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무십일홍-195화 (195/209)

195화. 以身先之(이신선지)

“문주님, 그들이 보이지 않는데요?”

영준은 행렬의 맨 앞까지 뛰어가 수레를 멈춰 세웠다. 안개 속을 뚫고 나가느라 긴장한 탓에 미처 뒤를 살피지 않았던 인경은 화들짝 놀랐다. 그러고 보니 등 뒤에서는 어떤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선운검파는 어찌 되었느냐?”

“그들도 보이지 않습니다.”

“이럴 수가.”

불행인지 다행인지, 고대산파만이 습지 한가운데 덩그러니 남겨진 셈이었다.

‘백형진은 끝까지 우리를 인질로 삼아 태자의 손발을 묶어둘 참이었다. 일부러 놓칠 이유가 없으니 아마도 길을 잃은 모양이구나.’

철두철미한 백형진이 낭패를 보았다는 것은 그들에게도 녹록지 않은 여정이라는 뜻과 같았다. 이제 앞에 놓인 장애물은 오로지 스스로 헤쳐나가야 할 과제였다. 인경의 꽉 쥔 주먹 사이로 끈적끈적한 땀이 배어 나왔다. 신체 건강한 장정들만 있어도 어려운데 백 세에 이른 노인과 거동조차 못 하는 병자가 함께 있으니 훨씬 더 위험할 터였다.

“영준아, 수레에 바짝 붙어 있어라. 혹여 나의 위치를 놓치더라도 저분들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 무슨 뜻인지 알겠지?”

“네, 물론이지요.”

눈치가 빠른 영준은 장문의 표정만 보고도 심각성을 인지했다. 이 안개 속에 어떤 끔찍한 악몽이 펼쳐질지 모를 일이었다. 사문을 위해, 형제들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 정신을 바짝 차려야 했다.

“허대협, 만약 우리에게 문제가 생기거든 혼자서라도 빠져나가야 합니다. 오대산검의 민낯을 밝혀주실 이는 대협밖에 없으니 꼭 살아남으셔야 합니다.”

“부디 문주님의 도움을 잊지 않고 약조를 지키겠습니다.”

허윤에게 신신당부한 후에는 사백의 수레로 향했다. 오랜 여정에 안 그래도 지쳐 있는 백천이 혹여 크게 다칠까 염려되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약간의 기대감도 있었다. 식견이 넓은 백천이라면 이 안개를 헤쳐나갈 묘수를 생각해 내지 않을까?

“사백님, 안개에서 옅은 향이 납니다. 습지 특유의 냄새라면 다행이지만 독물이 섞여서라면 어떤 문제가 나타날지 알 수 없습니다. 되도록 움직임을 줄이고 호흡을 짧게 끊으세요.”

“아마도 선황련인 것 같구나.”

“네? 연꽃 때문이란 말입니까?”

“그래.”

다행히 그의 표정에는 두려움이 없었다. 미간을 찌푸리고 코를 벌름거리더니 과연 짚이는 바가 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곧 인경을 가까이 부르더니만 차분하게 이야기를 이어갔다.

“물론 일반적인 연꽃과는 다르지. 경국에서는 보기 어려우나, 려국에서는 습한 환경만 갖춰지면 쉬이 구경할 수 있는 꽃이란다. 저들은 깽깽이꽃이라고 부르는데, 강아지가 잎이나 열매를 씹어 먹으면 환각을 일으켜 깽깽거린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다더구나.”

“그럼 다행이지 않습니까? 사람에게는 효과가 없다는 뜻 아닙니까?”

“원래는 그러하지.”

백천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갑작스럽게 이 안개와 꽃 향이 등장한 것이 강운선의 계략이라면 새삼 그의 치밀함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더불어 이 보물찾기가 얼마나 심혈을 기울인 덫인지도.

“증류하여 물기가 비강으로 스며들면 효과가 다르단다. 원래 약재로도 쓰이는지라 몸에 해하지는 않으나 오래 맡으면 머리가 어지럽고 맥이 빨라진다. 게다가 심약한 이는 환각과 환청을 느끼는데 심하면 발작을 일으키기도 한단다. 즉, 우리처럼 오랜 여정으로 지친 상황에서는 꽤 위험한 식물이란 말이지.”

그랬다. 려국에 들어선 지 달포가 넘어가는 지금, 누구 하나 몸과 마음이 지치지 않은 이가 없었다. 게다가 믿어 의심치 않던 동맹들의 배신과 동료의 죽음을 겪으며 온 길이 아니던가?

“다행히 습기를 들이마시지만 않으면 그리 걱정할 정도는 아닐 것이다. 일단 최소한의 대비를 하자꾸나.”

백천은 소매를 크게 찢어 고유생의 코와 입을 가려놓았다. 다른 쪽 소매로는 본인의 얼굴도 가렸는데 마치 복면을 뒤집어쓴 것 같았다. 인경은 즉시 제자들을 불러모아 같은 행동을 지시했다. 숨쉬기에는 불편하였으나 향이 덜하니 두통이 나아지는 기분이었다. 불안해했던 일행들도 한결 안심한 표정이었다.

