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화. 氷炭不相容(빙탄불상용)
가은이 도망친 습지 쪽에서 검은 인영이 나타났다. 구름을 걷는 것처럼 한 걸음씩 내디딜 때마다 희뿌연 안개가 걷혔다. 그 모습이 어찌나 가벼운지 마치 인간 세상을 구경 나온 신선과 같았다.
“강운선! 이 간교한 놈!”
장은은 감정을 숨기지 못하고 욕설부터 뱉어냈다. 처음부터 이 순간을 노렸다는 듯, 여유만만한 그의 태도에 더럭 짜증이 났다.
“움직일 수 있겠습니까? 혹 설이에게 받은 호각을 아직 갖고 있습니까?”
그러거나 말거나, 운선은 인경의 골절된 팔부터 살펴보았다. 다행히 뼈가 으스러지지는 않았으나 치료가 시급했다. 그의 품 안을 뒤져 호각을 찾아내더니 숨을 몰아넣어 길게 불었다.
삐익!
“설이가 곧 이리로 올 테니 그때까지만 버티십시오.”
“저는 괜찮습니다. 그보다 가은 낭자가 교주님 뒤로 보이는 샛길 쪽으로 도망갔습니다. 얼른 찾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 와중에도 인경은 가은에 대한 걱정이 앞섰다. 장은도 문제지만 습지에는 여전히 수많은 포식자가 먹이를 노리고 있을 터였다. 무공도 변변치 않은 가은이 무사히 벗어날 리 만무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은이는 매우 믿을 만한 이들이 잘 구해낼 테니, 문주님 몸이나 챙기시지요.”
“믿을 만한 이들이요?”
“네, 열쇠라면 환장하는 자들이지만, 절대로 그 아이를 해하지 않을 이들이지요. 귀한 공주님 모시듯 안전하게 데려갈 겁니다.”
인경은 수수께끼 같은 운선의 대답에 사뭇 당황하였다. 그녀가 열쇠를 가졌다는 사실을 아는 이들이 또 있단 말인가? 도무지 이 비범한 사내의 머릿속을 알 수 없으니 답답하기만 했다.
“그리고 백 어르신은 이미 습지를 벗어나 구정 밖에 도착하셨다 합니다.”
“아, 정말입니까? 다행입니다. 다행이에요.”
그제야 인경의 굳은 얼굴이 활짝 폈다. 운선이 오고 나서 모든 걱정이 해소되니, 가슴 깊이 고마운 마음이 들어찼다.
“하하, 이놈들이 아주 꼴값이구나. 그래, 두 놈 모두 죽여 주마.”
장은은 자신의 부러진 검 대신, 바닥에 떨어진 하현검을 집어 들었다. 눈앞에 적을 두고도 세상 정답게 대화하는 운선과 인경의 모습에 짜증이 울컥 올라왔다. 황석파의 장문이자 오대산검을 총지휘하는 무림 맹주를 우습게 보다니.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이었다.
“또다시 남의 것을 탐내다니. 사람은 절대로 고쳐 쓰는 게 아니라는 그 말이 딱 맞는구나. 하현검은 고대산파의 보물이다. 본래 주인에게 돌려주고 정정당당히 싸우자.”
“흥, 본래의 주인이 모자라 지키지 못한 걸 어쩌누? 빼앗겨도 할 말이 없는 법이지. 또한, 오늘이 저놈의 제삿날이 될 텐데 무슨 상관이람?”
장은의 간교한 웃음소리가 어둑어둑한 습지에 울려 퍼졌다. 늘 인자하고 예의 바르던 맹주로서의 모습은 아예 벗어버리기로 작정한 모양이었다.
“하긴, 나라도 팔아먹는 놈이 뭔들 훔치지 못할까? 차라리 네놈을 죽여 단죄하는 게 더 빠른 길이겠구나.”
