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화. 難明之案(난명지안)
“모자란 놈!”
형진의 일격을 받아낸 이는 주운이 아니었다. 단정한 이목구비, 온화한 미소, 그러나 그 뒤에는 자신을 향한 경멸의 빛이 숨어 있었다.
“스승님?”
눈을 비벼보고 고개를 좌우로 내저었다. 저것은 환영이다. 내 손으로 직접 칼을 꽂아 넣지 않았는가? 그때의 그 눈빛이 아직도 생생하거늘, 이렇게 실체가 되어 나타날 리 없었다.
“너 따위가 감히 나를 죽일 수 있었을까? 모자라도 한참 모자라는구나.”
조양은 혀를 끌끌 차더니 손가락을 들어 제자의 검 끝을 가볍게 쳐냈다.
텅!
평소와 달리 무겁고 둔탁한 소리. 반년이 넘어가도록 집에서 나오지 못한 검은 제 능력을 잃어버린 지 오래였다.
“어째서 활인검의 정신을 쉬이 꺾어버리고 오랑캐의 무공을 익혔더냐? 그러고도 네가 경국의 백성이라 할 수 있겠느냐?”
“스승님, 저는 이기고 싶었습니다. 활인검과 시묵공으로는 아무리 해도 강운선, 그 오랑캐를 이길 수 없었습니다. 이기는 게 최선이라 하지 않으셨습니까? 하여 스승님도 수년 동안 두문분출하며 태을신공을 연구한 게 아닙니까?”
형진의 태도는 그 어느 때보다 당당했다. 스승을 배신한 것도, 이금의 충견이 된 것도 수치스러웠지만 태을신공을 익힌 것만큼은 자랑스러웠다. 누구의 것인들 어떠랴? 훔쳐 배웠더라도 더 나으면 그뿐. 이로써 운선과 비등하게 싸울 수 있고 무림의 맹주가 될 수 있다면 더한 도둑질도 가능했다. 하물며 그 대단한 스승도 해내지 못한 성취가 아닌가? 오롯이 자신의 기지와 능력으로 얻어냈으니 부끄럽지 않았다.
“못난 놈, 넌 언제나 그랬지. 자신이 본래 가진 것에 만족하지 못했다. 그것이 욕심인 걸 알면서도 끝까지 탐하고 맹목적으로 쫓았지.”
“그게 어째서 욕심입니까? 머무르는 것보다 나아가는 게 훨씬 더 바람직하다 독려하신 건 스승님입니다.”
형진의 오른손이 움찔거렸다. 죽은 스승이 나타날 리 없다면 강운선의 함정이리라. 다시금 정신을 가다듬고 단전에 힘을 모았다. 평상시보다 아랫배가 뭉근하니 통증이 느껴졌다.
‘독이구나.’
그렇다면 방금까지 눈앞에 어른거리던 그녀도 환각이 분명했다. 이 지경까지 왔는데도 버리지 못한 미련이라니. 가슴 한구석이 찌릿해졌다.
“그래, 남의 것을 훔쳐 가지니 어떠하냐? 숨을 쉴 때마다 단전이 갑갑하고 내공을 운기하고 나면 정신이 혼미해지지 않더냐?”
“차차 나아질 것입니다.”
환각임을 알았으나 스승의 얼굴은 사라질 줄을 몰랐다. 되레 이목구비가 짙어지는가 싶더니 묵직한 활인검을 휘둘러 급소를 위협했다.
‘정신 차려야 한다!’
일단 안개를 벗어나는 게 급선무였다. 이미 외워둔 금황자의 지도를 떠올려 보았다. 출발 지점에서 계속 오른쪽으로 돌았으니 이 앞은 남동으로 꺾어지는 샛길밖에 없었다.
“아아, 정녕 후회스럽구나! 차라리 운선이 제자였다면 좋았을걸. 깜냥도 안 되는 네놈에게 어째서 등을 내주었던가!”
“뭐라고?”
머리털이 꼿꼿하게 곤두섰다. 강운선, 그 오랑캐 놈의 이름이 어째서 나온단 말인가? 평생을 존경하고 따르던 스승의 입에서 나온 모욕적인 말은 겨우 부여잡고 있던 이성의 끈을 끊어 버렸다.
“으아아아아악!”
챙! 챙! 챙! 챙!
검을 휘두르는 순간, 그의 손끝에서 뻗어 나간 내력은 시묵공도 아니고 태을신공도 아니었다. 두 개의 위대한 내공이 섞여 정체 모를 힘을 토해냈다. 뜨거우면서도 차가운 기운이 순행과 역행을 반복하니 오장육부가 뒤틀리고 관절 마디마디가 끊어질 것 같았다.
“으아아아아아!”
