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화. 出其不意(출기불의)
십여 합을 부딪쳤을 때, 용가현은 자신이 절대로 곡해고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무리 정상이 아닌 몸이라지만, 단 한 번 유효한 공격을 해보지도 못하고 수세에 몰렸다. 상대는 고작 비파나 뚱땅거리며 줄을 당겼다 날리는 게 전부였다. 그런데도 피하기에만 급급하니 한심할 따름이었다.
탕, 탕
주먹으로 두 개의 표창을 막은 후에 몸을 동그랗게 말아 한 바퀴를 굴렀다. 상대와 거리를 좁히며 하체를 공략하기 위함이었다. 소요공의 내공을 오 할 이상 실은 주먹을 뻗어 곡해고의 슬개골을 강타했다. 그러나,
“쯧쯧, 약해.”
“악!”
분명 뼈에 닿는 느낌이었건만, 용가현의 손등에 박힌 것은 소나무의 거친 등걸이었다. 어느새 자리를 옮긴 곡해고가 바로 음률을 바꾸자 무리하게 끌어올렸던 기혈이 뒤틀렸다.
좌르릉, 퉁
곡해고가 왼손 약지를 한 번 튕기자, 현 하나가 휘리릭 풀어졌다. 눈 깜짝할 새에 용가현을 향해 날아가니, 뒤늦게 몸을 돌려봤으나 어깨를 움푹 베어내고 말았다. 극심한 통증에 상처를 손으로 감싸 쥐고 몸을 웅크렸다.
‘독이구나.’
단순한 자상이 아니었다. 서둘러 혈을 눌렀음에도 검은 피는 그칠 줄을 몰랐다. 천서국의 기화요초로 만들어진 독은 해약도 없다고 했거늘, 안 그래도 모자란 실력으로 십여 합도 버티기 어려울 듯했다.
“어차피 금황자의 사람이든, 태자의 사람이든 다 죽여버리면 그뿐. 이제 구별조차 귀찮다.”
곡해고의 모습은 왠지 모르게 피곤해 보였다. 평상시보다 훨씬 느릿한 동작으로 비파를 분리하여 작은 곤봉을 만들었다. 이미 싸움의 승패는 정해졌으나 상대는 용가현이었다. 진 게 뻔한데도 쉬이 굴복하지 않을 테니 마지막 일격으로 끝을 내줄 생각이었다. 묵안과의 옛 인연을 고려한 배려였다. 그때,
“대, 대사형! 으아악!”
날카로운 비명이 곡해고의 귓속을 파고들었다. 크게 다치기는 하였으나 생명에는 지장이 없던 봉천이었다. 갑자기 위급한 상황에 직면했다면 또 다른 적이 나타났다는 뜻일 터. 용가현에게 향하던 손을 거두고 사제가 엎어져 있던 습지 쪽으로 몸을 돌렸다.
“당신이 그 대단하다는 서이국의 곡해고인가?”
“네 이놈!”
낯선 사내의 손에는 겁에 질린 눈을 차마 감지도 못한 봉천의 머리가 들려 있었다. 막 몸뚱이에서 잘린 그것은 선홍빛 피를 뿜어내며 곡해고의 눈을 어지럽혔다.
“설마, 백형진?”
용가현은 눈앞에 벌어진 상황이 믿을 수 없어 수차례 눈을 비벼보았다. 백의행 형진이 누구인가? 오대산검의 이름난 고수 중에서도 온화하고 도리를 지키기로는 제일이었다. 아무리 서이국의 적이라고 해도 다짜고짜 목부터 베어내다니, 이해하기 힘든 행동이었다.
“용문주님, 살아계셨군요. 이 늙은이는 제게 맡기고 어서 피하십시오.”
“아니, 그건…….”
눈치가 빠른 용가현이었으나 이번만큼 풀기 어려운 과제는 처음이었다. 급작스러운 백형진의 등장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가? 이 습지 안에 얽히고설킨 욕망이 얼마나 복잡한지 가늠하기조차 어려웠다.
“타륜!”
그러나 곡해고는 입장이 전혀 달랐다. 상대가 누구인지는 알고 싶지도 않았다. 마치 조타수가 타륜을 휘두르듯, 곡해고의 거친 손안에서 곤봉이 핑그르르 좌우로 회전했다. 봉천의 죽음을 확인한 순간, 그의 눈에는 오직 살기만이 담겼다. 이제 그의 반경 안에 든 이는 모두 살아서 나갈 수 없게 된 셈이었다.
