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화. 陵谷之變(능곡지변)
“아하하하하, 비루한 중생들. 또 그렇게 속아 넘어가는구나.”
그때, 비릿한 피 냄새와 함께 누군가의 검은 인영이 나타났다. 평소와 다른 거친 말투, 산발한 머리카락과 피로 물든 하얀 장포. 외모는 백형진이 틀림없건만, 어딘지 모르게 위화감이 들었다.
툭!
“태자 저하, 그리고 친왕께 인사드립니다.”
형진은 두 황자의 앞에 정중하게 무릎을 꿇고 머리 두 개를 내려놓았다. 그 참혹한 장면에 모두 눈을 돌렸으나, 오직 목치수만이 똑똑히 알아보았다.
“사형! 봉천아!”
“뭐?”
그제야 천서국의 모든 무사가 병장기를 챙겨 들고 그들의 주군을 둘러쌌다. 백형진이 내던진 수급 두 구. 그것은 사호세주의 수장 곡해고와 그의 아우 봉천의 것이 틀림없었다.
“네 이놈!”
목치수의 서슬 퍼런 호통에도 형진은 태연하기만 했다. 되레 당황한 이금을 올려다보며 조곤조곤 보고를 시작했다.
“저하, 오는 길에 버려진 시신이 있어 챙겨 오느라 늦었습니다. 심려 끼쳐드려 송구합니다.”
“…….”
이금은 차마 대답하지 못하고 얼굴을 잔뜩 찌푸렸다. 이 자가 백의행 형진이 맞는가? 분명 정중하게 고하고 있었으나, 어쩐지 자신에게도 칼을 찔러넣을 것만 같은 살기였다. 조금만 다가오면 제 몸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죽여야만 할 것 같았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 형진은 묵묵히 자리에서 일어나 강운선을 향해 돌아섰다.
“네놈의 얕은수를 내가 몰랐을까? 저 우매한 머저리들은 속일 수 있었을지 몰라도 나는 아니다. 개수작 부리지 말고, 진짜를 내놓아라.”
“글쎄, 너는 원래도 진실을 잘 믿지 않았지. 가진 그릇이 작은데도 넘치길 원했고, 충분히 사랑받고 있음에도 모자라다 생각했다. 이 세상 누구보다 너를 아끼고 믿었던 스승의 등에 칼을 꽂으면서 죄책감조차 느끼지 못하는 네놈이 누구를 머저리라 깔보는 것이냐?”
“개소리!”
백천에게로 쏟아졌던 모두의 시선이 이번에는 두 사람에게로 향했다. 그랬다. 그들은 눈앞에 보이는 진실보다 백형진이 지껄이는 억측에 작은 희망을 품었다.
‘강운선, 고약한 협잡꾼이 사기를 치고 있구나. 어딘가에 숨겨놨을 뿐, 보물은 있다. 이따위 먼지 묻은 종이 쪼가리가 아니다.’
의기양양해진 형진이 모두를 향해 돌아섰다. 계획은 단순했다. 강운선에게 모든 책임을 물어 신교를 뿌리 뽑는 것. 그리고 저 서적들 사이에서 자신의 광증을 치료할 방법을 찾는 것.
“존경하는 선배님들, 형제들. 더는 간악한 려국인들에게 놀아나서는 안 됩니다. 잘 생각해보십시오. 지난 몇 달간, 우리는 끔찍한 재앙을 겪었습니다. 십여 개의 유명 문파가 멸문하였고, 수많은 협객을 잃었지요. 모두 강운선, 저 사기꾼이 찢어발긴 해심밀경소 때문이었습니다. 뿐입니까? 우리는 억울하게 죽은 형제들의 주검 사이에서 악귀의 표식을 보았지요. 네, 바로 저기 서 있는 저자 말입니다.”
형진의 거침없는 삿대질이 한 사람을 향했다. 적우! 려국이 멸망하고 난 이후, 그의 피 묻은 이름을 보지 않은 경국인들이 몇이나 되겠는가? 형제와 친구의 복수를 다짐했던 기억이 새록새록 되살아났다.
“그리고 지금 이곳에서, 그는 고작 저 종이 쪼가리들로 우리를 미혹시켜 안개 습지에 몰아넣었지요. 독 향에 취하여 또다시 수많은 형제가 목숨을 잃었습니다. 이 분노와 억울한 마음은 저놈들을 불에 지지고 뼈를 갈아 마셔도 시원치 않을 것입니다.”
“맞습니다.”
“맞소!”
백천으로 인해 잠시 불편했던 마음에 화르르 불이 붙었다. 그러고 보니, 모두가 다 신교와 려국인 때문이었다. 이루어지지 않을 꿈을 꾼 것도, 그러다 형제를 직접 죽이게 된 것도. 그들이 부추기지 않았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었다. 본래 사람의 본성은 선하거늘, 하늘의 뜻을 거스르는 극악무도한 려국인이 우리를 시험하니, 미욱하여 잠시 발을 헛디뎠을 뿐이었다.
