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무십일홍-200화 (200/209)

200화. 主客顚倒(주객전도)

겨우 샛길로 빠져나간 가은은 죽을힘을 다해 뛰었다. 어떻게든 이 습지를 벗어나 장은의 비열한 민낯을 폭로해야 했다. 그것만이 자신이 사는 유일한 방법이었으므로. 그러나,

“여기서 또 만났네요.”

아란의 붉은 옷자락을 마주한 순간, 절망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하필이면 또 천서국이라니. 곡해고와 봉천을 만났던 그녀로서는 치가 떨리는 이름이었다. 정말이지 지지리 운도 없는 팔자가 분명했다.

“걱정하지 말아요. 죽일 생각은 전혀 없으니. 다만 가지고 있는 그 열쇠를 안전하게 옮겨주도록 할게요.”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저에게는 아무것도 없어요.”

끝까지 잡아떼어보는 양이 깜찍하여 버럭 화가 났으나, 아란은 마음을 가다듬고 상냥한 미소를 지었다.

“그럼 그런 거로 쳐요, 어쨌든 같이 갑시다. 지금까지의 은원은 접어두고 당분간은 한 편이 되어보자고요.”

아란은 뒤에 선 형권을 불렀다. 그는 미처 저항할 새도 없이 가은을 번쩍 안아 들었다. 넓은 어깨에 둘러메고 나니, 아무리 발버둥 쳐도 벗어날 방법이 없었다.

“내려 줘! 내려 주라고, 이 도둑놈들아!”

“강교주와의 약조만 아니었다면 진작에 입을 찢어버렸을 텐데. 아쉽군요.”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를 말을 주절거리며, 아란은 성큼성큼 습지를 걸어 나갔다. 이 지긋지긋한 개싸움도 끝을 향해 가고 있었다. 결국, 누가 승자가 될지는 저 어둡고 습한 지옥도에서 결판이 나겠지. 사실 경국의 황제가 누가 되느냐는 관심 밖이었다.

‘위대한 천서국의 앞날은 경국 황자들의 집안싸움이 아니라 옛 려국의 숨겨진 보물이 결정지을 테니까.’

고작 반 시진 만에 습지를 빠져나오자 언제 그랬냐는 듯, 상쾌한 가을바람이 그들을 맞이했다. 금천의 습지를 가로지르는 아홉 개의 샛길. 마치 우물과도 같은 구정의 늪을 빠져나온 이들은 이제 단 하나의 외길을 앞에 두고 있었다.

“와아.”

형권은 기가 막힌 절경에 자신도 모르게 감탄사를 뱉어냈다. 울긋불긋한 단풍이 가득한 두 개의 봉우리 사이에 거대한 출렁다리가 보였다. 조심조심 그 다리를 건너고 나니, 마치 그들을 기다리기라도 하듯 드넓은 공터가 펼쳐졌으며, 그 끝에는 거대한 석문이 있었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천장과 바닥인지 모를 심연의 동굴. 바로 그들이 그렇게 간절히 찾던 장소가 분명했다.

“여기가 바로 그곳이군요.”

려국의 모든 것이 있다는 전설의 그곳. 아무도 본 적 없고 누구도 간 적 없다는 그곳의 앞에 서자,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이 밀려 올라왔다. 미지의 존재에 대한 설렘, 오랜 꿈을 이루기 직전의 떨림. 아란의 얼굴이 묘한 흥분으로 서서히 붉어졌다.

“이게 다 무슨 일이냐?”

그러나 모퉁이를 돌아 공터에 다다른 두 사람은 완전히 다른 상황에 넋을 잃고 말았다. 그곳에는 이미 수십의 사람들이 무리를 지어 모여 있었다. 그러나 어떤 이의 얼굴에도 희망의 빛이 없었다. 지옥을 보고 나온 이들의 표정이 이와 같을까? 그나마 정신이 말짱한 이들이 분주히 동료들을 추스르니, 그 모습이 마치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오라버니를 찾아야겠습니다.”