“고작 오랑캐 주제에, 사호세주니 사천왕이니, 거창한 이름을 붙여댔구나.”
형진이 피식 웃음을 터뜨리더니 양손에 가득 내력을 흘려보냈다. 발작이 일어난 직후이기에 오히려 몸이 가벼워진 기분이었다.
탕, 탕, 탕
소매를 휘둘러 곤봉의 타격을 중화시키면서도 보법은 흐트러지지 않았다. 되레 수인을 맺어 곡해고의 왼팔 근골을 내리치니 상대의 내력을 반 이상 감하는 효과가 있었다.
“이놈 봐라.”
곡해고의 얽은 뺨이 실룩거렸다. 얼핏 보면 방어만 하는 듯 보였으나 그는 정확히 알 수 있었다. 이 건방진 기생오라비가 흘려보내는 내력의 정체가 태을신공과 닮아있다는 것을.
“신교 놈이냐?”
“감히 더러운 신교의 이름을 어디다 갖다 붙이느냐?”
형진은 미간을 잔뜩 구겼다. 아무래도 무공의 정체를 들키는 건 시간문제였다. 차라리 전심을 다 해 상대하는 것이 훨씬 효율적일 듯싶었다.
“심지!”
일부러 보여주고자 시묵공을 출수하였다. 내력의 출처를 확인하기 위해 대뜸 한 장 앞까지 다가온 곡해고는 예상하지 못한 두타공파의 장력에 깜짝 놀라 곤봉으로 막아섰다.
“심행!”
형진은 그 틈을 노려 이번에는 상대의 곤봉을 가슴팍까지 끌어들였다가 심행의 초식을 사용하여 손바닥으로 세게 밀어냈다. 아니나 다를까, 곡해고가 무너진 중심을 잡기 위해 뒤로 성큼 물러섰다.
“용문주님, 남동쪽으로 쭉 움직이시다가 좌측으로 두 번 돌아나가면 습지의 출구입니다. 제 걱정은 마시고 일단 먼저 나가십시오. 곧 따라가겠습니다.”
“그러나 백대협, 사람 된 도리로 어찌 형제를 버리겠는가?”
마음껏 태을신공을 사용할 요량으로 제안하였건만, 쓸데없이 의리를 중시하는 용가현은 쉬이 물러서지 않았다. 초조한 마음에 짜증이 올라왔으나 형진은 끝까지 미소를 잃지 않고 대꾸했다.
“지금 문주님께서는 크게 다치지 않으셨습니까? 출구로 먼저 가서 지원군을 불러오심이 어떻겠습니까?”
“알겠네. 그리하겠네.”
용가현이 마지못해 몸을 움직였다. 이윽고 나무 그림자 뒤에 가려지니, 좁은 공간에는 이제 두 사람만이 남았다. 형진은 절로 기분이 좋아졌다. 태을신공을 쓰든, 시묵공을 쓰든, 진짜 실력을 감출 이유가 없어진 셈이었다. 때마침 몸을 정돈한 곡해고가 성난 들개처럼 달려들었다.
“태일천하!”
팍!
단전에서부터 올라온 뜨거운 기운이 서서히 그의 몸을 지배했다. 정신이 아득해지고 온몸이 화끈거렸으나 운기를 멈추지 않았다. 이미 형진은 신공의 화마가 자신의 정신을 무너뜨리는 지경에 이르렀음을 깨달았다. 그러나 상관없었다. 광인이 되더라도 눈앞에 있는 극강의 적을 갈가리 찢어버리고 싶었다. 붉은 실핏줄이 빼곡히 들어선 눈은 굶주린 포식자와 같았다. 약육강식! 오직 상대를 죽이겠다는 강한 욕망 때문에 심장이 터져 나갈 듯 뛰기 시작했다.
“애송이, 본때를 보여주마!”
머리 위로 날아오르는 곡해고의 작은 몸이 보였다. 곧이어 정수리에 내리꽂히는 둔탁한 타성도 귀에 들렸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통증이 느껴지지 않았다. 극도의 쾌감이 몸을 휘감는 그 순간, 형진은 완전히 의식을 잃었다.
“저게 뭐람?”
용가현은 끔찍한 광경에 온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거대한 불기둥처럼 붉어진 형진의 몸은 흡사 사람의 형상이 아니었다. 울퉁불퉁 솟아오른 혈관이 혹처럼 튀어 올라 당장이라도 터질 듯이 울렁울렁 움직였다. 곡해고의 유려한 몸놀림을 따라가지는 못했으나 어떤 공격에도 타격을 입지 않았다. 강철처럼 단단한 근육은 곤봉으로 수십 대를 맞았는데도 끄떡없었다. 되레 맞은 팔을 크게 휘두르자, 손끝에 스친 곡해고의 코가 단번에 으스러졌다.