고통을 참지 못한 형진은 광인처럼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그렇게 일각이 넘도록 초식도 없는 무자비한 검무가 계속되었다. 검기가 스쳐 지나가는 곳마다 움푹 구멍이 패었다. 순식간에 그의 주변은 화마가 번진 것처럼 폐허로 변했다.
“으아아악!”
벌레가 기어 다니는 듯 온몸이 간지러웠다. 형진은 서둘러 장포를 벗어던지고 바닥에 몸을 비볐다. 알갱이가 다른 모래알이 맨살에 부딪혀 수많은 상처를 남겼지만, 그 정도 통증은 비할 바가 아니었다.
“욱!”
한차례 검붉은 핏덩이를 뱉어내었다. 꼬박 반 시진을 견뎌내고 나서야 발작이 멈춘 것이었다. 남의 것을 탐낸 벌일까? 피투성이가 된 입술 사이로 허탈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몸이 정상이 아님을 깨달은 것은 태을신공을 본격적으로 익히고 반년이 지났을 때였다. 수년을 연구하여 경국의 글자로 고쳐 만든 스승의 ‘해심밀경소’, 그리고 우영을 끈질기게 설득하여 얻어낸 풀이. 뭐 하나 그릇되지 않았건만 점점 더 통증은 심해졌다.
“신공과 시묵공은 그 흐름이 반대라 도저히 익힐 수 없더이다.”
지난날, 용문산에서 운선이 이죽거리던 그 말이 떠올랐다. 자신이 시묵공을 익힐 수 없듯, 조양 역시 신공을 익히지 못하리라 자신했었다. 그러나,
“사부님, 운선의 말이 사실입니까? 신공이 아무리 대단하다 한들, 배우는 건 영영 불가능합니까?”
“흥, 오랑캐의 무공 따위! 그저 허세일 뿐이다. 그 아이는 어설프게 신공을 먼저 익혀 위대한 우리의 시묵공을 익히지 못한 것이다. 대 두타공파의 내전 무공은 그 그릇이 크고 깊어 담지 못하는 무공이 없다.”
조양은 형진의 좁은 식견을 꾸짖으며 한참 동안 시묵공의 위대함을 역설했다.
“나 또한 신공을 익힐 수 있으나, 막상 다 풀어놓고 보니 시시하고 어쭙잖더구나. 하여, 장소를 지시하는 글자만 찾아냈을 뿐, 익히지 않고 치워 버렸다. 그러니 너 또한, 차후에 비급을 보게 되더라도 허투루 훑고 덮도록 해라.”
“네.”
조양이 누구인가? 경국뿐 아니라, 천서국과 옛 려국을 다하여도 겨룰 상대가 없는 절세 고수였다. 뿐인가? 무학에서도 절정에 이르렀으니 그의 말이 곧 진리였다.
‘주화입마가 온 것은 우영의 가르침이 모자란 탓이다. 버러지 같은 악귀 놈이 나를 농락하여 허투루 알려 주었구나.’
결론에 이른 형진은 모든 걸 바로잡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을 떠올렸다. 신교의 사람을 제외하고, 태을신공을 제대로 익힌 려국의 고수. 바로 주운의 스승 검선 이무영이었다.
“사저와 함께 인사드린 적이 있지요. 비록 문하는 아니지만, 후배를 불쌍히 여기시어 도와주십시오. 부탁드립니다.”
구월산에서 만난 이무영은 예전과 달리 늙고 초췌해 보였다. 그러나 기개만큼은 웬만한 대장부보다 드세어, 저절로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네가 태을신공을 익혔다? 하하.”
무영의 웃음은 한동안 그칠 줄 몰랐다. 그것이 경멸인지 분노인지 알 수 없었으나, 그 사이 형진의 자존심은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시묵공을 완공한 네가 굳이 신공을 탐낸 이유는 운선이를 이기고자 함이냐?”
“…….”
형진의 짙은 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당장이라도 이무영의 입을 틀어막고 싶었으나 차마 그럴 수 없었다. 어찌 되었든 살아날 방도를 찾아야 했으므로.
“단전에 울혈이 잡히고 하루에도 수차례 낯 색이 변한다면 이미 주화입마에 빠진 것이다.”
“방법이 없습니까?”
굴욕을 참기 위해 주먹을 꽉 움켜주었다. 견뎌내면 반드시 기회가 온다. 언젠가 나를 비웃었던 이 순간을 후회하도록 만들겠다. 온갖 다짐을 되뇌며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만약 네가 오대산검의 다른 문파였다면 방법이 있었겠지. 그러나 두타공파이기 때문에 불가능하다.”
“네? 어째서 그렇습니까?”
