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무십일홍-203화 (203/209)

203화. 天網恢恢疏而不失(천망회회소이불실)

“제가 바로 증인입니다.”

허윤의 등장으로 단번에 분위가 반전되었다. 자신의 의도대로 흘러간다 생각했던 형진은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침착한 척 미소를 띠었으나 입가가 미세하게 실룩거렸다.

“이 모든 일은 저의 그릇된 욕심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신계문이 흘린 정보를 토대로 해심밀경소 찾기에 뛰어든 일부터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진실을 밝히려면 그가 저지른 살인까지 털어놓아야 했다. 그것을 인정하는 것이 진정한 속죄였으므로, 후회는 없었다.

“아마 이 중에는 어렴풋이 눈치챈 이들도 있을 테지요. 적우의 흔적이 남았으나 사실 적은 내부에 있다는 것을. 어제는 형제였던 이들이 그깟 비급 때문에 서로의 가슴에 칼을 꽂아 넣었다는 것을요. 저 또한 그 욕심의 노예가 되어 정파의 형제들을 해하였습니다.”

“아니, 이런.”

“저, 저!”

몇몇은 분개하여 욕설을 날리기도 했으나, 대부분은 씁쓸한 표정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들 중에는 허윤과 다르지 않은 입장의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었다. 모든 죄를 신교에 뒤집어씌워 면죄부를 얻었다 여겼으나, 마음 한구석에 남은 죄책감은 지울 수 없었다. 진실은 어떻게든 밝혀지는 법이니까.

“제가 저지른 죗값은 무고한 형님이 치렀습니다. 그들은 마치 신교의 자객인 것처럼 기괴한 가면을 쓰고 유사한 무공을 구사하더군요. 그러나 저는 바로 알아보았습니다. 막 형님의 목숨을 끊어 놓은 자객은 생각지도 못한 저의 등장에 자못 당황한 눈치였어요. 본능적으로 평소 몸에 익은 무공을 쓰더이다.”

허윤은 손가락을 들어 강호인들을 쭉 훑었다. 그리고 바들바들 떨고 있는 한 사람을 가리키며 비장하게 한 마디를 외쳤다.

“진헌신장!”

“아!”

나지막한 탄식과 함께 모두의 시선이 고유생을 향했다. 그와 함께 일을 도모했던 척살대의 구성원들만이 차마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 그건…….”

“저 역시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고장로님, 어째서 그런 몹쓸 짓을 하셨습니까?”

인경의 단호한 목소리가 뒤를 이었다. 허윤만이라면 어떻게든 우겨볼 여지가 있건만, 고대산파의 장문까지 나서니 더는 물러설 곳이 없었다. 고유생의 황망한 눈동자가 척살대의 동료들을 향했다. 그러나 누구 하나 나서서 편을 드는 이가 없었다. 자신만은 들키지 않기를 바라는 간절한 표정에 배신감마저 들었다.

‘이렇게 혼자 죽을 수는 없지.’

고유생은 마른 입술을 꽉 깨물었다. 태자 이석의 얼굴을 흘긋거렸으나 그 또한 식은땀만 삐질삐질 흘릴 뿐 도와줄 생각이 전연 없어 보였다. 그가 먼저 나서서 감싸 주지 않는데, 감히 황실을 들먹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졸지에 형제들을 죽인 역적이 되었으니 진퇴양난이 따로 없었다.

“강운선이 해심밀경소를 찢어 우리를 시험했듯, 나 또한 하늘의 뜻을 받들어 형제들의 충성심을 확인한 것이오. 신계문의 설이곡과 용호문의 한철이 황실을 배신하고 역모를 꾀했다는 첩보가 있었소. 그들과 동조한 역적을 잡아낸 것뿐, 고작 해심밀경소를 탐한 게 아니란 말이오.”

“헐, 개소리! 그러면 어째서 그 죄를 나에게 뒤집어씌웠느냐? 이것도 설명해 보아라!”

“그, 그건…….”

겨우 변명을 쥐어 짜냈으나 적우의 지적은 피해갈 수 없었다. 거짓은 거짓을 낳으니 언젠가는 막다른 길에 이르기 마련이었다.

고유생이 당황하여 머뭇거리자 사람들이 다시 술렁술렁 동요하기 시작했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신교에게 죄를 물을 명분은 없어진 셈이었다.

“세상에, 아무리 비급이 탐이 난다 해도 그렇지.”

“원래도 욕심 많기로 유명하지 않았나?”

“늙은이가 노망이 들었어.”

숙덕거리는 소리가 당사자의 귀까지 파고들었다. 심지어 그를 둘러싼 황석파의 제자들까지도 원망의 눈길로 바라보았다. 사문의 명예를 실추시킨 원흉이라고 여기는 것 같았다. 이 억울함을 어디서 풀어야 할까? 밀려오는 서글픔에 애써 눌러놓았던 기혈이 다시 뒤틀리고 정신이 아득해졌다.

