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무십일홍-192화 (192/209)

192화. 魚目燕石(어목연석)

“사…사형……. 어째서?”

은률은 아득해지는 의식의 끈을 부여잡으며 가까스로 몸을 일으켰다. 이대로 이유도 모른 채 죽을 수는 없었다. 평생을 가족처럼 여겼던 형님의 배신이 지금, 이 순간에도 믿어지지 않았다.

“미안하게 되었다.”

“오, 오…해가 있…었나 봅니다. 그렇지요?”

그게 아니라면 저렇게 죄의식이 없는 표정으로 자신을 내려다볼 리 없었다. 어린 시절 살뜰하게 보살펴 주었던 그에 대한 기억이 여전히 생생했다. 설마 그 모든 순간이 가식이었을까?

“저는…, 은이를 해하려는 형님을 말린 것뿐, 방해하려던 게 아, 아…닙니다.”

“안다.”

“네?”

장은은 아직도 자신을 믿으려고 발버둥 치는 은률이 불쌍하다 못해 한심했다. 그래도 마지막이니 이유는 알려주어야 할까? 아우를 향한 안타까운 마음만은 그의 진심이었다.

“음, 굳이 지금이 아니었어도 결과는 같았을 것이다. 네가 죽음으로써 이 습지에서 살아남은 이유가 입증될 테니까. 이곳은 곧 지옥도가 펼쳐질 거야. 두 황자와 천서국의 태자까지 뛰어들어 서로의 뒤통수를 노릴 테니 말이다. 아무리 나라고 해도 이 지옥도를 너무 쉽게 빠져나오면 의심받지 않겠느냐? 그러니 이유 하나쯤은 만들어야 했지. 목숨보다 사랑하는 아우의 죽음. 참으로 감동적인 희생이 아니냐? 아쉽지만 네 역할은 여기까지다.”

“형님…….”

망연자실한 은률을 내버려 둔 채, 이번에는 가은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눈물 콧물이 섞여 엉망이 된 얼굴로 자신의 유일한 보호자를 끌어안은 모습이 퍽 측은해 보였다.

“얘야, 안타깝게도 우리 풍림은 가망이 없어. 그 잘난 약선이 온다 해도, 아니 그보다 훨씬 더 뛰어난 의원이 불현듯 튀어나온다 해도 고작 반 시진을 버티지 못할 것이다. 괜히 힘쓰지 말고 열쇠를 내어주렴. 그럼 아프지 않게 네 정인과 손잡고 가도록 해주마.”

“이 악귀! 어떻게 친아우 같은 이를 죽일 수가 있느냐? 당신이 이러고도 사람이야?”

“하아…….”

장은의 짙은 눈썹이 세차게 꿈틀거렸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요망하기 이를 데 없는 가은의 질타를 받으니 짜증이 솟구쳐 올랐다.

“친아우라니? 누구? 설마 이 천둥벌거숭이 녀석을 이르는 것이냐? 하하하, 세상에. 은률아, 설마 너도 그리 생각하느냐? 내가 정말 거짓말에 소질이 있긴 한가 보구나.”

“형…형님!”

은률은 그저 사형을 올려다볼 뿐이었다. 심지어 원망도 들지 않았다.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 속에는 답답함, 걱정, 그리고 미안함이 담겨 있었다. 자신의 어떤 행동이 사형을 오해하게 했을까? 그게 궁금할 따름이었다.

“얘야, 나는 너를 친아우로 생각하지 않는단다. 단 한 번도 그리 여기지 않았지. 오히려 원수에 가깝지 않을까? 그저 너는 내 복수의 대상이었단다. 물론 네 탓은 아니지만 말이다. 원망하려거든 죽어서 네 친 아비를 만나 하려무나.”

자분자분하게 말을 잇는 장은은 어딘지 모르게 홀가분해 보였다. 반면 세상 다 잃은 듯 무기력했던 은률의 얼굴은 점점 일그러졌다.

“무슨 말씀입니까? 제 부모는 성곤, 그 악귀 놈에게 죽었다 하셨잖아요. 애초에 저를 황석산으로 데려온 이가 사형이 아닙니까?”

“음, 일부는 맞고 대부분은 사실이 아니지.”

“네?”

장은은 아직도 안개가 자욱한 습지 쪽을 흘긋 쳐다보았다. 마치 이곳과는 전혀 다른 세상인 양, 고요했다. 주어진 시간이 남은 차에 아우가 편한 마음으로 눈 감도록 도와주어도 될 듯싶었다.

“안타깝게도 너의 원수는 성곤이 아니다. 굳이 따지자면 네 스승 부능파? 뭐, 거기에는 내 영향도 적지 않지.”

“무, 무슨!”

가물가물 흐려지던 눈이 번쩍 뜨였다. 지금 사형의 입에서 무슨 소리가 흘러나오는 거지? 죽기 직전에 마주하는 환청일지도 몰랐다.

“너의 친부는 온수의 안찰사였다. 정일권, 한때는 려국의 대군 창의의 충신, 그리고 나의 친부가 가장 신뢰하는 친우였지. 그래, 너는 원래 려국 세도가의 장자였단 말이다.”

