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화. 偕老同穴(해로동혈)
“으아아악!”
한때는 목숨처럼 사랑했던 정인의 피를 뒤집어쓴 채로, 소정은 깊은 울음을 토해냈다. 시작부터 결말이 정해진 만남이었다. 어떻게든 피하고자 했던 운명이었으나 그녀의 미약한 믿음만으로는 지켜낼 수 없었다.
“다 당신 탓입니다. 평생 내 곁을 지켜주겠다던 약속을 어긴 벌입니다. 우리 사랑의 결실을 포기하게 만든 벌입니다.”
소정은 묵직한 주먹으로 가슴을 탕탕 쳤다. 숨이 쉬어지지 않아 연신 헉헉거렸다. 평생 가슴을 짓누르던 응어리였다. 그 원인만 제거하면 다 끝날 줄 알았건만, 되레 덩치를 키워 놓았던 탓에 이제는 숨구멍까지 막혀 버렸다.
“나쁜 년, 도둑년. 이사형의 인생을 송두리째 앗아가 놓고도 모자라, 결국 목숨까지 거두는구나.”
설이의 눈에 시뻘건 눈물이 고였다. 누군가를 이렇게까지 증오해 본 적이 처음이라 모진 마음을 감당하기 어려웠다.
“죽어라!”
처절한 외침과 함께 적우의 육중한 몸이 날아올랐다. 그의 머릿속에는 오직 이사형을 앗아간 상대에 대한 복수심만이 가득했다. 설이조차 말리지 않으니, 이 살인귀를 막을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이 개망나니야, 네가 낄 자리가 아니다. 썩 물러나라.”
곡해고의 비파가 적우의 진로를 막아섰다. 흡사 적우의 반절만 한 체구였으나 그 위압감은 거대한 포식자와 같았다. 그 탓에 이성을 잃고 날뛰는 적우는 좀처럼 소정에게로 가까이 가지 못했다.
“이 영감탱이야, 이게 뭐 하는 짓이냐? 얼른 비켜라.”
“딱하다, 딱해. 그깟 연정 때문에 아까운 인생을 버렸구나.”
약이 올라 땀까지 삐질삐질 흘리는 적우와 달리, 곡해고는 그쪽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때때로 뜬금없는 말까지 지껄이는 양이 상대를 조롱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으나 저 망할 늙은이가 비켜줄 리 없겠구나. 그러나 나는 반드시 저 요녀를 죽이고 말겠다.’
복수하겠다는 절실한 욕망이 설이의 몸과 마음을 지배했다. 주변을 빠르게 훑던 와중에 한쪽에서 바들바들 떨고 있는 가은의 모습이 보였다. 그제야 현진의 이상한 행동이 다시금 떠올랐다. 어째서 이 아이에게 자신이 어미라는 거짓말을 했을까? 그녀의 비상한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그리고 비로소 모든 이유가 명확해졌다.
“은아, 다친 데는 없느냐?”
“네, 네 괜찮습니다.”
울먹이는 가은의 얼굴에는 근심 걱정이 가득했다. 스승을 어떻게든 살리고자 하는 마음이겠지? 이 와중에 자신의 친어미인 줄 알면 얼마나 기가 막히겠는가? 설이의 얼굴에 잔인한 미소가 스쳐 지나갔다. 그녀 또한 그날의 현진처럼, 일생일대의 거짓말을 준비하는 중이었다.
“일전에 네 아비가 누구인지 물은 적이 있었지? 현진 사저가 끝까지 비밀에 부친 친아버지 말이다.”
“네? 무슨…….”
갑자기 왜? 가은의 동공이 점점 커졌다. 양 손바닥에 땀이 고이고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어쩐지 답을 이미 알고 있는 것 같아 뒷말을 듣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설이는 말을 그칠 마음이 없었다.
“이상하지 않았니? 너를 살리겠다고 목숨을 걸고 곡해고와 싸운 마사형 말이다. 그래, 나 또한 질녀를 걱정하는 마음치고는 너무 과하다고 생각한단다.”
“설마, 무슨 말씀을.”
“신화정에서도 그랬지. 봉천과 일전을 치르고 온 이사형은 왼쪽 팔이 뜯겨나가기 직전이 되어 돌아왔더구나. 그래도 나무랄 수 없었다. 너를 구하기 위해 그랬다는데 그 누가 참견할 수 있겠니?”
“아, 아니죠? 아닐 거예요.”
설이는 울먹이는 가은을 향해 한 발, 성큼 다가섰다. 아까보다 선명하고 또박또박한 발음으로, 거짓말이 아닌 거짓말을 깔끔하게 마무리 짓기 위해서였다.
“이사형은 평생 잃어버린 딸아이를 그리워하셨다. 강가장에서 알아본 이후에 그림자처럼 너를 지키셨다. 저 요녀에게서 너를 지키지 못했다는 자책으로 십수 년을 괴로워하셨어. 은아, 아직도 모르겠니?”
