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화. 無價之寶(무가지보)
“고장로님, 도대체 무슨 말씀입니까?”
모두가 말리는 가운데에서도 고유생의 단호한 표정은 흔들림이 없었다. 저 배은망덕하고 염치없는 놈의 가면을 벗기는 것이 그의 남은 사명이라는 생각이었다.
“나의 대사형 마세풍이 갓 열 살을 넘긴 교은을 데려왔을 때만 해도 려국인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심지어 려국의 고을 하나를 불태우고 그들의 눈알을 뽑아내는 잔인한 짓도 마다하지 않았으니, 그의 출신을 의심할 이유가 없었다. 으흑, 콜록, 콜록!”
내상이 심각한 그는 한동안 격한 기침을 해댔다. 빗장뼈가 폐부를 찔러 숨을 쉬기조차 힘들었으나 말을 멈출 생각은 없었다. 평생을 마음속에 담아왔던 미움을 뱉어내니 오히려 가슴이 시원해지는 것도 같았다.
“그에 대해 의심하기 시작한 것은 풍림을 데려온 후부터였다. 풍림 정은률은 당시 온수 안찰사 정일권의 외아들이었다. 평소 잔인한 성정에 그라면, 죽여도 시원찮을 아이를 데려와 부사제의 제자로 받아주길 청하니 이상할 수밖에. 그때 그의 출신을 알아보고 깨달았지. 풍림을 데려와 자신의 개처럼 부리는 것이야말로, 려국에 대한 복수의 완성이라는 것을! 장교은 저놈은 악귀와 같은 자다.”
고유생의 노한 눈에 붉은 핏발이 섰다. 사실 그는 장은이 려국인이든 아니든 상관없었다. 되레 그의 복수심이 마세풍을 몰아내고, 황석파를 일으키는 데 도움이 되리라 생각했다. 자신이 장문이 되기만 한다면 뭔들 어떠냐 싶었다.
그러나 그의 자만이 엄청난 재앙을 불러왔다. 장문의 자리를 꿰차는 것으로도 모자라 호시탐탐 자신을 죽이려고 하질 않는가? 이대로 저놈이 한고비를 넘어간다면 다음번은 없었다. 지금이야말로 이 끔찍한 살인귀를 신성한 경국 땅에서 뽑아낼 절호의 기회였다.
‘망할 늙은이, 호시탐탐 장문 자리를 탐내어도 깍듯이 대접해 주었거늘. 은혜를 원수로 갚는구나.’
장은은 허공을 보고 허탈한 웃음을 터뜨렸다. 너무 어이가 없으니 화도 나지 않았다. 아니, 자신이 있었다. 수십 년을 오직 경국을 위해, 황석파를 위해 살아온 삶이었다. 고작 저 늙은이의 말 몇 마디에 무너질 탑이 아니었다.
“지금 풍림이라 하셨습니까? 장문주가 친아우처럼 여기는 이가 어찌 원수의 자식이었단 말입니까? 모두 낭설입니다. 풍림이 직접 오면 물어보는 게 맞습니다.”
평소 장은의 도움을 많이 받았던 선운검파 제자들과, 그외 몇몇 추종자들이 너도나도 반발하고 나섰다. 고유생이 평소 장문의 자리를 노렸던바, 거짓으로 사람들을 선동하려 한다고 생각했다.
“아니에요. 그는 돌아오지 못해요. 그럴 수 없으니까요. 풍림은 저 습지에서 장문주에게 살해당했어요. 그는 죽는 순간까지도 자신이 왜 죽는지 몰랐다고요!”
그때, 천서국의 무리 사이에서 가은이 뛰쳐나왔다. 어여쁜 선자가 닭똥 같은 눈물을 주르륵 흘리며 애처롭게 호소하자 분위기가 일시에 반전되었다. 그녀는 사람들의 마음을 홀리는 데에는 타고난 재주가 있었다. 부러 땅바닥에 주저앉으며 선운검파를 향해 통곡하니, 선자들이 모두 나와 그녀를 둘러쌌다.
“이게 다 어찌 된 일이냐?”
“네, 사숙. 사부님과 풍림 대협께서 때마침 나타나 천서국의 자객들로부터 구해주셨어요. 그러나 장은, 저 후안무치한 이가 나타났어요. 제가, 제가 가진 것을 빼앗으려고 그분들을…….”
