없었다. 바닥을 박차고 공중으로 몸을 날리는 동시에 월심을 휘둘렀다. 허공에 둥그런 타원을 여러 개 겹쳐 그리니 하얀 검기가 마치 은은한 달무리처럼 번져 나갔다. 그 상태로 형진을 감싸듯이 다가가자 검기가 밧줄이 되어 그의 울퉁불퉁한 몸을 옭아매었다.
“크아!”
통증에는 무뎠던 형진이었으나 몸이 묶여버리자 괴성을 질러댔다. 힘으로 끊어내려고 발버둥을 칠 때마다 검기가 조여오니 온몸에 시뻘건 자상이 생겼다.
“화향수형!”
주운은 그 작은 틈도 놓치지 않았다. 검기를 거둬들이자마자 빠르게 검을 휘두르더니 상대의 천혈, 천돌, 혹중의 혈을 스치고 지나갔다. 바늘 크기의 구멍이었으나 몽글몽글 솟아오른 피가 그치지 않았다. 그 탓인지 허기진 짐승처럼 날뛰던 형진의 움직임이 서서히 느려졌다.
“허억, 하아.”
가쁜 숨을 몰아쉬는 모습이 꽤 힘들어 보였다. 안광이 흐려지는가 싶더니 얼굴의 붉은빛이 점차 푸른빛을 띠었다. 피투성이가 된 몸을 발발 떨면서 연신 신음을 뱉어냈다. 드디어 통증을 느끼는 모양이었다.
“불쌍한 척 가식 떨지 마라. 살려둘 마음이 전연 없으니.”
“아아…….”
주운의 몸이 다시 날아올랐다. 자비 없이 찔러대는 검 끝은 오직 상대의 사혈만을 노렸다. 그 구멍으로 어김없이 피가 퐁퐁 솟아오르자 소나무의 푸른 잎이 온통 붉은색으로 뒤덮였다. 평소의 그녀였다면 절대로 쓰지 않았을 잔인한 초식. 웬만큼 산전수전을 다 겪은 강호인들도 그 끔찍한 장면을 차마 끝까지 지켜볼 수가 없어 눈을 감았다.
털썩!
결국, 버티지 못한 형진이 무릎을 꿇었다. 상대가 버틸 기운도, 의지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주운의 월심도 움직임을 멈췄다. 그리고 겨우 숨을 부여잡고 있는 그를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마지막 말을 전하기 위해서였다.
“백형진.”
“주운…….”
들릴 듯 말 듯, 가느다란 목소리로 그리운 그녀를 불러보았다. 이미 하얀 옷자락이 눈에 들어온 순간부터 부르고 싶던 이름이었다.
“순순히 죽음을 받아들였다고 해서 용서하지는 않을 것이다.”
“압니다. 용서받지 못할 것을요. 그러나 주운…….”
그의 눈에서 굵은 눈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온몸이 부수어질 것 같았으나 그보다 마음이 더 아팠다.
“아주 작은 연민이라도 남겨주면 안 되겠습니까? 적어도 당신만은 저를 불쌍히 여겨주면 아니 됩니까?”
그것이 어떤 감정이더라도, 사랑하는 여인에게만큼은 기억되고 싶은 욕심이었다. 그 간절함을 알아주기를. 이 세상에 오직 한 사람의 애정만을 얻을 수 있다면 단연코 당신이었음을 말해주고 싶었다. 그러나,
“이것으로 너와의 인연은 끝났다. 질기고 끔찍한 악연이었다.”
주운의 잘라낸 옷자락이 하늘하늘 떨어져 그의 무릎에 내려앉았다. 유난히 희고 매정한 마지막이었다.
“아아…….”
무얼 바라고 여기까지 왔을까? 운선을 향해 쏟아졌던 강렬한 분노가 주운의 얼굴을 마주한 순간 먼지처럼 사그라들었다. 죽이기 위해 달려드는 월심의 모든 초식이 구원인 것만 같아서 겸허히 받아들였다.
“이제 지쳤어.”
