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4화. 綿裏藏針(면리장침)
“으, 으으으…….”
설요의 모습은 가히 바라보기도 괴로울 만큼 끔찍했다. 두 눈이 뭉개진 채로 신음만 간신히 뱉어내는 게 할 수 있는 전부였다. 굳이 따지자면, 척추가 끊어져 영영 걷지 못하게 된 홍이성이 더 나아 보일 지경이었다.
“장님에 벙어리를 데려다 놓고, 증인이라 할 셈이냐? 지나가던 개가 웃겠구나.”
형진은 냉소적인 말투로 반문하였다. 그러나 미세한 손 떨림까지 감추기는 어려웠다. 그 자리에 있는 그 누구도 이제 그를 의심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비록 설형제가 목소리를 잃었으나 정신은 맑고 사지가 멀쩡하니 글자를 쓰는 데는 전혀 어려움이 없지. 여러분, 두 눈을 잃기 직전 그는 짐승 같은 살인귀의 얼굴을 똑똑히 보았습니다. 정가 형제를 무참히 살해하고 저와 설형제를 병신으로 만든 그 자의 얼굴을 말입니다.”
홍이성이 설요의 귀에 대고 뭐라 뭐라 속삭이자 그의 눈썹이 파르르 경련을 일으켰다. 그러더니 친우가 건네준 붓을 들어 수레 바닥에 크게 세 글자를 적어 내려갔다.
“백! 의! 행!”
홍이성의 분노에 찬 외침에 모두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정암을 비롯한 두타공파의 제자들 역시 더는 그들의 형제를 옹호할 수 없었다. 그저 이 순간이 꿈이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허공을 응시할 뿐이었다.
“그럼 사형과 사숙을 죽인 이도 너로구나!”
그때, 목치수의 서슬 퍼런 호통이 터져 나왔다. 그의 품속에는 눈조차 감지 못하고 죽은 곡해고의 수급이 있었다. 이 원수를 갚지 못한다면 가슴이 터져 죽을 것만 같았다. 그는 핏줄이 터진 눈알을 부라리며 자홍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저하, 부디 사형제들 죽음의 진상을 밝혀주십시오. 제 손으로 복수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저하!”
형권도 사형의 옆에 꿇고 머리를 조아리니, 곧 이마에서 붉은 피가 터져 나왔다.
“태자 저하, 만약 사호세주의 원한을 풀지 못한다면 우리 사이에 모든 약조는 없던 일로 하겠습니다. 부디 책임지고 밝혀주시어 억울하고 원통한 마음을 풀어주십시오.”
드디어 자리에서 떨치고 일어난 자홍이 이석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일국의 태자로서 예의를 갖추었으나 기실 협박과 다르지 않았다. 황좌에 앉기 위해 그들의 도움이 절실한 이석으로서는 이보다 더한 폭언이 없었다. 하여, 뻘쭘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좌중을 향해 명하였다.
“반드시 이 자리에서 사호세주를 살해한 범인을 밝혀내야 할 것이다. 또한, 진범을 죽이는 자가 누구든지 결코 죄를 묻지 않을 터, 천명을 받들어 협의를 지켜내거라.”
“존명!”
황자들까지 끼어들자 더더욱 분위기가 심각해졌다. 신교를 말살하기 위한 자리였건만, 오히려 그들을 비호 해주는 꼴이 된 것이었다. 그러자 이 모든 사태의 책임이 한 사람을 향하게 되었다.
“저들은 이미 강운선에게 매수되었습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떠돌이 자객들이 아닙니까? 의협 따위에는 관심도 없는 돈 귀신들의 말을 믿으십니까? 단언컨대, 저는 태을신공을 전혀 할 줄 모릅니다.”
분노에 찬 백형진이 발을 동동 굴렀다. 금방이라도 눈알이 쏟아져 내릴 것처럼 부라리는 모습이 평소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 같았다. 그 누구도 자신의 편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지금, 체면도 자존심도 다 내려놓은 발악만이 살길이었다.
