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화. 晴煙(청연)
금천으로 가는 내내 인경은 혼란스러운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지금까지의 상황으로 보건대, 이미 원정대의 목적은 신교 토벌이 아니었다. 부귀공명을 노리는 개인의 욕망과 황좌를 탐하는 정쟁이 어우러져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백형진이다. 스승을 죽이고 금황자에게 붙어 무림 맹주를 노리는 자!”
고유생이 그를 불러 속삭였던 진범의 이름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과연 사실일까? 강운선이 조양을 죽이지 않았으리라 짐작하기는 했으나, 그렇다고 백형진을 의심한 적은 없었다. 어릴 때부터 그의 자질과 실력을 흠모하며 자랐던 인경이었다. 아무리 탐욕에 잠식되었다고 한들, 감히 부모와 다름없는 스승을 죽였을까? 불경한 생각을 떨쳐내고자 머리를 세차게 흔들어 보았다.
“고문주, 이제 곧 금천입니다. 두타공파가 이끄는 선발 조에서 이미 도착하였다는 연통이 왔습니다. 그러나 안개가 짙고 길이 좁아 진입이 힘들다고 하니 종전의 작전을 수정해야 할 듯합니다. 만약의 상황이 닥치면 제가 나서야 하겠지요. 그때 우리 사숙과 황석파 제자들을 챙겨줄 수 있겠습니까?”
오대산검의 네 문파가 합류한 그날 밤, 장은은 몹시 은밀한 태도로 인경을 찾았다. 어쩐지 꿍꿍이가 있어 보이기는 했지만, 딱히 거절할 이유도 없었다.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자 장은은 함박웃음을 지으며 그의 두 손을 마주 잡았다.
“참으로 의로운 분이십니다. 한나절만 더 고생하면 금천에 다다르니, 기운 냅시다.”
“네. 그런데 장문주님, 용문파와 비봉문이 어째서 참변을 당했는지 정말 모르십니까? 또한, 고선배님의 상처가 매우 깊은데 어찌 된 연유입니까?”
인경의 기습적인 질문에 순간, 장은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러나 언제나처럼 여유만만한 웃음을 띠고 그럴듯한 변명으로 위기를 모면했다.
“신교의 기습을 염려하여 저만 따로 갈매를 거쳤더랬지요. 도농은 워낙에 길이 평탄하고 고사숙의 실력이 출중하여 별일 없으리라 안심한 게 이런 참극을 불러왔어요. 천서국 자객이 덤벼드는 와중에 제자들을 지키려다 다치셨다고 합니다. 장문으로서 책임을 다하지 못했으니 송구할 따름이지요. 용문파 역시 같은 이유로 화를 당하지 않았겠습니까? 용형제의 골절이 심해 당분간 말을 붙이기도 어려우니, 쾌차한 후에 자세한 사정을 물어봐야겠습니다.”
“그렇군요.”
아직 처세에 약한 인경은 유려한 그의 말솜씨를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어영부영 넘어가다 보니 정작 중요한 정보는 하나도 듣지 못한 셈이 되었다.
금천으로 넘어가는 마지막 고개였으므로 일행은 한차례 휴식을 취했다. 작은 모닥불을 가운데 두고 차가운 음식을 먹는 오대산검의 제자들 모두 낯빛이 어두웠다. 미지의 보물에 욕심을 내기에는 피로와 두려움이 너무 커진 탓이었다.
부상자가 제일 적은 고대산파의 분위기는 그나마 나았다. 백천을 빙 둘러싸고 앉은 그들은 서로를 격려하면서 추운 가을밤을 잘 견디고 있었다. 다만, 인경의 얼굴만이 유난히 어두웠다.
“정말 혀 하나로 살인도 할 사람입니다.”
영준은 누가 들을까 싶어 목소리를 한껏 낮추고 이죽거렸다. 심란해하는 장문을 위로할 요량이었다. 기실, 이 험난한 여정에서 그들의 상황은 점점 나빠지고 있었다. 동맹의 배신과 교위 무리의 시신들, 그리고 고유생과 용봉명의 큰 부상까지. 그중 뭐 하나 시원하게 정황을 파악하지 못한 채로 적진 한가운데 버려진 터였다. 장문으로서 얼마나 고민이 많을까 생각하니 절로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태사백님, 어찌 생각하십니까?”
연신 식은 몸을 부르르 떠는 백천의 얼굴에도 근심이 가득했다. 그는 장은이 주절거리는 말이 모두 거짓임을 알았다. 오직 고유생의 표정 때문이었다.
