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화. 狼狽(낭패)
용가현은 단전에 힘을 주고 호흡을 최대한 짧게 끊었다. 습지에 발을 디디는 순간, 불쾌하고 낯익은 향에 저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그때 그 연기와 같은 냄새다. 역시 신교 놈들이 덫을 놓았구나.’
태봉에서 당했던 그 일이 되레 도움이 된 셈이었다. 얼핏 곁눈질로 보니, 봉천은 전혀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저 눈앞에 자욱한 안개가 짜증이 나는지 쉴 새 없이 욕설을 내뱉고 있었다.
“어째서 폐하는 이따위 땅에 욕심을 내는지 모르겠어. 땅덩어리도 좁은 데다가 산지는 또 왜 이렇게 많은지. 흥, 우리 천서국과 견줄 자격도 안 되지. 뿐인가? 려국인들은 하는 짓이 영락없는 소인배란 말이야. 습지에 안개에, 더럽고 치사한 수는 죄다 동원하다니. 퉤!”
‘저 성질머리는 여전하구나. 잘만 하면 저놈을 따돌리고 습지를 빠져나갈 수 있겠다.’
불행 중 다행으로 체내의 약 기운을 어느 정도 몰아낸 터였다. 계속 무기력한 척하다가 내력이 거의 돌아올 즈음에 기회를 보아 일격을 날릴 작정이었다. 사호세주의 고수 넷은 모두 실력이 출중하여, 오대산검의 장문이라 할지라도 상대하기 버거웠다. 다만 봉천은 성정이 다소 급하고 사리분별력이 떨어졌다. 이 점을 적절히 이용하면 충분히 승산이 있지 않을까?
“봉대협, 일전에 금천 습지에 대해 묵안 사형에게 들은 바가 있습니다. 이곳은 안개가 짙고 샛길이 많아, 들어갈 때는 쉬워도 나오기는 어렵다고 하더군요. 무릇 길을 찾기 어려운 곳에서는 특별한 표식을 남겨 헷갈리지 않도록 하는 것이 가장 좋은 수라 배웠지요. 우리도 이 같은 방법을 쓰면 어떨까요?”
“흐음, 과연 그 말이 옳군요. 마침 내가 종종 채찍처럼 휘두르는 긴 천이 있으니 잘라서 갈대에 묶어두도록 하지요.”
봉천은 예상외로 순순하게 가현의 의견을 따랐다. 습지의 안개 때문에 온몸이 축축해지는 기분이 싫기도 했거니와 아까부터 머리가 지끈거렸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중독된 용가현이 함부로 도망치거나 공격하지 않을 테니 믿고 따라도 되지 싶었다.
끈을 묶으며 움직이려다 보니 반 시진이나 지났는데도 여전히 습지였다. 게다가 어떤 곳은 두세 번도 더 되돌아오게 되니 절로 진이 빠졌다. 참을성 없는 봉천에게는 그야말로 지옥이 따로 없었다.
“어째서 다시 여기냔 말이야!”
결국, 출발점으로 다시 돌아오게 되자 봉천은 분통을 터뜨렸다. 고래고래 지르는 목소리가 안개를 머금고 메아리가 되어 돌아왔다. 짐승의 포효 같기도, 귀신의 울음 같기도 했다.
‘조금만 더…….’
가현은 철부지 동행을 달래는 한편, 단전에 내력을 돌려 약 기운을 빼내는 데 최선을 다하는 중이었다. 어느덧 손바닥에 작게나마 장력이 모였다. 이제 곧, 기습할 정도의 장풍은 쏟아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게다가,
“용문주. 아까부터 너무 더운데 당신은 괜찮은가요? 아, 진짜 짜증 나네.”
“글쎄, 여기가 남쪽이라 아직 가을이 덜 익은 탓 아닐까요? 너무 조급해하지 말고 다시 차근차근 짚어 나갑시다.”
봉천의 이마에서는 식은땀이 빗줄기처럼 줄줄 흘러내렸다. 기실 그는 이미 독초의 향을 너무 많이 맡은 뒤였다. 평소였다면 쉬이 눈치챘을 몸 상태건만, 소소정의 독 구슬에 당한 내상이 발목을 잡은 탓이었다. 설이 덕분에 얼추 해독되었다지만, 또 다른 성분의 독을 이겨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아, 이상하구나. 머리가 어지럽고 구역질이 나는 게, 도저히 걷지 못하겠다.”
내내 앞장서서 걷던 봉천은 부러 발걸음을 늦춰 용가현의 뒤에 섰다. 두통이 너무 심해 고개를 들지 못하고 상대의 발뒤꿈치를 보며 겨우겨우 따라 걸었다. 그리고 그제야 무언가 크게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헛, 나를 속였구나!”
눈 깜짝할 사이에 소매 속에서 시퍼런 검날이 튀어나왔다. 봉천의 보검, 건달바(乾達婆)였다.
챙!