“그러나!”

그때, 두타공파의 임시 장문 정암이 벌떡 일어났다. 이대로 분위기가 역전된다면 저 대마두를 처단하지 못할까 두려웠다. 적어도 두타공파에게는 철천지원수인 강운선을 단죄해야 했다.

“강운선이 전 무림 맹주이자, 두타공파의 장문인 현로선생을 살해한 죄만큼은 분명합니다. 이 모든 비극의 시발점은 거기서부터가 아닙니까?”

“마, 맞습니다.”

“그 죄를 물어야지요.”

의기소침해졌던 무림인들은 다시금 기가 살았다. 그들은 고유생의 죄를 밝히는 것보다 강운선에게 죄를 묻고 싶어 안달이었다. 그를 궁지에 몰아넣어 진짜 보물의 행방을 알아내고 싶었다. 아니, 보물이 정녕 없을지라도 이 끓어오르는 분노를 쏟아부을 절대 악이 필요했다.

“현로선생 조양 장문을 죽인 이는 강교주가 아닙니다.”

이번에도 고인경이었다. 강운선을 옹호하려는 목적이 아니었다. 저 뻔뻔한 백형진이 저지른 천인공노할 패륜을 밝혀내고자 함이었다.

“아니,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겁니까?”

“아무리 고대산파의 장문이라지만 터무니없는 말을 하니, 저의가 의심됩니다.”

“그래, 그럼 누구란 말입니까?”

두타공파의 제자들이 너도나도 자리에서 일어나 고인경을 향해 날 선 비난을 쏟아냈다. 안 그래도 강운선과 모종의 관계를 맺고 있다는 의심을 받던 자가 아닌가? 직위를 이용하여 타 문파의 일에 간섭하려 드니 화가 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바로 저놈이다. 백의행 백형진, 나는 그날 똑똑히 보았다. 네놈이 스승의 가슴에 칼을 찔러 넣는 장면을 말이다!”

고인경이 입을 떼기도 전이었다. 고유생의 분노에 찬 삿대질이 백형진을 향했다. 자신이 모든 죄를 감당하는 게 억울했던 그가 할 수 있는 최후의 발악이었다. 드디어 역전의 기회가 온 것이었다.

“하! 그 말을 누가 믿을까?”

형진의 눈에서 안광이 번뜩였다. 저 망할 늙은이를 진작에 죽였어야 하는 건데. 강운선에게 죄를 물을 목적으로 남겨둔 증인이건만, 되레 자신을 옭아맬 족쇄가 된 셈이었다.

“무슨 개 같은 소리!”

정암이 흥분하여 검을 뽑아 들었다. 고유생, 저 치사한 협잡꾼이 자신의 위기를 타개하고자 애먼 이를 음해하는 것이 분명했다.

“맞습니다. 지난번에는 어르신께서 분명 강운선이 죽이는 장면을 보았다 하셨습니다. 왜 갑자기 말을 바꾸십니까?”

선운검파의 기정이 끼어들었다. 그녀 역시 고유생보다는 백형진에게 더 믿음이 갔다. 불리한 입장이 되어 헛소리를 지껄이는 게 틀림없었다.

“그때는 두 사람이 함께 서 있길래 응당 강운선이 찌른 줄 알았소.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이상하더란 말이야.”

조양이 숨겨놓고 찾던 이는 흑접쌍살의 우영이었다. 그렇다면 강운선이 위험을 무릅쓰고 수오당까지 온 이유도 설명이 되었다. 게다가 자신이 혼절하기 직전의 상황이 어떠했던가? 마음을 다스리지 못한 그가 내력을 전혀 쓸 수 없었으니, 조양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한 판이었다.

“비록 내가 방심하여 강운선의 일격에 당했으나 그 역시 크게 다쳤지요. 조맹주가 절대적으로 우세한 상황에서 백형진까지 온 상황이었어요. 여러분, 생각해보십시오. 상식적으로 죽었어야 할 쪽은 강운선이었단 말이오. 그러나 제가 마주한 상황은 완전히 반대였소.”

처음에는 기도 차지 않던 이들이 점점 고유생의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그러고 보니 강운선이 범인이라면 앞뒤가 맞지 않은 구석이 많았다. 백형진은 왜 근거지인 수오당에서 운선을 살려주었을까? 스승을 죽인 원수를 그냥 보내준 제자, 그리고 사라진 흑접쌍살 우영까지.

“하지만 그가 조맹주님을 죽일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반문하는 정암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믿고 싶지 않았으나 어느새 들어찬 의심을 미처 지우지 못한 탓이었다.

