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화. 坐收漁人之功(좌수어인지공)
은률은 등에 업은 가은이 무거운 줄도 몰랐다. 이번에 곡해고에게 따라잡힌다면 죽음을 각오해야 했다. 그전에 무조건 오대산검 일행을 만나야 한다는 일념으로 쉬지 않고 달려 나갔다.
툭, 투둑.
아까까지만 해도 한두 방울 떨어지던 빗줄기가 점점 굵어졌다. 어둠에 추위까지 더해지니 보법이 흐트러지고 숨이 차올랐다.
“오라버니, 일단 비부터 피해요.”
“아아, 그래야겠구나.”
보다 못한 가은이 은률의 목을 꼭 감싸 안으며 속삭였다. 그제야 그녀의 체온이 점점 식어가고 있음을 깨달았다. 서둘러 주변을 둘러보았으나 삐죽한 대나무밖에 보이지 않았다. 이대로 비를 다 맞다가는 가은이 크게 아플 것 같아 마음이 초조해졌다.
“저, 저기!”
“어?”
대나무숲을 막 벗어나 다시 절벽에 올라섰을 때였다. 가은의 손가락을 따라 움직이니 작은 동굴이 하나 보였다. 그러나 막상 다다르고 보니, 성인 한 명이 겨우 들어갈 만큼 비좁은 바위틈이었다.
“일단 비가 그칠 때까지 기다려보자.”
가녀린 몸을 덜덜 떠는 가은을 앉혀두고 벗을 수 있는 옷은 모두 벗어 덮어주었다. 맨몸으로 거센 빗줄기를 감당하면서도 추운 줄 몰랐다. 기껏 싸매둔 어깨의 상처가 다시 벌어져 피고름이 줄줄 흐르는데도 오직 연모하는 여인의 상태를 살피느라 바빴다.
“오라버니, 보았지요?”
“……뭘 말이냐?”
가은의 새파란 입술이 파르르 떨려왔다. 온몸으로 자신을 지키는 은률의 희생에는 관심 없었다. 그가 어디까지 목격했는지, 그 사실을 확인해야 했다.
“스승님이 어떻게 돌아가신 건지 보았냔 말입니다.”
“보지 못했다.”
그러나 융통성 없는 은률은 차마 표정까지 숨기지는 못했다. 아무리 그 상대가 가은이라 할지라도 끔찍한 패륜의 현장을 머릿속에서 쉬이 지울 수 없었다. 이유가 있겠지. 그게 무엇이든 그녀의 편이 되어주리라 다짐하면서도 당혹스러운 감정은 고스란히 가슴 속에 남아 버렸다.
“제가 스승님을 해쳤어요.”
“…….”
“역시 놀라지 않으시네요.”
은률을 올려다보는 가은의 얼굴에 희미하게 미소가 떠올랐다. 자신의 치부를 보였으니 이제 어찌한다? 그러나 함부로 그를 내칠 상황이 아니었다. 곡해고에게 잡혀 있던 만 하루 동안 죽음의 공포를 느끼지 않은 순간이 없었다. 은률이 아니었더라면 지금쯤 그 늙은이의 손에 목이 부러졌을지도 몰랐다.
“오라버니, 스승을 죽인 패륜을 모른척하지 마세요. 오대산검으로 돌아가면 죽음으로서 죄를 감당하겠으니.”
“아니다. 절대 그렇게 만들지 않을 것이다.”
은률은 가은의 축 처진 어깨를 잡으며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설령 더한 이를 죽였다 하더라도 그녀를 고발하거나 배신할 마음이 없었다. 목숨처럼 아끼는 진심을 몰라주니 서운할 뿐이었다.
“아닙니다. 괜히 저 때문에 오라버니께서 위험해지시면 어찌합니까? 그건 정말 견디지 못할 거예요.”
“괜찮다, 나는 괜찮아.”