“뭐, 뭐라는 거야?”

뜻밖의 사실에 놀란 이는 은률만이 아니었다. 가은 역시 충격을 받아 눈물이 쏙 들어갔다. 이야기인즉슨 세 사람은 본디 려국인이라는 뜻? 머릿속이 복잡해져서 당장 터져나갈 것 같았다.

“허나 너의 부친은 나의 부친보다 사리가 밝은 이였어. 자신의 부귀영화를 위해 친우를 밀고하였지. 원망조차 하지 않은 미련퉁이 아버지는 생떼 같은 어린 자식이 보는 앞에서 목을 매달았다.”

장은은 입을 다물지 못하는 두 사람을 향해 천천히 다가왔다.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아우의 귓가에 입술을 바짝 갖다 대었다.

“아우야, 그 어린 자식이 바로 나다.”

“말도 안 돼…….”

그의 얇은 입술이 한쪽으로 쭉 찢어졌다. 막상 밝히고 나니 어쩐지 기분이 상쾌했다. 수십 년간 혼자만의 비밀이었던 음모가 당사자 앞에서 밝혀지니, 묘한 쾌감도 느꼈다.

“멍청한 성곤은 고아가 된 소년을 불쌍히 여겨 그의 지기에게 부탁했다. 부디, 려국인임을 숨기고 황석파에서 보살펴 달라고. 쓸데없이 인정이 많았던 마세풍은 그 말도 안 되는 부탁을 승낙하고 말았지. 그 순간부터 길고 지루한 복수가 시작되었다. 소년은 한시도 아비의 죽음을 잊지 않았어. 하여, 경국이 온수를 점령했을 때 부능파를 부추겨 고을을 불태우고 사람들의 눈을 파냈다.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었냐고? 당연하지! 다 네 아비 때문이라는 걸 알려주고 싶었다. 친우를 버린 배신자 주제에 백성들에게 추앙받는 꼴이 역겨웠거든.”

“허억, 컥!”

은률이 다시 한번 검붉은 피를 토해냈다. 몸은 당장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망가졌는데 정신은 점점 더 또렷해졌다. 평생 믿어왔던 사실이 전부 부정되는 진실이 그에게는 되레 거짓 같았다.

“너 때문에, 너 하나 때문에 저들의 앞날은 칠흑같이 어두워질 것이다. 다, 네 탓이다. 죽는 그 순간까지 그 배신자에게 속삭여주었다. 그런데 생각보다 후련하지가 않더란 말이야. 난 십여 년을 악몽 속에 살았는데 이놈은 고작 일각도 안되는 동안만 고통스러웠으니 억울하더군. 어찌하면 이 풀리지 않는 응어리를 해결할 수 있을까? 고민하던 그때, 운명처럼 네놈을 보았다. 이제 막 돌이나 지났을까? 꼼지락거리며 아비를 찾는 그 손을 잡으니 아주 기가 막힌 생각이 떠오르더구나.”

‘이 자는 완전히 미쳤다. 당해낼 수가 없어.’

이야기를 듣는 내내 가은의 몸은 쉴 새 없이 덜덜 떨렸다. 집착과 광기로 똘똘 뭉친 살인귀를 한낱 어린 여인이 감당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차라리 단칼에 죽고 마는 게 덜 고통스럽지 않을까? 절망과 공포만이 그녀의 정신을 지배했다.

“죽기 직전, 나는 네 아비의 귀에 속삭였어. 남은 빚은 당신 아들에게 받겠습니다. 하하하, 그때 그 표정! 아아, 아직도 잊을 수가 없어. 나를 찢어 죽이고 싶어 안달이 났으면서도 이마를 찧으며 손을 비벼대더군. 차라리 나를 갈가리 찢어라. 제발 내 아들은 놓아 달라고. 아하하하하!”

“너, 너!”

드디어 은률의 눈동자에는 분노가 들어찼다. 거짓으로 점철된 세월에 대한 후회와 아비를 죽인 원수에 대한 증오가 범벅이 된 눈. 그 모습을 확인한 장은은 한층 더 자지러지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 얼굴이 그의 아비와 똑 닮았기 때문이었다.

“은률아, 네 이름은 너를 목숨보다 더 아꼈던 네 아비가 지어주었다더라. 그 이름으로 동족을 찌르고 벴으며, 아비의 은인인 성곤을 평생 증오했더랬지. 이보다 더한 희극이 어디 있을까?”

“이……이!”

은률의 손이 바닥을 헤매기 시작했다. 뭐라도 좋았다. 저 짐승만도 못한 놈의 명줄을 끊을 수 있는 그 어떤 무기라도 잡히길 바라는 마음이었다. 그리고,

“오라버니, 여기!”

가은이 은밀히 넘겨준 단검은 바로 소소정의 가슴에 찔러넣었던 그것이었다. 이제는 그의 차례였다. 친부모의 복수, 그리고 자신의 인생과 의지를 앗아간 복수를 해야 했다.

“으아아아아!”