“백형제, 안타깝게도 내가 보았네.”
이제 더는 놀랄 기운도 없는 그들이었으나 또다시 불편한 진실을 마주하게 되었다. 이제 막 습지를 벗어난 듯, 도포 자락이 흠뻑 젖은 이는, 다름 아닌 용문파 장문 용가현이었다.
“문주님!”
“사부님!”
수장을 잃어 넋을 놓고 있던 용문파 도사들이 일시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너도나도 함성을 지르고 울음을 터뜨린 통에 한동안 분위기가 어수선해졌다. 소동이 가라앉은 뒤, 용가현은 그들을 진정시키고 천천히 앞으로 나섰다.
“고장로의 함정에 빠졌던 저는 마침 나타난 봉천을 꾀어 금천까지 왔습니다.”
자분자분 이야기를 이어나가는 그의 모습은 어딘지 모르게 지쳐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질아 용봉명의 배신도 모자라 선황련과 곡해고의 독에 너무 오래 노출된 탓에 육체와 정신이 피폐하였다. 게다가 끔찍한 진실까지 목격하지 않았던가? 여기까지 온 것만으로도 기적이었다.
“한때는 형제로서 그를 믿고 의지했기에, 더더욱 진실을 밝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백형제!”
가현은 슬픈 표정으로 형진을 돌아보았다. 마치 한 마리 맹수 같았던 그의 모습이 떠올라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사문의 명예를 지키는 것에 매몰되어 거짓에 속고 진실을 외면한 자신 역시 그와 다를 바 없는 짐승이었다.
“그만 내려놓게. 더는 죄를 짓지 말게.”
“하, 하하하하하!”
형진의 공허한 웃음만이 고요한 숲속을 가득 메웠다. 이 얼마나 절묘한 한 판인가? 어느 방향으로도 도망 나갈 수 없으니, 자신의 완벽한 패배였다.
“훌륭한 덫이구나. 이제 어찌한다?”
이금은 옅은 신음을 뱉어냈다. 그나마 차선이라 생각했던 백형진이었건만, 최악의 상황을 맞이한 꼴이었다. 도와주고 싶어도 도무지 이 깊은 수렁에서 건져 올릴 방법이 없었다. 차라리 꼬리를 잘라내는 게 나을까? 어쩐지 함께 덫에 걸린 기분이었다.
“끝이다.”
모든 것을 내려놓은 그때, 형진은 단전에서부터 몽글거리는 기운을 느꼈다. 점점 뜨거워지는 그것은 경맥을 타고 들어 사지로 뻗어 나가더니 종국에는 머리 쪽으로 치솟기 시작했다. 온몸에 땀이 비 오듯 쏟아지고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손끝에 찌릿한 감각이 들다가 곧 경련이 일었다.
‘발작이다.’
돌이킬 수 없는 상태가 왔음을 깨달은 형진은 아예 광증을 받아들이기로 마음먹었다. 차라리 미쳐버린다면 견디기가 수월하리라. 모두에게 버림받고 손가락질당하는 삶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처음으로 이 끔찍한 고통이 꽤 참을 만한 것도 같았다.
“으아아아악!”
고통을 견디지 못한 형진이 몸을 한껏 움츠렸다. 식은땀이 줄줄 흐르고 한겨울 추위 속에 있는 것처럼 몸을 발발 떨었다. 당황한 두타공파의 동기들이 다가서려고 했으나 끔찍한 괴성에 차마 움직이지 못했다. 그리고,
“저, 저게 뭐야?”
운선을 비롯하여 그곳에 있는 모두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온몸의 핏줄이란 핏줄이 다 터져 나온 그는 마치 빨간 고깃덩어리 같았다. 푸른 안광이 번뜩이는 맹수의 눈. 혹여 자신을 향해 달려들까 봐 누구도 그 눈을 바라보지 못했다.
