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무십일홍-186화 (186/209)

186화. 隻愛(척애)

***

배 속에 아이가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가장 먼저 든 감정은 기쁨이었다. 정인과의 사랑이 빚어낸 결실이라는 뿌듯함. 그리고 평범한 여인으로 살고 싶은 욕망이 어우러져 퍽 감격스러웠다.

‘오늘은 맛난 탕을 끓여야지. 그이도 기뻐해 줄까? 아아, 빨리 돌아왔으면 좋겠구나.’

소정은 입덧으로 인한 구역감에 머리가 어질어질했으나, 서둘러 거울 앞에 앉았다. 더 예뻐 보이고 싶어 분칠을 곱게 하고 연지도 다시 발랐다. 며칠 동안 밥을 못 먹은 탓에 피부가 푸석푸석한 것 같아 속상했다.

끼이익!

“어? 벌써 왔어요?”

때마침 열린 문소리에 소정은 신발도 신지 못하고 뛰쳐나갔다. 사냥을 나간 것치고는 너무 빨리 돌아온 듯도 싶었지만 상관없었다. 이 기쁜 소식을 알면 어떻게 반응할까? 오직 그 생각으로 가슴이 두근두근했다.

“아니, 여길 어떻게?”

그러나 그녀의 앞에 선 이는 기다리던 낭군이 아니었다. 첩첩산중에 숨으면 절대로 찾지 못하리라 확신했건만. 고작 한 해를 버티지 못하고 꼬리를 잡힌 셈이었다.

“사람 하나 살지 않는 당나루에 숨어 있으면 모를 줄 알았더냐? 대단한 연정이구나. 이런 폐가에서 변변치 않은 음식과 옷으로 연명하면서도 행복하니?”

“언니…….”

새벽에 내린 비로 숲길은 온통 진흙이었다. 그 더러운 흙발을 털지도 않고, 소금정은 아우의 집을 헤집고 다녔다.

“흐음, 참 너처럼 해괴한 곳을 골랐구나. 나무를 끼고 만들어진 초옥이라니. 설마 연리지라도 된다더냐?”

“그런 거 아니에요.”

금정은 집 한가운데 버티고 선 나무 두 그루가 영 아니꼬웠다. 서로를 보듬듯이 감싸 안은 모양새가 아우의 역겨운 연정을 대변하는 것 같았다.

“헛똑똑이, 고작 덩치 큰 사내의 유혹에 빠져 본분을 잊다니. 결국, 그놈에게 독을 먹이지도 못한 모양이구나. 이깟 년을 사부님은 왜 그렇게 찾으시는 건지. 너 때문에 지난 반년간 내가 얼마나 고생했는 줄 아니?”

“죄송해요, 언니.”

고개를 숙인 소정의 눈은 여전히 그녀의 언니가 남긴 발자국을 쫓고 있었다. 이 소박하고 따뜻한 보금자리는 이제 안전하지 않았다. 그저 평범하게 살고 싶었던 소망을 산산이 부숴버린 그녀의 더러운 발을 칼로 베어버리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그래, 그곳의 위치는 알아냈니?”

“아니요. 그이도 모른대요. 아니, 칠원성군도 검귀 성곤도 모른답니다. 오직 왕실의 핏줄에게만 전해지는 비밀이라 하더이다.”

“흥! 그 말을 믿어? 순진하긴. 적어도 검선은 아는 게 있지 않겠느냐? 요망한 계집이 려국 왕의 정인인 걸 모르는 이가 없는데 말이다. 아니면 창의의 딸년도 살아 있지 않더냐?”

“검선은 자취를 감추었다 합니다. 무얼 알고 있다는 확증도 없고요. 창의의 딸은 제 어미와 불타 죽어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답니다.”

“흐음, 그럼 네년은 여태 사내 품에서 희희낙락 애교만 떨었더냐?”

금정의 앙칼진 비난에 소정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수치스러웠다. 순결하게 살아온 자신을 적진에 보낸 이는 다름 아닌 그녀의 언니였다. 칠원성군 중 누구라도 꼬셔 정보를 얻어오라던 그 말을 똑똑히 기억하건만, 어떻게 자기를 대놓고 모욕하는 것인가? 가슴 깊숙한 곳에서부터 혐오와 분노가 솟아올랐다.

