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무십일홍-193화 (193/209)

193화. 朽木糞牆(후목분장)

약속했던 한 시진이 훌쩍 지났건만, 먼저 떠난 선발 조에서는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어느덧 해가 지고 주변이 어둑어둑해졌다.

‘일이 잘못되었다. 이러다가 본래의 계획마저 어그러진다.’

더는 머뭇거릴 여유가 없었다. 백형진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예정대로 천령문이 그를 제압했다면 진작에 연통이 있었을 터, 일이 틀어진 게 분명했다. 그러나 초조한 내색을 드러낼 수는 없었다. 등 뒤에는 그의 다음 행보를 지켜보는 오대산검 형제들의 수많은 눈이 있었으므로.

“차라리 저들을 먼저 보내는 게 어떻겠습니까?”

비학문 문주가 형진에게만 들리도록 은밀히 속삭였다. 일이 틀어진 마당에 하릴없이 목숨을 내놓고 싶지 않았다. 습지 안에 어떤 함정이 기다리고 있을지 알 수 없거니와, 장은 역시 만만치 않은 인물이었다. 죽음을 불사하고 형진의 명령을 따를 만큼 충성심이 대단하지도 않았다.

“그러다가 운이 좋게 그들이 먼저 습지를 빠져나가면 도루묵입니다. 차라리 제가 저들과 들어가겠습니다. 문주님은 예정대로 이곳에서 기다리시다가, 뒤에 오는 태자의 무리를 습지 안으로 유인하시면 됩니다.”

“하지만, 괜찮겠습니까?”

문주가 잔뜩 찌푸린 얼굴로 안개로 뒤덮인 습지를 가리켰다. 온갖 요괴가 튀어나와도 이상하지 않을 음습한 곳이었다.

“혹여 신교가 파놓은 함정이든, 장문주의 꼼수든, 아니 진짜 귀신이 있더라도 상관없습니다. 아니, 오히려 그러길 바랍니다. 어려운 길일수록 목표와는 가깝기 마련이니까요.”

“아, 역시…….”

비학문과 두타공파의 제자들은 형진의 결연한 의지에 다시금 크게 감동했다. 아무렴 오대산검 및 전 무림을 이끌어갈 차세대 맹주의 자세가 아닐 수 없었다.

“그럼 부디 조심하십시오.”

“이따 뵙겠습니다.”

형진은 마지막으로 작전을 꼼꼼히 확인한 후, 곧장 고대산파와 선운검파에게로 다가가 상황을 설명했다. 얼핏 보면 정중히 부탁하는 듯하였으나, 기실 명령과 다름없었다. 기정은 몰라도 인경은 그의 시커먼 속내가 뻔히 들여다보였다. 인질을 앞세워 적의 함정을 확인해보려는 악랄한 심보. 끓어오르는 분노를 꾹꾹 눌러 참으며 흔쾌히 수락했다.

인경은 자리에서 훌훌 털고 일어나 일행의 맨 앞으로 나아갔다. 지친 고대산파의 동료들을 격려하는 한편, 선운검파의 안위도 살폈다. 물론 고유생이 탄 수레를 챙기는 일도 잊지 않았다. 당장은 짐처럼 보일지 몰라도 누구보다 소중히 지켜야 하는 사람이었다. 종국에는 사건의 전말을 풀어내는 증인이 되어줄 테니까.

아직 가을이 지나지 않았는데도 습지는 초겨울처럼 서늘했다. 숨을 내쉬면 하얀 입김이 한동안 머물러 눈앞에 가물거렸다. 콧속으로는 내내 습습한 공기가 질퍽하게 쑤시고 들어왔다. 괜히 눈이 따갑고 목구멍이 간질간질했다.

“문주님, 눈앞이 거의 보이지 않습니다.”

“수레를 엄호하고 절대로 떨어져서는 아니 된다.”

“네, 명심하겠습니다.”