“고유생은 옛날부터 폐하의 사람이 되고 싶었다. 반면 용가현은 언제나 정치와 거리를 두고 싶어했다. 그 갈등 때문에 다툼이 일어나지 않았을까 짐작해 보았다. 뜬금없이 황실의 교위가 나타난 것도 같은 맥락이겠지. 그것이 용가현의 실종과 관련이 있을 테고. 그런데 어째서 고유생이 저리 크게 다쳤을까? 그것을 아직 확신할 수 없구나.”
“그는 평소와 달리 사질을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그럼 고유생을 다치게 한 이가 장문주일까요?”
인경의 물음에 백천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랬다면 황석파에 내분이 일어났을 터, 제자들이 한마음으로 장은의 지시를 따를 리가 없었다.
“장은의 성향상, 한쪽 황자를 선택하지는 않았을 터. 만약 고유생이 너에게 진실을 말했다면, 그를 해친 범인 역시 동일 인물이 아니겠느냐?”
“아아.”
인경의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백천을 믿지 못해서가 아니었다. 그의 의견에는 틀린 곳이 전연 없었다. 다만, 사람이 그토록 인면수심일 수 있다는 사실에 실망감을 감추지 못할 뿐이었다.
“그래, 백형진이 금황자의 사람이고 장은이 저울질 중이라면, 이 혼란한 상황이 다 이해가 되는구나.”
“그럼 두 사람의 계획은 뭐란 말입니까?”
백천은 차마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린 장문에게 보여주기에 너무 더러운 개싸움이었다. 사백이기 이전에 무림의 선배로서 수치스러웠다.
“이제 저들은 나머지 오대산검을 설득하여 정쟁에 이용하려 들 것이다. 이대로 금천에 도착하면 우리를 기다리는 건 백형진의 칼날일 테지. 같은 편에 서거나, 미끼가 되거나 선택을 강요받을 것이다.”
“그럼 장문주는요? 그는요, 그는 어찌할까요?”
“그는 기회를 엿보겠지. 스스로 미끼가 되는 척하며 몸을 숨길지도 모르겠다. 결과에 따라 편을 정하는 게 언제나 그의 수법이었으니까.”
어느새 모닥불의 불꽃이 가물가물 힘을 잃어가고 있었다. 어둠이 서서히 걷히는 걸 보니, 이제 곧 새벽이 오는 것 같았다.
“우리는 어찌해야 할까요?”
인경의 눈이 지쳐 쓰러진 오대산검의 형제들을 향했다. 아직 목적지에 도달하기도 전이건만, 동기를 잃은 이들의 얼굴에는 희망이라고는 없었다.
“인경아, 흐르는 물을 막을 수 없듯, 마음의 흐름 또한 막을 수 없다. 그들이 각자의 욕심에 따라 저마다의 길을 선택한 것처럼 너 또한 네가 옳다고 믿는 길로 가려무나.”
“만약 그 선택이 형제들을 해치는 길이라면요? 저는 항시 그것이 두렵습니다.”
인경의 큰 눈망울이 금세 투명해졌다. 장문으로서의 책임감, 그리고 태사부가 남겨준 부채감 때문이었다.
“문주님, 저라고 문주님의 선택이 매번 좋았을까요? 짜증도 나고 이해도 안 되고, 답답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그런데요, 그때가 지나고 나면 그 선택이 다 이해가 가더란 말입니다. 하여 단 한 번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자신을 믿으십시오. 우리는 모두 문주님의 선택을 존중할 것입니다.”
그제야 묵묵히 듣고만 있던 영준이 나섰다. 현명한 어린 장문에게 필요한 건, 오직 자신감이었다. 그리고 자신이 얼마나 존경받는 수장인지에 대한 자각. 고작 약관의 나이가 될까 말까 한 젊은이들이 망해가는 문파의 역사를 짊어지고 올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당신이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네, 무슨 뜻인지 알겠습니다.”
곧 주변이 소란스러워졌다. 선두에 선 장은과 황석파는 슬슬 떠날 채비를 시작하는 중이었다. 인경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긴장감을 숨기기 위해 부러 더 명랑한 목소리로 형제들을 격려했다. 가능하다면 당분간 장은에게 충분히 협조하여 어리숙한 장문처럼 보일 생각이었다.
모두가 움직일 채비가 되었을 때, 수십의 오대산검 연합 조는 행렬을 시작했다. 황석파가 앞장서고 고대산파가 후미를 맡아 사주를 경계하였다. 급하지 않게, 그리고 위험에 대비하며 금천으로 가는 마지막 고개를 건넜다.
“와아!”
쉬지 않고 걸은 끝에, 드디어 거대한 안개 습지가 나타났다. 해가 중천에 떴는데도 한밤중처럼 캄캄한 안개 속. 인경은 자신도 모르게 깊은 탄식을 뱉어냈다. 그리고,
“이제 오십니까?”
