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화. 種豆得豆(종두득두)
마진건의 몸은 온통 피투성이였다. 곡해고를 단신으로 쫓아갔을 때부터 예견된 결과였다. 그나마 정은률이 따라왔기에 망정이지 하마터면 딸아이를 구하기도 전에 죽을 뻔하였다.
서로의 관계는 잠시 접어두고 두 사람은 아군이 되었다. 그러나 결과가 크게 달라지지는 않았다. 반나절을 꼬박 싸웠으나 적의 몸에 깊은 상처 하나 내지 못했다.
‘이래서는 가은을 구하기는커녕, 내 몸이 버텨내질 못하겠구나.’
은률은 낭패감에 애먼 입술만 잘근잘근 씹었다. 사실 그의 몸 역시 진건보다 나을 게 없었다. 왼쪽 팔에 입은 자상은 다시 또 상처가 벌어져 피고름이 질질 새어 나왔다. 체력적인 문제는 비단 상처 때문만은 아니었다. 애초에 그가 가진 검으로는 비월검법의 신묘한 초식을 구현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그 결점을 보완하기 위해 내력을 곱절로 사용하니, 이제는 검을 들기조차 버거울 지경에 이르렀다.
“비켜서시오. 더 무리하다가 목숨을 잃을지도 모르니.”
“당신 걱정이나 하십시오.”
어쩌다 보니 두 사람 사이에 기묘한 연대감이 생겼다. 진건의 배려를 거절하면서도 은률은 위험한 고비마다 그의 엄호를 받았다. 덕분에 유효한 공격을 펼치지는 못했으나 방어만큼은 확실히 할 수 있었다.
‘이런, 상황이 좋지 않구나.’
그들의 합이 맞아갈수록 곡해고의 호흡은 거칠어졌다. 연달아 서너 명의 고수를 상대한 것으로도 모자라 어깨에는 인질을 짊어지고 있으니, 아무리 그여도 힘에 부쳤다. 게다가 마진건의 거친 창법과 정은률의 정교한 검법이 의외로 절묘한 조화를 이루었다. 지금까지야 어찌어찌 버텼지만, 좀 더 시간이 지나면 자신이 밀리지 않으리라 장담하기 어려웠다.
‘확 이 아이를 죽여버릴까? 아니야, 그러기에는 뭔가 꺼림칙하단 말이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로 벌써 수백 합을 겨루는 중이었다. 그때,
“늙은이, 아주 잘 만났다!”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온 산에 메아리쳤다. 당장 눈에는 보이지 않았으나 적어도 자신의 편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망할.”
곡해고에게 남은 선지는 하나밖에 없었다. 적이 더 늘어나기 전에 일단 몸을 빼내자. 체력을 회복하고 인질을 해결하고 난 뒤에 다시 맞붙어도 늦지 않으리라.
어느새 그의 손에는 여태 옆구리에 끼고 있던 비파가 들려 있었다. 반복되는 곡조를 두어 번 반복하니 싸움판의 분위기가 일순 바뀌었다.
디링, 디리링
아무리 노력해도 귓속을 뚫고 들어오는 음률을 듣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곧 머리가 어질어질하고 구역감이 올라왔다. 안 그래도 내상을 입은 은률에게는 더 치명타였다. 자신도 모르게 검을 거두고 한 발 뒤로 물러서고 말았다.
탓!
곡해고는 그 찰나의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왼발을 들어 바닥을 툭 치자, 마치 날개라도 달린 듯 작은 몸이 허공에 붕 떠올랐다. 그 반동으로 두세 장을 한 번에 몰아 뛰니, 어느덧 그들과의 거리가 한참이나 멀어졌다.
“또 보세!”
“이런.”
울렁거리는 기혈을 겨우 가라앉힌 진건이 눈치를 챘을 때는 이미 곡해고의 그림자까지 사라진 뒤였다. 광인처럼 뛰쳐나가 이곳저곳 헤쳐 보았지만, 머리카락 한 올도 보이지 않았다.
“망할 영감탱이.”
은률은 울컥 선혈을 뱉어내고 나서야 겨우 몸을 가눌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눈앞에 닥친 상황은 그저 절망이었다. 눈앞에 두고도 가은을 지키지 못했는데 이제 어디로 갔는지조차 모르니 속이 타들어 가는 기분이었다.
‘이 낯선 길 어디에서 찾는단 말이냐?’
망연자실하여 함부로 움직이지도 못하고, 허공만 바라볼 뿐이었다. 문득, 살을 에는 고통이 찾아왔다. 상처에 감싸놓은 하얀 천이 본래의 색을 잃고 온통 검붉어졌다. 혼절하지 않은 게 기적이었다.