울며 겨자 먹기로 선두에 선 고대산파의 제자들은 그야말로 죽을 맛이었다. 서로의 옷고름을 붙잡고 발걸음을 옮기면서도 연신 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물론 두렵기는 인경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에게는 지켜야 할 이들이, 감당해야 하는 책임이 막중했다. 큰 눈을 부릅뜨고 마음을 가다듬으며 뿌연 안개 속으로 조금씩 들어갔다.

쉬이익

쉬이익

“이게 무슨 소리지?”

한껏 예민해진 형진의 귀가 미세하게 움직였다. 갈대숲 사이에 이는 바람 소리 같기도 하고, 정체를 알 수 없는 누군가의 옷깃이 스치는 소리 같기도 했다. 오른손을 들어 뒤따르는 제자들의 발을 멈추었다. 안개가 자욱한 주변을 훑는 그의 눈에는 은은한 안광이 빛났다. 개미 한 마리도 놓치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였다.

쉬이익

쉬이익

그러나, 아무리 귀를 기울여도 소리의 출처는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오히려 앞세운 고대산파와의 거리가 벌어지고 말았으니 이런 낭패가 없었다. 결국, 형진은 포기를 선택했다. 구령으로 일행을 재촉하니 당분간 지루한 행군은 계속되었다.

턱!

히이이잉!

“어? 으악!”

그렇게 일각이나 지났을까? 앞서가던 수레가 무언가에 걸린 듯하더니만 곧 누군가가 소름 끼치는 비명을 질러댔다. 고대산파의 바로 뒤에서 따르던 선운검파 선자들의 날카로운 소리가 보태지니, 행렬은 금세 혼란에 빠지고 말았다.

“무슨 일입니까?”

앞쪽은 이미 대열이 흐트러져 아수라장이었다. 형진이 혼란스러운 틈을 비집고 들어서자, 비릿한 피 냄새가 훅 끼쳐 들어왔다.

“이런, 이미 당하였구나.”

이십여 구의 시신이 작은 웅덩이를 만들어 앞길을 가로막고 있었다. 얼굴이 상당수 뭉개져 신원을 알기 어려웠으나 복색만으로도 쉬이 정체를 파악할 수 있었다.

“용문파와 천령문의 제자들입니다.”

“세상에…….”

“역시 신교 놈들이 암습을 한 걸까요?”

그러나 시체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형진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랬다면 이리 한 무더기로 몰려 있지 않았겠지. 이건 마치 저들끼리 분란이 생겨 서로를 찔러 죽인 모양새였다. 게다가,

“어? 여기 이 자는 용문파의 용봉명이 아닙니까?”

“심상치 않구나.”

봉명의 시신은 다른 이들보다 훨씬 더 처참했다. 여러 사람이 덤벼들었는지 찔리고 베인 상처가 수십 개였다. 그래도 이렇다 할 치명상은 피한 것으로 보아 끝까지 살기 위해 몸부림친 듯싶었다. 역설적이게도, 그 때문에 오히려 죽음에 이르기까지 꽤 오래도록 고통스러웠으리라.

‘정말 이상하지 않은가? 검흔이나 장력의 위력만으로 판단하건대, 모두 용문파 내전 무공에 당한 게 틀림없다. 설마 서로 죽고 죽인 걸까? 어째서?’

형진은 선뜻 길을 나아가지 못하고 깊은 생각에 빠졌다. 그러느라 정작 앞서가던 고대산파와 선운검파를 놓친 것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대사형, 큰일입니다. 앞선 일행이 보이지 않습니다. 안개가 점점 더 짙어지는데 어찌 찾을지 난감합니다.”

동문 사제의 보고를 듣고 나서야 비로소 정신이 들었다. 평소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실수였건만, 그 자신도 당황스러울 뿐이었다. 어째서인지 이곳에 발을 들인 이후부터 머리가 무겁고 어지러웠다.

“그들을 놓치면 큰일이다. 내가 경공을 써 따라잡을 데니 네가 책임지고 동문을 맡아라.”