아란은 그제야 가슴이 끔찍해졌다. 혹시나 다친 오라버니를 마주할까 두려운 마음에 사방을 둘러보았다. 어쩐지 낯이 익은 이도 보였고, 명성이 자자한 고수들의 모습도 눈에 들어왔다. 그러나 이들 중 몸이 성한 이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금천에 이르렀을 때만 해도 수백이었던 인원이었건만, 지금은 고작 백여 명이나 될까 말까? 습지는 거대한 끈끈이주걱처럼 창창한 목숨을 꿀꺽꿀꺽 삼켜 버린 모양이었다. 그리고 먹이로 삼은 대상의 국적도, 신분도 가리지 않은 듯했다.

“태자 저하.”

그때, 모두의 시선이 한곳으로 집중되었다. 일사불란하게 무릎을 꿇고 머리를 바닥에 조아리니, 전쟁터 같던 그곳이 일순간에 경건해졌다. 자못 어색한 인사를 받게 된 행렬은 몹시 꾀죄죄하고 초라하였다. 만약 누군가가 황실의 문양을 알아보지 않았더라면, 경국 태자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오라버니!”

그 속에서, 아란은 자홍의 모습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걱정이 가득했던 그녀의 눈가가 금세 붉어졌다. 오라버니는 몹시 지쳐 보이기는 했으나 다치지는 않은 듯했다. 잔뜩 겁을 먹은 이석을 부축하여 자리를 잡은 그는 누이를 만나자마자 따뜻한 미소를 지었다.

“무사하셨군요. 정말 다행입니다.”

“그래, 너 또한 일을 잘 마친 듯하구나.”

아란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도, 평소와 사뭇 다른 오라버니의 태도에 당혹스러움을 감출 수 없었다. 목치수의 비호 아래 무사히 습지를 건너온 자홍이었건만, 여유롭던 이전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그의 뒤에서 쭈그려 앉은 이석 역시, 귀신이라도 들린 듯 정신이 반쯤 나가 있었다.

“습지에서 당한 것입니까?”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입구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이들과 붙었으나 정작 우리를 집어삼킨 것은 안개였으니…….”

자홍의 고운 이마에 주름이 깊게 파였다. 그 끔찍한 살육의 현장은 생각도 하기 싫었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강운선의 계략이었을까? 그조차도 가늠할 수 없어 두려움이 밀려왔다.

“우릴 다 죽일 생각이었을까요?”

“아니, 그랬다면 아예 거래를 트지 않았겠지. 처음부터 살릴 요량이었던 것 같다. 다만, 이유를 모르겠구나. 그러니 우린 여전히 그의 덫 안에 있다는 뜻이겠지.”

누이의 물음에 자홍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경계 대상에는 애초에 운선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고작 하루 사이에 가장 두렵고 껄끄러운 상대가 되었으니 기가 막힐 따름이었다.

“아……, 아우가 여전히 살아 있구나.”

여태 발발 떨고만 있던 이석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의 시선 끝에는 우아한 몸짓으로 다가오는 이금이 있었다. 목치수의 도움으로 겨우 목숨을 구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그의 아우가 살아남지 못하리라는 생각에 안심이 되었던 터였다. 그러나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은 그의 모습을 마주하니 실망을 넘어 분노가 치솟았다.

“형님, 고생 많으셨습니다.”

정작 이금의 얼굴은 평화롭기만 했다. 비록 그의 곁에 남은 이는, 호위인 무생과 교위 하나가 전부였으나 옷자락 하나 상한 곳이 없었다. 여유로운 태도로 자홍과 아란에게도 예를 갖추니, 그들 역시 정중하게 읍했다.

‘강운선, 이놈. 경국과 천서국 사이에서 저울질을 하였구나.’

