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화. 互助互援(호조호원)
“상강!”
서늘한 바람이 뒤통수를 향해 거세게 불어왔다. 두 번은 피했으나 세 번째는 쉽지 않았다. 왼쪽 귀를 스쳐 가자, 찢어진 귓불에서 붉은 피가 뚝뚝 떨어졌다.
‘큰일이다.’
장은의 경공 실력이 월등한 데다가, 가은까지 안고 뛰니 따라잡히는 건 시간문제였다. 그렇다고 정면으로 맞붙을 수도 없으니 진퇴양난이 따로 없었다.
‘차라리 안개 속으로 들어가자.’
그나마 생각해 낸 묘책이었다. 어차피 독에 노출되는 건 같을 터, 비강을 잘 막으면 되레 자신에게 유리하지 않을까? 또한, 안개가 짙어질수록 시야가 좁아지니 쫓기는 쪽보다 쫓는 쪽이 더 어려울 것이었다.
“아, 이런.”
그러나 잠깐의 희망은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다. 거리를 얼마간 벌렸다고 생각했을 때, 거대한 아귀의 입과 같은 늪지가 그들의 앞길을 가로막았다. 인경은 눈앞이 캄캄해졌다.
“이제 어떡합니까?”
겁에 질린 가은이 울먹이기 시작했다. 괜히 어머니를 들먹이는 바람에 장은의 화만 돋우어 놓았으니, 후회막급이었다. 아무리 긍정적으로 머리를 굴려 보아도 인경의 실력으로는 이 난관을 극복할 수 없었다. 이제 영락없이 죽음을 기다리는 신세였다.
“가은 낭자, 잘 들으십시오. 이곳은 안개로 뒤덮여 있어 한 번 흔적을 놓치면 찾기 어렵습니다. 제가 도망갈 틈을 만들겠습니다. 싸움이 붙거든 지체하지 말고 도망치세요. 안타깝게도 그리 오래 붙잡아두지는 못할 겁니다.”
“네? 그렇지만…….”
가은은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눈만 끔뻑거렸다. 세상 누구보다 이기적인 그녀였으므로, 인경의 제안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고작 하루 동안의 인연이건만, 타인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거는 일이 가능한가? 도무지 받아들이기 힘든 희생이었다.
“안개에 독이 있습니다. 되도록 코와 입을 가리고 숨을 크게 들이쉬지 마십시오. 아까 보니 당신이 있던 곳은 안개가 유독 옅더군요. 아마도 출구에 가까운 듯싶습니다. 도망쳐 온 길로 되돌아가면 습지를 빠져나갈 수 있지 않겠습니까?”
“어째서 이렇게까지 도와주십니까?”
인경은 뜻밖의 질문에 새삼 당황스러웠다. 그러고 보니 이유를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가은이 열쇠를 갖고 있어서? 장은의 악행을 막고 싶다는 정의감에? 아니, 아니었다. 비명이 들려서 뛰어갔고, 죽게 생겨 도와주었을 뿐. 대가도 까닭도 없었다.
“그저 마음이 이끄는 대로 행동했습니다.”
“네?”
가은의 큰 눈이 더욱더 동그래졌다. 도대체 무슨 헛소리인가? 그녀의 소갈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는 답이었다.
“아, 이게 누구십니까? 우리 고문주님 아니십니까?”
그들이 머뭇거리는 동안, 장은은 벌써 한 장 거리까지 따라왔다. 인경의 예상과 달리 그에게 이 습지는 손바닥의 손금 보듯이 빠삭했다. 그저 따라가기만 했는데도 막다른 길로 몰아넣은 셈이 되었다. 손도 대지 않고 코를 풀었으니 그로서는 여간 기쁘지 않았다.
“네, 다행히 살아계셨군요. 용형제의 주검을 보고 내심 걱정하던 참이었습니다.”
인경은 재빨리 가은의 앞을 막아서며 태연스레 인사말을 주고받았다. 긴장으로 심장이 터질 것 같았지만, 여유 있는 척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런데 어째서 제 일을 방해하십니까? 분명 고사숙을 부탁드리지 않았습니까? 신뢰를 저버리시다니. 이거, 좀 서운한데요?”
“고장로님은 잘 계시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문주님이야말로 무엇을 하고 있으셨습니까? 설마 선운검파의 어린 선자를 해할 마음은 아니시겠지요?”
인경은 상대의 주의력을 흐트러뜨리고자 끊임없이 주절거렸다. 유독 감투를 좋아하고 남의 시선을 신경 쓰는 장은이었으므로 무조건 칼부터 들이밀지는 않으리라는 계산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몇 마디 주고받는 사이에, 당장이라도 휘두를 것처럼 위협적이던 그의 주먹이 스르르 풀려버렸다.