“네. 그런데 용문파와 쳔령문 형제들의 시신은 어찌합니까?”

“아, 안타깝지만 지금은 방법이 없구나. 일단 위치를 잘 기억해 두었다가 차후에 돌아오는 길에 묻어주자.”

과연 모두가 무탈하게 돌아올지 알 수 없었으나 그것이 최선이었다. 불안하고 초조한 마음을 애써 감춘 채, 형진은 홀로 발길을 재촉했다. 물론 인제 와서 오대산검의 잔챙이들을 염려하는 것은 아니었다. 설사 놓쳤다 한들, 이 안개 무덤에서 지도도 없이 출구를 찾을 리 만무했다. 그런데도 서두르는 이유는 단 하나, 고인경에 대한 의심 때문이었다.

‘혹시 그 녀석이 운선과 미리 짠 게 아닐까? 남다른 친분이 있던 그들이 아니었던가?’

또한, 장은에 대한 의혹도 여전했다. 신교의 기습을 받았다면 장은 역시 용봉명의 시신 근처에 마땅히 있어야 하거늘, 어떻게 혼자 감쪽같이 사라졌을까? 교활한 그라면, 어디선가 더 큰 음모를 꾸미고 있지 않을까? 쉬지 않고 움직이면서도, 불길한 예감이 가시지 않았다.

‘일이 자꾸 꼬인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문득 가슴이 답답해지고 머리가 지끈거렸다. 엄지 끝으로 명치를 힘껏 눌러 보았으나 체기는 아닌 것 같았다. 고작 이 정도 내력을 끌어올린다고 해서 무리가 갈 리가 없건만, 평소와 다른 몸 상태인 것만은 분명했다.

“헉, 헉.”

숨이 가빠져 도저히 뛰기 어려울 때쯤, 안개는 아예 장막이 되어 형진의 시야를 완전히 차단해 버렸다. 당장 눈앞에 적이 나타나도 분간할 수 없을 만큼 짙고, 탁했다.

‘원래 이런 곳이었던가? 아니면 이 또한 그놈의 함정인가?’

이제 뭐가 뭔지도 알 수 없었다. 어디까지가 강운선의 덫이며 어디까지가 진짜인지도 헷갈렸다. 단전에서부터 찌릿한 통증이 느껴져 저절로 허리가 구부러졌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머리가 어지러워 구역질이 날 것만 같았다.

스르릉!

“찾았다.”

차가운 금속의 감촉과 함께 귓가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청아하고 차분한 여인의 목소리. 그러나 그의 목을 겨누고 있는 검은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부르르 몸을 떨었다.

“당신이 어째서? 여기까지 어찌 온 것입니까?”

“네놈을 죽이기 위해 어딘들 못갈까?”

“사저…….”

형진은 목소리가 나는 쪽으로 서서히 몸을 돌렸다. 신기하게도 그 짙은 안개 속에서 그리운 그녀의 얼굴만은 똑똑하게 보였다.

“저를 죽이려고 오신 겁니까?”

“감히 그런 짓을 저지르고 살기를 바랄까?”

평소답지 않게 앙칼진 그녀의 모습에 되레 마음이 편안해졌다. 어차피 죽어야 한다면 강운선이 아니라 사랑하는 여인의 검 앞이 좋았다. 자신도 모르게 입가에 온화한 미소가 지어졌다. 분노를 누르지 못하는 주운의 얼굴일지라도 이렇게 마주 보니 반갑기만 했다.

“하지만 사저, 당장은 죽을 수 없습니다. 강운선과 마무리 지을 일이 있어요. 그 일이 끝나면 스스로 찾아갈 테니, 지금은 놓아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하하, 기가 막히는구나. 네놈을 죽이기 위해 몇백 리를 달려왔는데 빈손으로 돌아갈 리가 있겠느냐? 감히 나를 속이고 하나뿐인 가족을 죽인 죄, 당장 물어 원한을 갚아야겠다.”

휘익!