“뭐야? 성인군자인 척하지 마라. 역겹다. 도둑질로 따지면 네놈만 할까? 나의 스승님을 꼬드겨 영명권을 훔친 주제에, 누가 누구를 훈계하는가?”
장은의 입술 끝이 파르르 떨렸다. 그동안 감춰왔던 운선에 대한 분노가 일순간 터져 나오자 분노로 몸을 가눌 수 없었다. 당장이라도 저, 거만한 얼굴을 갈가리 찢어버리고 싶을 뿐이었다.
“만약 내가 누군가를 반드시 죽여야 한다면, 그 상대는 오직 너라고 생각했다. 개인의 복수를 위해 스승과 나라를 배신하고, 동족의 눈을 도려낸 너를 어찌 용서할 수 있을까? 오늘 네놈의 고약한 혀를 자르고 더러운 눈알을 파내어, 려국인의 복수를 하겠다.”
“어디 자신 있으면 한번 해보아라. 그 잘난 실력 한 번 보자꾸나! 소한!”
말을 마치자마자 장은의 인영이 운선을 향해 달려들었다. 몸놀림이 얼마나 빠른지 그의 동선대로 안개가 흩어져 긴 꼬리처럼 늘어졌다. 온몸에서 팔 할 이상의 내력이 뿜어져 나왔다. 습지의 습기가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한기와 맞닿아 작은 얼음 결정이 되었다. 방울방울 뭉쳐져 바닥에 떨어지니, 마치 우박과 같았다.
“소한!”
운선 역시 같은 초식을 칭명하였다. 그러나 화려한 장은의 몸짓과 달리 그저 우뚝 서 있을 뿐이었다. 그의 주변으로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오히려 공기가 차분해지고 가라앉더니 순간 모든 것이 멈춰 버렸다.
“건방진 놈!”
운선과 고작 한 장도 안 되는 거리까지 쫓아온 장은의 몸이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거대한 팽이는 반경 안에 모든 것들을 집어삼킬 것처럼 거친 바람을 토해냈다. 결국, 그 회오리 속에서 뻗어 나온 장은의 주먹은 운선의 전중혈에 정확히 꽂혔다.
“아아!”
설마 운선이 그리 무기력하게 당할 줄 몰랐던 인경은 자신도 모르게 깊은 신음을 뱉어냈다. 어떻게든 도와야 할 텐데,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무기력감, 허망함. 두 팔을 쓸 수 없는 자신이 한심하고 기막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런데,
“어?”
“헐, 겨우 이 정도였어?”
퍽!
분명 맞은 쪽은 운선이었으나, 널브러진 쪽은 장은이었다. 주먹으로 방출한 기운이 고스란히 튕겨 나와 그의 기혈을 뒤틀어 놓았기 때문이었다.
“우욱!”
붉고 진득한 피를 잔뜩 토해내면서도 장은은 작금의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다. 세상에 이런 희귀한 무공이 존재한단 말인가? 일전에 그가 훑어본 해심밀경소는 그저 내력을 증진하는 무공비급에 지나지 않았다. 보물의 위치를 알리기 위한 위장서라고 생각했거늘, 그 또한 속임수였나? 그렇다면 진짜 태을신공은 따로 있구나!
“네놈이 나에게 준 해심밀은 가짜였구나. 어쩐지 너무 쉽게 내어준다 했다. 퉤, 간교한 놈! 어디 누가 이기나 끝까지 해보자. 그래봤자 눈속임일 뿐이야. 어떻게 한 번은 속였을지 몰라도 다음은 어림없다.”
“딱 네 수준만큼 생각하는구나.”
운선은 맞은 자리를 손바닥으로 비벼대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진짜를 주어도 믿지 않고, 제대로 판단할 줄을 모르는 머저리. 마음에 열등감만 들어찬 이에게 분별력이 있을 턱이 없었다.
“소만, 소설!”