마지막 남은 힘을 짜내어, 은률은 단검을 든 팔을 앞으로 쭉 뻗었다. 자신을 조롱하느라 방심한 장은이 아직 눈앞에 알짱대고 있었다. 급소에 제대로만 꽂힌다면 저승길 동무로 데려갈 수 있으리라. 오직 그 소망으로 날린 일격이었다.

퍽!

“크윽!”

그러나, 하늘은 그마저도 허락하지 않았다. 이미 가은의 행동을 눈치챈 장은이 뻗어오는 은률의 오른팔을 꺾어 버렸기 때문이었다. 하릴없이 부러진 손목은 방향을 바꿔 자기 주인의 목덜미를 꿰뚫었다. 은률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그대로 절명하였다.

“아아아아악!”

가은의 처참한 울부짖음이 습지를 가득 채웠다. 태어나 처음으로 온전히 마음을 연 상대였다. 사랑까지는 아니어도 우정과 연민을 나눴던 유일한 사내였다. 그의 급작스러운 죽음을 목격한 지금, 마치 애간장이 마디마디 끊어진 것 같은 고통이 온몸을 휘감아 돌았다.

“으아아아아아!”

아우의 검은 피를 뒤집어쓴 장은은 미간을 찌푸렸다. 어미 잃은 새끼 참새처럼 짹짹거리는 가은이 퍽 시끄러웠다. 사실 이 아이만 아니었다면 은률을 좀 더 살려 둘 수도 있었을 텐데. 막상 마무리를 짓고 나니 살짝 아쉬운 마음도 들었다.

“얘야, 가증스러우니 그만 질질 짜렴. 은률의 죽음은 너에게도 책임이 있지 않니? 너 따위와 얽히지 않았다면 나에게 감히 대들지도 않았을 테고, 그 때문에 내가 짜증이 나지도 않았을 게 아니니? 그러니 네 탓을 인정하고 그만 열쇠를 내어놓아라.”

“이 악귀! 절대로 주지 않겠다! 어서 나도 죽여라. 진정 악귀가 되어 네놈 앞날을 망쳐 놓을 테다!”

“큭큭, 이거 참 웃기는 년이네?”

장은은 헛웃음을 치며 뒤로 성큼 물러섰다. 쫑알쫑알 저주를 뱉어내는 양이 아주 가관이었다. 실력도 안 되는 주제에 입만 나불대는 꼴이라니.

“소한!”

오른손을 감아쥐고 손목을 돌리자 차가운 겨울바람이 소매 속으로 빨려 들어왔다. 고작 내력의 이 할도 싣지 않았으나 이 정도면 충분했다. 저 요망한 아이의 정수리를 단번에 내리쳐 지루한 싸움을 끝낼 요량이었다. 괜히 시간을 끌다가 애먼 방해꾼이 나타날지도 몰랐다.

“내 어머니가 어째서 너를 그토록 한심하게 여겼는지 알겠다!”

“흥! 네깟 년의 어미가 누군지 알게 뭐냐?”

뜬금없는 헛소리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죽을 때가 되니 머리가 돌아버린 게 틀림없었다. 장은은 개의치 않고 다시 정신을 집중했다. 정확히 조준해야 뇌수가 사방으로 튀지 않을 터였다.

“내 어머니, 소백화 현진 말이다!”

“뭐?”

일순, 바람을 잔뜩 머금었던 그의 오른손이 스르륵 풀려 버렸다. 지금 누구라고 한 거지? 안면 근육이 서서히 굳어지고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지금 뭐라고 지껄인 거냐?”

“내 어미가 바로 려국의 옹주 현진이라 하였다!”

마지막 한 수. 언젠가 소소정이 했던 그 말이 떠올랐다. 장은은 현진을 절대로 죽이지 못할 것이라고. 아무리 생각해도 그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문득 어떤 장면이 뇌리를 스쳤다. 어미인 줄도 모르고 현진을 죽이러 갔던 그 날, 동굴에서 훔쳐본 장은의 표정은 포로를 신문하는 악랄한 고문관의 얼굴이 아니었다. 연민과 미안함이 범벅된 표정, 어떻게든 당신은 살리고 싶다는 다정한 제안. 그때는 이해되지 않았던 장면이 어쩌면 목숨을 구할 방도가 되지 않을까 추측했을 뿐이었다. 지금, 그 수가 정확히 먹혀든 참이었다.

“옹주에게 딸이 있어? 그게 너라고?”

경련이라도 난 것처럼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가은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동공이 점점 불투명해졌다. 당혹스러움이 가득했던 표정이 조금씩 소름 끼치는 살기로 변해갔다.

“그게 사실이라면 더더욱 네년을 죽여야겠구나. 단, 이번에는 가혹한 고통을 맛보게 해주마. 차라리 죽여달라고 싹싹 빌 만큼 끔찍하게 말이다.”

“뭐?”

가은의 자신만만했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갔다. 이제 빠져나갈 구멍은 어디에도 없었다. 열여섯도 채 되지 않은 소녀의 보잘것없는 삶이 막 끝나려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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