“뭐라고? 그게 무슨 소리냐?”
가은은 이때다 싶어 자신의 죄까지 장은에게 덮어씌웠다. 어차피 정체가 탄로 났으니 죄 한둘 더해진다고 해서 무슨 차이가 있으랴? 이참에 은률의 억울한 죽음을 갚고, 그의 희생에 보답하고 싶었다.
“여러분, 오늘 소녀는 중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바로 려국의 보물과 관련된 일이지요. 돌아가신 소문주님께서는 오래전 기연을 얻어 열쇠를 하나 얻으셨어요. 강교주의 계략에 맞설 비책으로 목숨을 걸고 지키셨지요. 그런데 장문주가 그 사실을 알았던 겁니다. 그는 습지의 안개를 핑계 삼아 문주님을 살해했어요. 보십시오, 이것이 바로 증거입니다.”
가은은 품속에서 주섬주섬 무언가를 꺼냈다. 바로 소소정의 장문 반지와 네 개의 열쇠였다. 그제야 장문의 죽음을 확인한 선운검파의 제자들은 바닥에 머리를 찧었다. 서글픈 통곡 소리가 가득 메우니, 분위기가 사뭇 엄숙해졌다.
“하하하, 네년이 언젠가 뒤통수 크게 칠 줄 알았지.”
여태 장은에게 가장 호의적이었던 선운검파가 뒤로 빠지고 나니, 더는 옹호하겠다 나서는 이가 없었다. 더구나 연이어 충격적인 사실이 까발려지자 누구도 함부로 끼어들지 못했다. 계속되는 고유생의 악에 받친 폭로와 장은의 허탈한 웃음만이 맴돌 뿐이었다.
“자, 이제 그가 려국인인 것을 믿지 않는 분은 없겠지요? 저는 그에게 눈을 뺏긴 려국인들의 한을 대신하여 양 손목의 경맥을 끊고 기문을 막아 무공을 폐하였습니다. 이 일에 책임을 묻고자 한다면 역시 선을 넘어오십시오.”
“…….”
이윽고 웃음을 멈춘 장은이 고개를 들어 익숙한 얼굴들을 돌아보았다. 어제까지만 해도 자신에게 온갖 아부를 떨던 이들이었건만, 시선을 맞추는 사람 하나 없었다. 수십 년을 경국인이 되기 위해 발버둥 쳤던 인생이었다. 그러나 그 오랜 노력이 철저히 부정당하는 순간이었다. 허무함, 그리고 참을 수 없는 분노에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저하, 태자 저하!”
장은은 무릎으로 기어 이석의 발밑에 엎드렸다. 황실의 눈에 들기 위해 그 어떤 더러운 짓도 서슴없이 행하지 않았던가? 이 치욕에서 건져줄 유일한 사람이 있다면 태자여야만 했다. 그러나,
“네가 더러운 려국인인 줄 알았더라면, 중용하지 않았을 터. 이제라도 네 나라로 돌아가 벌을 받아라.”
“저, 저하?”
이석은 마치 더러운 분변이라도 본 듯, 그의 손이 닿은 옷자락을 신경질적으로 털어냈다. 그리고 그 옆에서 세상 불쌍하게 내려다보던 이금이 한 마디 덧붙였다.
“인과응보라 하였다. 자신의 나라도 팔아먹는 이가 새 나라라고 다를까?”
“아, 아하하하하.”
장은은 실성한 사람처럼 온몸을 비틀었다. 흙바닥을 뒹굴고 바닥에 머리를 찧으며, 웃음인지 울음인지 모를 기괴한 신음을 뱉어냈다. 신교의 교도들에게 질질 끌려갈 때까지도 그 소름 끼치는 소리는 그칠 줄 몰랐다.
“자, 그럼 웬만큼 정리된 게 아닙니까? 약조한 대로 그곳을 보여주시지요.”
어수선한 분위기를 정리한 이는 다름 아닌 천서국의 공주 아란이었다. 그녀는 경국과 려국 사이의 신파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가은이 앙큼하게 열쇠의 존재를 까발린 마당에 머뭇거릴 이유가 있을까? 그들은 이석과 강운선에게 약조 받은 물건만 챙길 심산이었다.
“그럼, 그럴까요?”