울혈을 가라앉힌 장은이 또다시 날아올랐다. 이번에는 양 주먹을 다르게 잡아 전혀 다른 초식을 동시에 사용했다. 왼손에 감긴 바람은 영명권의 열일곱 번째 절기인 소설이었다. 그의 주먹이 닿을 때마다 습지의 물기가 순식간에 식어 하얀 눈 결정이 되었다. 반면 오른손에서는 여덟 번째 초식인 소만이 장력으로 변형되었다. 따뜻한 바람을 가득 쥐었다가 손바닥을 쫙 펼치자 누런 갈대 머리 수백 개가 으스러져 가루가 되었다.
후욱!
이번에는 운선도 위험하다고 느꼈는지 보법을 사용하여 하체를 비틀었다. 또한, 수인을 맺은 두 손을 크게 휘저었는데, 넓은 소매가 지붕처럼 허공을 덮었다가 열렸다. 그 탓에 장풍의 방향이 바뀌어 아슬아슬하게 어깨를 스치고 지나갔다.
“제법이네? 그럼 나도 소만!”
상체를 뒤로 젖혔다가 튕기니 운선의 오른손 주먹이 마치 화살처럼 상대의 가슴으로 뻗어 나갔다. 장풍을 출수한 직후라 피할 수 없었던 장은은 급한 대로 다시 손을 뻗었다. 두 개의 주먹이 맞부딪치는 순간, 작은 불꽃이 파바박 튀었다.
투두둑!
“으악!”
뼈가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장은의 날카로운 비명이 울려 퍼졌다. 안개 속에서 메아리처럼 돌아오니, 마치 귀신의 곡소리 같았다.
“스승님은 힘줄을 끊어 자신을 스스로 벌하셨지. 너는 염치가 없는 놈이니 내가 대신 뼈를 으스러뜨렸다.”
“네 이놈!”
장은은 고통을 참기 위해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왼손등의 뼈가 몽땅 부서졌으나 아직 오른손은 멀쩡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속임수가 분명했다. 강운선은 무공을 배운 지 고작 십여 년도 안 되는 애송이가 아닌가? 경국 최고의 고수라 자부하는 자신과는 비교할 가치도 없는 놈이었다.
‘그래 내가 잠시 자만하였다. 스승님에게 먼저 배운 이도 나고, 타고난 천재라 칭송받은 이도 나다. 고작 잡스러운 려국의 무공을 익힌 놈에게 질 리가 없다.’
이번에는 하현검을 고쳐 잡았다. 평소 쓰는 검은 아니지만, 자신의 뛰어난 내력을 담기에 모자람이 없는 보검이었다. 장은은 그동안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았던 검법으로 저 건방진 마두를 엄벌하리라 다짐했다.
“강지!”
“비월검?”
하현검에서 뻗어 나온 푸른 검기를 본 순간, 인경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은률과 겨뤄본 적이 있었으므로 확신할 수 있었다. 장은이 휘두르는 초식은 비월검법의 그것이 분명했다.
“강교주님! 비월입니다.”
“아아, 가지가지 하는군.”
운선의 눈이 조금씩 가늘어졌다. 자질로 치면 세상에 다시없을 천재라는 장은이었다. 황석파에서 수학하는 동안 검법의 정수라는 비월검을 배우지 않았을 리 없었다. 다만 부능파의 정식 제자가 아니었기에 떠벌리지 않았을 뿐, 완성도 면에서는 은률보다 나으면 나았지 떨어지지 않았다. 게다가 하필 그의 손에는 하현검이 들려 있었다.
“골치 아프게 됐군. 수중월영!”
하늘거리며 춤을 추는 수월과 유려하게 뻗어오는 하현이 푸른 검기를 내뿜으며 어우러졌다. 쾌검이라 파공성만 수십 차례 들려왔을 뿐, 인경의 눈에는 어지러운 빛만 번뜩였다.
