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화. 怨入骨髓(원입골수)
“아주 더러운 수로구나. 이 냄새, 안개. 하하하, 의와 협을 운운하더니 참으로 옹졸한 짓거리가 아니냐?”
장은은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며, 이미 목숨이 끊어진 봉명의 시신을 땅에 내팽개쳤다. 하필이면 이곳에서, 자신의 밑바닥을 마주하는 시련이라니. 기가 막힌 조롱이었다.
“좋다. 어디 마음껏 해보려무나. 너 따위에게 당할 만큼 무지하고 나약한 내가 아니다.”
허공에 대고 지껄이는 외침은 돌고 돌아 다시 귓속으로 되돌아왔다. 오히려 좋았다. 메아리는 잔뜩 흥분한 그의 마음을 가라앉혔다. 정신이 또렷해지고 흔들리던 눈동자가 초점을 찾았다. 고작 이 정도의 시련이라면 별것 아니었다.
평온함을 되찾은 장은은 짙은 피비린내를 피해 발걸음을 옮겼다. 금황자가 전해준 지도는 잊은 지 오래였다. 그러나 상관없었다. 금천의 까마득한 습지는 이미 그의 기억 속에 존재했다. 심지어 지도보다 훨씬 더 정확했다.
“교은아, 금천의 아홉 갈래의 샛길은 마치 거대한 진(陳)과 같다. 언젠가 이 아비를 따라 이곳을 지키려면 모든 길을 손금처럼 외우고 있어야 한단다.”
저 먼 곳에서 그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끊어질 듯 이어지는 다정한 그 소리가 가라앉은 마음을 다시금 헤집어 놓았다.
“아닙니다. 아버지. 저는 지키러 온 것이 아니라, 짓밟고자 하는 것입니다.”
마치 누가 보는 것처럼 세차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환청이란 걸 알면서도 굴복하고 싶지 않았다. 수십, 수백 번을 부정하고 또 부정하고 싶었다.
“그러나 아무리 부정해도 너는 려국인이다. 아비의 죽음은 그저 선택의 결과일 뿐, 그 누구의 탓도 아니다. 원망하지 말고 받아들여야 한다. 그것이 백성의 도리이니라.”
“아닙니다. 어째서 아버지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도 여전히 우매한 소리만 하십니까? 왕의 뜻이 어리석으면 아니라고 고할 수 있고, 그조차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거스르면 그만입니다.”
듣는 이가 없는 답변이었으나 막힘이 없었다. 막상 오랫동안 가슴에 담아두었던 울분이 터져 나오자 그칠 줄을 몰랐다.
“궤변이다! 나라를 팔아먹고 동족을 배신한 변명치고는 유치하고 옹졸한 말장난이다!”
귓가를 때리는 우렁찬 호통. 부지런히 내달리던 장은은 그 자리에 우뚝 섰다. 눈앞에는 여전히 희뿌연 안개가 자욱했으나 그 사이로 거대한 검은 그림자가 조금씩 형체를 갖춰 다가왔다. 떡 벌어진 어깨, 부리부리한 눈, 수염 한 가닥가닥 분노가 배인 성곤의 얼굴이었다.
“하하하, 망할 영감탱이.”
환각의 정체를 확인하자, 웃음이 멈추지 않았다. 어째서 당신이 나타났단 말인가? 적어도 성곤, 그에게는 죄책감이 없었다. 아버지를 꼬드겨 저승길로 몰아간 이가 누구던가? 연판장 위에 피로 적은 약속을 배신하고 오직 혼자 살아남은 위선자. 나라를 무너뜨린 장본인이면서 돌연 충성스러운 신하인 척, 경국을 향해 칼을 겨눈 그는 자신보다 더한 배신자였다.
“배은망덕한 놈, 아비의 복수를 하겠다고 날뛰던 네놈을 기어코 살린 건 나다. 새로운 삶을 살기를 바라는 마음에 부러 친우에게 맡겼거늘, 마음속에 악귀가 가득 찬 놈인 줄 왜 몰랐을꼬. 원통하구나.”
“당신과 내가 무엇이 다릅니까? 적어도 나는 당신처럼 위선을 떨지는 않았습니다.”
