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화. 吹恐飛執恐虧(취공비집공휴)
진건의 팔이 부르르 떨려왔다. 지금 들은 이야기의 진위는 궁금하지 않았다. 풀려버린 동공, 아무렇게나 뱉어내는 말, 비틀거리는 걸음걸이. 소정은 분명 제정신이 아니었다.
“적사형, 보고만 있지 말고 와서 도와요!”
설이의 다급한 외침에 그제야 적우가 달려 나왔다. 이대로 저 미친 여자 앞에 사매를 두었다가는 목숨이 위험했다. 아니나 다를까, 미처 그가 다다르기도 전에 소정의 일 장이 가은을 향해 날아오는 게 아닌가?
“안돼!”
설이는 몸을 날려 은이를 끌어안았다. 아무리 별 애정이 없는 상대라고 해도 자신의 실수 때문에 애먼 사람을 죽게 할 수 없었다. 게다가 은이는 존경하는 이사형의 딸이었다.
휘익!
“악!”
머리 위로 쏟아지는 장력을 고스란히 맞으려던 그 순간, 반짝하는 무언가가 그들을 향해 날아왔다. 소정은 정신이 나가 있었음에도 본능적으로 손을 거둬들였다. 만약 그대로 내질렀다면 손목이 날아갔을 일격이었다.
“어째서?”
너무 놀라 몸이 굳었던 진건의 눈동자가 서서히 커졌다. 무기력하게 사매와 딸아이의 죽음을 맞이할 뻔한 찰나, 도움을 준 이는 의외로 곡해고였다.
“뭐, 우리 싸움보다 더 재밌지 않나? 원래 이 나이쯤 되면 내 일보다 저잣거리 치정 이야기에 끌리는 법이지. 자네도 늙어보면 알 텐데 말이야.”
“헛소리 말고 집중하시오.”
진건의 다급한 외침에도 곡해고의 태도는 바뀌지 않았다. 살벌하게 휘두르던 비파는 본래의 용도로 돌아가 그의 양팔에 얌전히 안겨 있었다.
“으아아!”
본래의 계획은 이미 틀어진 것과 다름없었다. 그런데도 진건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곡해고를 잡아두는 것만이 그의 딸을 구할 유일한 방법이었으므로. 그는 상대가 방심한 틈을 타 미타를 거세게 휘둘렀다. 만신창이가 된 팔이었지만 아직 그 정도 힘은 남아 있었다.
“너한테는 이제 관심 없다.”
그러나 곡해고는 아예 등을 돌려 버렸다. 대신 반짝이는 비파 현 일곱 개가 시차를 두고 날아왔다. 미타의 공격을 방해하는 동시에 급소를 노리고 들어오니, 진건은 피할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으윽.”
안타깝게도 두 개의 현은 그의 양다리를 스쳐 지나갔다. 진건은 차마 버티고 서지 못하고 바닥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 인제 정말 한 발자국도 움직이기 어려운 지경이었다.
“흐음, 아주 재밌는 사연이구먼. 아무리 정신이 나갔다지만, 소금정을 살해했다고 자백한 꼴이군 그래? 그런데 말이야, 도대체 정인이 누구길래 친언니까지 죽였나? 원, 너무 궁금해서 안 들어볼 수가 없구먼.”
“곡해고! 닥쳐라!”
마진건은 어떻게든 그의 입을 다물게 하고 싶었다. 다리를 다쳐 움직이기 어려우니 소리라도 질러 막아 보고자 하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소정을 바라보는 곡해고의 눈이 그 어느 때보다 반짝반짝 빛났다.
이제 모든 게 딱 들어맞았다. 가려웠던 부분을 누가 긁어주는 것처럼, 속이 다 시원했다. 대답을 듣지 않아도 정인이 누군지 알 것 같았다. 유달리 기억력이 좋은 그는 선운검파의 장문 자리를 물려받기로 했던 소소정의 갑작스러운 실종을 생각해 냈다. 돌아오고 나서도 한참 남자와 야반도주했던 거라는 추문이 따라붙었지. 그런데 당장 소소정의 입에서 나온 말이 무엇이었는가? 소금정이 정인에게 고독을 먹이라고 종용했다? 그렇다면 상대는 정파의 인물이 아닐 터였다.
그제야 소소정을 본 순간부터 몸이 굳어버린 진건의 태도가 수상해지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죽자 살자 뒤를 쫓아와 가은을 구해내려던 이유도 알 것 같았다. 무엇보다, 가은을 처음 볼 때부터 느꼈던 친숙함.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것 같은 외모. 그 이유를 깨닫는 순간, 모든 의문점이 한 방에 해결되었다.