“그럴 수가…….”
그러나 부정할수록 더욱더 또렷하게 떠올랐다. 자신을 구하기 위해 봉천에게 아낌없이 왼팔을 뻗던 그가. 몇백 리를 등에 업고 달리던 그의 따뜻한 등이.
“도대체 마진건과는 무슨 관계인 것이냐?”
곡해고의 의구심 가득한 질문은 뻔히 하나의 답을 가리키고 있었다. 어째서 이제야 깨달았을까? 이 세상에 목숨을 바쳐 그녀를 구해줄 수 있는 사람은 오직 한 사람밖에 없다는 것을.
“아버지…….”
“은아, 미안하다.”
마지막으로 뱉은 그의 말이 가슴에 콱 박혀 들었다. 어쩌면 이미 알고 있었던 게 아닐까? 매번 그와 함께할 때마다 가슴이 찌릿했으면서. 시선이 머문 곳에는 그녀의 아버지가 차마 눈도 감지 못한 채로 자신을 향해 널브러져 있었다. 산과 같이 크고 단단했던 그의 몸은 보잘것없는 살덩이가 되어 버린 지 오래였다. 그리고, 그 옆에는 뻔뻔하게도 소소정이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어머니에 이어, 아버지까지. 나를 부모에게서 떼어놓은 것으로도 모자라 끝까지 고통을 주는구나.’
맑은 눈에 빠르게 복수심이 차올랐다. 자신의 인생을 송두리째 망가뜨린 원흉. 철천지원수를 눈앞에 두고도 몰랐다니. 이제 더는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으아아아아!”
가은은 품속에 간직해둔 단검을 뽑아 들었다. 이제 갓 무공을 배우기 시작한 그녀에게 소정이 직접 건네준 무기였다.
“네 한 몸 지키는 데는 이만한 보검이 없을 것이다.”
고작 작은 단검 하나를 쥐여준 이유는 뻔했다. 토사구팽. 어차피 그녀에게 가은은 고작 열쇠를 지키는 똥개에 불과했다. 운 좋게 살아남는다면 다행이고 아니어도 어쩔 수 없는. 버려질 운명의 똥개는 삶아지기 전에 도망치리라 마음먹었다. 그리고 지금, 바로 그 결정의 순간이 온 것이었다.
“네, 맞습니다. 제 한 몸을 위해 당신이 사라져야겠습니다. 저는 이제 당신이 짓밟았던 제 인생을 다시 찾을 겁니다.”
가은은 자신만이 알아들을 수 있는 작은 소리로 중얼거리며, 비틀비틀 한 걸음씩 움직였다. 연신 혀를 차는 곡해고도, 그에게 막혀 이도 저도 하지 못하고 발만 동동 구르는 적우도 연약한 그녀를 신경 쓰지 않았다. 불쌍한 스승을 감싸 안는 어린 선자의 효심이겠거니 했을 뿐, 그 순진한 얼굴로 비수를 박아넣으리라고는 그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쑥!
“헉!”
외마디 비명이 전부였다. 이미 정신이 한참 나간 소소정은 자신의 가슴에 꽂힌 비수가 누구의 것인지도 몰랐다. 극심한 통증에 온몸을 발발 떨면서 일그러진 표정으로 품에 안긴 제자를 바라보았다.
“으으으.”
“부디 좋은 곳으로 가십시오.”
눈물이 많은 가은이었지만 이번만큼은 울지 않았다. 오랜 바람을 이루는 순간은 통쾌하고 짜릿했다. 이제 자신의 앞날을 방해하는 장애물은 아무것도 없었다.
“우욱!”
소정이 더는 견디지 못하고 상체를 크게 비틀었다. 울컥 뱉어내는 핏덩이는 그녀의 인생처럼 새까맣고 진득했다. 양손을 뻗어 휘저으니 자신을 꽉 감싸 안고 있는 가은의 얼굴이 잡혔다. 그제야 시야를 가렸던 뿌연 안개가 걷히는 것 같았다.
“아아, 너였구나. 은이, 은이, 아아, 왜 못 알아봤을까?”
소정의 눈에서 시뻘건 눈물이 흘러내렸다. 육체가 죽어갈수록 정신은 또렷해졌다. 매일 옆에 두었으면서도 눈치채지 못했던 자식의 얼굴이 두 눈에 박혔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난생처음 딸아이의 얼굴을 더듬어 보았다. 눈, 코, 입. 어느 하나 닮지 않은 곳이 없는데 여태 알아보지 못한 게 신기할 따름이었다.
“미안하다. 미안하구나, 은아.”
“이제 와 그러셔도, 저는 후회하지 않습니다.”
반면, 가은의 표정에는 감정이 없었다. 되레 원망하지 않는 소정의 태도가 역겹기만 했다. 차라리 자신을 죽이려 들었다면 불쌍하기라도 했을 텐데. 마치 아끼는 제자를 대하는 것처럼 얼굴을 쓰다듬는 양이 가증스러웠다.