“고생 많으셨습니다.”
장은은 특유의 친화력을 발휘하여 백형진과 인사를 나누었다. 헤어졌던 수일간의 근황을 나누는 모습은 자못 다정해 보였으나, 두 사람의 검은 속내를 이미 알고 있는 인경의 눈에는 가증스럽기만 했다.
“고사숙의 협조하에 태자 쪽의 계획을 얼추 파악하였습니다. 예정으로는 금일 밤에 이곳에서 만나기로 했다 합니다. 그곳으로 가려면 어쨌든 습지를 지나야 하니까요. 아마도 먼저 도착하여 보물을 탈취할 생각이 아니었을까요?”
“그럴 가능성이 농후하지요.”
형진 역시 동의하는 바였다. 이미 고유생을 비롯한 척살대와 교위들이 금황자의 수하들을 제압했다고 여길 테니, 남은 일은 보물을 찾는 일일 터였다. 혹여 잔당이 있다 해도 천서국의 자객을 움직여 처리할 작정이리라.
“존경하는 친왕께서 지도를 내려 주셨으니 우리는 그들보다 훨씬 유리한 셈입니다. 하여, 선발 조가 습지에 매복하여 태자의 교위들을 제압하는 한편, 후발 조는 보물을 찾으러 출발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이른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자는 뜻이지요.”
“흐음, 좋은 의견입니다.”
이야기를 마친 장은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마치 보고를 듣고 결정하는 듯한 형진의 건방진 태도에 기분이 상했지만, 얼굴에 웃음을 잃지 않았다.
“어떻게 조를 나누면 좋을까요?”
“그러게요, 문주님께서는 누가 먼저 습지로 들어가 매복을 하면 좋겠습니까?”
형진이 다소 걱정스러운 얼굴로 되물었다. 질문이었으나 강요에 가까웠다. 형진의 마음속에는 이미 선발 조의 인원이 다 정해진 다음이었다.
“하하, 백대협. 당연히 선배인 내가 앞장서야지요. 또한, 고사숙이 저지른 죄가 있으니 황석파의 명예를 위해서라도 제가 대신 짐을 지겠습니다.”
“아아, 그런 의미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역시 우리 중에 선배님의 무공이 가장 출중하시니 모자란 후배로서 감히 부탁드리겠습니다.”
형진이 깊이 고개를 숙여 예를 갖추자, 오대산검 및 제 문파의 제자들 모두 읍을 하였다. 등 떠밀어 보내면서도 제법 정중하게 권하는 꼴이었다.
‘흥, 감히 너 따위가 나를 선배라 불러? 끝까지 맹주라 칭하지 않는 이유는 네가 그 자리를 노리고 있기 때문이로구나. 오냐, 원하는 대로 해주마.’
장은은 세상 비장한 표정으로 더 깊이 허리를 숙였다.
“형제들, 비록 뜻이 어긋나 부침을 겪었으나 우리가 오대산검의 이름으로 뭉친 명문정파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본래의 목적이 무엇이었습니까? 반드시 배은망덕한 신교를 토벌하고 그들이 숨긴 보물을 찾아 경국의 부국강병을 도모할 것입니다. 물론 쉽지 않은 일이겠지요. 미천한 제가 이 한 몸을 바쳐 큰 뜻을 이루는 거름이 되겠습니다. 우리 꼭 살아서 다시 만납시다.”
“아아, 맹주님.”
“맹주님!”
여기저기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안 그래도 불안하고 두려운 여정이었다. 숭고한 그의 연설이 지친 그들의 마음을 어루만져주니 감동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 심지어 평소 장은에게 불만이 많던 고대산파의 제자들까지도 눈물이 왈칵 쏟아질 뻔하였다.
‘여우 같은 놈.’
형진의 굳게 다문 입술이 바르르 떨렸다. 불리한 순간에도 분위기를 좌지우지 이끄는 장은이 존경스럽기까지 했다. 그러나 거기까지! 습지는 그야말로 안개 속이었다. 과연 장은이 버텨낼 수 있을까? 만약 운이 좋아 살아난다 해도 뒤따라가 해치우면 그만이었다.
형진은 용봉명을 비롯한 용문파를 선발 조에 차출했다. 굳이 태자의 편을 함께 보내는 이유는 만약을 위해 인질로 삼고자 함이었다. 또한, 천령문을 뒤에 따라 붙이고 은밀히 명령을 내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안개가 깊어 주변이 식별되지 않을 것이다. 기회를 보아 용봉명을 죽여라. 또한, 가능하다면 장은을 공격해도 좋다.”
“존명!”
예쁘장한 그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서서히 번져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