눈물을 뚝뚝 흘리는 가은은 길 잃은 강아지 같았다. 그런 그녀가 너무 안타까워 그의 눈에도 금세 눈물이 고였다.
“저는 천벌을 받아 마땅해요. 그러나 다시 그 순간으로 돌아가도 똑같이 행할 거랍니다. 오라버니, 제 부모님은 가씨가 아닙니다. 그들은 양부모였어요. 친부모를 찾아 오대산검으로 찾아왔는데 하필 그곳에서 원수를 알게 되었답니다.”
“설마…….”
“네, 소소정은 제 부모님을 모두 죽였습니다. 언젠가는 꼭 복수하리라 다짐하며 숨죽이고 살았는데 오늘 그 천운을 잡게 되었습니다. 다시는 기회가 없겠다는 생각에…….”
은률은 오열하는 가은을 와락 끌어안았다. 이처럼 가여운 이가 또 있을까? 원수를 스승으로 모시며 느꼈을 비참함, 분노, 억울함이 온전히 전이되는 기분이었다.
“원수를 죽인 게 어찌 죄가 된단 말이냐? 이 난장판 속에서 소문주가 죽은 이유를 어찌 캐내겠느냐? 혹여 누가 보았다 해도 내가 다 죽여버릴 테다. 그러니 걱정하지 말아라. 이제 내가 너를 지켜주마. 부모가 되어주고 형제가 되어줄 것이다. 암, 평생 곁을 떠나지 않으마.”
“오라버니…….”
은률의 품속은 생각보다 더 따뜻했다. 살기 위해 지어낸 거짓이었으나 의외로 감쪽같이 속아 넘어가자 되레 미안한 마음도 들었다.
‘아니야, 약해지지 말자. 지금은 콩깍지가 씌어 무조건 내 편이 되겠다 하지만, 차후에 그가 변심할지 어찌 안담? 이 세상에 믿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
불현듯 마진건의 마지막 얼굴이 떠올랐다. 목숨도 아깝지 않은 부모의 사랑이 바로 그런 모습일까? 그러자 이번에는 진심으로 눈물이 솟구쳐 올랐다. 이용 가치로만 여겨졌던 그녀가 난생처음 받아본 온전한 사랑이었다. 그리고 이제 다시는 받아보지 못할 마음이었다.
“으흑.”
그칠 줄 모르는 가은의 울음이 거센 빗소리에 섞여들었다. 모진 폭우를 몸뚱이로 받아내며, 은률도 함께 울었다. 가족을 잃은 슬픔보다 그들을 앗아간 이에 대한 분노로 사는 삶. 그것이 얼마나 비참한지 누구보다 잘 아는 그였다. 하여, 그녀의 아픔이 완전하게 이해되었다.
“너만은 반드시 지켜내겠다.”
얼마나 지났을까? 등줄기를 세차게 때리던 빗줄기가 한층 부드러워졌다. 부둥켜안고 울던 두 사람이 몸을 일으키니 어느덧 아침 해가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어? 오라버니, 저게 뭐죠?”
주섬주섬 바위틈에서 나온 가은이 건너편 절벽을 가리켰다. 사람의 형상 같기도 한 거대한 바윗돌이 이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뭐라고 쓰여 있는데? 음, 소……내? 소나?”
“아아, 알았습니다.”
은률이 더듬더듬 두 글자를 읽어냄과 동시에 가은이 손바닥을 세게 쳤다. 그날 용문파 밀실에서 현진이 일러줬던 수수께끼가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오라버니, 이곳이에요.”
“뭐?”
“소나! 네, 이곳이 바로 금천이라고요!”
“금천? 금천!”
그 이름을 듣는 순간, 잊고 있던 막중한 책임감이 가슴을 짓눌렀다. 정말이지 은률은 사형의 신신당부를 감쪽같이 잊고 있었다.