“미…, 미안…….”
반복되는 사과가 끝날 때쯤, 가은은 더는 견디지 못하고 스승의 몸뚱이를 밀어내었다. 비릿한 피 냄새가 묻은 옷가지를 툭툭 털어내며 뒤로 성큼 물러섰다. 그 탓에 소정의 몸은 마른 나뭇가지처럼 바닥에 펄렁 엎어지고 말았다. 피투성이가 된 몸에서는 여전히 검붉은 피가 콸콸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은아, 가자!”
그때, 차갑고 큰 손이 그녀의 가녀린 손목을 잡아챘다. 이미 떠난 줄 알았던 은률이었다.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도 자각하지 못하던 가은은 그제야 현실감이 돌아왔다.
“얼른 가야 한다!”
“…….”
문득, 자신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설이와 눈이 마주쳤다. 대답 대신 고개를 크게 끄덕이는 그녀에게, 가은 역시 가벼운 묵례로 많은 말을 대신했다. 다행히 곡해고는 그들 쪽을 등지고 있었다. 지금이야말로 도망칠 절호의 기회였다.
“업혀라!”
은률은 비틀거리는 가은을 등에 업었다. 보법으로 왼쪽 발을 세게 구르니 몇 걸음 만에 바위 절벽을 훌쩍 뛰어넘었다. 늙은 고수가 눈치챘을 때는 이미 바위 절벽 뒤 샛길로 빠져나간 뒤였다. 돈점박이(표범)처럼 날쌘 그를 그 누구도 잡을 재간이 없었다.
“어허, 이런.”
뒤늦게 상황을 깨달은 곡해고는 할 말을 잃었다. 언제 나타났는지 모를 정은률에게는 관심도 없었다. 야무지게 스승의 가슴에 비수를 꽂아 넣은 가은에게 질려버린 탓이었다. 어디서부터 어그러졌을까? 그저 재미로 시작한 참견이 한 편의 촌극이 되었으니 그저 기가 막힐 뿐이었다. 적우를 내려치려고 높이 올렸던 팔은 어느새 무릎 밑으로 축 늘어졌다. 도무지 싸울 마음이 들지 않았다.
“이 늙은이가 나를 아주 우습게 보는구나!”
눈치 없는 적우는 아직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지 못했다. 그저 곡해고가 방심을 한 탓이려니 싶어 내력을 한껏 끌어올렸다. 어차피 실력으로 당하지 못할 바에는 동귀어진이라도 할 작정이었다.
“적사형, 그만두세요. 다 끝났습니다.”
“뭐?”
설이는 그런 적우의 앞을 당차게 막아섰다. 더는 곡해고와 싸울 이유가 없었다.
“곡어르신, 더 싸워봤자 서로 이득이 없으니 그만두시지요. 들으셨는지 모르겠으나, 강교주님은 천서국과의 화친을 도모 중이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싸울 이유가 있을까요? 선자는 도망쳤고 그녀를 보호하려던 마사형은 이미 죽었습니다. 저희는 이제 그 아이의 생사에 관심이 없으니 쫓든 말든 알아서 하세요.”
“흐음, 그 말이 옳구나.”
곡해고는 주섬주섬 옷매무시를 가다듬었다. 재밌는 구경도 끝났으니 이제 본래의 임무에 매진할 생각이었다. 가은을 끝까지 쫓을지, 곧바로 금천으로 갈지가 남은 고민이었다.
“쯧쯧, 정이 뭐길래 이리 비참하고 참혹하단 말인가? 인연인 줄 알았건만, 결코 만나서는 안 되는 악연이었구나.”
곡해고는 알 수 없는 말을 노랫말처럼 흥얼거리며 바위 절벽을 넘어섰다. 터덜터덜 걷는 것처럼 보였건만, 금세 새카만 점이 되어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이제 바위 위에 숨을 쉬는 사람은 오직 설이와 적우밖에 남지 않았다.
“그래, 아주 잘하였다! 암, 그래야지. 역시 진건 형님의 핏줄이구나!”
설이에게 자초지종을 들은 적우는 얼굴을 뒤로 젖히며 호탕하게 웃었다. 비명 같기도, 울음 같기도 한 소리가 메아리로 돌아와 바위 절벽을 가득 메웠다. 그렇게 한참의 의식이 이어진 후에야 마음 구멍에서 뿜어나오던 슬픔이 잦아들었다. 널브러진 소정의 몸을 발로 툭 밀어놓고, 진건의 시신을 어깨에 멨다. 이제 이 바위 절벽은 진절머리가 났다.
“형님, 이제 속이 후련하십니까?”
적우의 거친 피부 위로 한줄기 굵은 물방울이 툭 떨어졌다. 때마침 떨어진 가을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