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화. 莫知其子之惡(막지기자지악)
“아주 운이 좋은 아이로구나.”
곡해고는 가은의 목덜미를 엄지로 꾹 눌렀다. 입도 벙긋 못하고 혼절하자 바닥에 아무렇게나 던져 버렸다. 일단 저 불청객을 처리하고 난 후 해결할 생각이었다.
“이게 누군가? 선운검파의 소문주가 아니신가?”
“…….”
대답 대신 검은 그림자가 동굴 안으로 불쑥 들어왔다. 굳이 얼굴을 보지 않아도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이십여 년 전에도 그들의 잔인한 암기에 혀를 내둘렀더랬지. 선녀 같은 외모와 달리 쓰는 수법마다 악랄한 자매였다. 곡해고는 그때도 언니 소금정보다 동생인 소소정을 더 눈여겨보았다. 속내를 감추는 데 능한 달변가. 그 위선이 언젠가 자신의 언니까지 해하리라 예언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말이야, 자네는 제자를 구하러 온 건가? 죽이러 온 건가? 실력이 고꾸라진 게 아니고서야 이 지독한 암기를 어찌 제자의 얼굴을 향해 던졌을꼬?”
서서히 다가오던 그림자가 문득 걸음을 멈췄다. 잔뜩 흥분했는지 거친 숨소리가 동굴 안을 가득 메웠다. 어쩐지 그가 알던 소소정이 아닌 듯싶었다.
“흥, 어른 말씀에 대꾸조차 없다니. 버릇이 없구먼. 이래저래 자네와 수다 떨 상황은 아닌 듯싶네. 우리 악연도 이쯤에서 끊어야 하겠지.”
곡해고는 앉은 자리에서 자세를 고쳐 잡았다. 굳이 일어나서 상대할 적이 아니기도 했지만, 아직 체력이 다 회복되지 않은 탓이었다. 언제 다시 신교의 무리와 마주할지 모르니 얼른 승부를 봐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디리링, 팅!
손가락을 한 번 튕기자 번쩍 빛을 발하며 비파줄 하나가 허공을 갈랐다. 좁고 어두운 동굴 안에서 쓸 수 있는 가장 유용한 초식이었다.
쉬익!
이상한 일은 바로 이때부터였다. 소소정이라면 쉽게 피할 만한 공격이었거늘, 그녀는 어쩐 일인지 미동조차 없었다. 덕분에 왼쪽 어깨 일부분을 베어냈을 뿐, 치명상은 입지 않았다. 일부러 상대의 움직임을 고려하여 튕긴 줄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어라? 어째서?’
사뭇 당황한 곡해고는 그제야 소소정의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큰 싸움을 하고 온 탓인지 도복 여기저기가 찢겨 나갔으며 머리는 산발이었다. 눈은 뻘겋게 충혈되었는데 초점이 없는 것이 흡사 광인(狂人)과 같았다.
‘그리 단정하던 여인이 어찌 저리되었는가? 게다가 저 상처는 건달바의 검날에 베인 게 아닌가?’
자상의 모양을 들여다보던 곡해고는 그녀가 겨룬 상대가 봉천이었음을 알아냈다. 그렇다면 더욱더 이상했다. 봉천이 소소정 따위를 제압하지 못했을 리 없었다. 혹시 다른 협력자가 나타났을까? 그러나 그 또한 말이 되지 않았다. 오대산검의 고수가 도왔다면 저리 넋이 나가 여기까지 흘러왔을까?
“봉천을 만난 모양인데, 그는 지금 어디 있는가?”
“어, 어…언…….”
동굴에 들어와 처음으로 낸 목소리였지만 발음이 부정확하여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성질이 급한 곡해고는 몸을 일으켜 그녀 쪽으로 성큼 다가섰다.
“이보게? 뭐라 했나?”
“어, 언니…….”
“뭐?”
