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화. 罪障(죄장)
“대낮인데도 너무 어둡지 않습니까? 귀신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네요.”
장은의 귀에 속삭이는 봉명의 목소리가 덜덜 떨렸다. 기실, 무리의 다른 이들도 비슷한 생각을 하는 중이었다. 당장 길을 잃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 골짜기. 입구부터 안개가 자욱하여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다. 한 발자국만 들어가면 물귀신이 바짓가랑이를 붙잡을 것처럼 음산하고 음침했다.
“정녕 이곳이 맞습니까?”
“하아.”
장은은 대답 대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웬만한 일에는 무덤덤한 그였으나 이번만큼은 쉬이 나서기 어려웠다. 금천. 그곳은 그의 고향이었으나 가장 끔찍한 기억의 장소였다. 잊고 있던 과거의 악몽이 서서히 공포심을 불러일으켰다.
“교은아, 잘 들어라. 이 아비는 그분을 원망하지 않는다. 무릇 정치가 그런 것이다. 원하지 않아도 희생이 따르는 법. 그러니 너 또한 절대로 원망해서는 안 된다. 그분을 섬기고, 우리 려국을 위해 살아야 한다.”
“아버지! 아버지!”
희뿌연 안개 속에서 환청이 들려왔다. 격하게 그리웠으나 영영 잊으려 했던 그 목소리. 장은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세차게 가로저었다. 왜 하필 지금, 이 순간에 기억이 났을까? 빌어먹을, 안개 때문이었다.
“설마 겁이 나시는 겁니까?”
“그럴 리가요.”
형진의 가시 돋친 물음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겁이 나다니. 콧등에 맺힌 식은땀을 재빨리 닦아내며, 배시시 미소를 지었다. 적어도 이놈에게는 들키지 말아야 하는 약점이었다.
“혹여, 일이 잘못되거든 언제든 호각을 부십시오. 곧 달려가겠습니다.”
‘이놈이 나를 죽이려는구나.’
장은의 짙은 눈썹이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상대의 시커먼 속내가 뻔히 들여다보였다. 형진의 걱정스러운 얼굴이 가증스럽기 그지없었다. 무림 맹주를 노린다면야 그에게는 자신이 가장 큰 걸림돌일 터였다. 그렇다면 이번만큼 좋은 기회가 또 있을까? 금황자야 목적만 달성하면 그뿐, 둘 중 누구여도 상관하지 않을 것이었다. 이 싸움의 승리는 결국, 살아남은 자의 몫일 테니까.
“무운을 빕니다.”
형진의 태도는 나무랄 데 없이 정중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표면적인 예의일 뿐, 속내는 전혀 달랐다.
‘어차피 이 안개 속에서 죽는다고 해도 누구 탓이라 하겠는가? 신교의 기습이었다 한들, 증명할 수 없으니 이보다 더 좋은 기회는 없다. 장은을 살려 둔다면 언젠가 내가 당할 터, 이참에 목숨을 거두는 게 맞다.’
형진은 마지막으로 천령문의 문주를 향해 눈짓을 보냈다. 이미 잘 짜인 거미줄이었다. 먹이만 제대로 유인한다면 실패할 리 없었다.
“다만,”
장은은 눈썹을 축 늘어뜨리고 고유생이 누워 있는 수레를 가리켰다.
“고사숙의 상태가 퍽 심각합니다. 함께 이동한다면 기민하게 움직일 수 없을 겁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고대산파의 고문주에게 사숙을 부탁해도 되겠습니까?”
“흐음.”
의도가 의심스러웠으나 그렇다고 거절할 만한 이유가 딱히 없었다. 아니, 차라리 잘 되었다는 생각도 들었다. 고인경이 부상을 입은 고유생을 떠맡는 동안에는 손발을 묶어놓을 수 있으리라. 무공이 일취월장한 그가 함부로 끼어들어 방해할 가능성을 사전에 차단하는 좋은 수였다.
"고문주님, 부탁드리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인경은 허리를 깊이 숙여 장은을 배웅했다. 장은의 의중을 완전히 파악하지는 못했으나, 자신에게 고유생을 맡긴 이유가 분명히 있으리라 생각했다.
'이 안개 속에서 찾아낼 것이다. 이들의 추악한 욕망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 그리고 강운선, 그가 원하는 끝이 무엇인지 두 눈으로 확인할 것이다.'