힘껏 대거리해보았으나, 성곤의 노한 얼굴은 좀처럼 흩어지지 않았다. 여전히 그의 주변을 빙빙 돌면서 꾸짖고 욕했다.
“당신은 늘 당신이 가장 옳다, 현명하다 여겼지요. 하여, 창의를 내세우려던 일이 실패했는데도, 그 일로 수많은 충신이 억울하게 죽었는데도 뻔뻔하게 얼굴을 들고 다녔지요. 나를 살려주었다고 하셨습니까? 오직 하나뿐인 내 피붙이를 목매달아놓고 그의 자식을 거둔 것이 구원입니까? 아니요, 그것은 자신의 죄책감을 덜기 위한 가식이며 위선입니다.”
장은은 주먹을 휘둘러 안개를 흩어냈다. 더는 저 흉한의 형상을 보고 싶지 않았다. 이 모든 원망의 시발점이었건만 어느새 마음속에 자리 잡아 따박따박 핑계를 대는 꼴이 역겹기만 했다.
“교은아, 네 이름을 바꾼 연유가 무엇이냐?”
“아아…….”
흩어진 안개가 또 한차례 엉겨 붙었다. 이번에는 키가 작고 동그란 노인이 자애로운 얼굴로 다가왔다. 그의 얼굴을 인지한 순간, 한껏 치켜뜬 장은의 눈썹이 축 내려앉았다. 자리에 주저앉아 양손으로 귀를 틀어막았다. 듣고 싶지 않았다. 무슨 잘못을 해도 용서해 줄 것 같은 자애로운 표정, 고양된 복수심을 단번에 묽게 만드는 다정한 목소리. 하필 이 순간에 나타난 스승 마세풍의 얼굴은 간신히 부여잡고 있던 그의 정신을 빠르게 갉아먹었다.
“은(恩)! 원망을 버리고 마음을 갚겠다 하여 바꾼 이름이었다. 기억하느냐?”
“아아아아악!”
안개가 흩어지도록 고함을 질러 보았다. 절대로 듣지 말아야 하는 단 한 사람의 목소리. 고개를 세차게 휘젓고 발을 동동 굴렀다. 닥쳐라. 아무 말도 듣지 않겠다.
“은아, 피는 피를 부르는 법. 어차피 삶이란 아무것도 없이 시작하여 아무것도 가져갈 수 없단다. 무엇이 그리 억울하여 손을 비우지 못하는 게냐?”
“아니야, 나는 부끄럽지 않아!”
장은의 주먹이 다시 한번 허공을 갈랐다. 사람의 형상이 부서졌다가도 방향을 바꾸어 서서히 뭉쳐졌다. 벌써 여러 차례 흩어졌다가 뭉쳐졌건만, 여전히 제자를 내려다보는 스승의 얼굴은 인자하기만 했다.
“이제, 그만 집착을 버려라. 더는 네놈이 망가지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구나.”
“아아, 스승님…….”
자신도 모르게 두 주먹을 내려다보았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는 스승이 불편했다. 쓸데없이 태평한 성격이, 식탐이 전부인 욕심이, 그리고 그 누구에게도 편견 없는 자유로운 가치관이. 전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차라리 부능파나 고유생의 제자였으면 좋았을걸. 그랬다면 일말의 죄책감도 남지 않았을 텐데. 존경하지 않으려 했으나 존경할 수밖에 없는 그가 죽이고 싶도록 미웠다.
“지금부터 나에게는 제자가 없다. 네놈을 직접 가르친 손목을 끊어 스스로 죄를 묻겠다. 다시는 나를 찾지도, 내 이름을 입에 담지도 말아라.”
이번에는 환청이 아니었다. 이십여 년 전, 매몰차게 돌아서던 스승이 직접 내뱉었던 그 말이 까마득한 기억 속에서 삐죽 고개를 내밀었다. 그러자 인자하기만 했던 스승의 형상이 조금씩 일그러졌다. 힘줄을 끊은 오른 손목에서는 피가 뚝뚝 흘러내려 하얀 도포 자락을 붉게 물들였다.