“가은을 빼돌리거든, 금천으로 데리고 와라. 안개가 가득 낀 그곳은 입구가 다른 아홉 개의 샛길이 있어 한 발 들이기만 해도 결코 벗어날 수 없단다. 하여 지도를 그려줄 테니 출구에서 만나자꾸나. 내가 미리 가서 기다리겠다.”
“반드시 그리하겠습니다.”
그때는 별 의심 없이 받아들였던 약조였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완전히 달라진 참이었다. 이대로 가은을 데리고 가 장은을 만나는 게 능사일까? 평생을 존경하고 따르던 사형이었으나 이번만큼은 불길한 예감을 떨칠 수 없었다.
‘사형은 분명 목적을 이루고자 은이를 이용할 것이다. 막상 원하는 것을 얻은 뒤에는 언제 그랬냐는 듯 버릴지도 몰라. 과연 내 실력으로 은이를 지킬 수 있을까?’
가은의 어깨가 비에 젖어 유달리 연약해 보였다. 조실부모도 모자라 사문의 죄인까지 된 이 가엾은 여인을 어찌해야 할까?
“은아,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차라리 뒤로 물러나 다음 기회를 노리는 게 어떻겠니? 이 앞은 그야말로 지옥도와 다름없다. 모두 너와 그 열쇠를 갖기 위해 악다구니처럼 싸울 텐데 두렵지 않으냐?”
“오라버니, 염려하시는 마음은 잘 알아요. 하지만 오늘 도망가면 앞으로도 평생 도망자 신세를 벗어날 수 없어요. 알다시피 장문주님은 기어코 우리를 찾아내 열쇠를 뺏어가고 말겠지요. 오히려 당당히 나서 정당한 대가를 받는 것이 더 낫습니다. 오라버니만 제 편이 되어주시면 장문주님도 약조를 지키실 거예요. 저는 하찮게 여기더라도 오라버니는 친아우처럼 여기지 않습니까?”
“은아…….”
불길한 예감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았지만, 마냥 겁쟁이처럼 뒷걸음질 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무엇보다 연모하는 여인의 바람을 무시할 수 없는 사내의 마음은 누구보다 진심이었다.
“명당이 따로 없구나!”
버들가지 하나 물고 내려다보는 금천의 골짜기는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가까이에서 보면 귀신의 입김 속 같았으나 멀리서 보면 하얀 구름 속 무릉도원이었다. 갈대 습지로 돌아들어 아홉 개의 우물로 이르는 길이 한눈에 보이니, 마치 구름다리를 타고 넘어가는 피안(彼岸)과 같았다.
“과연, 신교가 약속을 지킬까요?”
“글쎄요…….”
이석은 초조한 나머지 아까부터 자신의 손톱을 잘근잘근 씹고 있었다. 반면 자홍은 신선이라도 된 것 마냥, 여유롭기 짝이 없었다.
“차라리 우리 쪽에서 선수를 치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글쎄요.”
“그럼, 계속 여기 계실 겁니까?”
“글쎄요.”
“아니, 지금 뭐 하자는 겁니까?”
결국, 참지 못한 이석은 소리를 버럭 질렀다. 안 그래도 불안해 죽겠는데 태평스러운 자홍의 태도가 새삼 괘씸해졌다.
“당신의 계획만 믿고 애먼 짓을 벌인 제 입장은 생각지 않으십니까? 설마 절 속인 겁니까?”
“하여튼, 성정이 참 급하십니다.”
그제야 자홍은 비스듬히 누운 자세에서 일어나 옷매무시를 가다듬었다. 워낙에 경국 태자의 그릇이 작은 줄은 알고 있었지만, 이번에 보니 아예 높은 자리에 오를 인물이 아닌 듯싶었다. 내내 옆에서 징징대기만 하니, 귀찮기도 했지만 내심 놀리는 재미가 쏠쏠했다.