무리를 나누어 대열을 정비한 후에, 드디어 장은이 이끄는 선발대가 출발하였다. 고작 스무 걸음을 걸어 들어갔는데도, 그의 모습이 안개 속에 숨어 보이지 않았다. 그 깊은 심연 속에서 마지막 여정이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앞 사람의 발끝을 잘 보고 쫓으십시오.”
장은의 지시에 따라 한 발씩 앞으로 나아갔다. 안 그래도 겁이 많은 용봉명은 금세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었다. 수백 마리의 벌레에 물린 것처럼 피부가 따끔거리고 간지러웠다. 앞 사람의 등만이 유일한 길잡이가 되어 걸음을 옮기니 두려움은 곱절이 되었다.
우르르르르르.
산새의 소리가 분명한데도 마치 귀신의 울음 같았다. 발목에 스치는 나뭇가지에도 일일이 놀라며 어느새 화가 치밀어 오르기 시작했다.
“대체 언제까지 가야 합니까?”
장은은 철없는 봉명이 한심하기만 했다. 그들의 앞에 놓인 이 길은 형진이 놓아둔 커다란 덫이었다. 알면서도 뛰어들었으니 최대한 벗어날 방법을 찾아야 했다.
“한길을 쭉 따라가면 습지의 중심부입니다. 일단 그곳을 선점해야 안전합니다.”
“아니, 그러니까 그게 언제 나오냔 말입니까?”
“쉿!”
어딘지 모르게 달라진 분위기를 느낀 장은은 걸음을 멈췄다. 방금까지 귀에 들리던 수하들의 숨소리가 감쪽같이 사라진 것이었다. 서둘러 양팔을 펼쳐 휘저어 보았다. 역시, 불길한 예감은 현실이 되었다.
“용형제, 뒤따르는 형제들이 있습니까?”
“네? 당연하지요. 그걸 왜?”
무심코 등 뒤를 돌아보았을 때, 봉명은 눈앞이 캄캄해졌다. 방금까지도 근저에 있던 동료들이 단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이리저리 둘러 보아도 희뿌연 안개뿐. 혹시나 하는 마음에 팔을 휘둘러 보았지만 잡히는 것이라고는 차가운 물방울밖에 없었다.
‘야단났다.’
온몸에 소름이 쪽 끼쳤다. 암습을 한다면 그야말로 진퇴양난이었다. 아직 골절된 부위가 제대로 붙지도 않았거늘, 전면으로 맞붙어 싸울 자신이 없었다.
“장문주님, 아무래도 다들 길을 잃은 모양입니다. 더 늦기 전에 호각을 불어 백대협 일행에게 도움을 청하심이 어떻겠습니까?”
“…….”
“어? 문주님?”
몇 번을 애타게 불렀으나 대답이 없었다. 설마 이 끔찍한 안개 속에 혼자 남은 것일까? 봉명은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몸도 성치 않은 동료를 두고 갈 만큼 장은은 무정하지 않으리라. 뿐인가? 백부의 행방이 묘연한 지금, 용문파의 수장은 자신밖에 없었다.
“어? 문주님?”
그때, 그의 시야에 얼핏 인영 하나가 들어왔다. 큰 키와 떡 벌어진 어깨를 보아하니, 역시 장은이 틀림없었다. 아무렴, 자신을 버리고 갈 리 만무하다고 생각하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문주님, 혹여 저를 두고 가신 줄 알았습니다. 이제 어떡할까요? 호각을 불어 볼까요?”
“어리석은 놈!”
“네?”
뜻밖의 꾸짖음에 봉명은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그러자 검은 인영이 그를 향해 천천히 다가왔다. 안개를 뚫고 나타난 그는 생각지도 못한 얼굴이었다.
“어리석은 놈! 사문을 욕보이고 명예를 실추시킨 네놈이 정녕 사람이더냐?”
“헉! 설마, 숙부님?”
짙은 눈썹을 치켜뜨고 노한 표정으로 삿대질을 하는 그는 숙부 용조현이었다. 그러나 그럴 리가 없었다. 그는 토끼 바위에서 이서문의 손에 절명하지 않았던가? 그의 주검을 직접 수습했던 터라 더욱더 믿기지 않았다.
“숙부님이 어째서 살아계십니까?”
“흥! 우리 삼 형제가 모두 죽었다고 해도 너 같은 비천한 놈에게 사문을 맡길 수는 없다. 부귀에 눈이 멀어 무인으로서의 본질을 훼손한 네놈에게 무슨 자격이 있냔 말이다!”