“으아아아아아!”
처절한 괴성과 함께 형진의 모습을 한 물괴가 운선을 향해 돌진했다. 평생의 숙적이자 원수. 의식을 잃은 상태에서도 그의 눈에는 오직 한 사람만 들어왔다.
“태용!”
손바닥에서 출수한 장력은 거침없이 뻗어가 운선의 오른쪽 어깨에 명중했다. 그는 평소대로 내력을 움직여 튕겨냈으나 어마어마한 위력에 뒤로 스무 걸음 이상 밀려 나갔다. 그 때문에 오른쪽 견갑골이 우지끈 소리를 내니, 필시 부러진 것 같았다.
‘큰일이다.’
운선은 재빨리 운공을 하여 왼쪽 주먹에 화기를 보냈다. 오래지 않아 주먹에서 희뿌연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니, 이는 곧 ‘영명망종’의 초식이었다.
팍!
일격이 형진의 명치에 정확히 꽂혔으나 어쩐지 반응이 없었다. 시퍼렇게 멍이 들고 그 사이로 핏물이 배어 나오는데도 통증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피하지 않고 다시 태일장을 출수하는 바람에 되레 운선이 위험에 빠진 꼴이 되었다.
“소한!”
허리를 뒤로 꺾어 간신히 장풍을 피한 운선은 아랫배로 주먹을 찔러 넣었다. 공격에 집중하느라 방어하지 못한 형진은 좌요부를 제대로 얻어맞았다.
“쿨럭!”
검붉은 피를 울컥 뱉어내는 양이, 적어도 오장육부 중 한 곳이 파열된 듯싶었다. 그러나 이번에도 역시 고통을 느끼지는 못했다.
“제가 저놈의 머리통을 부숴버리겠습니다.”
누구보다 대사형의 죽음에 분노한 금형권이 앞으로 나섰다. 설령 목숨을 잃더라도 복수를 할 수만 있다면 상관없었다. 목사형의 허락이 떨어진다면 당장이라도 뛰쳐나갈 듯 철퇴를 휘돌렸다.
“아직은 아니다.”
“네?”
그러나 목치수는 침착하고 이성적이었다. 복수하고픈 마음은 형권과 다르지 않았으나 무작정 목숨을 걸 상황이 아니었다. 그들보다 실력이 뛰어난 곡해고를 죽인 살인귀였다. 함부로 싸움에 나섰다가 낭패를 본다면 태자의 안전까지 위협하게 되는 셈이었다.
“태을신공의 위력이 대단하여 지금 나선다면 필패다. 저놈이 어느 정도 힘이 빠졌다 싶을 때 움직이자.”
“하지만.”
단호하게 고개를 젓는 사형의 태도에 형권은 하고픈 말을 꿀꺽 삼켰다. 아무리 무지하다 해도 그들이 이곳까지 온 이유를 모르지 않았다. 사사로운 복수가 대의를 망쳐서는 아니 될 터였다.
‘망설이는구나.’
반면 두 사람의 피 튀기는 싸움을 지켜보던 아란은 착잡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치명상을 입힐 충분히 기회가 있었음에도 매번 물러서는 운선의 움직임을 포착했기 때문이었다. 그를 잘 몰랐을 때는 저 망설임이 철저한 계략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달포 넘게 지켜보면서 점점 확신이 들었다. 그의 마음속에 존재하는 일종의 도덕률이라는 것을.
‘참으로 답답하구나. 무릇 일국을 다스리려거든 때로는 얼음보다 차갑고 검보다 모질어야 하건만. 저 우유부단함이 언젠가 발목을 잡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자꾸 안쓰러운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 누구에게도 느끼지 못했던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이었다.
“아무리 찌르고 베어보아라. 나는 절대로 죽지 않는다. 일어나고 또 일어나 네놈을 갈가리 찢을 것이야. 내장을 씹어먹고 뼈를 갈아 마셔야지.”
“하아, 하아.”