그때, 허공을 헤매던 소정의 눈동자가 갑자기 제자리를 찾았다. 그와 동시에 천천검을 들더니 곧바로 곡해고의 명치 끝으로 쭉 팔을 뻗었다.
“낙화유수!”
“억!”
떨어지는 꽃잎처럼 우아한 동작 사이에 정교하고 날렵한 검날이 예리하게 찔러 들어왔다. 뜻밖의 상황에 놀란 상대가 허리를 비틀어 피하자, 반대쪽으로 몸을 꺾어 퇴로를 막는 식이었다. 경공에 능한 곡해고지만 좁은 공간 안에서는 마음껏 움직일 수가 없었다. 이점이라고 생각했던 부분이 되레 약점이 된 셈이었다.
“흥, 경국의 명문정파라는 놈들은 하나같이 비겁하구나. 늙은이를 속여먹다니 고얀 것! 내 오늘 너를 용서치 않겠다.”
“호접화예”
곡해고가 연신 욕지거리를 해댔으나 소정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마치 싸움 귀신이라도 된 듯한 모습이었다.
‘이대로는 승산이 없다.’
수많은 적에 둘러싸여 싸우면서도 땀 한 방울 흘리지 않던 곡해고였다. 그러나 지금은 완전히 상황이 달랐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광인과 대결할 일이 흔했겠는가?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주르륵 떨어졌다. 실력의 고하와는 상관없는 대결이었다. 평생 처음 겪는 황당한 위기를 어떻게 극복해야 할지 고민스러웠다.
“화수황봉”
선운검법의 초식이 또다시 바뀌었다. 이름처럼 매서운 이 초식은 벌이 꽃의 수술을 따가는 모습에서 창안된 무공이었다. 천천검의 얇은 검신이 소정의 야리야리한 허리를 감싸 안았다가 순식간에 펼쳐졌다. 휘돌아 나가는 원심력은 웬만큼 무거운 도의 힘과 비견될 정도였다. 그러면서도 쾌검이라서 적의 주요 혈을 빠르게 찔러댔다. 제때 피하지 않으면 마치 벌에 쏘인 것처럼 사지가 마비되는 무시무시한 공격이었다.
“제기랄!”
곡해고는 점점 화가 치밀어 올랐다. 오대산검 중에 가장 우스운 문파가 선운검파가 아니었던가? 게다가 과거에 만났던 소정은 한 문파의 장문으로서는 턱없이 부족한 실력이었다. 헌데, 이렇게 열세에 처하다니! 받아들이기 힘든 게 당연했다.
‘비파는 가까운 상대에게는 무용지물. 장력을 출수하면 이 좁은 동굴이 무너질지도 모른다. 어찌한다?’
휙, 휘익.
잠시 다른 생각에 빠진 틈에 천천검이 우요부를 스치고 지나갔다. 서늘한 기운에 깜짝 놀라 엉덩이를 쭉 당겼으나 이미 길고 얕은 상처를 낸 뒤였다. 손바닥으로 대충 훑으니 붉은 피가 선명하게 묻어나왔다.
“북천지의”
이것저것 따질 상황이 아니었다. 화가 머리끝까지 솟은 곡해고는 오른손에 오 할 이상의 내력을 모아 북천신공을 출수했다. 사호세주의 내전 무공이자 태일장에 버금간다는 그 대단한 장법이었다.
쾅! 우르르!
일 장은 소소정의 옆구리를 스치고 지나가 동굴 내벽에 명중했다. 그 거대한 힘을 버티지 못한 바위들이 곧 천둥 같은 굉음과 진동으로 화답했다. 그러자 바닥에 널브러진 가은의 얼굴 위로 흔들리는 바위틈을 비집고 쏟아진 흙모래가 후두두 떨어지기 시작했다.
“언니!”
소정이 벌떡 일어나 가은을 향해 몸을 날렸다. 떨어지는 흙더미를 온몸으로 막으며 가은을 꽉 끌어안은 모습은 마치 새끼를 품은 어미 같았다.