“젠장, 너무 늦었구나.”
뒤늦게 도착한 적우는 다짜고짜 욕설부터 내뱉고 보았다. 가은의 생사야 관심도 없었지만, 곡해고 늙은이를 놓친 게 영 아쉬웠다. 그는 경국과 오대산검만큼이나 천서국의 사호세주를 혐오했다.
“이게 다 네가 뭉그적거린 탓이다.”
“대뜸 소리부터 질러 도망갈 틈을 준 사형 탓입니다.”
불퉁하여 잔뜩 삐친 적우가 버럭 소리를 질렀지만, 기가 죽을 설이가 아니었다. 기실 적우의 경거망동 때문에 일을 그르쳤기에 화가 나기는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이사형, 일단 상처부터 치료하고 찾아보아요. 당장은 은이를 죽이지 않을 겁니다.”
아무 소득 없이 돌아온 진건의 얼굴은 십 년은 더 늙어 보였다. 왼쪽 팔이 뼈가 보일 정도로 깊이 베었는데도 자각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그 간절한 마음을 모르는 바 아니기에 설이는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여기서 지체해 봤자 답이 없습니다. 그자가 저 바위틈으로 사라졌으니, 그 뒤에 보이는 샛길을 따라 움직여 볼까 합니다. 어쩌다 보니 담합하게 되었으나 다시 만날 때에는 종전의 적대적 관계로 돌아갈 것입니다.”
비틀비틀 다가온 은률이 진건을 향해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잠시나마 함께한 일에 대한 최소한의 예우였다. 비록 안하무인에 건방지기로 소문난 자였으나, 그 정도 도리는 지킬 줄 알았다.
“선자를 계속 찾을 것이오?”
“네, 저에게는 무엇보다 중한 일입니다.”
진건의 깊은 눈이 순간 파도처럼 일렁였다. 딸아이를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워준 상대에 대한 고마움, 그 이상의 벅찬 감정이 가득 차올랐다.
“고맙소.”
“네?”
뜻밖의 인사에 은률은 심히 당황하였다. 은이가 가진 열쇠 때문에 쫓아온 이들이 아니었던가? 그의 시선이 천천히 진건의 피투성이 몸을 훑어내렸다. 그러고 보니 이상한 점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정대협, 육안으로 보아도 상처가 매우 깊습니다. 이 약은 외상에 특효이니, 통증이 심해질 때마다 환부에 발라요. 아무쪼록 무리하지 말고 살펴 가십시오.”
눈치 빠른 설이가 대번에 두 사람 사이를 막아섰다. 아무리 가은에 대한 정이 깊은 자라고 해도 황석파의 사람이었다. 그녀가 마진건의 여식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좋을 게 없었다.
“고맙소.”
다행히 은률은 남의 일에 그다지 관심을 두는 성격이 아니었다. 곧이어 바위 절벽 뒷길로 사라지니, 금세 시야에서 보이지 않았다.
“망할 늙은이, 어디로 사라진 거지?”
세 사람은 일단 주변부터 샅샅이 뒤져보기로 했다. 방향도 모르면서 무작정 쫓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곡해고는 그야말로 귀신처럼 사라져 버렸다. 심지어 주변이 온통 바위로 둘러싸인 절벽이라 더 기가 막혔다.
‘충분히 우리를 처리할 수 있었음에도 머뭇거린 것은 체력적인 문제일 터. 내력을 회복하기 전에 찾아내야 승산이 있다.’
진건의 눈에 파르르 경련이 일었다. 정 모르겠거든 절벽의 바위를 하나하나 뽑아내서라도 찾아내야 했다. 그 밖의 임무는 생각나지 않았다. 그의 목적은 오직 딸아이를 구하는 것, 그게 전부였다.
급박한 순간에, 곡해고가 찾아 들어간 곳은 절벽 끄트머리에 보이는 작은 동굴이었다. 그 속에서 가능하다면 꼬박 하룻밤을 버틸 예정이었다. 딱히 다친 곳은 없었으나, 체력이 고갈되어 더는 싸우기 어려웠다. 아무리 천서국 최고의 자객이라 하더라도 연달아 수 명의 고수와 맞서 싸우니 힘에 부친 탓이었다.
‘저 두 놈은 아예 목숨을 내놓고 덤비는구나. 이 아이가 보기 드물게 예쁘장하니 젊은 놈은 이해가 되지만, 마진건은 왜 또 저리 절실한가?’
운기조식을 하는 내내, 잡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세상만사 겪어보지 않은 일이 없을 정도로 통달한 그였기에 더더욱 궁금증이 많아졌다.