거짓이 거짓을 낳고, 경쟁심이 탐욕이 되었을 때, 그 역시 알았다. 잘못되었다는 것을. 자신을 잡아줄 누군가가 있었다면 달라졌을까? 그러나 스승의 질책이, 주운의 매정함이 그를 다그치고 채찍질했다. 멈추지 마. 이겨서 증명해 내. 그 끔찍한 외길을 혼자서 달려오며 얼마나 외로웠던가?
“네가 자초한 외로움이다. 너의 스승은 끝까지 너에게 등을 내어주었다. 되레 너에게 미안하다고 하였다. 그때 그만두어야 했다.”
멀어져가는 의식 속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익숙하고 역겨운 목소리. 바로 백형진, 자신의 질책이었다. 잘못된 길임을 알면서도 앞으로만 달렸고 내 것이 아님을 알면서도 끊임없이 탐했다. 그러니 응당 받아들여야 하는 결말이었다.
“흐흐흐.”
신음 같은 웃음은 조금씩 커져 소나무숲 사이로 퍼져나갔다. 절벽에 부딪혀 메아리가 되고 다시 돌아올 때쯤, 그는 영영 아무 소리도 들을 수 없게 되었다. 그나마 마지막으로 그리운 이를 눈에 담았음에 감사하면서, 외롭고 쓸쓸하게 숨을 멈췄다.
“주운, 괜찮습니까?”
“괜찮다.”
운선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옛 정인의 표정을 살폈다. 맥이 빠진 듯, 멍하니 서 있는 주운을 등 뒤로 돌려세우며 앞으로 나섰다.
“뜻하지 않은 상황이 된 점,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더 큰 오해로 번지지 않았으면 합니다.”
모두를 위한 정리였으나, 특히 염자홍을 비롯한 천서국에게 이르는 말이었다. 적어도 그들과의 관계까지 얽히지 않겠다는 의지였고, 약조를 지키겠다는 신호였다.
“이로써, 모든 오해가 풀리고 판이 마무리되었군요. 하긴 누가 죽인들 어떻습니까? 천서국은 신교에게 억울한 누명을 씌울 생각이 없습니다. 다만 저자의 살인이 혼자만의 판단은 아닐 터, 스승의 죽음에 대해서는 반드시 인과를 밝혀내겠습니다.”
자홍은 자리에서 일어나 운선의 인사에 호의적으로 답했다. 그러면서도 곡해고의 죽음을 쉬이 넘기지 않겠다는 의지를 표명했다. 이금을 향한 선전포고와 다름없었다.
‘제길.’
흘러가는 상황을 가만히 지켜보던 이금이 고운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이제 그에게는 남은 패가 없었다. 신교를 멸할 명분도, 형님을 해할 기회도 다 잃은 셈이었다. 오직 강운선과의 약조만이 유일한 대책이라는 사실에 자존심이 상했다.
‘이유야 만들면 될 터, 차라리 모두를 선동하여 파장을 낼까?’
그러나 금세 고개를 저었다. 상처받은 자존심에 대한 분풀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으므로. 오히려 형진이 곡해고를 죽인 일이 그의 발목을 잡을지도 몰랐다. 지금은 죽으로 입을 다물고 형세를 지켜봄이 최선이었다.
“그럼 이제부터는 다른 이야기를 하지요. 설마 의협을 중시하는 강교주가 약조를 어기지는 않으시겠지요?”
형진의 시체를 발로 툭툭 차며, 자홍이 말을 이었다. 신교와의 일에서는 물러나겠다는 의지를 보여주는 한편, 약속한 모든 보상은 받아내고자 하는 속셈이었다. 기실 그는 더 이상의 피해를 감수하면서까지 경국의 태자를 돕고 싶지 않았다.
“맞습니다. 말씀처럼 어지간히 정리되었습니다. 지금까지 보셨듯이 신교에 죄가 없음이 명명백백 밝혀지지 않았습니까? 두 황자님을 비롯하여 강호 선후배님들의 생각은 어떠신지요? 물론 본의 아니게 이곳까지 오시는 길에 험한 일을 겪으신 점,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하여 여러분에게 선물을 드릴까 싶은데 괜찮으십니까?”