“아주 꼴값이구나.”
곡해고는 어쩔 수 없이 두 사람을 질질 끌고 동굴 밖으로 나왔다. 소소정이야 묻혀도 상관없었지만 가은은 달랐다. 열쇠를 찾으려면 시체라도 확보해야 할 테니까.
“퉷!”
바닥에 가래침을 탁 뱉어내는 그의 얼굴에는 살기가 가득했다. 모든 게 자기 뜻대로 되지 않으니 짜증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눈이 빙글빙글 돌고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의 내면 깊숙이 자리한 살인 충동이 발현된 탓이었다.
“찾았다!”
쉬익! 팅!
미처 주변을 둘러보기도 전이었다. 불시에 날아온 창날이 곡해고의 등줄기를 매섭게 스치고 지나갔다. 진득한 살기에 본능적으로 몸을 숙였기에 망정이지, 몸을 세로로 가를 정도의 묵직한 일격이었다.
“네 이놈! 찢어 죽여버릴 테다.”
벌써 몸에 두 군데나 상처가 난 곡해고는 흥분으로 제정신이 아니었다. 눈을 희번덕거리며 비파를 휘두르는 양이, 성난 땅늑대(흙늑대) 같았다.
길길이 날뛰는 그와 달리, 마주 선 진건은 침묵을 지켰다. 다만 시선은 적이 아니라 그의 뒤편을 향해 있었다. 가은을 끌어안은 무언가가, 익히 그가 아는 여인이란 사실을 깨닫자, 마른 입술을 질끈 베어 물었다.
“네 상대는 나다.”
“오냐 오냐 해줬더니, 건방이 머리 꼭대기까지 치솟았구나. 그래, 오늘 네 그 거만한 눈깔을 터뜨려주마.”
애지중지 아끼는 비파를 오른손에 옮겨 잡자 하나의 무기로 바뀌었다. 연주할 때는 오직 현을 튕겨 공격하지만, 검처럼 휘두를 때는 금형권의 철퇴보다도 묵직한 곤봉이 되었다. 그것이 만들어 내는 좌열창은 검에게 뚫린 상처만큼이나 고통스러웠다.
“내가 막을 동안 은이를 구해다오.”
진건은 뒤를 돌아보며 고개를 까딱 움직였다. 이렇게 되기 전에 미리 당부한 약속이었다. 자신이 희생하여 곡해고의 시선을 끄는 동안 설이가 은이를 구할 것. 혹여 그가 눈치챌지도 모르니 적우가 엄호하여 이 절벽을 벗어나라는 것이었다.
물론 그들은 사형의 뜻을 끝까지 거부했다. 그러나 막상 그의 비장한 모습을 마주하고 나니 더는 반대할 수 없었다. 자식을 구하겠다는 부정(父情)을 무슨 명분으로 막을 수 있을까?
“사형, 은이는 제가 목숨 걸고 지킬게요.”
“고맙다.”
말소리를 내지는 않았으나, 진건은 사매의 의중을 읽어내었다. 애초에 계획된 일이 아니었기에 운선에게, 사형제들에게 죽도록 미안했다. 그러나 그에게는 지금, 이 일전이 그의 삶을 통틀어 가장 의미 있는 일이었다.
“비형”
곡해고의 왜소한 몸이 팽이처럼 핑그르르 돌았다. 분명 딱딱한 바위 위건만, 회전이 반복될수록 두 다리가 땅에 박히는 것 같았다.
진건은 미타의 길이를 감안하여 뒤로 성큼 물러섰다. 그와 정당하게 승부를 겨룬다면, 이길 가능성이 아예 없었다. 시간을 버는 것. 이 싸움의 진정한 목적이었다.
“네 속내를 모를 줄 알고?”
휘익!