‘주화입마가 분명하다. 그런데 어째서 광인이 되었는가?’
아무래도 형진의 태도가 의심스러웠던 용가현은 위험을 무릅쓰고 가던 길을 돌아온 참이었다. 그리고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목격하는 내내 알 수 없는 두려움과 배신감을 느꼈다.
“태을신공을 무리해서 익히면 큰 재앙이 닥친다. 그것이 바로 무공의 귀재라 불리던 성곤조차도 완공하지 못한 이유이니라.”
묵안과 무학을 논하던 어느 날이었다. 가현은 존경하는 사형이 어째서 려국 최고의 내공이라는 태을신공을 전혀 배우지 못했는지 물어보았다. 그는 조금도 아쉽지 않다며 이렇게 덧붙였더랬다.
“무공이란 무릇 자신의 그릇에 맞아야 하는 법이다. 대접에 담을 것을 종자기가 탐내면 그릇은 깨어져 버린다. 하여 나에게는 마땅히 자격이 없으며, 소요공을 깊이 익혀 내 그릇을 넘치지 않게 채우고자 하는 것이다.”
그때는 소요공을 폄훼한다 여겨 마음이 상했던 가현이었다. 그러나 이제야 묵안이 했던 말의 참뜻을 깨달았다.
“무공에는 경중이 없고 서열이 없다. 자신에게 적합한 것을 깊이 익혔을 때, 비로소 생사경의 경지에 이를 것이다.”
‘아아, 자신을 버리고 얻은 절세 무공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그 사이 두 사람의 싸움은 끝을 향해 가는 중이었다. 협영, 안하, 그리고 흉천에 엄지손톱만 한 구멍이 뚫린 곡해고는 장승처럼 서서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수십 군데 찔리고 베인 상처에서 붉은 피가 새어 나와 온몸이 피투성이였다. 평생 성곤 이외에는 적수가 없던 곡해고였건만, 낯선 땅에서 외로운 죽음을 맞이하게 된 것이었다.
“허억, 헉.”
이제 눈 한 번 끔뻑거리는 데도 힘이 들었다. 몸에서 피가 다 빠져나왔는지 통증도 없었다. 막상 죽음을 눈앞에 두자 생각만큼 끔찍하지는 않았다. 다만 아쉬운 것은, 누구나 인정하는 고수가 아니라 이성이 없는 짐승에게 당했다는 것. 수치스럽고 한심했다.
“큭큭큭.”
이미 상대의 죽음을 확신했는지 형진의 움직임이 완전히 멈췄다. 여전히 흰자위만 번뜩이는 눈으로 살벌하게 웃고 있을 뿐, 정신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 끝이 무엇이든, 너는 누구도 이기지 못할 것이고 무엇도 이루지 못할 것이다. 고작 탐욕의 노예가 되어 사람 되기를 포기하였으니 짐승과 다를 바 없다.”
피고름이 섞인 가래를 툭 뱉으며, 곡해고는 쉴 새 없이 욕지거리를 뱉어냈다. 그래야만 답답한 속이 조금이나마 뚫릴 것 같았다.
“쉬익, 쉬익.”
연신 히죽대던 형진의 얼굴이 다시금 험악하게 찌그러졌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으르렁거리는 모습이 한 마리 배고픈 맹수와 같았다. 아직도 말할 기운이 남았는지 더듬더듬 유언처럼 주절거리는 곡해고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그래 죽여라. 나는 조금도 두렵지가 않구나. 사람이길 포기한 짐승에게 죽는 게 부끄러울 뿐이다. 하긴, 너 따위 참새가 대붕의 뜻을 어찌 알겠는가? 아하하, 욱!”
갈퀴처럼 뾰족한 형진의 오른손이 그의 가슴에 꽂히는 순간, 곡해고의 처절한 웃음소리가 뚝 끊어졌다. 대신 잔잔한 파동이 안개에 섞여 윙윙 메아리가 되어 돌아왔다.
“킥킥.”
드디어 형진의 기괴한 소리까지 멎자, 습지는 언제 그랬냐는 듯 고요해졌다. 오직 부들부들 몸을 떠는 갈대들만이 방금까지의 끔찍한 혈전을 기억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