“저하, 그들은 저하와 친왕의 사이 또한 이간질하였습니다. 천서국과 형제의 의를 돈독히 하려는 저하의 뜻을 음해하였고 심지어 사호세주의 어르신들을 살해하였습니다. 이것은 두 나라를 다투게 하여 려국을 재건하려는 의도가 아니겠습니까?”
형진이 몰아붙이자 그 기세에 당황한 이석은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듣고 보니 자신이 그런 생각을 했던 것도 같았다. 어쩐지 뿌듯한 마음에 흘긋 염자홍을 바라보았다. 무표정한 얼굴이었으나 제 생각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였다.
“게다가 친왕께서 감히 황좌를 노린다는 터무니없는 낭설 역시 그들의 계략이었습니다. 무릇 황제의 자리는 하늘이 내리시는 것일진대, 감히 려국인 나부랭이가 함부로 입에 담고 내란을 꾀했으니 이 또한 역모의 죄가 아닙니까? 부디 허락하신다면 저들을 갈가리 찢어 모두에게 본보기로 삼을 것입니다.”
형진은 두 황자의 앞에 무릎을 꿇고 이마를 세 번 찧었다. 얼마나 간절한 몸짓이었는지 이마에 시퍼런 멍이 들고 찢어진 피부 사이로 붉은 피가 배어 나왔다.
‘이미 이석을 죽일 기회를 놓쳤다. 또한, 보물이라 얻어갈 게 없으니 당장 폐하의 신임을 얻을 방도도 없다. 형진의 의도대로 지금은 모든 죄를 강운선에게 물어 물러서는 게 좋겠다.’
이금은 깊은 한숨을 뱉었다. 비록 원하는 방향은 아니었으나 차선을 선택한 셈이었다. 바보 같은 형님은 천서국에게 신화정을 내어주는 것도 모자라 약점까지 잡혔으니, 이번 일의 가장 큰 수혜자는 천서국이었다. 그 점이 영 못마땅하여 선뜻 형진을 칭찬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려국에게 재건의 정당성을 줄 수는 없는 일!’
그러나 한편으로는 다행이기도 했다. 만약 강운선의 계획대로 흘러갔다면 크게 낭패를 볼 뻔했기 때문이었다. 그가 모두를 불러 동굴의 보물을 확인시킨 이유. 자신에게 제안했던 거래의 저의를 눈치챘으므로. 이금은 자리에서 일어나 손수 백형진을 일으켜 주었다. 네 뜻에 동의한다는 일종의 신호였다.
“하여, 나의 스승님과 사숙을 강운선이 살해했단 말입니까?”
여태 침묵을 지키던 자홍이 입을 열었다. 그를 비롯하여 천서국의 모든 이들의 얼굴에는 분노가 가득했다. 곡해고와 봉천의 죽음은 그리 단순하지 않았다. 천서국에 대한 도전이며 능멸이었다.
“시신의 상처를 보십시오. 이것은 태을신공의 자국이 틀림없습니다. 곡어르신과 대등하게 싸울 실력이 있는 자, 태을신공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자, 그리고 천서국에 원한이 있는 자는 오직 강운선이 아닙니까?”
“저하, 형님의 복수를 하게 허해주십시오.”
“으아아아아!”
이성을 잃은 목치수와 금형권이 차례로 읍소하자 자홍의 마음은 더욱 흔들렸다. 그 또한 스승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태자라는 신분을 잊어서는 아니 되었다. 슬픔에 찬, 이 순간에도 그는 어느 쪽을 선택해야 나라에 이득이 되는지를 냉철하게 판단해야 했다.
“이처럼 명명백백 그들을 죽여야 하는 이유가 밝혀졌으니, 더는 지체하지 마시고 명령을 내려 주십시오.”
형진은 거침없이 말을 이어나갔다. 과연 잘 속아줄까 긴장하며 시작한 거짓말이었으나 이야기를 풀어갈수록 진짜가 되었다. 사실 그의 인생 역시 강운선, 그놈 때문에 망가지지 않았던가? 그만 없었더라면 스승이 죽는 일도, 주운과 원수가 되는 일도, 그리고 주화입마에 빠져 광증을 앓을 일도 없었으리라. 모두 강운선 때문이었다.
“형진아, 어디까지 가야 바닥인 줄 알 테냐?”
그러나 모진 모함 속에서도 강운선의 얼굴에는 두려움이 없었다. 온화한 미소를 띠고 형진을 내려다볼 뿐이었다.
“나 혼자 떨어지지는 않을 터, 너를 끌어내리고 다시 올라갈 것이다.”
“가엾다.”
한때는 존경하던 사형이었다. 인정받고 싶었고 우정을 지키고 싶었다. 수없이 죽일 기회가 있었음에도 차마 그럴 수 없었던 것은 오직 그때의 추억 때문이었다.