운선이 기다렸다는 듯, 그의 의견을 받아 말을 이었다. 혹여 주운에게 화살이 돌아갈까 염려되어 서둘러 일을 진행하기 위함이었다.
“…….”
“…….”
그토록 소란스럽던 분위기가 일순간에 가라앉았다. 신교 토벌이라는 거짓 명분 아래 각자의 탐욕을 위해 모인 자리였다. 명분을 잃은 지금, 옳다구나, 운선의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검은 속내를 들켜버리는 셈이었다. 어쩐지 부끄럽고 민망하여 누구 하나 선뜻 나서는 이가 없었다.
“조, 좋다. 어디 진짜 보물을 보여봐라.”
한동안의 침묵 끝에 눈치 없는 태자 이석이 나섰다. 습지에서 겪은 끔찍한 공포 때문에 그는 이미 넋이 나가 있었다. 서둘러 보물을 얻어 황실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억지로라도 빼앗을 작정이었건만, 강운선이 순순히 내어준다니 이보다 더한 횡재가 어디 있을까? 하여 태자의 체면이고 뭐고 대책 없이 나선 참이었다.
“역시 태자 저하다운 결단력이십니다. 그런데 걱정이 있어 선뜻 내어놓기 어려우니 한 가지만 약조해 주시겠습니까?”
“뭐, 뭐냐?”
“신교는 전 교주님의 영면 이후로 그 세가 약해져 위기에 이르렀습니다. 굳이 들쑤시지 않아도 기운이 다했으니 이들로 무슨 반역을 꾀하겠습니까? 하여, 보물을 내어드리면 군사를 물려주시길 청합니다.”
“그 정도쯤이야, 좋다. 허한다.”
“망극합니다. 저하.”
운선의 얼굴에 얼핏 장난스러운 미소가 스쳐 지나갔다. 이제 내어주는 보물이 무엇이든 죽으로 감사하게 생겼으니, 이보다 바보 같은 약조는 없었다. 운선의 의도를 눈치챈 이금은 어떻게든 형을 막아보고자 했으나 소용없었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요, 교활한 거미의 지주망에 걸려들고 만 것이었다.
“진짜 보물을 보여드리려면 오대산검 여러분에게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가능하시겠습니까?”
뜻밖의 제안에 놀란 강호인들은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보물과 오대산검의 도움이 무슨 관계가 있다는 것인가? 그러나 두 나라의 태자를 앞에 두고 괜한 소리를 할 것 같지도 않았다.
“이미 태자 저하께서 받아들이셨으니 백성 된 도리로 어찌 돕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다만 도리와 법도에 어긋나는 일이 아니어야 할 것입니다.”
“물론입니다.”
비로소 백천이 수레에서 일어나 예를 갖춰 대답하였다. 오대산검에서 가장 연배가 높은 그가 나서자 분위기가 한결 부드러워졌다. 운선은 그의 배려에 진심으로 감읍하여 고개를 숙여 인사를 올렸다.
“이제부터 몇 가지 검법을 시연하고자 합니다. 제가 오대산검의 각 문파에 질문을 드렸을 때 솔직히 대답해 주시면 됩니다.”
“좋소.”
뜬금없는 검법 시연이라니? 어안이 벙벙했으나 일단은 흘러가는 상황을 지켜보기로 하였다. 무엇보다 그들은 얻어갈 것만 있을 뿐, 잃을 것이 없었다.
쉬익!
운선의 검은 도포 자락 사이에서 수월이 유려한 자태를 드러냈다. 좌중 앞에 선 그의 얼굴에는 잔잔한 미소가 번져 나갔다. 이제 그들을 이곳까지 모이게 한 진짜 이유를 보여줄 차례였다.
*** 선악불이(善惡不二)
: 선악은 모두 인연에 의하여 생긴 것으로 각각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평등 무차별한 하나의 이치로 돌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