“스승님의 전언이다. 읽어 보아라.”

잔소리도 슬슬 지겨웠는지 금정은 품속에서 진짜 용건을 꺼내 들었다. 기실, 그녀는 문파를 배반하고 도망친 아우를 용서할 마음이 전혀 없었다. 그러나 스승은 정반대인 듯했다. 애타게 그리워하더니만, 소정을 반드시 찾아 전하라며 서신을 써주었다.

“그래, 뭐라시니?”

서신을 읽는 내내 소정의 손이 덜덜 떨렸다. 이리저리 방향을 잡지 못하는 눈동자에는 두려움이 가득했다.

“아아, 스승님.”

결국, 소정은 바닥에 무너지고 말았다. 감히 주제에 그리 대단한 꿈을 꾸었더냐? 방금까지 거울 앞에서 단장하던 자신이 어리석고 한심했다. 그때, 자신도 모르게 스르르 아랫배로 손이 움직였다.

‘그러나, 이 아이는 어쩐단 말인가?’

바라던 일은 아니었으나 잠시나마 느꼈던 충족감이 다시금 떠올랐다. 앞으로 다시 이런 행복을 누릴 수 있을까?

“일단 자리를 비켜주세요. 그이가 올 때가 되었거든요. 갈 때 가더라도 무언가 얻어가는 게 있어야 하지 않겠어요? 이 길로 쭉 나가면 고개 너머에 작은 객점이 있답니다. 내일 새벽에 거기서 만나요.”

“흐음, 나를 감히 속이려는 건 아니겠지?”

“그럼요. 제가 어떻게 언니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겠어요. 지금도 이렇게 찾아내셨잖아요.”

소정은 애써 미소를 지어 보였다. 워낙에 상대의 눈치가 빠르니 최대한 자연스러운 모습을 유지해야 했다. 다행히 칭찬이 만족스러웠는지 금정은 별 저항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또다시 더러운 발자국을 아무렇게나 찍으며 문밖으로 천천히 나섰다.

“그런데 말이야, 네가 잊고 있는 것 같아 덧붙이는데.”

금정의 심술궂은 얼굴이 소정의 앞으로 바짝 다가왔다. 한날, 한시에 같은 배에서 나온 자매건만 외모부터 성격까지 완전히 다른 두 사람이었다.

“스승님은 우리의 은인이야. 다 죽어가는 우리 자매를 거둬주신 분이지. 그런 분을 기만한다면 그야말로 짐승보다 못한 년이란다. 알지?”

“…….”

소정은 차마 대답하지 못하고 고개만 끄덕거렸다. 지금 목소리를 내면 이 시커먼 속내가 다 들킬 것만 같았다. 스승을, 하나뿐인 자매를 배신하고자 하는 더러운 욕망을 끝까지 숨겨야 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아이를 지켜야 한다. 진건이 오늘 안에 돌아오지 않는다면 혼자서라도 도망쳐야 한다.’

이 강만 건너면 천서국의 국경이었다. 아무리 언니여도 설마 타국으로 넘어가리라 생각하진 않을 터였다. 소정은 없는 살림이지만 부지런히 이것저것 필요한 물품을 챙겼다. 그중에서도 가장 먼저 챙긴 건, 작은 장신구였다. 그곳의 열쇠라며 소중히 보관한 그것이야말로 누구에게도 뺏기면 안 되는 보물이니까.

일단 챙긴 행장은 두 그루의 나무가 얽힌 사이로 꼭꼭 숨겨 두었다. 그다음에는 몰래 뒷문을 열어 나룻배를 점검했다. 낡고 작았으나 천서국까지 이동하는 데는 충분했다. 혹시나 혼자 노를 저어야 할지도 모르니, 석반도 잔뜩 챙겨 먹었다. 입덧으로 울렁거려 몇 번을 포기할까 싶다가도 아이를 생각해서 꾸역꾸역 욱여넣었다.