‘닮았어. 뜯어보면 이목구비 하나하나가 똑 닮았잖은가? 내 참, 왜 그걸 이제 알았을까?’
두 사람이 연인 사이였고, 가은의 외모가 소소정과 똑 닮았다면 결론은 하나!
‘이 어여쁘고 앙큼한 선자가 마진건과 소소정의 숨겨진 아이였구나.’
“우욱!”
소정이 울컥 선혈을 뿜어냈다. 무리하게 내력을 거둔 탓이었다. 안 그래도 산발한 머리에 입과 옷이 온통 피범벅이니, 그 모습이 마치 귀신 같았다.
“쯧쯧, 그리 약해 빠져서 어찌 언니를 죽일 배짱이 있었나? 차라리 정인을 죽이면 될걸. 퍽 고달픈 선택을 했구먼.”
“누가 알겠어? 내가 어떤 마음으로 살아왔는지 아무도 몰라.”
겨우 몸을 일으킨 소정은 멍한 눈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방금까지 앞에 섰던 소금정은 어디 가고, 가냘픈 여인 둘만이 알짱거렸다. 그중에서도 몸을 축 늘어뜨린 쪽에 자꾸 눈길이 갔다. 어쩐지 그 모습이 낯설지 않았다.
“아아, 너는, 너는 소소정이 아니냐?”
“어어?”
설이가 미처 도망칠 새도 없었다. 그들의 앞으로 성큼 다가온 소정이 가은을 확 낚아채 갔다. 그러더니 양손으로 그녀의 어깨를 잡더니만 미친 듯이 흔들어 댔다.
“이년이, 이 나쁜 년이 자기 친언니를 죽이고도 살아 있구나. 너 같은 건 죽어야 해. 죽어!”
“이거 놔요, 이러다 진짜 죽어요!”
설이가 매달려 흔들어봐도 소용없었다. 어찌나 악력이 센지, 흔들 때마다 은이의 몸이 종이 인형처럼 팔랑거렸다.
“비켜!”
“악!”
소정이 팔을 크게 휘두르자 가냘픈 설이의 몸이 허공에 붕 떠올랐다. 이대로 떨어지면 어디든 크게 부러지고 말 터였다.
“이게 정말 돌았구나?”
뒤늦게 뛰쳐나온 적우는 일단 설이부터 받아냈다. 몸을 회전하며 사매를 바닥에 내려놓는 동시에, 소정을 향해 주먹을 내지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대로 발광하게 두었다가는 큰일이 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감히 너 따위가 나를 방해해?”
고개를 돌려 주먹을 흘려보낸 소정은 가은의 어깨를 축으로 삼아 공중으로 한 바퀴를 돌아 넘었다. 그 덕분에 적우와 거리를 벌리는 한편, 좀 더 평평한 바위 위로 이동할 수 있었다.
“아악!”
급작스러운 어깨 통증 때문에, 드디어 가은의 정신이 돌아왔다. 깨어보니 웬걸, 생각지도 못한 이들이 자신을 구경하듯 바라보고 서 있는 게 아닌가? 게다가 어깨를 짓누른 이는 다름 아닌 그의 스승 소소정이었다.
“사부님?”
“뭐?”
은이의 물음에 소정의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렸다.
“사부라니? 내가 소소정의 사부란 말인가? 그럴 리 없다. 내 사부는 이미 오래전에 영면하셨거늘, 내가 어찌 살아 있단 말이냐? 어? 그럼 나는 누구지? 지금 여기는 어디지?”
“사부님! 사부님이 바로 소소정이잖아요.”
“뭐? 네가 아니라, 내가 소소정이라고?”
말똥말똥 쳐다보는 가은의 눈과 마주치는 순간, 소정의 가슴 속에 돌덩이 같은 무언가가 쿵 내려앉았다. 익숙한 얼굴이었다. 마치 거울을 보는 것 같았다. 어째서 몰랐을까?
“너, 너…….”
“네, 저 가은이에요.”
“아니야,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으아아아악!”
머릿속이 온통 뒤죽박죽이었다. 어째서 배 속에 있던 아이가 벌써 이렇게 자랐단 말인가? 진건에게 버림받고 수차례 포기하려던 아이가 어째서 살아 있단 말인가?
“소소정, 미칠 거면 곱게 미치지 어디서 패악질이냐?”