말을 마치자마자 월심이 그의 안면으로 뻗쳐 들어왔다. 내력을 쏟아부은 검은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사혈만을 노리고 움직였다. 그런데도 어찌나 빠른지, 뱀이 똬리를 틀듯 감았다가 풀어지는 모양이 눈에 보이지도 않았다.

“안개가 가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으니 혹여 다치게 할까 두렵습니다. 지금은 검을 거두세요.”

그러나 형진의 몸놀림은 그보다 훨씬 쟀다. 월심이 목표 지점에 도달할 찰나에 기가 막히게 몸을 빼내 뒤로 물러섰다. 진심으로 싸울 마음이 없는지 내내 뒷짐을 진 채였는데 몸의 중심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위선자!”

“네, 맞습니다. 부정하지 않겠습니다.”

형진은 어떤 욕을 먹어도 괜찮았다. 그저 울먹이는 주운이 안쓰러워 꽉 끌어안아 주고 싶었다. 허나, 그조차도 그에게는 주어지지 않은 특권이었다.

“사저, 저는 위선자가 맞습니다. 하여 미워하고 증오하는 마음, 이해합니다. 하지만 강운선은 어떻습니까? 당신을 버리고 떠난 것도 모자라 오해하고 상처 입히지 않았습니까?”

“잡소리 집어치워라! 네놈이, 네놈이 사랑하는 스승님을 죽였다. 이보다 더 큰 상처가 어디 있어?”

주운의 검은 점점 더 어지러워졌다. 날은 어두워지는데 나비처럼 팔랑거리는 하얀 옷자락에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그 아름다운 모습을 넋 놓고 보다가 퍼뜩 어떤 생각이 떠올랐다. 형진의 시야가 금세 뿌옇게 흐려졌다. 오늘이 그녀를 보는 마지막 날일지도 모른다. 이대로 그녀와 헤어진다면 평생 후회할 것 같았다.

“이무영! 그 요녀는 당신의 스승이 아닙니다. 아무 힘 없는 경국의 백성을, 당신의 부모를 죽이지 않았습니까? 어째서 원수의 복수를 하려 하십니까?”

“그러니 네놈은 틀린 것이다. 평생 운선의 발뒤꿈치도 따라가지 못할 소인배인 것이다.”

“사저!”

그제야 형진의 손이 소매 밖으로 드러났다. 평생 그를 지배했던 열등감이 일순 이성을 잠식해 버렸다. 하필 세상에서 가장 인정받고 싶은 이에게서 가장 듣고 싶지 않은 말을 들은 셈이었다.

‘그래, 애초에 갖지 못할 사람이었다. 그이에게서 비난을 듣느니, 영영 기억 속에서 지워버리자.’

밑도 끝도 없는 그릇된 마음이 서서히 차올라와 머릿속을 지배했다.

“하하하, 이미 한 번 해본 일을 두 번은 못 할까?”

“뭐?”

온화한 그의 얼굴에 잔혹한 미소가 떠올랐다. 부모와 같았던 스승 조양을 살해하던 날 밤, 죄책감 따위는 느끼지 않았다. 그의 죽음 뒤에는 더 큰 명예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 명예야말로 스승의 욕망이 아니었던가? 가장 큰 나라 경국에서 가장 높은 위치에 오르는 것. 그의 목숨을 뺏어 꿈을 이뤄주겠다는 역설적인 논리가 기적적으로 일치되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지금,

“평생 갖고 싶었던 여인이었다. 너를 죽여서라도 이대로 멈춰둘 수 있다면 충분히 가치 있는 일일 것이다. 태일천하!”

양손에 하나씩 맺은 수인 사이로 서늘한 바람이 휘몰아쳤다. 습지 바닥에 고여 있던 안개가 순식간에 걷히며 수천, 수만 개의 물방울이 되었다. 내력의 오 할 이상을 쏟아부은 장력은 어떤 장애물도 거치지 않고 하얀 옷자락의 여인을 향해 거침없이 뻗어 나갔다.

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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