“자, 안개가 잠시 옅어졌으니 서둘러 나아갑시다.”

인경의 뒤를 따라 고대산파 일행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안개만 아니라면 길은 넓고 평탄하여 어려움은 없었다. 옷과 머리에 맺힌 물기를 연신 손수건으로 닦아내니 낙오하는 인원 하나 없이 무사히 지나가는 듯싶었다. 그러나,

“아아악!”

“꺄악!”

저 너머 어딘가에서 자지러지는 비명이 들려왔다. 누구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여인의 목소리가 틀림없었다.

“선운검파다!”

인경은 본능적으로 백천과 영준을 번갈아 보았다. 응당 그들을 구하러 가야 했지만 사백과 형제들의 목숨이 무엇보다 소중했기 때문이었다.

“인경아, 가보렴. 소문주가 없는 선운검파는 이 안개를 이겨내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똘똘 뭉쳐 나아갈 테니 걱정 없다. 영준이도 제법 무공이 늘었지 않니? 게다가 이분 역시 범상치 않은 실력을 갖췄으니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백천은 턱을 들어 삿갓을 깊게 눌러쓴 허윤을 가리켰다. 진작에 그의 정체를 알고 있었으나 모른척했을 뿐이었다.

“허대협.”

“고문주님, 은혜를 갚을 기회를 주십시오.”

“하지만…….”

인경은 선뜻 나아가지 못하고 동문들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대로 떠났다가 다시는 만나지 못하는 게 아닐까? 태사부님이 봉우리에 남겨두고 떠나시던 그 날이 떠올랐다. 아무것도 모르고 가족을, 친우들을 잃었던 그 날. 다시는 그런 무기력한 아픔을 겪고 싶지 않았다.

“문주님, 절대로 문주님을 홀로 두고 죽지 않을 겁니다.”

인경의 마음을 눈치챈 영준이 다가와 지그시 그의 손을 잡아주었다. 긴장으로 차갑게 식어 있던 손이 영준의 체온으로 따뜻하게 데워졌다.

“기필코 여기서 살아남을 테니 두고 보십시오. 그리고 이제 그날의 기억에서 벗어나세요. 저를, 그리고 자신을 믿으십시오.”

“영준아.”

그에게는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유일한 친우이자 가족 같은 존재였다. 그의 믿음직한 어깨를 끌어안으며 절대로 마지막이 되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그럼 이 길의 끝에서 기다리겠습니다. 부디 무사히 건너오세요.”

백천을 향한 인사를 끝으로, 인경은 안개 속으로 홀연히 사라졌다.

‘문주님, 인제 그만 죄책감을 내려놓고 앞으로 나아가세요. 꼭 살아남아 뒤를 지켜드리겠습니다.’

주먹을 꽉 쥐여 보는 영준의 뒤에서 백천이 쓸쓸한 미소를 지었다. 자신의 몸이 어디까지 버텨줄지 모르겠으나 이 어린 제자들을 끝까지 지켜주리라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아악!”

다시 처절한 비명이 들려왔다. 가까워질수록 어쩐지 익숙한 목소리인 것 같아 점점 더 초조해졌다. 설마 신교가 공격했을까? 아니면 천서국의 자객들이 여기까지 장악한 걸까? 정답이 무엇이든 일단 구해내고 봐야 했다.

“어디냐?”

앞으로 나아갈수록 길은 좁아지고 눈앞은 뿌옇게 흐려졌다. 무리해서 호흡하니 코를 감싸고 있던 손수건은 어느덧 축축해져, 있으나 마나 제 역할을 전혀 하지 못했다. 조금씩 머리가 지끈지끈하고 속이 거북했다. 습지에 빠질 뻔하기를 여러 번, 드디어 소리가 지척으로 가까워졌다.

“어떻게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평생을 당신을 믿고 따른 사람을!”

“하하, 뻔뻔한 년.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네가 할 말은 아니지 않아? 은률을 이용하고 가지고 논 건 네가 나보다 더하지. 순진하게 끝까지 네 목숨 지키겠다, 제 목숨 넘긴 병신만 불쌍하지 뭐.”

“장은?”

그제야 두 사람의 정체를 눈치챈 인경은 일단 갈대숲에 몸을 숨겼다. 누구보다 영악한 이들이었다. 정황을 제대로 살펴야지 섣불리 나섰다가는 되레 자신이 당할 게 뻔했다.

“쯧쯧, 가엾은 놈.”

장은은 습지에 얼굴을 묻고 늘어진 은률의 시신을 끌어당겼다. 막상 목숨줄을 끊고 보니 마음 한구석이 쓰리고 아팠다. 복수심으로 함께한 세월이지만 그간의 정을 어찌 무시하랴. 형님, 형님 따르던 해맑은 그를 가끔은 친아우라 느낀 적도 있었다.

“어차피 죽은 놈은 되었으니 우리 얘기를 해볼까? 그래, 가지고 있는 열쇠를 전부 내어놓아라.”