자홍의 초생달 같은 눈썹이 꿈틀거렸다. 이금이 저 아귀의 아가리 같은 소굴에서 멀쩡하게 벗어날 수 있었던 방법은 하나. 길을 알고 있었다는 것. 그리고 이금에게 지도가 있었다면 누가 주었는지는 너무 뻔했다.

‘신나게 놀아났구나. 허나, 아직은 우리에게도 패가 있다.’

자홍은 형권의 등에 얌전히 업혀 있는 가은을 바라보았다. 강운선에게 받은 담보와 이석의 목숨이 여전히 우리 손에 있으니, 아직 거래는 진행 중이었다.

“자, 어디 잘난 낯짝들 좀 보자.”

서늘한 가을 날씨에 모두가 지쳐갈 때쯤이었다. 요란스러운 웃음소리와 함께, 드디어 거대한 덩치의 사내가 나타났다. 구렁이 같은 짙은 눈썹, 부리부리한 눈, 그리고 반 토막이 난 커다란 도(刀). 자기소개 따위는 필요 없었다. 바로 태을신교 칠원성군의 여섯째, 적우였다.

“여기까지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수다. 그러나 남의 것을 훔쳐 가려면 이 정도 희생은 감수해야 하지 않겠소?”

“흠!”

“저, 저 후레자식이!”

“망할 신교 놈들!”

적우의 도발이 이어지자 모두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각자 꿈에 부풀어 시작한 원정이었다. 그러나 현실은 꿈과 달랐다. 믿었던 동료에게 배신당하고, 안개에 취해 사문의 형제들을 직접 베어냈다. 무엇을 위해 여기까지 왔는지 이유를 잃어버린 지 오래였다. 그 모든 재앙이 신교와 강운선 때문인 것 같았다.

“아아, 싸우고 싶다면 마다하지 않겠지만 당신들 목적은 내 대가리보다 보물 아니겠소? 바로 이 앞에 당신들이 그토록 탐내던 보물이 있소. 그래, 어디 한 번 구경해 보시겠소? 물론 그 전에 청산해야 할 일이 몇 가지 있지. 그것부터 따지고 넘어갑시다.”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오만방자하게 구는 것이냐? 대 경국의 태자 저하께 예부터 갖추어라!”

분기충천하여 외친 이들은 이석을 호위하는 교위들이었다. 아무리 강호인의 무리였으나 건방지고 예의 없는 적우의 태도에 화가 난 까닭이었다.

“여기는 엄연히 려국의 땅인데 그게 무슨 상관이람? 남의 땅에 발을 디뎠으면 응당 그곳의 법도를 따르는 게 예의 아닌가요?”

“암, 그렇고말고.”

야무진 목소리의 주인은 적우의 뒤에서 고개만 삐쭉 내민 윤설이었다. 눈을 부릅뜨고 앙칼지게 쏘아붙이자 분위기는 점점 더 험악해졌다. 누구라도 먼저 칼을 들이밀면 다시 또 한차례 피바람이 불어닥칠 것만 같았다.

“려국의 땅이라고는 하나 이미 없어진 나라의 소유권을 주장할 수는 없는 일이지요. 그렇다고 다른 두 나라의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우리 중 누구의 것이라 할 수 없으니 그럼 강호의 법도를 따르지요.”

차분하지만 또렷한 목소리가 좌중을 압도했다. 드디어 모두가 기다리던 강운선의 등장이었다. 그를 바라보는 눈동자들에는 분노와 원망이 가득했지만, 대드는 이는 없었다. 그의 말이 틀리지 않기도 했거니와 정작 경국의 태자 이석도, 친왕 이금도 나서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결국, 모두의 동의를 받은 셈이 되었다.

“무림의 법도를 따른다고 하면 응당 오대산검의 맹주가 나서야 하지 않겠습니까? 장문주님을 기다려 시시비비를 따짐이 옳겠습니다.”