“알고 보니 이 깜찍한 아이가 강운선의 끄나풀이 아니겠습니까? 아우 풍림을 홀려 저를 죽이려 하더군요. 다행히 눈치가 빨라 공격을 피했으나, 어이없게도 아우가 죽고 말았지요. 아무리 선운검파의 제자라고 하지만, 제 아우를 죽인 원수를 살려 보낼 수야 없지 않겠습니까? 이 일은 제 개인적인 원한이니 고문주님께서 모른 척 넘어가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거짓말!”
가은이 뒤에서 날카롭게 외쳤으나 장은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오히려 눈썹을 축 늘어뜨리고 의기소침하게 울먹이는 모습은 진정 슬퍼 보였다. 그러나 고인경은 속지 않았다. 이미 그의 악랄한 본성을 꿰뚫고 있기 때문이었다.
“죄송하지만 그건 어렵겠습니다. 이 선자님은 과거 저와 인연이 닿았지요. 모르는 이였어도 그냥 지나치지 못할 텐데 심지어 아는 사람이 위험에 처한 것을 어찌 두고 보겠습니까? 제 체면을 보아 그냥 보내주십시오.”
인경은 허리를 굽히고 정중히 부탁했다. 물론 이 정도로 일이 무마되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그가 노리는 건 오직 틈이었다. 상대가 방심하는 사이 가은을 도망가게 한다면, 일각 정도는 막을 자신이 있었다.
“하아, 고문주님과는 진심으로 우정을 나누고 싶었건만. 아쉽게 되었군요. 우리의 인연은 여기까지인 것 같습니다. 소한!”
그러나 방심한 쪽은 오히려 인경이었다. 장은은 내내 그의 발끝을 보고 있었는데, 미세한 움직임만으로 다음 수를 꿰뚫은 참이었다. 하여, 불시에 일 장을 뻗어 그들의 퇴로부터 차단했다. 풀어졌던 주먹을 어느새 불끈 쥐더니 그대로 적의 코끝을 향해 뻗었다. 차갑고 건조한 바람이 얼굴을 향해 불어오자 화들짝 놀란 인경은 허리를 뒤로 젖혔다.
쓱싹!
가까스로 주먹은 피했으나 권풍에 스친 인경의 앞머리가 숭덩 잘려 나갔다. 그 충격으로 바짝 올려묶은 머리가 스르르 풀어지니 망나니처럼 산발이 되었다.
“지금입니다!”
그 와중에도 인경은 희망을 잃지 않았다. 적의 주의를 분산시키기 위해 크게 외치는 동시에 가은의 등을 힘차게 밀었다. 장은과 대화하는 사이 내내 눈여겨본 갈대 습지 건너편이었다. 다행히 가벼운 가은의 몸이 나뭇잎처럼 팔랑팔랑 날아가, 목표했던 장소에 내동댕이쳐졌다.
“뛰어요!”
“흥, 어림없지.”
다급해진 장은은 인경을 향해 다시금 오른 주먹을 휘둘렀다. 아까와 같은 소한의 차가운 기운이었으나 힘을 다소 줄여 밀어내기만 할 요량이었다. 예상대로 인경이 뒤쪽으로 두어 걸음 크게 움직이자 거리가 석 장 이상 벌어지게 되었다.
“월산서풍!”
그 틈을 놓칠 장은이 아니었다. 왼쪽 소매에서 튀어나온 새파란 검기가 가은을 향해 거침없이 뻗어 나갔다.
“아악!”
막 중심을 잡고 일어서려던 가은은 무지막지한 살기를 느끼고 비명부터 질러댔다. 운이 좋게도 습한 흙바닥에 미끄러진 덕분에 아슬아슬하게 검기가 머리 위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러나 장은의 공격은 그치지 않았다.
“표풍!”
찌르는 대신 검을 휘돌리니 거대한 소용돌이가 만들어졌다. 원심의 공기는 잔잔한 데 반해 밖으로 뻗어 나갈수록 흐름이 빨라졌다. 주변의 흙먼지와 갈대 찌꺼기가 조금씩 움직이더니 휘검하는 방향으로 빙빙 돌아가기 시작했다.
“으윽!”
가은의 야리야리한 몸뚱이도 갈대와 다를 바 없었다. 두 다리가 휘청휘청하더니 마침내 무릎이 꺾였다. 얼마 없는 내공으로 단전에 기운을 모아 보았으나 턱도 없었다.
휘익!
휘돌리던 팔은 움직임을 멈추었으나 검기는 여전히 주변의 공기를 지배했다. 그 사이 몸을 날린 장은은 오른손을 거둬들여 가은의 이마 쪽으로 뻗었다. 동시에 왼손에 쥔 칼도 허리를 향해 베어내니 아예 피할 도리가 없었다.