“흥! 네놈의 속셈을 모를 줄 알고? 뻔하지. 열쇠가 있으니 그나마 내가 나불거리기라도 하지. 이걸 내놓는 즉시 죽일 셈이지 않느냐?”

“역시 똘똘해. 죽이기 아까울 정도라니까.”

장은은 예의 사람 좋은 얼굴로 연신 손뼉을 쳤다. 당장 죽이고 열쇠를 거둬도 될 테지만 어쩐지 더 놀려주고 싶기도 했다.

‘어찌한다? 이제 완전히 죽은 목숨이다. 더는 나를 지켜줄 사람이 없으니 정녕 끝이구나.’

가은의 흔들리던 동공이 은률의 시체 앞에서 멈췄다. 어리석은 사람. 차라리 진심을 주지 말지. 마음속에 생긴 커다란 구멍이 그녀의 머릿속도 함께 비워간 것 같았다. 하다못해 유치한 잔꾀라도 떠오르지 않으니 이미 죽은 그가 새삼 원망스러워졌다.

“오호라, 네년도 우리 아우님에게 영 마음이 없던 게 아니었구나. 쯧쯧, 남녀 간의 정이란 이렇듯 애틋한 법이지. 서로를 바라보고 연모해도 모자를 생인데 그마저도 엇갈려 버리니 쌓이는 건 그리움이요, 원망이로구나.”

“퉷! 악귀 같은 놈!”

한껏 빈정거리는 장은을 참지 못하고 가은이 침을 뱉어냈다. 이왕 죽을 거라면 그간 못 했던 욕설이라도 실컷 내질러 보고 싶었다.

“이제 슬슬 재미도 없으니 죽여볼까? 그래도 여인이라 순순히 받아내고 욕보이지 않으려 했거늘, 네가 선택하였으니 원망은 말아라. 그래도 시신을 뒤져가게 되었으니 미리 사과는 해두마. 열쇠가 네 개, 맞지?”

“흥! 과연 내 몸에 지니고 있을까?”

가은은 악바리처럼 마지막 발악을 해보았다. 저 잔혹하고 매정한 악귀가 시신을 갈가리 찢어발길지도 모른다 생각하니 온몸에 소름이 다 돋았다. 어떻게든 살아날 구멍을 찾아내야 했다.

“몸에 없어? 그럼, 산 채로 고통을 줘 볼까? 손가락부터 하나씩 떼어내면 답을 토해내겠지. 아닌가?”

“뭐?”

가은의 낯 색이 새파래졌다. 문득 죽기 직전 만났던 어머니의 모습이 떠올랐다. 소백화라 불릴 만큼 아름다웠던 용모가 비참하게 시들어버렸던 그때, 그 끔찍한 몰골에 얼마나 구역질이 났던가?

‘안 돼! 절대로 안 돼!’

세차게 고개를 흔드는 가은은 벌써 두려움이 가득했다. 그리고 그녀의 감정을 낱낱이 읽어낸 장은의 얼굴에는 표독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자, 어느 손가락부터 잘라 줄까?”

“내 어머니가 어째서 너를 그토록 한심하게 여겼는지 이제야 알겠다!”

“흥! 네깟 년의 어미가 누군지 알게 뭐냐?”

뜬금없는 헛소리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죽을 때가 되니 머리가 돌아버린 게 틀림없었다. 장은은 개의치 않고 다시 정신을 집중했다. 정확히 조준해야 뇌수가 사방으로 튀지 않을 터였다.

“내 어머니, 소백화 현진 말이다!”

“뭐? 지금 뭐라고 지껄인 거냐?”

“내 어미가 바로 려국의 옹주 현진이라 하였다!”

가은의 얼굴에 자신만만한 미소가 번져나갔다. 그래,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는 법이지. 고귀한 핏줄을 타고난 자신이 이렇게 어이없게 죽을 리가 없었다.

“옹주에게 딸이 있어? 그게 너라고?”

그러나 안타깝게도 행운은 여기까지였다. 당혹스러움이 가득했던 장은의 표정은 점점 소름 끼치는 살기로 변해갔다.

“그게 사실이라면 더더욱 네년을 죽여야겠구나. 단, 이번에는 가혹한 고통을 맛보게 해주마. 차라리 죽여달라고 싹싹 빌 만큼 끔찍하게 말이다.”

“뭐?”

“꺄악!”

쉬익!

그때였다. 전광석화처럼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든 인경은 다짜고짜 가은의 허리를 잡아 들었다. 가타부타 설명할 틈도 없었다. 장은이 진심으로 덤빈다면 가은을 구하기는커녕 자신의 목숨도 보장할 수 없었다. 그가 믿을 것은 오직, 빠른 발과 안개뿐이었다.

“절대로 소리를 내지 마십시오. 숨을 죽이고 몸에 힘을 빼세요.”

등 뒤로 뻗쳐 오는 권풍을 가까스로 피하며, 두 사람은 안개 속으로 빠르게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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