이번에는 적우의 행덕이 날아왔다. 그저 상대를 죽이겠다는 살기만 가득한 일격이었다. 기실 손속의 인정을 둘 이유가 없었다. 적우에게 오대산검은 누구를 막론하고 찢어 죽이고픈 적이었다. 하물며 소소정은 형님의 인생을 망가뜨린 요녀가 아닌가?
팅!
“쯧쯧, 이 성질 급한 망나니야. 좀 기다려 봐라. 이제 막 재밌으려는데 네놈이 나서서 망치면 쓰겠냐?”
“이, 노망난 늙은이가!”
또다시 곡해고의 비파 현이 방해하자, 적우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그의 머릿속에는 이미 사전의 계획 따위는 없어진 지 오래였다. 가은을 구할 생각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얌체처럼 몰래 빼내는 방법이 내키지 않던 참이었다. 이렇게 된 김에 다 죽이고 가자. 저 늙은이가 먼저 시비를 걸었으니 오히려 잘 되었다 싶었다.
“그래, 어디 당신이 얼마나 대단한지 한 번 겨뤄보자!”
“쯧쯧, 저 더러운 성질머리.”
땅을 박차고 달리는 적우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이래야 사내대장부지. 무릇 강호의 법도란, 성심을 다해 싸워 이기면 되는 것. 혹여 진다고 해도 목숨으로 갚으면 될 일, 뒷일은 자신의 몫이 아니었다.
“강운선, 네 녀석의 약점이 바로 이놈이로구나. 잘 드는 칼이지만 주인을 따르지 않으니, 가져봤자 무용지물인 것을.”
곡해고는 피에 굶주린 악귀처럼 달려드는 적우를 바라보며 연신 혀를 끌끌 찼다. 자신의 사형이 만신창이가 된 걸 보고도 싸움에 정신이 팔려 날뛰는 꼴이 한심하기만 했다.
“허나, 네 녀석을 죽이면 되레 강운선을 도와주는 격이 되니 이를 어찌할꼬?”
“사형!”
설이가 애타게 불러보았지만, 그의 귀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붉게 충혈된 눈동자에는 오직 곡해고의 못난 얼굴만이 비쳐 보였다.
휘익!
퍽!
진건은 다리의 통증을 참아가며 적우와 곡해고의 사이를 막아섰다. 철없는 아우의 허물은 그를 제대로 보듬지 못한 사형의 몫이었다.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어 성한 곳이 없었지만, 의지만큼은 여전히 꺾이지 않았다.
“당신의 상대는 여전히 나다.”
“자네 정말 어쩔 수 없는 사람이구먼.”
곡해고의 긴 눈이 점점 가늘어지더니 입가에 음흉한 미소가 지어졌다. 문득 이 우직한 사내가 바닥까지 떨어지는 모습을 보고 싶은 심술이 솟아났다.
“여어, 소문주. 여기 누가 있는가 보시게. 자네의 철천지원수가 눈앞에 있는데 두고 볼 셈인가?”
“뭐?”
초점이 풀린 소정의 시선이 천천히 곡해고 쪽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 앞에 익숙한 사내의 커다란 덩치를 대번에 알아보았다.
“아아, 당신!”
“소정…….”
진건의 입술 사이로 오랜만의 옛 정인의 이름이 흘러나왔다. 미련과 미움이 범벅이 된 그 이름을 부르지 않기 위해 얼마나 안간힘을 쓰며 살아왔던가. 그러나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순간이기에, 차마 애절한 마음을 숨기지 못하고 말았다.
“내 인생을 망친 놈! 뻔뻔하게 아직도 살아 있었구나!”
미쳐버린 여인의 움직임은 날랜 날짐승과 같았다. 등지고 선 적우를 순식간에 지나쳐 곡해고의 코앞까지 당도했다. 적우가 뒤늦게 그녀의 머리채를 낚아챘을 때는 이미 얇고 가느다란 천천검이 진건의 가슴을 뚫고 지나간 뒤였다.
“이사형!”
“헉, 사형!”
울부짖는 사형제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진건은 스르륵 무너져 내렸다. 한때 목숨을 바쳐 사랑했던 여인의 발밑에 무릎을 꿇은 채로. 그러나 마지막으로 눈에 담은 사람은 소정이 아니었다.
“은아, 미안하다.”
한평생 후회했고, 그리워했던, 자신의 소중한 분신을 지켜주지 못했다는 죄책감을 안고, 그렇게 마진건은 모진 삶을 놓아버렸다.
*** 취공비집공휴(吹恐飛執恐虧):
불면 날아갈까 쥐면 터질까 두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