봉명은 손등으로 눈을 비벼댔다. 꿈인가? 스스로 옆구리를 세게 꼬집어 보았다. 그러나 눈앞에서 노발대발하는 숙부의 얼굴은 사라지지 않았다.
“다 자식을 잘못 키운 내 탓이네.”
“아, 아버님?”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니, 이번에는 용송현이 슬픈 표정으로 서 있었다. 봉명은 이제 다리가 풀려 중심을 잡기도 어려웠다. 겨우 버티던 왼쪽 발목이 풀썩 꺾이며 바닥에 널브러졌다.
“실력도 없는 놈이 마음속에 욕심만 득시글거리는 걸 일찍부터 알았다. 그래도 자식이라고 감싸고 돌았건만, 결국 이 사달을 내고 말았으니 내 죄가 크구나. 참으로 부끄럽다.”
“아버지! 그게 아닙니다. 그게…….”
그리웠던 아버지였으나 부끄러움에 고개도 들지 못했다. 노여워하는 숙부보다 자신의 탓을 하는 그의 모습에 더 미칠 것 같았다.
“그게 아니긴 뭐가 아니냐? 동료를 살해하고 사문을 팔아넘긴 것이 사실이거늘, 무슨 핑계를 댈 작정이냐?”
“아아.”
그의 등 뒤에는 용가현이 커다란 바위처럼 우뚝 서 있었다. 미약에 당해 기운이 없어 보였으나 눈빛만은 형형하여 감히 올려다볼 수도 없었다.
“그들은 해심밀경소에 눈이 먼 도둑놈들이었습니다. 황실의 명을 받들었을 뿐, 적어도 사리사욕을 위한 행동이 아니었어요.”
“하하하하하.”
봉명의 변명이 끝나기도 전에 용가현이 웃음을 터뜨렸다. 좀처럼 그치지 않는 그의 웃음은 습지를 가득 메우고 다시 돌아들어 봉명의 귓가를 세차게 때렸다.
“도둑놈이라 하였느냐? 그래, 그럼 네가 이곳에 온 목적이 무엇이냐? 무엇을 얻기 위해 이곳에 왔느냐?”
“그, 그건…….”
“으아아아악!”
머리 위에서 번쩍 작은 불꽃이 솟아올랐다. 날카로운 검기는 봉명을 향해 똑바로 날아왔다.
스윽! 푹!
“헉!”
방어를 위해 본능적으로 뽑아 든 검은 누군가의 가슴에 깊숙이 박혀 움직이지 않았다. 검붉은 피가 검날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다. 정확히 심장을 찔렸을 텐데도 상대의 사지가 팔딱팔딱 움직였다.
“그럼 나는 무슨 죄란 말이오?”
“너, 너는?”
빙글빙글 웃는 그는 신계문의 문주 설이곡의 장남 기욱이었다. 봉명은 차마 얼굴을 마주할 수 없어 고개를 떨궜다. 한차례 죽은 적이 있는 그의 배에는 커다란 구멍이 뚫려 있었다. 그 사이로 삐져나온 내장은 온통 썩어 구더기가 들끓었다.
“우욱!”
“나는 왜 죽어야 하냔 말이야!”
구역질하는 봉명의 등 위로 기욱의 끈적한 피가 뚝뚝 떨어졌다. 어떻게든 도망가고 싶었으나 부러진 발목이 완전히 돌아가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으아아아아악!”
“누가 누구에게 감히 도둑이라 하느냐? 남의 목숨을 함부로 거둔 죄가 도둑질에 비할까? 하하하하하하!”
용가현이 다시 웃음을 터뜨리자, 그의 두 아우가 따라 웃기 시작했다. 그 비명 같은 메아리를 들으며 봉명의 의식은 더욱더 아득해졌다.
“용형제? 이보시오! 봉명!”
뒤늦게 돌아온 장은은 의식을 잃고 쓰러진 봉명을 발견하고 아연실색했다. 그의 주변은 온통 피바다였다. 서로를 죽고 죽인 무인들의 시체가 봉명의 주위를 빙 둘러싸고 있었다.
“강운선, 이 악귀 같은 놈! 이 안개가 바로 덫이로구나!”
장은은 피가 날 정도로 입술을 꽉 깨물었다. 늘 인자한 미소를 띠던 그의 얼굴에는 살기가 가득했다. 드디어 본색을 드러낸 강운선의 민낯을 대면한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