운선의 얼굴에 잔잔한 미소가 지어졌다. 목 주변을 한 번 훑어 세 개의 구슬이 달린 목걸이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선운검파의 선자들에게 둘러싸인 가은을 향해 다정하게 말을 걸었다.
“선자님, 드디어 약조한 때가 왔군요. 소문주님께서 목숨을 바쳐 지키신 열쇠를 이리 주십시오. 제가 문을 여는 데 잠시 빌리겠습니다.”
운선이 유독 몇 개의 단어에 힘을 주어 말했으나 그 의도를 아는 이는 거의 없었다. 오직 당사자의 얼굴만이 새빨개졌을 뿐이었다.
“부디 약조를 지켜주십시오.”
가은은 비틀거리며 설이에게 다가왔다. 달달 떨리는 손으로 열쇠 네 개를 건네니, 자연스럽게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그러나 설이는 재빨리 고개를 돌려버렸다. 어미인 줄은 몰랐다고 해도 스승이 아니었던가? 그녀를 죽이고도 뻔뻔하게 타인을 모함하는 가은를 도저히 바라볼 자신이 없었다. 소름 끼치게 끔찍하고 두려웠다.
쿠쿠쿵!
운선의 손을 거친 일곱 개의 열쇠가 북두칠성 모양의 골에 정확히 맞아 들었다. 거대한 석문이 웅굉한 소리를 내며 움직이자, 모두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방금까지도 서로를 의심하고 원망하던 이들의 눈빛이 다시금 욕망으로 번들거렸다.
‘드디어!’
천서국의 귀한 이들도, 경국의 권력자들도 지금만큼은 모두 한뜻이 되어 같은 곳을 바라보았다. 이 세상의 모든 권력과 재물, 그리고 명예를 얻을 수 있다는 전설의 그곳. 그 미지의 문 앞에서 각자의 그릇에 넘치는 꿈을 꾸고 있으리라.
쿠쿵!
“어?”
“어라?”
그러나 그들의 눈앞에 드러난 진실은 예상과는 너무나 달랐다. 재물? 권력? 명예? 그중 무엇 하나라도 만족시킬 그것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몇몇은 눈을 비벼보고, 또 몇몇은 벽을 쓸어보았다. 그러나 뿌연 먼지 속에는, 빛나는 그 무엇도 보이지 않았다.
“말도 안 돼!”
높이와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거대한 동굴 속에는 헤아릴 수 없는 양의 석판과 책들만이 가득했다. 물론 전설로만 전해 듣던 고대의 병기도 보였으나 습기와 먼지에 오래 방치된 탓에 전부 녹이 슬어 무엇 하나 건질 것이 없었다. 오직 특별한 보관법으로 천장까지 쌓아 올린 책들만이 거의 온전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을 뿐이었다.
“아니야, 아니다. 분명 숨겨놓았을 것이야! 찾아봐라, 어서!”
사람들을 헤치고 앞으로 뛰쳐나온 이석이 교위들을 재촉했다. 광인처럼 발을 동동 구르고, 고함을 질러댔으나 아무 소득이 없었다. 충성심 강한 그들이었지만 없는 것을 찾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것은 다른 무림인들도 마찬가지였다. 주변을 샅샅이 훑고 또 훑었으나 눈에 보이는 건 여전히 책들밖에 없었다.
“아하하하하하!”
“오라버니, 웃음이 나오십니까? 네, 다 제 탓입니다. 저 여우 같은 놈을 믿은 제 잘못이니 그만 웃으시란 말입니다.”
내내 심각했던 자홍이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너른 동굴 안을 울리고 다시 메아리가 되어 돌아와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그런데도 좀처럼 웃음을 멈추지 않으니, 아란은 그가 미친 건 아닌지 의심이 될 정도였다. 차라리 화를 내던가, 마치 자신을 조롱하는 것만 같아 자존심이 상했다.
“아니다. 아란아. 잘하였다. 우리는 이제 기다리기만 하면 되겠구나. 물론 약속한 물건을 받아서 말이다.”
“네?”
자홍은 목치수와 금형권을 불러 동굴 밖으로 물러났다. 마치 동굴에는 아무 관심도 없는 사람 마냥 여유롭고 평화로운 얼굴이었다.
“흐음, 이렇게 나오시겠다?”