챙!
“저를 얕보셨군요.”
인경은 하현검으로 장은의 칼을 막아서는 즉시 팔꿈치로 그의 오른손을 쳐냈다. 우지끈, 척골이 부러지는 소리가 났으나 일단은 주먹의 방향을 돌리는 데에는 성공하였다. 또한, 하현검의 경도를 이기지 못하고 장은의 칼이 반 토막이 났다.
“고인경!”
여태 예의를 지키던 장은의 얼굴이 험악하게 변했다. 짙은 눈썹이 치켜 올라가고 흰자위에 핏발이 서자, 마치 저승을 지키는 사자의 모습 같았다.
“암, 이게 당신의 진짜 얼굴이지요.”
오히려 인경의 마음은 한결 편안해졌다. 어차피 죽음을 각오하고 싸워야 할 한 판이었다. 봐주는 척 설렁설렁 조롱당하는 것보다 백번 나았다.
“문주님, 문주님, 대우해 주니까 아주 눈에 뵈는 게 없는 모양이구나.”
장은의 주먹이 점점 더 거칠어졌다. 이제는 고인경을 죽이겠다는 마음으로 덤비자 손속에 인정을 둘 이유가 없었다. 살려두어도 입을 나불거릴 테니 죽여서 뒤탈을 없애는 게 더 낫다는 생각이었다. 고작 어린 장문 하나 죽이는 게 뭐 대수랴? 이 안개 습지에서 비명횡사한들, 누가 죽였는지 알 게 뭐람?
“취우!”
주먹을 피해 움직이면서도 상대의 급소를 노리는 매월검법의 신묘함은 감탄을 자아냈다. 그러나 실력 차이는 월등했다. 최선을 다하는 인경이었지만 어깨의 살점 일부가 뜯겨나가는 부상을 피할 방법이 없었다. 곡해고와의 싸움에서 입은 상처가 깊어 이미 기울어진 싸움이었다. 검의 움직임이 현저히 느려지자 보법까지 꼬이기 시작했다.
“쯧쯧, 여기까지구나.”
장은은 부러 주먹에 힘을 빼고 양쪽 옆구리를 빠르게 찔러 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내공으로 단단히 방어하고 있어야 할 급소가 반 치 정도 물렁물렁하게 들어갔다.
‘눈치챘구나.’
인경은 점점 초조해졌다. 이제 다른 방도는 없었다. 방어를 포기하고 최후의 일격을 감행하여 동귀어진하리라. 설사 목숨을 잃게 되더라도 장은을 묶어둘 수 있으니 충분히 해볼 만하다 생각했다.
“하현천무!”
“청명!”
두 고수의 일격이 동시에 부딪쳤다. 그러나 정직한 인경과 달리 장은의 공격은 허수였다. 바위처럼 단단한 그의 주먹이 인경의 검날을 유려하게 피해가, 어느새 손목에 닿았다.
툭!
"으악!"
왼쪽 팔뚝 척골에 이어, 이번에는 오른손 손목의 자뼈가 부러졌다. 또한, 인대가 끊어졌으니 극심한 통증에 하현검을 놓치고 말았다.
“그리 정직한 일격을 누가 맞아준단 말입니까? 매월검은 빠르기가 생명이거늘 한껏 느려진 초식에 제가 당하리라 생각했습니까?”
“으윽,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아이고, 우리 가엾은 문주님.”
“윽.”
장은의 발길질 한 번에 인경의 두 무릎이 풀썩 꺾였다. 양팔이 골절된 탓에 손을 짚지 못하니, 그대로 진흙 바닥에 얼굴을 찧고 말았다.
“아직도 모르겠습니까? 한 문파의 수장이 된다는 것이 그저 실력만으로 이룰 수 없는 것을요. 때로는 더러운 짓도 감수하고 자존심도 내려놓아야 하지요. 의협 따위, 권력을 지키는 데에는 아무 소용이 없단 말입니다. 하여 당신은 장문이 될 자격이 없어요.”
“으으.”
인경은 수치스러움에 차마 고개를 들지 못했다. 이 짐승보다 못한 인간 앞에 머리를 조아린 꼴이 비참하고 끔찍했다.
“그럼 동족을 배신하고 나라를 팔아먹은 자는 자격이 있다는 말인가?”
“뭐? 아니, 너!”
그때였다. 억양이 없는 차분한 목소리. 메마른 듯하면서도 다정한 그의 목소리가 짙은 안개를 뚫고 또렷하게 귀에 꽂혔다.
‘아아, 다행이다.’
인경의 시뻘게진 눈에 맑은 눈물방울이 맺혔다. 강운선, 누구보다 막강한 아군이 도착했으니 이제 모든 것이 순리대로 흘러갈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