오랜 침묵을 깨고, 선운검파의 기정이 나섰다. 젊은 선자의 대찬 용기에 수십의 무림인들이 너도나도 동조하였다. 오직 황실의 사람들 쪽만이 고요하였는데, 강운선이 이 기가 막힌 상황을 어찌 극복하는지 지켜볼 심산이었다.

“무림 맹주라 하셨습니까? 혹 이 자를 말씀하신다면 저 또한 청산할 일이 있습니다.”

운선은 만면에 웃음을 띠고 나무 그림자 속에서 걸어 나왔다. 그러나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어깨에 커다란 사내를 짊어지고 있었는데 그 옷차림을 보자마자 모두 당황하여 입을 다물지 못했다.

“장문주님!”

“맹주님!”

운선이 내팽개치듯이 바닥에 내려놓고 나서야 장은의 의식이 서서히 돌아왔다. 온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고 정신이 혼미하여 몸을 일으키기조차 어려웠다. 수치스러움, 굴욕감에 이대로 콱 죽어버리고 싶었다.

“네놈이 우리를 습지로 유인하였구나. 맹주를 폐인으로 만들고 형제들을 죽게 만들다니 네놈이 정녕 사람이더냐?”

기정의 울부짖음을 신호로 너도나도 검을 꺼내 들었다. 어차피 목적지에 다 왔으니 저놈의 안내는 필요치 않았다. 형제들을 도륙하고 오대산검을 욕보인 죄를 물어야 했다. 수십의 아군이 있으니 겁날 것이 없었다.

“웃기는 소리를 하는군.”

무표정하게 좌중을 내려다보던 운선이 쓴웃음을 지었다. 누가 누구를 욕보이고, 죽게 했는가? 애초에 남의 것을 탐하지 않았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비극이었건만, 감당하기 어려운 죄책감을 타인에게 뒤집어씌워 면죄부를 얻으려는 심보가 역겹기만 했다.

“당신들의 형제는 누가 죽였습니까? 설마 저 습지의 안개가 죽였다는 헛소리를 하는 겁니까? 자신의 손에 묻은 피를 안개 탓이라 징징대려거든 이 선을 넘어 저에게 검을 겨누십시오. 그 누구의 검도 피하지 않겠습니다.”

운선이 앞으로 한 걸음을 나서더니 바닥에 곧은 선을 그었다. 그 앞에 버티고 서서 좌중을 돌아보자 그 누구도 선뜻 대들지 못했다. 동료의 몸에 칼을 꽂아 넣고 살아남은 이들에게도 일말의 양심은 남아 있는 모양이었다.

“그래 좋다. 다른 형제들의 죽음은 그렇다 치자. 그럼 감히 오대산검의 맹주님을 해한 일도 발뺌할 테냐?”

두타공파의 임시 장문인 정암이었다. 그 또한 제자 여럿을 제 손으로 죽였기에 뒤로 물러섰던 참이었다. 그러나 장은에 관한 일은 달랐다. 무림 맹주를 건드렸으니 그 책임을 물어야 했다.

“장은, 아니 장교은은 오대산검의 맹주이기 이전에 려국의 배신자입니다. 이날을 기다려 벌을 내렸으니 제가 한 짓임은 부정하지 않겠습니다. 하여, 이 일에 대해서만큼은 제가 책임져야겠지요.”

“무슨 헛소리냐? 우리 장문주님은 황석파에서 쭉 자라왔거늘, 려국인일 리가 없지 않으냐?”

웅성거리는 사람들 사이에서 황석파 제자들이 치고 나왔다. 감히 한 문파의 수장을 욕보이고, 명예를 실추시키다니. 사문에 대한 도전이 아닐 수 없었다.

“맞다. 장은, 아니 장교은은 려국 태학사 장은령의 장남 장교은이 맞다.”

모두의 시선이 일시에 목소리의 주인에게로 집중되었다. 황석파 제자들 사이에서 해쓱한 얼굴로 앉은 그는, 황석파의 전 부장문이자 제 일 원로인 고유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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