상대의 움직임을 눈치챈 건 용가현도 마찬가지였다. 호흡이 흐트러지는 것을 확인한 순간, 미리 단도를 쥐고 있던 왼손을 쭉 뻗었다. 두 쇠붙이가 맞닿자마자 불꽃이 파르르 튀더니, 뿌연 안개를 잠시 흩어내었다.
“봉대협, 약조를 어기는 거요?”
“흥! 이 간사한 용가 놈아! 진작에 해독이 되었거늘, 날 속이고 내력을 잃은 척하였구나.”
“흐음.”
두통으로 눈앞이 흐릿한 중에도 그는 용가현의 발을 똑똑히 보았다. 습한 흙길을 걸으면서 발자국 하나 찍히지 않은 것을. 누군가를 속이고자 할 때는 해치기 위함이라는 걸, 강호의 살수인 그가 모를 리 없었다.
“하긴, 경국인들은 려국인들만큼이나 양심이 없는 것들이지. 남의 땅을 뺏고 내 것이라고 우기는 놈들을 믿었으니 내가 미쳤지, 미쳤어. 그래, 어디 네 잘난 실력 한 번 보자꾸나.”
뒤로 일 장 이상 물러난 봉천은 건달바를 크게 휘둘러 둘 사이에 자욱한 안개를 걷어냈다. 여태 사람 좋은 미소로 기운 없이 걷던 가현이 커다란 곰처럼 자신을 향해 돌진하는 모습이 보였다. 양 주먹에 철편을 끼고 좌우로 휘두르니 습하고 더운 바람이 안면으로 훅 불어닥쳤다.
“고작 애들 가지고 노는 희구를 휘두르는 꼴이라니.”
봉천이 몸을 뒤로 젖히자마자 후텁지근한 권풍이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갔다. 허리를 회전축으로 삼아 뒤로 공중제비를 하여 갈대 머리를 사뿐히 밟았다. 파리 한 마리도 지탱하지 못하는 나약한 갈대건만, 미처 무게를 느끼기도 전에 봉천의 몸은 다음 갈대로 옮겨갔다.
“그래봤자 얼마나 버티겠느냐?”
상대의 빼어난 경공에도 용가현은 코웃음을 칠 뿐이었다. 얼핏 보아도 봉천의 중독 상태는 꽤 심각했다. 서늘한 가을 날씨에도 온몸이 땀에 절어 있었으며 갈대를 밟으며 움직이는 다리가 부들부들 떨렸다. 여기서 내력을 더 끌어쓰다가는 필경 자멸하고 말 것이었다.
“소요음!”
가현이 크게 반원을 그리며 양팔을 휘둘렀다. 순식간에 주변 공기가 주먹 안으로 빨려 들어갔으나 내공의 이름처럼 아무런 소리가 나지 않았다. 덕분에 적이 방어하려 할 때는 이미 주먹이 이마에 다다른 다음이었다.
퍽!
봉천은 가까스로 왼쪽 팔뚝을 들어 얼굴을 막았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척골이 완전히 부러졌다. 정신이 아득해질 만큼 고통스러웠으나 아파할 틈도 없었다. 다음 공격을 피하려면 상대와 최대한 거리를 벌려야 했다. 그는 본능적으로 소매를 휘둘러 평소 채찍처럼 쓰는 천을 쭉 펼쳐 들었다. 그러나,
“아! 젠장!”
기껏해야 서너 자가 될까 말까 한, 천은 건너편 나무까지 이르지도 못하고 습지 가운데에 툭 떨어져 버렸다. 길을 찾아보겠다고 길잡이 용도로 찢어 썼기 때문이었다.
“이놈! 이 구렁이 같은 놈!”
“하하, 오늘 나에게 천운이 따르는구나. 억울하게 죽은 내 아우들이 도와주나 보다.”
물론 천 조각까지 계산한 것은 아니었으나, 그야말로 행운이 따른 셈이었다. 득의양양해진 용가현은 거침없이 달려들었다. 위협만 주고 도망치려던 생각은 버린 지 오래였다. 지금이 아니라면 이 대단한 살수를 죽일 기회가 또 있을까? 백 번을 다시 물어도 대답은 ‘아니오’였다. 결국, 죽이지 않으면 죽게 될 사이. 가능성이 클 때 밀어붙여야 했다.
“파영!”
가현의 육중한 몸이 허공에 붕 떠올랐다. 몸을 비틀어 돌며 두 주먹을 나란히 뻗으니, 불어 나간 바람이 습지에 고인 물에 잔잔한 파동을 일으켰다. 땅에 발을 디딜 때 몸의 무게를 곱절로 더해 진동을 주자, 그 파동의 중앙이 솟구쳐 올라 물기둥이 되었다.
쏴아!
솟구친 물기둥이 갈대 머리를 옮겨 다니는 봉천의 발바닥에 세게 부딪쳤다. 고작 팔뚝 굵기의 작은 물기둥이었으나 성인 남자의 몸을 밀어내기에 충분했다. 중심을 잃은 봉천은 습지에서 떠밀려 축축한 흙바닥에 내팽개쳐졌다.