“사숙, 설마 살인귀의 거짓말을 믿는 건 아니겠지요? 제가 얼마나 사부님을 존경하고 따랐는지 아시지 않습니까? 보시다시피 저는 장문 자리에 욕심이 없습니다. 그 후에 제가 얻은 것이 없는데 무얼 바라고 그런 미친 짓을 하겠습니까?”

“해심밀경소, 아니 태을신공을 얻기 위해서!”

“뭐?”

운선의 낭랑한 목소리가 불시에 끼어들었다. 다시 등장한 이름에 좌중의 분위기는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또 그 망할 경전이란 말인가?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해심밀경소의 진본 한 권은 조맹주가 가지고 있었습니다. 무학에 조예가 깊었던 그는 폐관 수련을 핑계로 태을신공을 풀이해냈고, 심지어 신교에서 축출된 우영을 찾아 극심한 고문까지 하여 해석본을 완성했지요. 그리고 오직 그 사실은 애제자 백형진만이 알고 있었습니다.”

“흥, 내가 그따위 무공을 배워서 무엇 하느냐? 게다가 네 입으로도 말하지 않았는가? 태을신공과 시묵공은 기를 운용하는 방식이 정 반대라 결코, 같이 연마할 수 없다고.”

“그랬지. 그래서 나 또한 처음에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적어도 그날, 도우객 설요가 기습을 당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아니 그렇습니까? 공주님!”

“어?”

아란은 자신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여태 남 일이라 여겨 구경 중이었건만, 불시에 호명되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날, 공주님께서 산책하며 우연히 만난 흑의인 말입니다. 그자가 바로 백의행 형진입니다.”

“아!”

어떻게 그 밤의 일을 잊었겠는가? 지금도 생각하면 자다가 벌떡 일어날 정도로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흑의인의 살인 행각은 사숙 봉천보다도 훨씬 잔악무도했더랬다. 또한, 화기를 방출하여 사람을 태웠으니 태을신공이 분명했다.

“저 말이 맞느냐?”

“네, 맞습니다. 설요 일행을 습격한 자객의 무공은 분명 태을신공이었습니다.”

자홍의 표정이 자못 심각해졌다. 이제 이 일은 비단 경국과 태을신교 사이만의 문제가 아니게 되었다. 태을신공을 쓰는 이가 따로 있다면 사부 곡해고와 사숙 봉천의 살인범은 운선이 아닐지도 몰랐다. 명명백백 밝혀내어 진범을 잡아내야 할 터, 천서국의 명예를 걸고 나서야 할 때였다.

“공주님, 그럼 하나만 여쭙지요. 그런 자객을 보았다 칩시다. 그자의 얼굴이 저와 같습니까?”

“그건…….”

아란은 당황하여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체격은 비슷할지 모르나 이목구비를 확인하지 못했으니 함부로 단정 지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옆에서 빤히 지켜보는 오라버니에게 거짓을 고할 수는 없었던 그녀는 결국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라는 증거가 없을진대, 오직 저 마두의 터무니없는 헛소리를 믿으시겠습니까?”

형진의 입술 사이에서 비열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강운선이 무슨 소리를 하든, 믿어줄 이는 아무도 없었다. 되레 누명을 씌운 셈이 되었으니 더더욱 불리해질 것이었다.

“하긴, 달도 없는 밤이었어요. 자객은 복면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지요. 공주님께서는 참으로 정직하신 분이군요. 맞습니다. 저 또한 심증일 뿐, 그의 얼굴을 보지 못했습니다. 눈앞에서 복면을 벗겨 보았다면 모를까?”

“뭐?”

자신만만했던 형진의 얼굴이 급격하게 일그러졌다. 가시 돋친 운선의 마지막 말에 번뜩 정신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설마? 눈을 뽑아내고 혀를 잘라내지 않았던가? 절대로 살아 있을 리가 없었다.

“이곳으로 오는 길에 처참하게 다친 두 사람을 만났어요. 비록 일면식도 없는 이들이었으나 의원이 된 도리로 모른 척할 수가 없더군요. 그런데 치료를 하고 나니 글쎄, 엄청 유명한 분들이 아니겠어요?”

설이가 호들갑을 떨며 앞으로 나섰다. 그러더니 신교의 교도들 사이에서 수레를 하나 끌고 나오는 게 아닌가? 그 위에는 강호에서 너무나 유명한 두 사람이 처참한 몰골로 앉아 있었다.

“알아보시겠어요? 도우객 설요, 그리고 그의 지기 자용검 홍이성 대협이랍니다.”

한동안 무거운 침묵이 계속되었다. 역설적이게도 그 침묵이 어떤 말보다도 그들의 정체를 증명해준 셈이 되었다.

*** 천망회회소이불실(天網恢恢疏而不失)

: 하늘의 그물은 크고 넓어 엉성해 보이지만, 결코 그 그물을 빠져나가지는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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