그러나 곡해고의 경지는 진건보다 훨씬 웃돌았으므로, 거리의 차이는 의미가 없었다. 회전을 멈추지 않은 채로 차츰 다가오는가 싶더니 불쑥불쑥 팔을 뻗어 미타의 양날을 번갈아 때렸다. 그때마다 창을 돌려 보았지만, 어김없이 또 같은 방식으로 날아와 방어를 무색하게 했다.
탕! 탕! 탕!
실력 차이는 명확했다. 한 식경이나 버틸 수 있을까? 설이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작전 따위 접어두고 무작정 사형을 구하고 싶었다. 그러나,
‘모두가 죽을 수는 없다. 마음을 굳게 먹어야 한다.’
설이는 두 사람이 동굴 쪽에서 멀어지기를 기다려 재빨리 가은을 향해 뛰었다. 손에는 아까 전부터 준비한 환약이 들린 채였다.
“비켜요!”
다짜고짜 가은을 부둥켜안은 소정에게 버럭 고함을 질렀다. 약을 발랐다면 필시 제정신이 아닐 터. 얼른 떼어내야 귀찮은 일이 생기지 않을 것이었다.
“안돼, 우리 언니야!”
“아이참, 시간이 없다고요.”
설이는 초조하여 발을 동동 굴렀다. 초점이 없는 소정의 눈을 보니 완전히 자기만의 세상에 빠진 것 같았다. 가은을 안은 손에 점점 더 힘이 바짝 들어갔다.
“설아!”
동굴 뒤편에서 기다리던 적우가 결국 참지 못하고 설이를 불러제꼈다. 곡해고에게 들키면 작전은 여기서 끝이건만, 성질 급한 그가 또 말썽이었다. 설이는 화들짝 놀라 곡해고 쪽을 돌아보았다. 다행히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그러나 진건의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었다.
‘아, 더 끌면 사형이 당한다.’
결국, 위험을 무릅쓰는 수밖에 없었다. 마른침을 꿀꺽 삼켜 보았다. 혹여 다치더라도 사형을 구할 수 있다면 그걸로도 만족스럽다 싶었다.
“소소정, 이 나쁜 년아! 네가 감히 나를 배신해?”
“언니!”
임기응변으로 아무 말이나 뱉어낸 참이었다. 가은이 아니라 자신이 소금정인 체를 하면 잠깐이라도 시간을 벌 수 있으리라는 계산이었다.
“아아악!”
“어? 어라? 이게 아닌데?”
소정의 비명이 바위 절벽 틈으로 처절하게 울려 퍼졌다. 뜻밖의 반응에 놀란 사람은 비단 설이뿐만이 아니었다. 싸움이 한창이던 곡해고와 마진건도 일순 손놀림을 멈추었다. 작전은 대실패였다. 소소정을 가은에게서 떼어내기는 했으나, 정작 곡해고에게 꼼수를 들키고 만 셈이었다.
“언니! 제발 용서해주세요. 어쩔 수 없었어요. 다 언니가 자초한 일이잖아요. 내 정인도, 아이도 버린 삶이었어요. 인제 나에게 남은 건 이 빌어먹을 문파밖에 없지 않겠어요?”
비틀비틀 자리에서 일어난 소정의 눈에서 굵은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마치 무언가를 보듯 허공에 둔 시선은 공허하고 서글펐다.
“네, 그래서 물에 독을 탔지요. 언니가 내 정인에게 먹이라고 종용하던 그걸 말이에요. 그 와중에도 내가 주는 건 마시지 않을까 봐 언니 수통에 넣었답니다. 으흐흐, 이게 다 언니가 가르쳐 준 수법이었잖아요. 제가 무얼 그리 잘못했나요?”
고해인지, 변명인지 모를 절절한 독백은 그렇게 한참을 이어졌다. 그 자리에 있는 모두의 가슴 속에 깊은 충격을 남겼으나, 오직 혼절한 그녀의 딸만은 아무것도 듣지 못했다.
*** 막지기자지악(莫知其子之惡):
부모 된 사람은 자기 자식의 잘못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