“우욱!”
사지를 제대로 쓰지 못하고 넘어진 봉천은 빗장뼈가 서너 개 이상 부러졌다. 하필 발바닥 용천혈에 압력이 가해진 탓이었다.
“서쪽 오랑캐 주제에 큰 나라를 넘본 죄다. 오늘 죽음으로 네 죄를 갚아라.”
용가현은 조금의 자비도 베풀 마음이 없었다. 오른 주먹을 들어 소요공의 내력을 실었다. 이대로 정수리를 내리쳐 즉사시킬 생각이었다.
디리링! 탁!
“앗!”
그때, 안개 속에서 반짝 빛이 새어 나오는가 싶더니, 별 모양의 표창이 빠르게 날아왔다. 생각지도 못한 암기에 대응할 여유가 없던 가현은 고작 몸을 비트는 게 전부였다. 다행히 몸에 꽂히지 않고 스쳐 지나가니, 곧 왼쪽 소매가 붉게 물들었다.
“누구냐?”
“흐음, 이 어리석은 놈이 여기서 노닥거리고 있었구나.”
“설마, 당, 당신은?”
안개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이의 얼굴을 본 순간, 가현의 낯빛이 새파랗게 질렸다. 평생 다시는 만나고 싶지 않았던 사호세주의 수장, 다문천왕 곡해고가 예의 그 비열한 웃음을 띠고 다가오고 있었다.
“쯧쯧, 어리석다 어리석어. 절대로 네 판단을 믿지 말라 했거늘, 어찌 이리 철이 없는 것이냐? 적어도 형권은 말이라도 잘 듣지 않니? 네 모자란 행동에 폐하의 계획이 무너질 수 있음을 왜 몰라?”
“사…사형……!”
그제야 안심이 된 봉천이 어린애처럼 울음을 터뜨렸다. 용가현에게 속았다는 수치심과 사형이 왔다는 안도감 때문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겁이 나기도 했다. 자신이 안하무인으로 행동한 이유가 보물이 탐나서였다는 사실을 들키면 큰일이었다.
‘저놈을 빨리 죽여 입을 막아야 한다.’
빠르게 판단이 선 봉천은 다짜고짜 곡해고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늘어졌다. 사형의 꾸중은 나중에라도 들으면 그만이지만, 용가현이 안개 속으로 도망가면 다 허사였다.
“사형! 저놈은 금황자의 사람입니다. 태자와 맺은 약조가 있으니 어서 죽이십시오.”
“어라? 용문파가 이금의 편이라고?”
“네, 태자의 사람인 양 저를 속여 끌고 와서는 죽이려 했지 뭡니까? 틀림없이 금황자 쪽이라고요.”
“흐음.”
두 사람의 대화를 듣는 용가현은 기가 탁 막혔다. 이야기인즉슨, 태자가 천서국과 손을 잡고 금황자를 죽이려 한다는 것이었다. 외세를 끌어들여 황위 다툼을 벌이다니, 이토록 어리석은 일이 또 있을까? 답답하고 황망하여 정작 자신이 위기에 처했다는 사실도 잊어버릴 지경이었다.
“뭐, 기든 아니든 저놈 하나 죽이는 게 대수랴?”
안 그래도 이래저래 짜증이 났던 곡해고는 살인 욕구가 확 일어나던 참이었다. 누구라도 죽여 꽁한 마음을 풀지 않으면 자신이야말로 일을 그르칠 것만 같았다. 하여 용가현이라도 죽여 끓어오르는 분노를 다스려 보자 마음먹었다.
“원래 용문파는 계획에 없었으나 당신을 죽이기로 지금 막 결정했소. 그저 재수가 없었다고 생각하시오.”
“뭐? 이 살인귀들이 뭐라 지껄이는 것이냐? 남의 땅에 들어온 것도 모자라 감히 천자 자리에 대해 왈가왈부해? 고작 오랑캐 것들이?”
이제 용가현은 도망갈 마음이 사라졌다. 당장 이 자리에서 뇌수가 터져 나와 죽어도 이대로 물러설 수 없었다. 천자를 음해하는 것은 나라를 욕보이는 것과 같고, 나라는 곧 백성의 정체성이었다. 서쪽 오랑캐의 조롱에 물러선다면 살아도 부끄러운 일이 아니겠는가?
“둘 다 죽여버리겠다! 파륜!”
용가현이 양팔을 감아 가슴 앞에서 열십(十)자를 만들었다. 내력을 전부 쏟아부어 주먹에 담더니 온몸을 팽이처럼 휘돌려 적을 향해 돌진했다. 동귀어진! 자신의 생사를 돌보지 않는 그의 권풍은 오직 애국심과 자존심을 위한 일격이었다.
“쯧쯧, 고작 저 정도 위력의 소요공이라니. 죽은 묵안이 무덤에서 통곡하겠구나.”
디리링!
곡해고의 작고 찢어진 눈에 살기가 번뜩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