캉, 캉, 캉, 캉
원래 비월은 단단하고 묵직한 검이었기에 하현검과는 성질이 완전히 달랐다. 그러나 화려한 초식을 받아내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치고 빠지며 급소를 정확히 찔러대니 베는 초식과 어우러져 공격과 방어의 적절한 조화를 이루었다.
“역시 대단한 검이군. 그러나 방법이 틀렸다.”
운선이 빙그레 웃더니 곧 검을 고쳐잡았다. 방금까지도 사뿐사뿐 내리찍는 위주의 초식이 좌우로 급변하더니 여러 개의 물결을 만들어냈다.
“하현천무.”
지켜보던 인경의 얼굴에도 미소가 지어졌다. 마치 달빛에 흐드러지게 핀 배꽃처럼 하얗게 부서지는 낙화의 검기. 그것은 반년간 백천에게서 배웠던 매월검법의 최강 절기, 하현천무였다.
캉, 캉, 캉, 캉
수월검이 만들어낸 매월검법 절정의 초식은 정작 초식의 주인인 하현검을 꼼짝없이 가두어 버렸다. 당황한 장은이 뒤로 물러서며 뒤늦게 수습해 보았지만 막아설 때 휘어지고 나아갈 때 구부러지니 그야말로 통제 불능이었다.
“검은 휘두르는 이의 마음을 비치는 거울이란다. 고요하고 정갈한 마음이야말로 최강의 초식이 될 터, 쓸데없는 욕심을 버리고 도리를 잃지 말아라.”
운선의 매월검법을 바라보는 인경의 눈에 깨달음이 들어찼다. 들을 때는 뜬구름 같던 백천의 가르침이었건만, 이제는 가슴속에서 잔잔한 울림이 되었다. 탐욕에 눈이 먼 장은의 검은 제 능력의 반도 발휘하지 못했다. 이제는 그나마 푸른 검광마저 잃어 한 자루에 녹슬고 무딘 검처럼 보였다.
싹!
"으악!"
마지막 일검에 장은의 오른손 힘줄이 잘려 나갔다. 이제 그의 손은 어떤 검도 쥘 수 없는 어느 필부의 손과 같았다.
“스승님께서는 평생 가르친 자신을 탓하셨으나, 몹쓸 제자를 탓한 적이 없었다. 그런 스승을 욕보이고 모함한 너를 어찌 용서할까?”
바닥에 쓰러진 장은의 앞에 운선이 감정 없는 얼굴로 우두커니 서 있었다. 어느덧 안개가 걷힌 사이로 맑은 달이 모습을 드러냈다. 햇빛만큼 밝은 빛으로 두 사람의 머리를 비추니, 운선의 거대한 검은 그림자가 초라한 장은을 완전히 덮어 버렸다.
“네게 준 해심밀경소는 진본이다. 그러나, 려국을 원망하고 그들의 문화와 무학을 무시한 네놈에게는 그저 흔한 무공비급에 지나지 않았겠지. 태을신공은 남을 해치는 무공이 아니기에 초식이 없다. 오직 마음을 단련하여 감정을 다스리며, 기운을 맑게 하여 뭉치지 않도록 보호한다. 하여, 배운 무공을 증진하고 외부의 공격을 튕겨내어 제 몸을 지키도록 하는 것이다. 그래, 네가 그토록 우습게 여긴 려국의 무공이란 무한히 크고 넓은 정신이란다.”
운선의 오른손 주변으로 공기가 울렁거렸다. 뒤이어 스산한 기운이 감돌더니 물방울이 응결하여 서리가 되었다. 드디어 주먹을 그러쥐자 사각거리는 소리와 함께 허연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죽는 그 순간에도 네 걱정을 하던 스승님의 마음을 담아, 질긴 목숨을 거두어주마. 대한!”
퍽!
거침없이 뻗은 운선의 주먹이 상대의 아랫배를 강타했다. 미처 피할 새도 없이 급소를 맞은 장은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앞으로 고꾸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