“얘야,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통성명이나 하자꾸나.”
“또 무슨 꿍꿍이예요?”
“어린 게 참으로 되바라졌구나.”
여태 거칠게 대하던 이가 뜬금없이 친절하게 구니, 가은으로서는 두려운 마음부터 들었다. 저 늙은이가 방심하게 만들었다가 목을 떼어 갈 생각이구나. 그렇다면 멍청하게 당할 생각은 없었다.
“어르신, 정말로 제게는 열쇠가 없어요. 강운선, 그 마두가 다 뺏어갔다니까요? 만약 절 보내주신다면, 어르신의 수족이 되어 뭐든지 하겠어요.”
“흐음.”
곡해고는 안 그래도 작은 눈을 게슴츠레 뜨고는 가은을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애초에 열쇠만이 목적이었다면 지금까지 살려 두었을까? 어쩐지 계속 꺼림칙한 부분이 있어 손을 쓸 수 없었을 뿐이었다.
“강운선과 어떤 관계냐?”
“네? 저는 오대산검의 제자인데 어찌 신교의 마두와 관련이 있겠습니까?”
“흐음, 아무 상관이 없는데 열쇠를 가졌다?”
“저에게 없다니까요!”
가은이 아무리 몸서리를 쳐도 곡해고는 전혀 믿지 않았다. 애초에 신뢰가 가지 않는 아이였다. 지금도 얼굴빛이 붉고 목청이 커진 양이, 딱 보아도 거짓이었다.
“그럼 어째서 마진건 저 돌부처 같은 이가 이리 필사적으로 쫓아오는지 설명해 보아라.”
“저도 모르지요!”
이번에는 진심이었다. 그나마 은률은 짐작 가는 바가 있었으나, 마진건 쪽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고작 열쇠 때문에 이렇게까지 한다고? 그럼 봉천에게서 구해줬던 일이 전혀 설명되지 않았다.
‘강운선 때문이라면 더더욱 나에게 감정이 좋을 리 없다. 그를 죽이려고 했으니까. 뭐 때문에 그러는 걸까? 혹, 어머니와 관련이 있나?’
수만 가지로 변하는 가은의 표정을 보면서 곡해고는 슬슬 짜증이 올라왔다. 고작 어린 계집애 때문에 골머리 썩는 상황이 귀찮기만 했다.
“하긴, 네가 무엇이든 어떠냐? 답을 내어놓지 않으면 더 기다릴 이유가 없지.”
곡해고의 못생긴 얼굴이 서서히 찌그러졌다. 그의 깊은 주름 하나하나에 살기가 가득 담겼다. 여태 물색없이 덤비던 가은조차도 극한의 공포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온몸에 털이 바짝 곤두섰다.
“지, 진짜 모릅니다.”
“그럼 할 수 없지.”
곡해고는 봉천과는 완전히 다른 의미로 괴물이었다.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것 같은 살인귀. 덜덜 떠는 입술 사이로 쉰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이제는 정말 끝이구나 싶으니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으으, 그래요, 열쇠, 그래, 열쇠를 드릴게요.”
“흥, 네가 죽으면 어차피 내 것이 아니냐?”
“아, 제…제발요…….”
가은이 두 손을 모아 싹싹 비는데도 곡해고는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그저 그녀의 가느다란 목을 향해 길고 날카로운 손톱을 들이밀 뿐이었다. 짐승의 이빨과도 같은 그것은 스치기만 해도 목을 뎅강 잘라낼 것 같았다.
휘익!
디링!
그때, 어둠을 뚫고 반짝이는 무언가가 날아 들어왔다. 정확하게는 가은의 목덜미를 겨냥한 암기였다. 곡해고는 낯선 기척을 느끼자마자 비파의 현을 튕겨내었다. 미처 중간까지 오기도 전에, 그것은 반 토막이 되어 버렸다.
투둑.
바닥에 떨어진 쇠구슬 주변으로 순식간에 개미들이 모여들었다. 그러나 고작 더듬이만 닿았을 뿐인데 하나둘 배를 까뒤집었다. 고독이었다.
“누가 이리 잔악한 암기를 쓰는가?”
그 꼴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곡해고는 혀를 끌끌 찼다. 암기에 독을 바르는 일이야 흔하지만, 이처럼 소량으로도 목숨을 앗아갈 독성을 지닌 암기는 드물었다.
“설마!”
그제야 가은의 눈에서 눈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곡해고의 손아귀에 잡혔다는 공포심보다, 암기를 던진 이에 대한 배신감에 치가 떨렸다.
“소소정, 이 나쁜 년!”