‘그러나 더는 보아줄 수가 없겠다.’
운선의 눈이 서서히 감겼다. 아직 저 깊은 속에 남은 감정을 가라앉히기 위해서였다. 오히려 꺼내고 들여다보고 기억한 후에, 이별하고 싶었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 드디어 하나씩 밝혀나가기로 마음먹었다.
“이곳까지 오셨을 때는 저를 비롯한 신교의 멸문을 생각하셨겠지요. 려국이 사라진 그 날부터 우리는 언제든 죽여도 되는 이들이 되었으니까요. 무릇 나라 잃은 설움이 그렇습니다. 아무리 새 땅에 뿌리내리고 살겠다고 최선을 다해도 피를 다 바꿔 넣지 않는 한, 소용이 없더란 말입니다. 저의 첫 스승이자 아버지와 같았던 검신 강율천이 목숨을 바쳐 제게 주셨던 새 삶이 그러했습니다. 또한, 모국을 짓밟아서라도 뿌리 내리고 싶었던 장은 역시 다르지 않을 테지요.”
운선의 목소리는 조곤조곤 사람들의 귓속에 파고들었다. 억양도 없고 담담했으나 들을수록 마음이 불편해졌다. 차라리 억울하다, 화가 난다고 울부짖었다면 나았을까? 이 기묘한 감정이 일종의 죄책감이라는 것도 모르면서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아시다시피 저는 돌아가신 현로 조양과 그분의 제자 백의행 형진과 인연을 맺은 적이 있지요. 저에게는 스승님의 유언인 해심밀경소가 있었고 현로선생은 그것을 원하셨으니까요. 그때만 해도 저는 그것이 무엇인지 몰랐습니다. 의백만이 그것의 모든 비밀을 알았기에 원본에 가장 가까운 사본을 얻게 되셨습니다. 제가 여러분 앞에서 찢은 그것은 그저 경전 해석본에 불과합니다. 아니, 그보다 못할지도 모르지요. 제가 음과 뜻을 마음대로 바꿔놓았으니까요. 오직 두 권, 조맹주가 연구하여 숨겨둔 원본에 가장 가까운 필사본 한 권, 그리고 제가 장교은에게 준 한 권만이 진본입니다.”
“뭐?”
그렇다면 그들이 그동안 형제들을 베어내며 뺏은 그것은 무엇인가? 고작 경전 해석본을 얻자고 무슨 짓까지 했던가? 하나둘 깨닫는 이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하여, 그 사실을 아는 적사형은 가짜를 수거하러 갈 이유가 없었던 것입니다. 물론 저와의 불화설도 제가 스스로 퍼뜨린 낭설이지요. 아니 그렇습니까? 사형.”
“그간 내 흉내 내느라 고생들 했겠구먼. 그러나! 아직 멀었어. 내 필체 하나도 따라 쓰지 못하면서 어찌 무공이 가능할까? 신계문 돼지 설이곡이 죽을 때는 직접 구경하러 갔거든. 어찌나 어설프던지, 도와주고 싶더라니까?”
“에그, 주책! 거기까지만 해요.”
설이는 적우가 또 헛소리를 주절댈까 봐 옆구리를 쿡쿡 찔러댔다. 그러나 방정맞게 껄껄 웃어 젖히는 사형의 주접을 막을 도리가 없었다.
“그럴 리가, 그럼 누가 그 끔찍한 살인을 저질렀단 말인가?”
“거짓말이다. 저들의 말을 어찌 믿어?”
여기저기서 탄식에, 질타에, 온갖 잡소리 튀어나오니, 고요했던 분위기가 다시 아수라장이 되었다. 결국, 참지 못한 용문파의 장로 한 명이 떨치고 일어났다.
“모두 당신들의 주장이 아닙니까? 증좌가 없는 일을 믿으라 한다면, 우리는 백의행 대협 쪽이 더 신뢰가 갑니다.”
“맞습니다.”
“맞소!”
운선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반박하지 않았다. 어차피 믿어달라 설득하는 자리가 아니었다. 다만 모든 사실을 속 시원하게 밝히고 앞으로 할 일의 정당성을 구하면 될 테니까.
“증거가 있습니다.”
그때였다. 고대산파의 무리에서 삿갓을 쓴 복면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백천과 고인경에게 차례로 예를 올리고는, 천천히 좌중의 앞으로 나왔다. 잠시 망설이기는 했으나, 드디어 결심이 섰는지 삿갓과 복면을 벗었다.
“아!”
“당신은?”
운평에서 그와 그의 문파를 모르는 이가 있기나 할까? 진작에 죽었다던 그를 마주한 강호인들의 얼굴에 놀라움과 당혹감이 가득했다. 하루아침에 식솔 모두가 죽고 멸문한 원용당의 부당주 허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