“그랬지요. 당신은 나를 버렸지요. 내가 아니라 창현의 아들을 하나뿐인 제자라 인정하셨습니다. 영명권을 가르치고 임종을 지키게 했지요. 하필 제 아버지를 죽게 한, 창현의 아들에게 말입니다. 하하, 제가 왜 그걸 잊고 있었을까요?”
무릇 기억이란 왜곡의 산물이었다. 상대에 대한 추억으로 채색되어 피멍이 든 상처를 은밀히 덮어버리는 환각제였다. 잠시 몽글몽글해진 마음은 어린 시절 살뜰히 보살펴 주던 스승에 대한 기억 때문이었다. 자신의 머리에 일 권을 내리치려던 그의 경멸 어린 표정을 감쪽같이 잊어버리고는.
“또 속을 뻔하였다.”
장은은 검을 꺼내 왼쪽 허벅지에 얕은 자상을 만들었다. 붉은 핏물이 방울방울 맺혔으나 곧 아물 정도의 가벼운 상흔이었다.
“당신은 이제 저에게 고작 이 정도의 기억입니다.”
산발한 머리를 정돈하여 정수리까지 올려 묶었다. 흐트러진 옷매무시도 단정히 가다듬자, 어느새 점잖은 장문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렇지만 안심할 수는 없었다. 혹여 또다시 향에 취해 정신을 잃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품속에서 연꽃이 수놓아진 손수건을 꺼내 코와 입을 막았다. 잠시 호흡을 멈추고 기를 순행하니, 여태 지끈거리던 두통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
‘고작 이 정도로 나를 잡아둘 수는 없지.’
이제 그에게 남은 선택지는 두 가지였다. 백형진과 다시 합류하거나, 은률을 기다리는 것. 그러나 애초에 답은 정해져 있었다. 어차피 이 미친 안개 속에서 살아남는 쪽이 이기는 편이었다. 결과에 따라 선택하면 될 일, 굳이 남의 싸움에 끼어들어 쓸데없이 힘을 낭비할 필요는 없었다.
어둑해진 하늘 위로 푸르스름한 반달이 모습을 드러냈다. 비가 그친 뒤에 얼굴을 씻은 덕인지 유달리 밝고 선명한 빛을 발했다. 위치로 보아서는 해시에서 자시로 넘어가는 때쯤일까? 이제 충직한 아우가 선물을 가지고 돌아오기를 기다리면 될 터였다.
“그래, 다행히 늦지 않았구나.”
그로부터 꼬박 반 시진이 지난 뒤였다. 드디어 애타게 기다리던 은률이 가은을 등에 업고 나타났다. 역시 늙어빠진 여우 고유생과는 비할 수 없이 믿음직한 아우였다.
“네, 안개의 향을 맡아본 적이 있어 호흡을 조절하며 걸었습니다. 역시 신교의 수작인가요?”
곡해고와의 혈투로 수많은 내, 외상을 입었으나 정작 습지의 안개 속은 무사히 건너온 모양이었다. 사실 그는 금천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안개의 위험성을 바로 알아차렸다. 역설적이게도 일전에 태봉에서 같은 향을 맡아본 덕분이었다.
“곡해고 늙은이가 나타나 하마터면 열쇠를 뺏길 뻔하였습니다. 가은 낭자는 그 일로 상태가 좋지 않으니 너무 다그치지 마십시오.”
“당연한 얘기를 하는구나. 얼마나 고생한 줄 뻔히 알면서 섭섭하게 대할 리가 있겠느냐? 게다가 네가 마음에 담아 둔 여인이 아니냐? 앞으로는 내가 나서서 너희들을 지켜줄 테니 걱정하지 말아라.”
세상 다정한 장은의 태도에 은률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잠깐이었지만 사형을 의심했던 마음이 미안해질 지경이었다. 이게 다, 동료를 죽고 죽이는 더러운 싸움판에서 한껏 예민해진 탓이었다. 아무렴, 평생 친아우처럼 자식처럼 보살펴 준 그가 아니었던가? 그간 응어리졌던 서운함이 다 풀어지는 기분이었다.
“으으.”