무영은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 쪽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멀리 내다보니, 구월봉 꼭대기에 미처 녹지 못한 새하얀 눈이 한 폭의 그림처럼 다가왔다. 무릇 삶이란 눈처럼 영원하지 않건만, 무얼 바라고 아득바득 살아내는 것일까? 모든 것이 후회요, 한숨이었다.
“오대산검은 모두 한뿌리에서 나왔으나 두타공파는 다르다. 너의 사조는 한낱 보잘것없는 농부에 지나지 않았고, 그 후로도 삼 대까지는 일신의 안위를 지키는 무공을 익히는 게 다였다. 조양의 스승 대에 이르러서야 기연을 얻어 용문파 방계 제자가 되었는데, 그것이 수오당의 시초이다.”
“말도 안 돼.”
형진의 얼굴이 조금씩 새파래졌다. 발작의 징조였으나 무영은 애써 모른 체했다.
“그러나 조양은 그 자질이 달랐지. 용문파의 무공을 빠르게 흡수함은 물론, 약관의 나이에 새로운 내공을 만들어 낼 수준이었으니까. 다만 자존심이 너무 강했어. 부러 내력의 흐름을 역행하는 시묵공을 완성했더랬다. 심지어 애써 익혔던 용문파의 소요공을 폐(閉)하면서 말이다.”
“거짓입니다. 소요공을 익혔다면, 굳이 폐할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흥, 그럴 수밖에. 안 그랬다면 너처럼 주화입마에 빠졌을 테니까.”
“…….”
이제 형진은 입술까지 새파래졌다. 안 그래도 내장이 뒤틀렸는데 마음마저 상했으니 발작을 피할 길이 없었다.
“안타깝게도 네 병은 오장육부에 침투하여 고칠 방도가 없다. 그리 탐이 났다면 시묵공을 폐하고 익혀야 하거늘, 도에 넘치는 욕심이 화를 불렀구나.”
“하아, 하.”
거친 숨을 몰아쉬는 형진의 눈동자에는 이미 초점이 없었다. 통증을 견디지 못하고 까무룩 정신을 놓아 버리니, 어느새 흰자위가 검은 동공을 뒤덮어 버렸다.
“앞으로 반년. 네 몸이 버틸 수 있는 최대한일 것이다. 조금이라도 더 살고자 하면, 지금이라도 기공을 닫고 두 가지의 내공을 모두 폐해라. 필부로 살아간다면, 본래 수명만큼은 아니라도 적당히 즐기다 가지 않겠느냐?”
“만약, 만약 버틴다면요.”
“음.”
무영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번져나갔다. 변해가는 형진의 눈을 보면서, 이미 자신의 앞날을 예견했기 때문이었다.
“발작이 잦아지고 내장이 썩어들어 갈 것이다. 또한, 통증을 견디지 못하는 때가 오면, 종국에는 의식을 잃을지도 모른다. 스스로 통제하지 못한 순간,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도 모르는 광인이 되겠지.”
“그, 그런……. 으아악!”
형언할 수 없는 끔찍한 고통이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 그의 앞에는 가슴에 커다란 구멍이 뚫린 무영의 시신이 널브러져 있었다. 그의 앞에 놓인 차가 아직 식지도 않았을 만큼 짧은 동안이었다. 그러나 황당하게도, 정말 아무런 기억이 나지 않았다.
“아아아아악!”
고통에 찬 절규. 내장이 뒤틀리는 육체의 고통보다 자신이 미쳐간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일이 훨씬 더 끔찍했다.
“세 번.”
아무렇게나 내팽개친 옷을 주섬주섬 입으며, 형진은 손가락을 꼽아 수를 세었다. 기억을 잃고 깨어나길 벌써 세 번. 간격은 짧아지고 강도는 세졌다. 이제 무리하게 내력을 끌어올릴 때마다 정신을 잃으니, 다음 발작의 시기를 가늠할 수조차 없었다.
‘괜찮다. 강운선, 그놈을 죽이는 그때까지만 버티면 된다.’
흐트러진 머리를 묶어 올리니 금세 말끔해졌다. 길을 좀 헤맸을 뿐, 크게 다친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형진은 애써 미소를 지어 보았다. 그리 부정적으로 볼 일은 아니었다. 어쩌면 이무영, 그 간악한 여우가 거짓으로 겁을 주었을지도 몰랐다.
‘그곳에는 온갖 비급과 신이한 고서가 가득하다 했다. 반드시 내 병을 고칠 비책을 찾아낼 것이다. 그것이 건방진 이금의 밑에서 굴욕을 감내하는 진짜 이유니까.’
어느덧 안개가 옅어지고 특유의 진득한 꽃 향도 사라졌다. 발작이 지나간 다음이어서인지, 한결 정신이 맑아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