‘바로 이 앞에서 기다리면 어쩌지?’

어둠이 내려올수록 소정의 큰 눈동자가 불안하게 움직였다. 과연 잘 따돌릴 수 있을까? 이럴 때, 하필이면 감감무소식인 진건이 원망스러웠다.

끼이익!

“오셨어요?”

그때, 기다리고 기다리던 반가운 문소리가 들렸다. 이번에는 틀림없이 그의 정인었다.

“뭘 좀 구해오셨어요?”

“미안하오.”

원래도 낯빛이 밝은 이는 아니었으나 오늘따라 더욱더 어두운 표정이었다. 사흘 전에 집을 떠날 때만 해도 나름 다정했던 그가 아니었던가? 소정은 문득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혹, 오는 길에 누굴 만나신 거예요?”

“…….”

대답은 하지 않았으나 그의 놀란 표정만으로도 충분했다. 언니가 아우를 믿지 못하고 이 앞을 감시했구나. 그렇다면 자신의 의중을 오해할지도 몰랐다.

“저도 언니가 찾아올지 몰랐어요. 스승님께서 찾으신다는 전갈을 가져왔지만, 저는 절대로 떠나지 않을 겁니다. 제 뜻을 오해하지 마세요.”

“소정.”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보던 진건의 눈썹이 아래로 축 처졌다.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 입술을 달싹거렸으나 쉬이 말이 나오지 않는 모양이었다.

“당신의 언니가 왔구려. 몰랐소.”

“네? 그럼 만난 사람이 누구예요?”

“…….”

사랑하는 그는 고작 몇 마디만 던져놓고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덕분에 소정의 속은 까맣게 타들어 갔다. 언니를 만나지 않았다면 왜 이토록 어두운 얼굴인 걸까?

“아니,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에요. 우리 얼른 이곳을 떠나요. 언니가 막무가내길래, 일단 새벽까지 시간을 벌어놓았답니다. 약속 장소는 고개 너머지만 영악한 사람이니 이 근처에 있을 거예요. 당신이 돌아온 것도 보았겠지요. 그렇다면 더욱 서둘러야 해요.”

“…….”

물론 적극적인 동의를 바라지는 않았지만, 너무 침울한 그의 표정에 사뭇 마음이 상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사소한 일로 서운할 때가 아니었다.

“뒷문으로 나가 배를 타요. 제가 이미 다 준비해 놓았답니다. 서이국으로 가면 절대로 쫓아오지 못할 거예요. 아니, 언니의 주변머리로는 상상하지도 못할걸요?”

“소정…….”

“황당한 상황이라는 거 잘 알아요. 허나, 언니가 온 이상 다른 방법이 없잖아요. 당신이 나선다면 무력으로도 막을 수 있겠지만, 그러고 싶지는 않아요. 아무리 미워도 한날에 태어나 평생을 한 몸 같이 살아온 언니인걸요.”

“떠나는 건 어렵지 않소. 그러나 떠나기 전에 내 이야기를 먼저 들어보시오.”

소정의 간절한 부탁을 듣고만 있던 진건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표정은 물론이고, 목소리도 평소보다 훨씬 묵직했다. 슬픈 것 같기도, 화가 난 것 같기도 했다.

“이 기회에 문파로 돌아가는 것도 방법이오.”

“네?”

“여태 당신의 인생을 망쳤다는 죄책감에 힘들었소. 돌려보낸다 한들, 용서해주겠냐 싶었는데 마침 연락이 왔으니 얼마나 다행이오? 내게 미안한 마음은 접어두고 뜻대로 하시오.”

“뭐라고요?”

소정은 순간 귀를 의심했다. 선뜻 따라나서지는 않아도 결국, 제 뜻을 받아들이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는 목숨을 내어주고서라도 이 사랑을 지키리라. 굳건히 믿었다. 그런데 뭐? 죄책감? 다행?

“내가 선택하여 당신을 따른 것인데 무슨 죄책감을 느꼈단 말입니까? 그럼 나 또한 당신의 인생을 망쳤다는 건가요? 말해 보세요.”