장은은 아우를 안심시켜 놓은 뒤에 가은에게로 다가갔다. 등 뒤에 손을 얹고 내력을 불어넣어 주자, 그녀의 의식이 서서히 돌아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두통은 여전했고 온전히 몸을 가누기는 어려워 보였다. 내력이 미천한 터라, 아무리 비강을 막아도 안개의 독을 온전히 피할 수 없었던 모양이었다.
“고생 많았다. 이제 열쇠를 내게 다오. 앞으로 네 생명을 위협하는 이들은 없을 것이다.”
“문주님, 설마 약조를 잊으신 건 아니겠죠?”
잔뜩 쉰 목소리를 내며 묻는 가은의 표정에는 경계하는 빛이 가득했다. 열쇠만이 자신의 유일한 무기거늘, 함부로 넘기기에는 더럭 겁이 났다.
“선운검파를 비롯한 오대산검은 안개에 갇혀 아직 습지를 빠져나오지 못했다. 내가 미리 지름길을 알려주지 않았다면 너희들의 목숨도 장담할 수 없었지. 이래도 의심스러우냐?”
“은아, 형님은 그럴 분이 아니시다. 적어도 내가 있지 않니? 나를 믿는다면 열쇠를 내어주렴.”
“오라버니.”
자신의 손을 꼭 잡아주는 그의 체온에 혼란스러웠던 마음이 가라앉았다. 하긴, 장은은 믿지 못해도 은률은 달랐다. 이 사람이라면 반드시 나를 지켜주리라. 함께했던 반년의 시간이 신뢰의 감정으로 차곡차곡 쌓인 덕분이었다. 아무리 의심이 많은 가은이라도 경계가 허물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자, 또 누가 나타나 방해할지 모르니 어서 다오.”
품속을 뒤지는 가은을 내려다보며 장은은 초조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이제 딱 한 발만 디디면 그토록 간절히 염원하던 지위를 갖게 될 터였다. 경국인으로 당당히 인정받고, 온 세상이 우러러보는 무림 맹주가 되는 것. 죽은 아버지가 외면하고, 스승이 인정하지 않아도 좋았다. 모국을 배신한 대가로는 충분한 보상이 아닐 수 없었다.
“잠깐!”
바삐 움직이는 가은의 손을 잡은 건, 뜻밖에도 은률이었다. 방금까지도 장은에게 열쇠를 주라고 재촉하던 그가 돌연 정색을 하고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어째서? 두 사람의 얼굴에 당황한 빛이 역력했다.
“그런데 형님, 뭐 하나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뭘 말이냐?”
짜증이 솟은 장은은 애써 미소를 지어 보였으나 덜덜 떨리는 입꼬리만은 차마 감출 수 없었다. 급박한 상황에서 나온 그의 본성이었다.
“왜 계속 뒷짐을 지고 계십니까? 도대체 왜 오른 주먹에 내력을 가둬두셨습니까?”
“뭐?”
“형님!”
은률의 검이 날카롭게 뻗어 나왔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애써 감추고 있던 장은의 오른손 역시 요란한 소음을 내며 기운을 방출했다.
퍽!
팅!
“욱!”
고작 한 장 거리에서 부딪친 두 고수의 격돌은 너무나 허무하게 단 한 합만으로 승패가 결정되었다. 이미 곡해고에게 부러졌던 은률의 칼날이 장은의 권풍을 견디지 못하고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기 때문이었다.
“오라버니!”
처절한 가은의 외침을 들었으나 은률은 차마 대답할 수 없었다. 그 절체절명의 순간에도 가은을 지켰다는 게 그나마 위안이 되었을 뿐이었다.
“욱! 컥컥!”
자비 없이 내지른 주먹은 그의 명치에 정확히 꽂혔다. 빗장뼈 수 대가 부러져 움직일 때마다 폐부를 찔러댔다. 울컥 뱉어낸 선혈은 파열한 내장 때문에 유난히 짙고 검었다.
“아우야, 그냥 모른척했다면 아프지 않게 끝났을 텐데. 참으로 어리석구나.”
장은의 허탈한 웃음이 습지의 바람을 타고 멀리멀리 퍼져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