“속일 작정이었다면 제가 직접 여기까지 왔겠습니까? 게다가 천서국의 자랑, 사호세주까지 모두 데리고 말입니다. 저하께서 그리 믿는 오대산검의 척살대가 아무리 대단해도 우리 사천왕만큼 믿음직스럽지는 못할 겁니다.”
“아무리 무공이 뛰어난들, 그들을 놓치면 다 허사 아닙니까? 이러다가 재주는 내가 다 부리고, 공은 아우가 갖게 되겠습니다.”
이석은 답답한 마음에 발을 동동 굴렀다. 아버지의 비호를 받고 자란 그는 실제로 전면에 나서 일을 진행해본 적도 이번이 처음이었다. 게다가 진작에 연통을 보내왔어야 할 나교위가 감감무소식이니 더 미칠 것 같았다.
“아까도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연통이 오지 않았다면 이유는 뻔합니다. 안타깝게도 저하의 계획은 무산되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금황자는 생각보다 훨씬 집요하고 음흉한 자 같더군요. 제 예상대로 저하의 심복이 이미 잡혔다면, 우리가 금천에서 접선하기로 한 사실까지 실토했을 겁니다. 그러나 되레 잘 되었습니다. 아마도 저하의 아우는 안개 속에 매복하여 기습을 준비하지 않을까요? 그러니 내버려 두는 게 최선입니다. 무엇보다 우리에게는 지도가 있지 않습니까? 여기서 실컷 구경이나 하다가, 때를 맞춰 함께 내려가 정리하지요.”
“그래도!”
이석은 뭐라고 반박하려다가 자신도 모르게 자홍의 양옆에 선 이들을 바라보았다. 자신이 데려온 교위 여섯을 다 쏟아부어도 목치수 하나 상대하기 버거울 터였다. 분명 동맹을 맺고 데려온 지원군이건만, 어쩐지 자신이 인질이 된 것 같아 기분이 영 찜찜했다. 하려던 말을 꾹 삼키고 동그란 눈만 끔뻑거릴 뿐이었다.
“그래도 저하, 주의하십시오. 강교주는 용의주도하고 속을 알 수 없는 잡니다. 그가 준 지도가 진짜라는 보장이 없습니다. 함부로 습지에 뛰어들지 마시고 경국 태자를 먼저 보내 동태를 살핌이 어떻겠습니까?”
목치수는 은근슬쩍 자홍에게 다가와 복화술로 몇 마디를 전했다. 기실, 그의 주군의 계획에는 빈틈이 없었으나 강운선 역시 호락호락한 이가 아니었다. 나머지 열쇠를 찾으러 간다고 했지만, 그 또한 믿기 어려웠다. 막상 우리끼리 싸움을 붙여두고 이금에게 붙어 또 다른 음모를 꾸밀지 누가 알겠는가?
“하하하, 당연히 믿을 리가 없지.”
“네?”
뜻밖의 대답에 당황한 목치수는 금세 얼굴이 붉어졌다. 그렇다면 굳이 그가 제안한 바를 따라줄 이유가 있을까? 주군의 속내를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그를 믿지 않았으므로, 아란과 형권을 함께 보낸 것이다. 아무리 그자의 무공이 대단해도 두 고수를 단번에 제치고 열쇠를 빼돌릴 수는 없다. 뿐이냐? 우리 태자님인들 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안개 속에서 무사히 빠져나오실 수 있을까?”
“아!”
그제야 알아들은 목치수는 감탄사를 크게 뱉어냈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는 옛 려국의 땅. 혹여 두 황자 중 누가 죽더라도 책임은 온전히 신교의 몫이었다. 되레 천서국은 도와주러 왔다가 목숨의 위협을 받은 신세가 될 것이니, 결과와 상관없이 약조한 대가를 당당히 요구할 수 있을 터였다.
“좌수어인지공(坐收漁人之功)! 우리 역할은 딱 거기까지다.”
한바탕 비를 퍼부은 하늘은 티끌 하나 없이 맑았다. 곧이어 벌어질 살육의 잔치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청명한 날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