백여 합을 부딪치는 사이, 운선의 체력도 한계에 이르렀다. 그 와중에 크고 작은 부상을 입어 온몸은 상처투성이였다. 그러나 다른 이를 끌어들일 수는 없었다. 미쳐버리는 바람에 되레 신공의 오성을 이룬 격이 되었으니 웬만한 내력을 가진 자가 끼어든다면 치명상을 피하지 못할 터였다.
‘내가 끝내야 한다.’
일부러 거리를 벌린 뒤 천천히 마음을 가라앉혔다. 영명권 최강의 절기를 쓰기 위함이었다. 오른쪽 어깨를 움직이지 못해 최고의 위력을 내지는 못하겠지만, 상대의 폭발하는 화기를 막는 데는 충분할 터였다.
‘한 해를 돌아 다시 한 해가 되니 스스로 삼아 만물의 어미가 된다.’
태일신공의 구결을 마음에 새기자 단전에서 사지로, 다시 단전으로 기혈이 움직였다. 한열과 습조가 조화를 이루니 몸과 마음에 거칠 것이 없었다.
“대한!”
주먹에서 감돌던 서늘한 기운이 뻗는 쪽을 향해 일시에 폭발했다. 장력처럼 반경이 크지는 않았으나 목표물에 정확하게 꽂히면 위력은 훨씬 대단했다.
퍽!
“으아아아악”
형진이 본능적으로 오른손을 들어 날아오는 주먹을 감아쥐었다. 마치 불덩이같이 새빨간 손바닥이 차가운 겨울의 회오리를 만나자 희뿌연 연기가 피어올랐다. 살을 베어내는 듯한 고통이 극심했는지 여태 물괴같이 들이대던 그가 비명을 질러댔다.
“제발…….”
근심 어린 눈으로 운선의 모습을 쫓던 설이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잡혔다. 저 거리에서 검을 꽂아 넣는다면 피할 방법이 없었다. 광인이 되어 오성의 경지에 올랐다고 해도 이미 깨달아 완공한 오라비를 이길 수 있으랴? 다만, 걱정되는 점은 그의 쓸데없는 측은지심이었다.
그동안 수많은 싸움을 치르면서도 부러 누군가의 목숨을 뺏은 적이 없는 운선이었다. 하물며 형진은 한때 그의 사형이 아니었던가? 아니나 다를까, 설이의 불길한 예감은 여지없이 맞아떨어졌다.
“아차!”
머뭇거린 틈은 그대로 약점이 되었다. 손의 통증이 감해지자마자 형진의 왼손이 두 번째 장력을 만들어냈다.
“풍진!”
형진의 이번 장력은 태을신공이 아닌 시묵공이었다. 이미 역행한 기혈은 혈맥을 타고 마구잡이로 몸을 망치는 중이었다. 기가 막히게도 그 덕에 시묵공과 태을신공을 혼합하여 쓰게 되었으니 그야말로 동귀어진과 다르지 않았다.
“오라버니!”
설이의 날카로운 비명이 공터에 울려 퍼졌다. 아무리 운선일지라도 완전히 정반대의 기운을 쓰는 두 가지 내력을 동시에 받아낼 수는 없었다. 수곡도가 파열되는 최악의 상황이 일어날지도 몰랐다.
퍽!
“설마!”
아랫배에 뜨거운 장력이 스며드는 찰나, 하얀 인영이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부드러운 머리카락, 나풀거리는 하얀 옷자락. 그리고 곧 다정하고 그리운 목소리가 귓속을 파고들었다.
“운선아, 이 악연만큼은 내가 끝내고 싶구나.”
“주운. 어째서 당신이…….”
“이제부터는 나의 복수다.”
충분히 다스렸다고 생각했던 감정이 급격하게 울렁거렸다. 얼굴이 붉어지고 뜨거운 눈물이 차올랐다. 그녀의 부탁이 아니더라도 이미 마음이 무너져내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