이금 역시 호위들을 불러 밖으로 물러앉았다. 이제부터 벌어질 일들이 강운선의 진짜 의도일 터, 눈을 크게 뜨고 지켜봐 줄 작정이었다. 려국을 멸망시킨 모두를 한 자리에 불러모은 진짜 이유. 그것이 무엇이든, 그가 어디까지 할 수 있을지 궁금하기도 했다. 날카로운 눈빛이 운선의 태연자약한 얼굴에서 떠날 줄을 몰랐다.
“무생, 내 앞에 이십 보 앞까지 다가오는 이는 그가 누구이든 베어 버려라. 아, 물론 형님 앞에 오는 자도 마찬가지다.”
“존명!”
거대한 덩치의 무생이 이번에는 그림자처럼 숨지 않고 이금의 등 뒤에 바위가 되어 버티고 섰다. 주군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목숨도 불사할 마음으로 아수라장이 된 동굴 안팎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강운선! 고작 이 종이 쪼가리로 우리를 유린한 것이더냐?”
“오냐, 네놈이 죽고 싶어 환장했구나.”
얼마나 지났을까? 드디어 사람들은 아무것도 건질 게 없다는 현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분노의 화살은 오직 강운선을 향했다. 있지도 않은 허상으로 모두를 속이다니, 찢어 죽여도 시원치 않았다. 누구의 것인지도 모를 욕설이 여기저기서 튀어나왔다.
“해심밀경소!”
그때, 정암의 비명 같은 외침에 모두의 이목이 한곳으로 집중되었다. 책장 한편에 우아하게 놓인 해심밀경소. 총 열권 중 율천이 가졌던 열 권째를 뺀 나머지가 정갈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러나 광인처럼 쫓아가 전설의 비급이라던 그것을 펼친 이들은 모두 얼어붙고 말았다. 강호에 날고 긴다는 십여 개 문파의 목숨을 앗아간 절세 비급. 뒤집어 읽고, 대각선으로 읽고, 빛에 비춰보아도 그것은 무공의 ‘무(武)’자와도 관련이 없었다. 그저 불교 경전 해심밀(解深密)의 해석본에 불과했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이들이 이 하찮은 책 때문에 목숨을 잃었던가? 그랬다. 이 빌어먹을 책이 모든 비극의 시작이었다.
“으아아아아!”
흥분한 천령문의 문주가 보검을 꺼내 들었다. 이 끔찍한 종이 쪼가리들을 다 찢어발겨 버리리라. 울분을 풀어낼 가장 단순한 방법을 생각해 낸 것이었다. 그러나 막 해심밀경소를 손에 들었을 때, 그의 분노를 막은 이가 있었다. 바로, 오대산검 제일의 석학이자 고대산파의 살아 있는 역사 백천이었다.
“여러분, 잠시만 진정하고 제 말씀을 들어주십시오. 눈을 크게 뜨고 찬찬히 돌아보십시오. 지금 앞에 놓인 이것들은 그저 종이 쪼가리가 아닙니다. 보물, 아니 그보다 더 귀하지요.”
“뭐요?”
“이 늙은이가 노망이 났구나!”
거친 욕설 사이에서도 백천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오히려 눈시울이 서서히 붉어지더니 굵은 눈물을 뚝뚝 떨어뜨렸다.
“무엇을 찾아 여기 오신지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전설처럼 들어왔지요. 해심밀경소를 얻는 자,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다고 말입니다. 네, 맞습니다. 지금 이곳에 그 모든 것이 있지 않습니까?”
백천의 늙은 손이 수많은 책더미에서 한 권을 빼 들었다. 그리고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모두의 눈이 책의 표지로 향했다.
“반월경?”
그제야 무언가를 깨달은 그들은 홀린 듯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까처럼 원하는 것을 찾는 게 아닌, 보이는 것을 찾아서. 욕망을 감한 눈동자들은 곧 어떤 글자들을 또렷하게 찾아냈다.
“네, 이 거대한 지식 창고는 바로 이 세상 모든 문파의 뿌리입니다. 옛 려국과 경국, 그리고 천서국의 뿌리가 여기에 다 있단 말입니다.”
거짓말처럼 주변이 고요해졌다. 큰 파도가 휩쓸고 지나간 뒤, 아무것도 남지 않은 텅 빈 모래사장처럼 휑하고 서글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