“…….”

진건의 깊은 눈이 바닥을 향했다. 말주변이 없는 못난 사내는 정인의 분노를 감당할 깜냥이 되지 못했다. 이별의 인사가 매정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진짜 속마음을 말할 자신이 없었다. 그저 그녀의 앞날을 위해 이 모든 원망을 겸허히 받아들여야겠다고 생각할 뿐이었다.

“당신, 당신이야말로 후회했군요. 나라도 이념도 다른 여인에게 홀려 스승을 배신했다고 자책하는군요. 아아, 저는 그것도 모르고 당신이 행복하리라 믿었어요. 오죽하면 저는 다 버리고, 심지어 나라도 버리고 떠나려고 했답니다. 당신과 함께라면 다 버틸 수 있으니까요.”

울부짖는 소정의 얼굴이 한층 더 수척해 보였다. 진건은 사랑하는 그녀가 혹여 쓰러질까 봐 노심초사했지만, 안타깝게도 입 밖으로 표현하지는 못했다.

“자, 이제 말해 보아요. 왜 갑자기 오늘입니까? 지난 사흘간 무슨 일이 있었길래, 하필 오늘입니까?”

“하필 오늘이 아니오. 반년 전, 나는 계심방에 있었소. 지금은 칠목에 다녀오는 길이고.”

뚱딴지같은 대답에 순간 말문이 막혔다. 계심방이라면 반년 전 멸문한 계정의 소상단이 아닌가? 갑자기 왜?

“아!”

소정은 그제야 다 이해가 되었다. 진건이 이별을 결심한 건 요 며칠이 아니었다는 것을. 그는 자신을 속이고 여전히 스승의 임무를 수행하고 다녔다는 것을. 연정의 단물이 다 빠진 지금, 굳이 정인을 곁에 두고 마음고생을 할 이유가 없었으리라. 그런 줄도 모르고 아이까지 가진 신세라니, 원통하고 억울했다.

“나를 속였군요. 당신은 나의 정인이 아니라, 여전히 검귀 성곤의 둘째 제자로 살고 있었군요.”

“미안하오.”

“저를 철저히 가지고 노셨군요. 아니, 이제라도 말해주니, 고맙다고 해야 할까요?”

“그저 우리가 여기까지인 거 같소.”

“하하하.”

억장이 무너진다는 게 이런 기분일까? 소정은 이제 울음보다 웃음이 나왔다. 고작 이런 매정한 속물의 아이를 갖고 행복했었다니. 스승의 은혜를 배신하고 핏줄을 모른 체하려 했다니. 부끄럽고 후회스러웠다.

“이것만 알아두세요. 내 인생은, 내 행복은 당신 때문에 깨졌다는걸. 그러니 이후에 일어나는 모든 일은 당신이 자초한 거라는 걸.”

“…….”

진건은 정인의 마지막 인사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그저 죄책감에 그녀의 뒷모습조차 바라볼 수 없었다.

소정은 기껏 챙겨 두었던 모든 짐을 버려두고 혈혈단신 사라졌다. 그리고 다시 진건을 찾았을 때는, 그로부터 꼬박 열 달이 지난 후였다. 갓 태어난 아이는 고작 서신 하나 달랑 품은 채, 그들의 은신처 중 한 곳에 버려졌다.

“으아앙.”

영원한 사랑을 약속했던 그 나무 사이에 구슬이 숨겨진 줄도 모르고, 진건은 내내 소정을 원망하고 자신의 어리석음을 탓했다. 하여, 꼬물거리는 아이의 손 한 번 잡아주지 않고 현진에게 내던지듯 맡겨 버렸다.

“잘 키워줄 이를 찾아 주어라.”

매정한 한 마디가 딸아이를 향한 그의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낯모르는 여인의 품에 안긴 아기는 자신의 모진 팔자를 알기라도 하는 듯, 자지러지게 울어 재꼈다. 현진은 어쩔 줄 몰라 하면서도 아기가 딱해 가슴에 꼭 안아주었다.

“가엾은 아가, 부디 못난 네 부모를 용서하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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